동요

이성원이 노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옛동요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리차드 강 2009. 8. 3. 16:20

이성원이 노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옛동요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1996 화음레코드)

이성원 Lee Sung Won 1961년 01월 05일 -

Track - 전곡 연주

 

  1. 프롤로그 (Prologue 따오기 1절, 추곡초등학교 전교생)               00:36
  2. 겨울나무 (Winter trees 이원수 작사, 정세문 작곡)                     03:42
  3. 엄마야 누나야 (My Mom & Sister 김소월 작사, 김광수 작곡)      02:27
  4. 구두 발자국 (Foot print of shoes 김영일 작사, 나운영 작곡)        02:56
  5. 나뭇잎 배 (Boat of leaves 박홍근 작사, 윤용하 작곡)                  04:14
  6. 섬집아기 (A Baby living in an Island 한인현 작사,이홍렬 작곡)    03:35
  7. 오빠생각 (Thinking a Brother 최순애작사, 박태준 작곡)              04:10
  8. 모래성 (A Sandy Castle 박홍근 작사, 권길상 작곡)                    03:32
  9. 나뭇잎배 (Boat of leaves 연주)                                                 04:13
  10. 에필로그 (Epilogue 따오기 2절, 추곡초등학교 전교생)              00:38

Credits

레코딩 엔지니어 :  황인
기획사 :  윤숭호
레코딩 스튜디오 :  TAC STUDIO

노래/이성원 : 편곡/이영재, 이성원 : 녹음/TAC STUDIO, SOUND BANK STUDIO : 엔지니어/황인, 이영재 : 컴퓨터프로그래밍/이영재 : 드럼/안기정 : 베이스/조원익 : 일렉트릭기타/이영재 : 어쿠스틱기타/이영재, 이성원 : 플룻/김희숙 : 피아노/황순영 : 바이올린/이지연 : 하모니카/김두수 : 자켓사진/임연호 : 자켓디자인/윤숭호 : 기획/윤숭호 : 제작/VISION MEDIA

Introduction

이 음반에는 '엄마야 누나야', '구두 발자국', '나뭇잎배', '섬집아기' 등 작은 시골학교의 어여쁜 여선생님과 낡은 풍금소리와 검정 고무신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훌쩍 세월을 넘겨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요가 아기자기 모여있다.

어둠이 들었다 불을 밝혀라 - 이성원의 노래

김진묵(음악평론가)

거대한 삶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관조하는 수단으로 예술은 좋은 방법이 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삶이라는 엄청난 병세를 풀어나가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로 꽤나 긍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 예술성은 진지한 음악 행위와 결과 혹은, 부산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술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직 미숙한 음악이다. 중요한 것은 음악가의 삶을 바라보는 '진지함'이다. 이 진지함에 공감할 때 우리는 '예술적 감동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도 듣는 이가 공감하지 않으면 의미없는 소리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적 논리만으로 사람의 미움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듣는 이와의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 즉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자연 관조와 자기 성철이 우선하여야 한다. 예술은 이를 표현해내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는 너무나도 많은, 예술을 추구하는 음악이 있다. 결국 우리는 예술 공해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상황에서 이성원의 노래는 가뭄 끝의 단비처럼 신선함을 전해준다. 그 신선함은 그의 음악 속에 깃듣 명상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자연 관조와 자기 성철의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다 '얻어지는 ' 시와 노래

이성원은 작곡을 하기 위해 펜을 들고 책상머리에 앉지 않는다. 자연을 바라보다가 문득 시와 함께 노래를 얻는다. 즉흥적으로 직관에 의해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고치거나 다듬을 필요가 없다.

어느 봄날, 나뭇가지 끝에 피어나는 나뭇잎을 바라보던 이성원은 태양을 향한 푸른 나뭇잎의 형상이 불꽃과 같음을 알았다. 자신의 삶이 불꽃과 같다고 느끼던 그는 나무가 된다. 언덕에 서서 황금빛 저녁을 맞이한 나무는 밤이슬을 맞으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는다. 나무는 갈증이 난다. 그러나 달빛 고운 하늘에서 단비가 내릴리 없다. 채념의 미학을 아는 나무는 '오지 않는 님' 대신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에 허허로운 마음을 달랜다.

대나무를 그리기 위해 대나무를 바라보던 사나이가 결국 대나무가 되어버린 이야기가 있다. 그 사나이의 깊은 관조를 이성원에게서 본다. 관조는 애정어린 눈으로 볼 때에 가능하다. 나무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우주라는 전체성을 설명해야만 이해한다면 이는 답답한 일이다. 이성원은 그 전체성을 직관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많은 노래는 모두 이런 식으로 씌어졌다. 어둠을 응시하다 <말하라 어둠이여>, 밤이 지나가는 소리를 귀기울여 듣다 얻은 <이 밤에>, 멀고 먼 삶의 여정을 담백하게 그린 <보아라 수아>, 그리고 언어를 넘어선 의식의 세계에서 얻은 <비숑>과 <루디엥>같은 노래에서 우리는 그가 명상을 통해 얻은 메시지를 나눌 수 있다.

세상은 자구 우리를 화나게 한다. 물신자를 양산해내는 종교, 우리의 아이들을 망치는 교육, 그리고 기득권층을 위해 모두를 볼모로 한 제도들. 올바른 의식으로 바라본 세상은 너무 안스러워 눈물없이는 볼 수가 없다.

오늘도 산을 깎아내리는 개발 현장을 우회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산을 깎을 수 있어도 산을 만들 수는 없다. 화가 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성원의 노래 <문밖에 봄빛은>을 듣는다. 이성원은 '에아! 꽃밭에 꽃이 피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어둠이 들었다. 불을 밝혀라'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우리에게 아직도 삶의 신비가 남아 있음을 본다.

[자료: "굿 인터내셔날 " 이성원 앨범 소개의 글에서]

     

이성원 Lee Sung Won 1961년 01월 05일 / 대한민국

불혹의 나이에 동요음반을 발표한 포크가수 이성원. 흔치 않은 동요 가수로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만 사실은 곽성삼, 김두수와 더불어 1980년대 3대 언더 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아티스트다. 덥수룩한 수염에 치렁치렁한 장발은 기인의 향내를 풍기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순응하는 외견일 뿐 실은 맑은 영혼으로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다.

그는 포크로부터 출발해 국악과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노래해 왔다. 최근 동요가수로 제법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화려한 주류무대와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돈 안되고 소박한 무대만을 찾아 나서는 별난 사람이다.

그의 동요는 기억 저편에 실종된 어릴 적 추억과 다정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되살려놓는 마력을 지닌 가락이다. 똑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슴이 시려온다. 그래서인가 그의 동요가락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오히려 즐겨 듣고 눈물을 훌쩍인다. 이성원의 노래 가락은 살벌한 생존경쟁사회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아침 이슬 같은 무균질의 결정체이다.

이성원은 1961년 4월 5일 경남 진해에서 지방지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석곤과 모친 김기연의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엔 갖기 어려웠던 전축을 갖춰놓고 재즈 등 흑인 음악을 즐기고 노래자랑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윤택한 집안의 외아들 이성원이 음악의 달콤함을 일찍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해 도천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물동이를 지고 가면서 바람에 부대끼는 뒷산 대나무 소리 등 온갖 자연의 소리가 좋았던 이성원. 4학년 때 하모니카를 가르쳐주신 고정엽 선생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부친이 황달과 고혈압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모진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네 자녀를 키웠다. 진해 중학교 때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에 집으로 쫓겨와 정학까지 먹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도 기적이었다. 같은 처지의 여동생은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장 없는 졸업생이 되었다.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 진해상고 3학년 때 친구 집에서 우연히 접한 통기타소리는 답답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졸업 후 신문, 우유배달과 가구점 일꾼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우유 배달 중에 어려운 노인이나 아이들을 만나면 우유를 거저 나눠주고 신문 배달 때는 못된 20명의 불량배들과 한판 대결을 벌였을 만큼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일꾼으론 미덥지 못했다.

1981년 해태유업에서 전국의 직원을 대상으로 장기자랑대회를 열자 노래로 1등을 해 상금으로 빚진 우유 값을 갚고 나왔다. 이후 세광전지의 지점에 사무직으로 취직해 1년간 근무했다. 어느 날 ‘합창단을 조직하라’며 본사로 부터 기타가 지급됐다. 독학으로 기타연습을 하고 있던 터라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러나 업무 시간에 몰래 회사 공중목욕탕에서 매일 기타를 튕기자 구내매점 주인이 고자질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났다. 이후 음악적 방향도 없이 그저 노래가 부르고 싶은 마음에 카페들을 방랑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국 가수가 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DJ 이종환이 운영하는 명동 쉘브르의 노래경연대회에 참가했지만 떨어졌다. 이후 무명 통기타 가수로 소일하다 빚을 내 이화여대 정문 앞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다. 영화사 ‘신씨네’의 신철과 배우 명계남 등 신촌 쪽에서 놀던 특이한 연예인들이 당시 내 카페를 아지트로 삼고 드나들었다. 카페를 작은 공연장으로 삼아 마음껏 노래하며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며 이성원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당시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등이 부른 노래 전곡을 ‘파 들어가며’ 연습했다.

하지만 양희은이 불렀던 김민기 곡 <밤뱃노래>속의 전통가락이나 특히 <진주난봉가>의 구수한 우리 가락이 가슴을 파며 스며 들어왔다. ‘내가 무엇을 노래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락을 노래해야 한다는 답을 얻었던 시기였다’고 이성원은 회고한다.

1985년 어느 날 봉은산에 별을 보러 올라갔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신기하게 움직이던 별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코밑의 상처는 그때 입었고 한동안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이성원은 말한다. 기이한 경험은 1집 수록곡 <선인장>의 악상이 갑자기 떠오르며 창작의 물꼬를 터트렸다.

이성원은 1986년 정기적인 개인콘서트를 크리스탈 문화센터에서 열며 자신의 음악빛깔에 덧칠을 해나갔다. 창작곡으로 꾸며진 데뷔음반<문을 열고 나서니-아세아,1987년>은 제작사의 야심에 찬 홍보전략으로 제법 촉망 받는 인기가수의 꿈을 키우게 했다. 그러나 방송국 PD에게 촌지 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자 음악보다 돈이 우선하는 현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1집은 이성원의 국악적 향내를 철저하게 지워내는 편곡으로 제작된 평범한 앨범이었다.

그는 ‘솔직히 음반을 낸다는 욕심에 상업적으로 타협했다’고 고백한다. 이후 상업적인 음악활동과는 거리를 두며 우리가락을 포크와 접목하는 음악실험에 몰입하며 즉흥 창작 무용곡에도 빠져들었다. 1988년 겨울 평택에서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동화처럼 신기한 경험을 했다.

소들이 숨쉴 때마다 내뿜는 하얀 김이 장관을 이루자 만져보고 싶어 다가갔다. 소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나자 돌아서기 섭섭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자 흩어져있던 소들이 신기하게도 스스로 뿔을 들이대거나 혓바닥을 내밀며 몰려들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자 우리 가락은 자연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가슴 뻐근한 감동이 밀려왔다.

신비로운 경험은 더욱 자유로운 음악 날갯짓으로 1989년 첫 국악 가요 발표회로 이어졌다. 2집<나무밑에서-서울음반,1991년>은 자신의 음악색깔을 고스란히 담은 사실상의 데뷔 음반이다. 이정선이 편곡작업을 거들고 김두수는 기타 세션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한편의 시나 다름없는 수록곡 <밭>의 절제된 가사는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렸다. ‘2집 발표 후 골수 팬들이 생겨나 지금까지 묵묵하게 도와주는 후원자가 있다. 올해 발표한 2장의 신보도 그 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말하는 이성원. 수록곡 <보아라 수야><구름타령><밭>은 1980년대를 수놓을 만한 한국적 가락의 정통 포크곡들이다.

오선지의 틀조차 깨기 위해 한 음 한 음 직접 기타 줄을 튕기며 곡을 만드는 그의 창작작업은 독특하기만 하다. 이성원은 2집 발표 후 활기찬 활동으로 국악가요의 영역을 넓혀 나가던 중 1993년 인도의 명상음악과 조우하는 음악적 전환점을 가졌다.

‘제 3세계음악의 폭풍'이라 불리며 미국과 유럽을 발칵 뒤집었던 인도의 세계적 거장 라즈니쉬와 아쉬람 현지 공연에서 인도 라가풍의 명상음악과 우리민요가락의 충돌은 황홀한 불똥을 튀게 했다. 이때부터 이성원은 인도음악에 대한 관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1996년 어느 날. 일본의 한 유명가수가 그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왔다. 우리가락을 배우겠다는 열의가 예뻐 음악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의 음악을 도용해 음반을 발표해 버렸다. ‘동양의 매력을 내뿜는 새로운 작품’이라며 일본 음악계가 들썩했다. 일본에 초청돼 오사카에서 함께 공연하면서 자신과 우리 음악을 도난 당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성원은 ‘나는 역사를 바꿀 힘은 없지만 노래로 표현할 힘은 있기에 답답한 패잔병의 유산이 청산될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요를 부르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석에서 노래할 땐 언제나 동요를 부른다. <엄마야 누나야> 등이 수록된 1999년 첫 동요음반<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도 어느 조촐한 자리에서 그의 동요를 듣고 감격한 사람들이 강력하게 음반작업을 추진해 맺은 결실이다.

2002년 초 두 장의 음반을 동시 발표했다. 먼저 3집<동쪽 산에>는 2집 수록곡들을 재해석하고 사물놀이의 신명과 휘모리 장단을 현대적 기법으로 채색한 국악 포크 음반이었다. 그리고 두번 째 동요집<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에 수록된 티없이 맑고 시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클레멘타인>으로 더욱 대중들에게 다가섰다. 최근 그는 수많은 동요공연과 환경운동 팀과 함께 전국을 도는 환경공연을 3개월간 벌였다.

또 5월 부처님 오신날 성북동 길상사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정태춘, 박은옥과 함께 했던 탈북자를 위한 자선공연과 동부 이촌동 강변교회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위해 노래했던 찬송예배 공연은 뜻 깊고 이색적인 자리였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그는 모든 종교인들의 화합을 위해 정성스럽게 노래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성원은 ‘동요는 내 많은 음악 보따리 중 한 주머니일 뿐’이라며 인도명상음악과 우리 전통가락을 아우르는 작업에 큰 갈증을 드러낸다.

그는 요즘 ‘한국 포크의 정신 김의철 선배와 전통가락을 파고드는 포크 음반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며 고 품격의 한국가락을 꿈꾼다. 잊혀져 가는 동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불어넣는 가난한 노래꾼 이성원은 한국 대중가요를 살찌우게 할 또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

글. 최규성(가요칼럼니스트)

     

Introduction

'영혼으로 부르는 노래'

통기타 하나 달랑 메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열다섯 해가 된다는 이성원씨.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가수는 아니지만 우연히라도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게 된다고 한다. 그의 노래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보기 드문 노래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굳은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빗줄기 같은 노래를 하는 사람이려고 했다. 봄이면 도시 전체가 꽃등을 켜고 하얗게 손짓하는 남해안의 小도시 진해 꽃을 보기에는 이른 철에 그를 만나러 갔다. "벚꽃이나 향어회를 빼고도 억수로 아름다운 도시"라고 농을 하는 목소리가 정겨웠고, 마음에서부터 풀어낸다는 그의 노래를 청해 들을 욕심에 먼 여행길도 신바람났다.

통기타 하나 달랑 메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지 열 다섯 해가 난다는 이성원씨(37). 그는 오빠 부대를 동원하는 가수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수도 아니다. 그를 좋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그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저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춰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짧은 순간 반짝 빛을 발하고 스러지는 '스타'들과 새로운 노래가 헤아릴 새도 없이 쏟아지는 요즘. 그의 노래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은 무얼까.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랫말

대중가요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어떤 노래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성원의 노래는 명상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의 노래가 사람을 사로잡는 힘은 바로 그것이라며, 그에게 물으니 세상이 워낙 명상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들릴 뿐이라며 별 다른 답이 없다. 오히려 "그런데 명상이 뭐예요?"라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묻는다.

그의 노래는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도레미파솔라시의 각 음들이 꼭 제 집을 찾아들어간 것처럼 여기저기 잇대어 짜집기한 느낌이 없다. 그는 '명상적'이라는 의미를 나무들이 꾸밈없이 제가 자라고 싶은 방향대로 가지를 뻗는 것에 비유했다. 그것처럼 그의 노래 대부분이 어느 순간 한 소절이 풀려나오기 시작하길래 줄줄 뽑아냈더니 곡 하나가 완성되었다는 식이다. 곡을 만드는 동안 수정하는 일 없이 기타를 퉁기며 나직이 읊는 것만으로 노래가 된다.

어느 여름, 저녁 어스름에 산택을 나갔다가 해가 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언덕받이의 계단을 오르며 하늘을 보니 별이 초롱했다. 넋을 잃고 올려다본 별이 뱅글 맴을 돌자 그도 따라 돌았다. 순간 그는 계단에서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보름쯤 의식을 잃고 누웠다가 깨어난 날이었다.
"내 속에서 뭔가 우우우 하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어요. 그러더니 멜로디가 되고 노랫말이 되었어요. 녹음기를 부둥켜안고 흘러나오는 대로 불렀지요."

<선인장을 보러>가 이 때 만들어진 곡이다. <비가 내린다>도 마찬가지다. 어느 소나무숲에서 기타를 퉁기고 있는데 갑자기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드드는 소리가 들렸다.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를을 읊다가 노래가 되었다. <비가 내랜다>에서 그는 "내 영혼 속에 터질 듯이 쌓이고 쌓인 말들처럼/내 영혼 속에 쏟아져오는 그 많고 많은 예감처럼" 비가 내린다고 했다. 그의 노래도 꼭 그렇게 터져나온다.

그는 지금가지 노래를 만들면서 오선지나 펜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 15년 경력의 가수답지 않게 악보를 그리는 데 서툴기도 하지만 흘러나오는 대로 불러보는 순간 그대로 머릿 속에 각인된다고 한다.

그의 노래가 명성적인 더 큰 이유는 노랫말에 있다. 그의 노랫말은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대로 붙인 것처럼 평범한 듯하면서도 담다른 깊이가 느껴진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심히 흘러보낼 수도 있는가 하면 박하사탕을 삼긴 듯 답답했던 가슴 속을 '싸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그래 가자/이 길 따라 가자/술렁대는 세상/눈을
반쯤 감고/가다 보면 행여/새벽 아침을 볼까/기다리는
마음/달래면서 가지

<그래 그래>에서 그는 고단한 삶의 여정에 나선 사람들에게 술렁이는 세상 일일랑 한쪽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걸어가자고 노래한다.

나무 밭에서 익은 잎사귀 푸르고/구름 밭에서 열린 비
내린다/나무 밭은 땅에 심겼는데/땅은 어데서 심겼나/
그름 밭은 하늘에 걸렸는데/하늘은 어데서 걸렸나

그의 2집 음반 타이틀 곡인 <밭>이다.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을 묻는 노랫말이 그 뜻을 알 듯 모를 듯하다. 이 노랫말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녹음을 끝내고 심의를 받는 과정에서 그만 음반 심의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밭>을 포함한 2집의 가사들이 대체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바로 이 말도 안되는(?) 노랫말이다.

노래의 참 임자는 '느끼는' 사람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있는 법이다. 그 어려움을 잊을 만큼 빠져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에게는 노래가 그랬다. 부친이 일찍 별세하시는 바람에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공납금을 제 때 내지 못해 정학을 당하고 겨울이면 몇 개월치씩 밀린 방세 때문에 쫒겨나 리어카를 끌고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던 기억이 어둡지만은 않은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에 미치지 않았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세월이다.

굳이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고교 졸업 후 거친 직업만도 서너 가지가 된다. 볼링장에서 '핀보이'를 하기도 했고, 가구점에서 가구를 배달하는 일도 해보았다. 우유 배달을 한 적도 있었는데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오히려 돈을 물어넣어야 할 판이었다.
"어머니 친구분이 지나간다고 우유 한 병 드리고, 알고 지내는 형이 배가 불러오는 형수랑 지나가면 우유 두 병 드리고···. 뭐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적자가 나던 걸요."

그는 지금도 노래를 직업으로 하고 싶지는 않다 .스스로를 굳이 '가수'보다는 '노래사람'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활이, 삶이 없으면 노래는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진짜 노래사람은 밭을 갈거나 외양간을 고치는 등 열심히 하루를 살고 난 저녁에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만족을 노래하는 그런 모습이예요."

그는 트로트, 포크, 락, 발라드, 팝송, 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창력을 구사한다. 뿐만 아니라 굳이 자신이 만든 노래만을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일에 더 열심이다.

최근 내놓은 동요를 모은 음반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도 그렇다. 이 음반에는 '나뭇잎배', '구두 발자국', '섬집아기' 등 작은 시골학교의 어여쁜 여선생님과 낡은 풍금소리와 검정 고무신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훌쩍 세월을 넘겨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요를 모았다.

누가 "당신 노래를 좀 불러보라"고 하면 그는 "내가 부르는 노래는 다 내 노래"라고 답해준다. 그래서 자기 노래를 부르더라도 "내가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말하기가 어색하다.

"내 노래, 남의 노래가 어디 있겠어요. 부르는 사람의 노래고 듣는 사람의 노래죠."

그는 노래 자체보다 노래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가슴이 동시에 올리는 그 순간의 공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음반 만드는 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라이브 공연을 좋아하는 가수들이 그렇듯이 테잎으로, 판으로 듣는 노래는 이미 새장 안에 갇힌 새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같은 노래란 없다.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사람이 같은 노래를 부르더라도 노래하는 순간순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노래는 참 임자는 그 노래를 온전히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느 현대 음악가는 "이제 음악에 있어 중요한 것은 도나 미가 어디에 놓일 것인가가가 아니라 그것이 내는 진동, 음향, 파장"이라고 했다. 그의 노래가 아주 특별한 장르가 아님에도 남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것도 그의 노래만이 갖는 독특한 '파장' 때문이다 음정, 박자가 맞지 않아 들쭉날쭉한 얼니 아이의 노래가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것은 천진난만함 때문이다.

그는 맑다.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헤쳐온 삼십대의 모습이 저럴 수도 있구나 싶도록 오랫동안 그를 알고 지내온 어떤 이는 그를 두고 '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우스겟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는 지금까지 두 장의 음반을 냈다. 1집 <문을 열고 나서니>외 2집 <나무 밭에서>가 그것이다. 모레코드사에서 1집을 만들었을 때 그는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1집이 사람들의 귀에 체 익기도 전에 묻혀버리고 만 데는 사연이 있다. 레코드사 사장과 함께 방송국 프로듀서를 만나러 간 자리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고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린 것이다.

"그건 가짜지요. 나는 사람들이 듣고 정말 좋아서 찾는 노래를 원합니다."

2집 음반이 나왔을 대도 비슷하다. "누가 누구를 스타로 키울 수 있다"는 힘(?)의 논리 앞에 나이도 인격도 무시되는 방송가의 생리가 싫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런 그를 세상 물정 모른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가짜'를 용납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내 주머니는 빈 주머니, 그러나 내 마음은 가득."

잊을 수 없는 '소 머리의 물결'

그에게는 평생에 잊지 못할 두 가지의 '물결'이 있다. 그 하나는 '소 머리의 물결'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 머리의 물결'이다.

평택에 있는 친구를 찾아갔을 대였다. 새벽에 일어나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논두렁을 따라 산책을 나셨다. 얼마쯤 걸어 나갔더니 목장이 보였다. 울타리 안에 이삼백 마리의 소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있었다. 선하고 맑은 소들의 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갑자기 소의 뿔을 만져보고 싶어져서 손을 내밀었지만 달아날 뿐 가까이 오려들지를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다가 그냥 오기가 아쉬워 노래라도 한 곡 불러주자고 생각했다. 그는 소들을 위해 즉흥적으로 모음母音으로만 이루어진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제각각이던 소들이 노랫소리를 따라 전부 저를 향해 몰려들었어요. 뿔을 들이대고 혓바닥을 내밀고 야단이 났어요. 난생 처음으로 소들을 마음껏 쓰다듬고 껴안아 봤어요."

노래를 부르는 순간 일제히 그를 향하던 수백 마리 소들의 머리가 이루는 물결, 그 때 일은 지금 생각해도 벅찬 감격이다.

두 번째는 인도의 라즈니쉬 아쉬람에서였다. 천 명 가까운 산아신(라즈니쉬의 제자를 이렇게 부른다.)들이 큰 강당에 모여 하얀 색 로브를 입고 흔들흔들 자유롭게 움직이며 춤추고 있었다. 아쉬람에서 갖는 '춤의 명상' 시간이다. 그는 각국의 뮤지션들과 함께 무대 옆에서 한 가지 주제로 즉흥음악을 연주했다. 느리게 시작된 음악이 점점 고조됨에 따라 춤추는 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그러다가 한 순간 그대로 정지하는 식이다. 이 때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정면을 향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도치듯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마치 벼이삭들이 바람에 몸을 맡겨 굽이치는 것처럼 장관을 이루었다.

즉흥음악은 대부분의 뮤지션들이 동경하는, 음악인으로서 나름대로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이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음악인의 내면이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끼와 영감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음악은 즉흥적이다. 그가 만든 곡들이 대부분 그러할 뿐 아니라 라즈니쉬 아쉬람에서처럼 무용 공연의 배경음악을 즉흥적으로 시도했던 적도 있다. 낙태 반대를 주제로 한 <어린 영혼의 비나리>라는 무용 작품에서 그는 30분 가량의 공연 시간 동안 무대 뒤에서 아무런 악기도 사용하지 않고 구음口音으로만 배경음악을 담당했다. 공연을 지켜보았던 한 무용평론가는, "춤 자체보다 배경음악을 담당한 가수의 소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고 평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그가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 올랐을 때 관중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는 의병장 최익현을 기린 국수호씨의 작품 '면암의 명상'에서도 같은 작업을 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에게 즉흥음악은 어떻게 하는 지 물었다.
"그냥···던지면 돼요. 도를 소리낼지 미를 소리낼지 생각하는 순간 소리는 멈춰지고 맙니다. 소리가 저절로 내 몸을 타고 나오도록 해야죠. 주제에 깊이 몰입하면서 나는 그냥 입을 벌리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뭔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 뜻을 두고 던지면 저절로 소리가 되는 거지요."

이런 작업을 할 경우 연습은 없다.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난다. 그 시간이 5분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그는 음악 활동을 하면서 철저하게 '연습 안 하기'를 고수한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노래가 그냥 묻혀 버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나는 내가... 샘이기를 바랍니다. 굳이 땅을 파지 않더라도 늘 솟아나와 넘쳐 흐르는 그런 샘이요."

좋은 노래, 감동을 주는 노래를 위해서는 물론 피나는 수련도 필요하다. 그는 반복되는 연습을 통해 순간순간의 살아 있는 느낌들이 노래를 통해 피어나지 못하고 화석처럼 굳어버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샘이 되려면 물이 차오를 비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의 '연습 안 하기'는 그런 의미다.

그는 즉흥음악에 남다른 매력을 느낀다. 아무런 제약이 없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다는 것.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이십대를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충만한 음악적 영감에 휩싸인 채 보냈다. 나뭇잎에 부서져내리는 햇살. 코끝을 간지르는 꽃내음. 빈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꼬맹이들의 환호성···.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하나의 곡조로 피어나곤 했다.

발 끝에 그는 "지금은 삼십대라서 못하지요."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서 산과 들에서 뜻대로 자라는 나무를 옮겨다 굳이 분제를 만들고마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응답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는 최근 일본 공연을 다녀왔다. 그가 하고 싶은 일 중 한 가지가 '고리타분하다'는 틀 속에 갇혀버린 우리 가락을 대중화하는 일이다. 굿거리, 중모리, 휘모리 등의 우리 가락을 고고, 디스코, 블루스 같은 서양리듬 못지 않게 세계적으로 유행시키고 싶다.

그가 우리 가락에 관심을 가져온 지는 십 년쯤 된다. 양희은, 송창식, 김민기 등 칠십년대를 풍미한 포크 가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그는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포크로 시작했다.

"포크라는 말에 '민속'이라는 의미가 있잖아요. 포크 음악을 단순히 통기타 음악이라고만 생각하니까 어느 날 거기에 생각이 미쳤어요. 어 그러면 우리 민속은, 우리 것은, 우리 노래는? 그렇게 된 거죠."

1집이 포크락 위주의 곡들인 데 비해 2집에서는 포크락적인 곡과 <보아라 수야>, <구름타령>, <상주 모십기> 등 우리 가락의 느낌을 살린 곡들을 가미했다.

우리 가락이나 악기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데 있어서도 그는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다른 사람한테 배우기보다 내 안에 있는 걸 찾고 싶었어요. 내가 한국인인 이상 우리 가락이나 장단에 대한 감각이 당연히 내 속에 녹아 있겠죠. 누군가에게 배우면 자칫 앵무새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내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탄광에서 금을 캐내는 광부가 되기로 했지요."

그는 요즘 몇몇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사물놀이가 되살아나고 있지만 우리의 풍물은 그렇게 기계화된 장단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해에서는 군항제가 열리면 언제나 풍물패가 풍물을 놀았어요. 어려서부터 그 장단에 익숙했죠. 우리 풍물은 기계화되고 정형화된 가락이 아닙니다.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아도 당겨주고 밀어주면서 서로 어울렁 다울렁 맞물려 넘어가는 그런 맛이 진짜예요."

그가 되살려내고 싶은 우리 가락은 그런 것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어울리는 것.

그는 현재 창원, 진해, 마산 일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제일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우리 아이들에게 밝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일이다. 아이들의 정서를 망가뜨리는 쪽으로 흐르고 있는 대중매체에 반기를 들고 잠자는 순수와 감성을 일개우는 이 일을 그는 '아름다운 싸움'이라고 표현한다. 청소년음악회 등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냐고 물었더니 "응답하는 노래"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해 주석을 부탁했다.

"진실로 노래를 하면 답이 와요. 세상에는 많은 소망이 있지요. 내 개인이 원하는 것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원하는 소망도 있잖아요. 나는 그 소망을 노래하면 되는 거예요. 밝고 경쾌한 노래가 세상에 넘치면. 그리고 진실로 노래를 하면 그런 세상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 뿐입니다."

그가 먼 길을 찾아 온 손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불러준 노래는 이랬다.

사랑하는 사람들아/나 초저녁 별이 되니/내 영혼 쉴 때까지
/내 소망을 노래하리

글 : 강정화 (자유기고가)

     

찾아가는 동요콘서트 이성원씨

“아이들에게 풍경을 전해주고 싶어요.이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우리의 풍경말입니다”

낡은 통기타줄을 튕기며 한 소절,두 소절 상큼한 노랫말을 이어가는 이성원씨(42)는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동요콘서트를 열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그는 때로는 자기 돈을 들여,때로는 차비도 안되는 적은 사례비를 받고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라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다.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우리의 서정을 영영 되찾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지난 3월부터 그가 찾아다닌 곳은 전교생이 67명밖에 안되는 시골학교인 강원도 정선 용탄초등학교와 경남 하동 악양초등학교,서울 쌍문동 한신초등학교 등 벌써 10여곳이 넘는다.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도,탐스러운 달이 둥실 떠올라도 촘촘히 들어선 고층건물에 모두 가려져버리는 삭막한 도시.그 속에 사는 우리 아이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래들을 먼저 배우는 것이 그를 못내 괴롭혔다.요즘 유행하는 노래들은 그에게는 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참 노래를 돌려달라고 외쳐대는 아우성같이 들리기 때문이다.그는 “아이들이 이상하고 쓸데없는 노래나 부른다고 야단치지만 사실 어른들이 아무 것도 전해주지 않기에 그런 노래들에 빠져버린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동요를 불러줄 때면 그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면서 어린 가슴 깊숙이에서 메말라있던 그 무엇인가가 촉촉히 적셔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산골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동요에 대해 깊이 배울 기회가 별로 없어도 자연과 부대끼면서 체득한 정서가 아직은 살아있다.지난달 30일 강원도 영월 구래초등학교를 찾았을 때다.50명이 채 되지 않는 전교생이 모여 이씨의 노래를 듣더니 자신들도 노래를 선물하고 싶다며 민요를 불러줬다.아이들의 민요자락에는 자연에 대한 따뜻한 정과 풋풋한 감성이 배어있었다.

도시의 아이들이라고 동요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단지 맛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올 2월이었다.이씨는 두번째 동요집을 낸 뒤 음반제작을 도왔던 이재만 선생님(경기도 일산 고양종합고등학교)의 요청을 받아 고양종고에서 동요공연을 가졌다.다른 교사들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동요가 통하겠어?요즘 아이들이 어떤데”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처음에는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던 학생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진지한 표정으로 동요를 듣고 따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동요의 힘이요?” 이씨는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동요의 힘”이라고 잘라말한다.동요는 세대를 초월한 우리 모두의 노래이기 때문이다.“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복된 소리,곧 생명을 살리는 소리가 아니겠어요.동요는 아이들의 영혼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두장의 음반녹음을 끝낸 올 3월부터 시골 초등학교를 방문해 동요를 부르고 가르치는 ‘찾아가는 동요콘서트’를 열었다.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고교 3학년때 처음으로 통기타를 치기 시작한 뒤 이제까지 한 번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한 그는 잠시 취직을 했지만 일하는 시간에도 노래연습을 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그후 고향인 경남 진해를 떠나 마산과 부산,서울의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만으로는 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워 가구배달,우유배달까지 해야했다.그러나 노래를 멈출 수는 없었다.서울 크리스탈 문화센터에서 ‘이성원-수요콘서트’도 열고,무용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기도 했다. 1987년 첫 음반 ‘문을 열고 나서니’를 냈다.토속적인 질감과 서구적 세련됨이 절묘하게 섞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92년 자작음반 2집 ‘나무밑에서’를 출시했다.역시 관심을 보인 곳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노래를 부를 때면 늘 동요를 한 곡 부르고 시작했던 그에게 사람들은 “성원씨가 부르는 동요,참 따뜻하네”라며 호응을 보였다.특히 아이들의 반응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한 두 번 참여했던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에서 그는 아이들이 동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현란한 대중가수들의 움직임과 빠른 리듬에 푹 빠져있던 아이들이 처음에는 단조로운 리듬이 반복되는 조용한 동요를 듣고는 심심해했다.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마음속에 뭔가 꼼틀거리는 듯 이내 따라한다. 자신들에게 꼭 맞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는 듯 얼굴에는 빙긋빙긋 웃음이 번져가기도 한다.이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도대체 무얼 전해주고 있는 걸까.우선 어른들부터 옛 정서를 되찾아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이성원이 노래하는 어른들을 위한 옛동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에 그는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구두발자국’ 등 8곡을 담았다.이 음반을 만들때 초등학교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춘천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깊은 산골에 있는 추곡초등학교 학생들이 이 음반의 첫 곡과 마지막 곡을 불러줬다.한 학년이라야 고작 서너명.전교생이 스물아홉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시를 쓰는 교감선생님의 협조로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소리를 실을 수 있었다.여린 봄햇살이 수줍게 찾아든 교실 한 켠에 녹음장비를 설치하고 지도교사에게 시작 신호를 보내자 교사의 풍금소리에 이어 번지는 ‘따옥 따옥 따오기 논에서 울고…’.아이들의 목소리에 실린 너무도 귀에 익은 화음을 타고 다가오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녹음하던 이들은 순간 핑그르 도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잃고 산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성원씨의 동요와 또 추곡초등학교 아이들의 노래는 도심의 회색 정글에서 쫓기듯 살아온 날들이지만 아직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이씨의 첫 동요음반제작을 도왔던 음악평론가 김진묵씨의 말이다.

첫 동요음반을 낸 뒤 그는 열린음악회,국악한마당 등에 출연하고 동요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도 했지만 그곳이 자신이 설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올 2월 환경의 소중함을 일러주는 국악집 ‘동쪽산에’와 두번째 동요음반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를 출반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찾아가는 동요콘서트’를 시작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정다운 마을의 한 전셋집에 아내,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인 딸과 살고 있는 이씨는 “목소리가 나오는 한 계속해야지요.할아버지가 돼도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가서 동요를 부를거예요”라며 소박한 웃음을 지었다.

<국민일보 최현수기자 hschoi@kmib.co.kr>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