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luya - Nana Mouskouri (2002) | |
Boleros Canciones Recuerdos cd2 *
Nana Mouskouri (Greek October 13, 1934- )
Disc 2 - 11. Aleluy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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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Universal Music Spain | |
Aleluya - Nana Mouskouri
(G. Hadjinasios/N. Gatsos/J.M. Purón)
Un silencio azul Y el resplandor de mil estrellas Un inmenso mar Bañando en paz la luna llena Tu mirándome, poniendo amor Sobre la aren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 aleluya alelul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Yo que fuà feliz Al contemplar una sonrisa Yo, que no perdà Jamás la fé que fué mi guÃa Hoy te tengo a ti Trayendo amor entre la bris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 aleluya alelul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Una noche más Un corazón que vuelve a amar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 aleluya, ale.. aleluya alelulya Aleluya alelu.. aleluya, alelu.. aleluya
Aleluya.. alel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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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 Mouskouri(나나 무스꾸리)는 내전과 세계대전으로 나라가 황폐해진 바로 전 1934년 그리스의 섬 Crete(크레타)에서 태어난다. 세기말 경에는 그녀는 자신의 다국어로 노래할 수 있고 부드러운 소프라노 목소리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럽 최대의 스타들 중 한 사람이 된다. Mouskouri는 미국의 재즈와 그리스의 민속음악을 포함한 그녀가 들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성장한다. 이러한 다양한 취향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접근하기 쉬운 팝을 모든 이들에게 알린 용감한 번역가였으며 이 것에는 프랑스 대중가요 또는 그녀가 직접 부른 부드러운 'Guantanamera(관타나모에서 온 소녀)'가 포함된다. 그녀는 앨범을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로 레코딩하였으며 그리스 민속 음악에서 볼레로 심지어 클래식도 연주하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노래 스타일로 사랑 받는 Mouskouri는 1994년 유럽 의회에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발된다.
Aleluya - Nana Mouskouri (Story 1990) | |
Story (Philips Taiwan 1990)
Nana Mouskouri (Greek October 13, 1934- )
Track 16. Aleluy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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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낳은 세계적인 가수 나나 무스꾸리. 그녀의 젊은 시절 25살 때의 이야기. 1959년 첫 레코드를 취입하고, 1960년 지중해 송 페스티발을 석권하면서 유명해진 그녀.
1962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팝의 본고장 미국에 음반 취입을 위해 도착한다. 사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와 프랭크 시나트라, 재즈의 열렬한 팬이었다. 또한, 뮤지컬도 좋아했다. 때문에 미국은 늘 그녀가 동경해온 무대였다.
그녀의 미국 방문에는 머큐리 음반사의 사장인 루이잔 헤이잔과 퀸시 존스, 어빙 그린 등의 도움이 있었다. 뉴욕으로 온 그녀는 처음 3주 동안은 그저 여기저기 놀러다기만 했다. 그녀는 운좋게 거물급 뮤지션들과도 어울렸는데, 그 중에는 마일즈 데이비스,루이 암스트롱, 엘라 피츠제랄드, 듀크 엘링턴 등도 있었다.
그런 행복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초조해져갔다. "내가 좋아했던 우상들을 만나는 건 좋아. 하지만 난 뭐냐.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 얼른 음반이라도 녹음해야 되는 데.. 불안한 걸." 고민 끝에 그녀는 퀸시 존스를 찾아갔다.
"저기, 존스씨? 드릴 말씀이 있는 데요."
"무슨 말인데?" "다름이 아니구요. 제가 미국온지도 이제 20일이 되었잖아요. 근데 아무것도 하는 일없이 그저 놀러만다니고 있으니.. 녹음은 언제 하는거예요?"
"하하하.. 걱정하지 말라구. 다 때가 되면 하게 될테니까. 그보다 지금은 편하게 마음을 먹고 생활을 즐겨. 그러면서 보고 배우라고."
퀸시 존스의 말에 안도를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심 조바심을 떨치지 못한다.
다음은 나나 무스꾸리의 회상.
"그 땐 야속하게도 생각되었지요. 하지만 그의 말이 옳았어요. 정말 훌륭한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4주째 되는 날 , 퀸시 존스는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있는 스튜디오로 그녀를 불렀다.
"자, 이제부터 시작하지. 준비는 되었겠지?"
"예. 물론이예요."
나나 무스꾸리는 퀸시 존스의 프로듀서 아래 약 한달동안 음반 취입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루 12시간 씩을 노래했으며, 퀸시 존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발음부터 감정 표현에 있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지도했다. 어느 날은 새벽 5시까지 녹음한 적도 있었다고.
다시 나나 무스꾸리의 회상.
"당시 내 생활이라고는 노래하는 것과 햄버거 먹는 일, 그리고 콜라마시는 일뿐이었지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녹음은 끝났고, 이어 기술적인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다. 녹음이 완성된 날. 퀸시 존스는 테잎을 가져와 말했다.
"바로, 이거야. 굉장한 걸."
당시 퀸시 존스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그처럼 좋아면서 만족해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해서 나온 음반이 바로 1962년작 "나나 무스꾸리 In New York " 한편, 이 음반은 1999년 유니버설 뮤직에 의해 새롭게 리마스터링되어 시디로 재발매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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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여가수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 450여장의 발매 앨범 중에서 350여장이 골드 앨범 또는 플래티넘 앨범으로 제작되었으며 1년에 100여차례 공연을 연일 매진으로 마치는 전설적인 여가수이다.
글 출처 : 네이버 지식검색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Nana Mouskouri
검은 뿔테안경에 긴 생머리, 흰 드레스, 청아한 목소리, 나나 무스꾸리. 그녀가 그동안 발표한 노래는 1,500곡, 발매된 음반만 450장, 판매된 음반은 3억장이 넘는다. 골드앨범(판매량 50만장 이상)과 플래티늄앨범(100만장 이상)도 3백여장 이다.
무스꾸리는 모든 장르의 곡들을 다 소화해 낸 매우 특별한 가수다. 그녀는 그리스 민속 음악에서 볼레로 심지어 클래식도 연주하였다. 일단 그녀에게 악보가 넘겨지면, 그 곡은 새로운 노래들로 변하곤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플라시도 도밍고도 극찬을 한 바 있다.
나나 무스꾸리는 1934년 10월 13일 제우스의 탄생지로 알려진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극장의 영상기사였고 어머니도 극장에서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스꾸리가 3살때, 가족들은 아덴으로 이사를 했다. 무스꾸리를 권위 있는 아덴 예술학교에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음악에 소질을 보이는 그녀를 위한 부모의 선택이었다.
1950년, 무스꾸리는 아덴 예술학교에 들어가 오페라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 입학한 지 8년쯤 지난 후, 그녀는 친구가 노래하던 재즈클럽에서 노래를 하게 됐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엘라 핏제랄드등 대중가수들의 노래였다. 그런데 어느날, 담당 교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가 대중음악을 불렀다고 화가난 교수는 무스꾸리가 연말 시험을 보지 못하게 방해한 후, 그녀를 아예 학교에서 추방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오페라 가수의 꿈이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아덴의 재즈 클럽 '자키'에서 노래하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위기가 아니라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다키스는 ‘오버 앤 오버’를 작곡한 유능한 인물로 무스꾸리의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1958년 음반을 발표했고 이듬해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과 차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받은 나나 무스꾸리는 유럽으로 진출했다. 1962년에는 퀸시 존스를 만나 뉴욕에서 ‘The girl from Greece sings’ ( Nana Mouskouri in New York) 음반을 만들었다. 이 음반은 전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1965년에는, 가수’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1년 동안 공연을 가졌다. 당시 벨라폰테는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던 대중음악의 스타였다.
무스꾸리는 1963년 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첫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되자 1974년 부터는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겼다. 2003년에는 두번째 남편 ‘안드레 샤펠’을 만나 지금까지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2004년부터 시작한 무스꾸리의 ‘World farewell tour’는 7월 23일, 그리스 ‘아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녀의 50년 음악 인생에 ‘아듀’를 고한 것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Odeon of Horodes Atticus) 음악당에서 열린 고별콘서트는 그리스 총리를 포함한 만여명의 청중들이 운집을 했다.
콘서트를 끝낸 그녀는, 오랜세월동안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준 전세계의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유니세프(UNCEF)친선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는 젊은 가수지망생들을 지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글 출처 : 想像's Music & Meditation ::
Aleluya - Nana Mouskouri (Tierra Viva 1987) | |
Tierra Viva (Spain ©1987 Philips)
Nana Mouskouri (Greek 1934- )
Track 9. Aleluy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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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무스쿠리. 1950년대 후반 음악계에 데뷔, 거의 반세기 가까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사랑 받아 온 그녀는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 음악 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꼽히는 아티스트로 그 어느 여가수보다도 많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큼지막한 뿔테 안경과 긴 생머리, 자신의 최초 히트곡이자 별명이기도 한 ‘아테네의 흰 장미’를 연상시키는 흰 옷. 이처럼 지적이고도 수수한 이미지의 그녀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맑고 고운 소프라노 보컬을 앞세워 화려함으로 치장된 대중음악계에서 변함없는 팬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 대한 유럽의 대답’이란 평을 받았던 그녀가 전세계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보여준 다양한 음악 스타일 덕이다. 모국인 그리스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 어 등 무려 7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재즈와 팝, 록, 샹송, 그리스 전통음악, 오페라 아리아, 종교음악, 포크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유럽은 물론 미 대륙과 아시아 등 전 세계적으로 팬들을 확보해나갔다. 그녀의 주무기는 바로 익히 알려진 각국 음악을 리메이크하거나 다른 언어로 ‘번안’해 부르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오리지널 히트곡도 많지만 이번 베스트 앨범에서도 알 수 있듯 팝과 전통 민요, 포크, 심지어 클래식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그녀의 입을 빌어 새롭게 태어났다.
D장조 6/8박자, A-B-A-C-A-B-코다로 구성됨. 제1 주제(A)는 피아노가 제시하며 40마디부터는 제2 주제(B)가 바이올린으로 시작함. 77마디부터는 F장조의 제3주제(C)를 바이올린이 연주함.
대담한 성격의 주제가 벽두에 나타나면 이 선율이 악장 전체를 지배하면서 화려한 전개를 펼친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 곡을 혹독하게 악평했지만, 고전주의의 진수가 깃든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사랑의 기쁨 (Plasir d'amour)',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수많은 히트곡으로 세계 곳곳에 있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음악의 감동을 선사했던 가수. UN 친선 대사를 비롯한 사회 사업 활동과 인권 운동, 그리고 가수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던 대가수가 바로 나나 무스꾸리이다. 1934년 생으로, 이제 올해 고희를 그녀는 대중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음반들을 발표하면서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사랑의 기쁨'을 비롯한 히트곡을 통해 '세미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얼핏 생각하면 크로스오버 (Crossover) 또는 세미 클래식 장르에서 활동하던 가수로 알려진 나나 무스꾸리가 왜 그리스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아티스트가 되는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그리스 음악을 가장 잘 부르는 그리스 가수'로 세계에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나나 무스꾸리가 프로 가수로서 미 대륙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스탠더드 넘버들을 주로 부르는 그리스 출신 여성 재즈 가수(!)'로서라고 한다. 1962년 당시 미국에서 발표되었던 음반은 '그리스 처녀 노래하다 (The Girl from Greece Sings)'였고, 이 음반은 이후 '뉴욕의 나나 무스꾸리 (Nana Mouskouri in New York)'이라는 제목으로 CD화되었는데, 수많은 클래식과 대중 음악, 그리고 그리스 전통 대중 음악을 세계에 알렸던 그녀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의외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자신은 재즈로 음악을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엘비스, 프랭크 시나트라, 마할리아 잭슨,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당시 나나 무스꾸리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역시 청순한 그리스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데뷔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이 당시 촉망받는 신인 가수, 작곡가 겸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Quincy Jones)였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의 '차세대 재즈 거물'과 그리스의 '원조 수퍼스타'가 만나 'The Girl from Greece Sings'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 음반의 커다란 성공에 힘입은 나나 무스꾸리는 이후 최정상의 인기를 달리면서 발표하는 음반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조국 그리스의 음악만으로 구성된 음반을 기획한다.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서를 세계에 소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했는데, 결국 이 기획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함께 그리스 국민 작곡가로 추앙받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1967년, '내 조국의 노래 (Chant du mon pay)'라는 제목으로 정식 공개된다.
여기에는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작품 'Manoula Mou (마눌라 무; 나의 어머니)'와 함께, '하얀 손수건'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Me T'aspro Mou Mantili (메 따스프로 무 만띨리)'를 만날 수 있다. 이후 그리스의 전통 음악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민요와 히트곡, 클래식을 보다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데 앞장섰던 나나 무스꾸리.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녀의 모습은 단지 노래를 부르는 아티스트로서가 아니라 사회 사업과 자선 사업에 앞장서는 훈훈한 인간애를 지닌 따스한 사람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의 청초한 풀내음과 지중해의 색채를 담은 명반! 나나 무스꾸리 내 조국의 노래 (Nana Mouskouri / Chants de mon pays)
나나 무스꾸리의 트레이드 마크는 역시 긴 생머리와 함께 특유의 검은 테 안경일 것이다. 엘튼 존(Elton John), 미셀 폴나레프(Michel Polnareff), 트레버 혼(Trevor Horn), 이안 헌터(Ian Hunter) 등 안경을 트레이트로 삼고 있는 아티스트들은 많지만, 나나 무스꾸리만큼 그 이미지 메이킹에 공헌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나 무스꾸리는 안경과 긴 머리만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대중 음악으로만 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음악 장르를 넘나들며 오랜 세월동안 사랑 받은 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데뷔 당시에는 그리스 어로 노래하는 그리스 가수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 보컬리스트로, 이후 크로스오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나나 무스꾸리. 이제 우리는 나나 무스꾸리의 청초한 목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근 40년이 흘러버린 지금에 와서, 이미 전성기를 훨씬 지난 그리스 출신 가수의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최근 1-20년 사이에 갑자기 불어닥친 월드뮤직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나 무스꾸리의 음악을 먼저 듣는 것이 필수적이다.
월드뮤직이라는 용어의 개념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는 시절, 미국의 대중 음악이 세계 시장을 점령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어 노래와 특유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세계를 휘어잡은 ‘월드뮤직의 1세대 원로’이다. 그 실체를 음반으로 확인한다는 것은 월드뮤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순례 코스이자 커다란 축복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음반들은 1964년부터 발표된 넉 장의 그리스 어 레코딩인데, 그 가운데에는 ‘하얀 손수건’의 원곡과 함께 마노스 하지다키스의 대표곡들을 모아놓은 음반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1960년대에 발표된 나나 무스꾸리의 음반들은 결코 ‘크로스오버 가수’로서도 아니고, 유네스코 친선 대사 등 음악 외적인 행보로 희석되지 않은, 순수한 ‘아티스트’로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나나 무스꾸리의 행보 (1960년대를 중심으로)
‘사랑의 기쁨’, ‘Try to Remember’,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수많은 히트곡으로 세계 곳곳에 있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음악의 감동을 선사했던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마찬가지로 UN 친선 대사와 유네스코 대사를 비롯한 사회 사업 활동과 인권 운동, 그리고 가수로서의 활동을 병행했던 대가수가 바로 나나 무스꾸리이다. 우리에게는 영어식 또는 프랑스식 발음인 나나 ‘무스꾸리’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어 식 발음으로는 ‘무쉬후리’ 또는 ‘무슈-리’에 가까우며, 실제로 그리스에서는 영문 표기를 할 때 ‘Mouskouri'와 ’Moushouri'를 함께 사용한다. 이제 올해 고희를 맞은 나나 무스꾸리의 수많은 음반들은 대중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전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사랑의 기쁨’을 비롯한 히트곡을 통해 ‘세미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유행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리스라는 나라의 아름다운 음악들을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 알린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
1936년 10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이오아나 무스꾸리(Ioana Mouskouri)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나나 무스꾸리는 영화를 사랑했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과 영화를 비롯한 예술 방면에 개방되어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 나나 무스꾸리의 부모는 나나 무스꾸리가 태어나자마자 아테네로 이사했는데, 여섯 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선보인 나나 무스꾸리는 여동생 제니(Jenny)와 함께 음악에 입학했다. 하지만 두 자매를 한꺼번에 음악원에 보내기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상, 나나와 제니 중 한 명은 음악원을 그만두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선택된 자매는 놀랍게도 나나 무스꾸리가 아니라 동생 제니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 나이의 두 자매 가운데 여동생 제니가 더 나은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결국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나나 무스꾸리의 유년 시절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성어가 떠오를 뿐이다. 하지만 당시 나나 무스꾸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이후 스스로의 힘으로 장학생이 되어 음악원을 계속 다니게 되고, 성악과 피아노, 그리고 화성학을 배우며 음악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10대 후반에 친구들을 통해 듣기 시작한 재즈의 매력은 결국 나나 무스꾸리에게 일생의 변화를 선사하게 되고, 이후 나나 무스꾸리는 클래식을 포기하고 재즈를 포함한 대중음악 가수로서의 길을 선택한다. 나나 무스꾸리 스스로도 자신은 재즈로 음악을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엘비스, 프랭크 시나트라, 마할리아 잭슨, 그리고 마리아 칼라스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당시 나나 무스꾸리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역시 청순한 그리스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오페라 가수로서의 꿈을 포기하고 클럽 등지에서 노래하고 있던 나나 무스꾸리에게 기회를 선사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노스 하지다키스(Manos Hadjidakis)였다.
당시 하지다키스는 쥘스 다상(Jules Dassin) 감독의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의 스코어를 작곡하기 전이었는데, 당시 하지다키스는 나나 무스꾸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후 나나 무스꾸리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노래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후 1960년, 나나 무스꾸리는 그리스 안에서 열렸던 컨테스트에서 우승하는데, 이때 커다란 도움을 준 사람 역시 마노스 하지다키스였다. 결국 이렇게 나나 무스꾸리와 마노스 하지다키스와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하지다키스와 무스꾸리 사이에 있었던 약속은 이후 두 장의 음반으로 결실을 맺었다.
나나 무스꾸리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첫 싱글 곡은 ‘아테네의 흰 장미(Weisse Rosen aus Athen)였다. 독일에서 녹음된 이 싱글은 수백만 장이 팔려나갔고, 이후 이 곡은 나나 무스꾸리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음반이었다. 이후 이 곡을 들은 미국의 음반 관계자들은 나나 무스꾸리를 미국으로 초청했고, 이때 제작된 음반이 바로 ’그리스 소녀가 부르는 노래(The Girl from Greece Sings)‘이다. 1962년에 출시된 이 음반은 2002년에 ’나나 무스꾸리 뉴욕 레코딩(Nana Mouskouri in New York)'이라는 제목으로 리마스터링되어 다시 한 번 공개되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이 당시 촉망받는 신인 가수, 작곡가 겸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Quincy Jones)였다.
당시 미국의 ‘차세대 재즈 거물’과 그리스의 ‘원조 수퍼스타’가 만나 ‘The Girl from Greece Sings’를 만들어 낸 셈이다. 이렇게 미국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친 나나 무스꾸리는 이듬해인 1963년, 프랑스로 건너와 새로운 음반을 발표한다. 그리고 음악적 동반자이자 1956년 나나 무스꾸리와 결혼한 기요르고스 페칠라스(Georges Petsilas; 프랑스에는 보통 ‘죠르쥬 페칠라스’로 불렀다)와 함께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정하는데, 이후 프랑스는 나나 무스꾸리에게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활동을 결정한 이후 나나 무스꾸리는 독집 음반 활동과 공연을 병행하면서 미셀 르그랑(Michel Legrand),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등 당시 최고의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60년대 당시 나나 무스꾸리는 올랭피아 극장 무대에 최소 세 번 이상 올랐는데, 음악 애호가들에게 회자되는 명연은 보통 죠르쥬 브라상스(Georges Brassens)가 지원했던 1966년 공연, 그리고 1967년 10월에 가졌던 공연, 그리고 70년에 있었던 공연이다. 이 가운데 1967년과 1970년 공연은 이후 공연 실황 음반으로 소개되었다.
나나 무스꾸리의 성공 가도를 살펴보면, 1960년 그리스로 시작되어 1962년 미국, 1963년부터 프랑스, 그리고 1969년 ‘Over and Over'를 통해 영국 음악계를 공략한 것까지 미주 지역과 유럽 전역을 망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0년 앞서 언급한 올랭피아 극장과 영국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공연으로 6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이후 나나 무스꾸리는 정들었던 프랑스 파리를 떠나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 뒤, 보다 다양한 음악과 활동을 펼친다. 이후 우리에게 친숙한 수많은 명곡들을 발표하면서 지금까지 찬란한 명성을 유지한다.
Mes Plus Belles Chansons Grecques - 그리스의 아름다운 노래 모음집
데뷔 당시에는 그리스어로 노래하는 그리스 가수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즈 보컬리스트로, 이후 크로스오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나나 무스꾸리.
1962년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나나 무스꾸리가 그리스 사람들의 정서를 세계에 소개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며, 음악적으로도 최고의 완성도를 선보인 1964년 명반 [MES PLUS BELLES CHANSONS GRECQUES - 그리스의 아름다운 노래 모음집이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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