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가요

여러분 - 윤복희│믿음이 담긴 노래...좋은 노래

리차드 강 2009. 11. 28. 15:21

여러분 - 윤복희

전속기념음반 제1집 (Oasis 오아시스 1984)

윤복희 Yun, Bok-Hee (1946년 03월 09일 -  )

No.1 - 여러분

 

여러분 - 윤복희

작사 : 윤항기 작곡 : 윤항기

1. 네가 만약 괴로울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음음음음 서러울대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내가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오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나는나는나는 너의 기쁨이야


2.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음음음음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내가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오오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나는나는나는 너의 기쁨이야

대사)만약 내가 외로울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뒷얘기

가수 남진과의 이혼 후, 시름에 잠긴 윤복희를 위해 그녀의 오빠 윤항기가 작곡해 준 노래이다. 며칠이고 방안에 박혀 울기만 하던 윤복희는 방밖에서 오빠가 불러주는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문을 열고 나와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노래이다.

1979년 제 1회 서울국제가요제...인가 하는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노래이기도 하다.

또 하나 내려오는 전설로는, 이 노래가 전두환 전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거의 금지곡 취급을 당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전두환 전대통령도 원래는 무척 좋아해 윤복희를 청와대 영빈관에 불러 무대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비서진들이 '네가' 라는 가사가 좀 그렇다며, 대통령과 고관대작들 앞에서 감히 반말투라 건방지니 '그대', '당신' 뭐 이렇게 개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윤복희는 이를 거절하고, 무대에서 삿대질(?)까지 하며 노래를 불렀고, 전두환 전대통령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의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그 후 윤복희는 괘씸죄에 걸려 활동이 위축되었다고 한다.

요즘도 방송가에서는 많은 코미디언, 배우, 가수 등이 윤복희를 흉내내고 있기도 하고,
미니스커트 담론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시기도 하다.

글 출처 : 인터넷 어느 불러그에서...

윤항기 "'여러분'은 동생 윤복희를 위해 만든 노래"

'장미빛 스카프'로 유명한 윤항기가 노래 '여러분'은 동생 윤복희를 위해 만든 노래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윤항기는 동생 윤복희가 불러 히트를 기록한 노래 '여러분'은 동생 윤복희를 위해 만든 노래라고 밝혔다. '여러분'은 윤항기가 작사,작곡했으며 윤복희가 불러 큰 사랑을 받았다.

윤항기는 "당시('여러분'이 탄생하기 전) 동생의 가정사에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며 입을 열었다.

이어 윤항기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외롭게 성장했다. 그래서 나도 결혼을 일찍하고 동생도 그랬다"며 "다만 중간에 안 좋게 끝났다. 동생의 개인적인 이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분'을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복희는 1977년 11월 가수 남진과 결혼해 1979년 3월 짧은 결혼생활을 마감하고 이혼했다.

윤항기는 한국 최초의 록밴드 키보이스에서 음악활동을 시작, '나는 어떡하라구' '별이 빛나는 밤에' '해변으로 가요' 등 히트시키며 7,80년 대 큰 사랑을 받았다.

동생 윤복희는 가수 뿐 아니라 '빠담빠담빠담' '피터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에 출연하며 뮤지컬 배우로 50년 넘는 세월 무대에 올라 뮤지컬계의 대로모 자리를 잡았다.

출처 : 스타뉴스

     

예순 셋 안식년을 선언한 윤복희 인터뷰

'엄마가 뿔났다'의 안식년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무대가 힘들거나 인생이 시큰둥해서가 아니다. 혹시나 무대에서 찾지 못한 나의 꿈이 있지 않을까? 올해 윤복희는 안식년을 선언했다.

지난 6월 초 한국컴패션의 사진전을 겸한 문화 행사(서울 광화문 KT홀) 무대에 선 윤복희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열창했다. ‘놀라운 은혜’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개구쟁이 같았고, 깊은 연륜이 동시에 묻어났다. 노래 시작 전 무대 구석에 놓인 피아노 건반을 살짝 눌러주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으로 관객과 눈 맞춤을 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노랫말을 창으로 불렀다. 윤복희의 몸짓과 목소리는 단 한 곡만으로도 ‘왜 윤복희인가’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모처럼 무대에 오른 윤복희와 정오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열정적인…

공연 시간은 낮 12시. 윤복희는 “대낮에 노래를 부르는 건 처음이다. 꼭두새벽(오전 7시)부터 일어났다. 도움이 필요한 전 세계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모처럼 스커트를 입고 볼터치도 했다”고 말했다. 윤복희의 ‘화장학 개론’이란 게 있다. “무대에 서기 위해 분장은 하되, 예쁘게 보이기 위한 화장은 하지 않는다”는 것. 평소에는 쌩얼로 다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는 윤복희의 ‘쌩얼’을 못 본 게 기자는 조금 아쉬웠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준다는데, 그녀에게 오전 일곱 시는 왜 꼭두새벽일까.

“뮤지컬 공연은 주로 밤에 하잖아요. 목소리 관리를 위해 공연(보통 오후 7시) 전에는 목소리를 안 쓰거든요. 아, 우리들 세계의 말로 ‘12시 전에는 침도 안 뱉는다’는 게 있어요. 그만큼 목소리 관리에 신경을 쓴다는 거죠. 오늘은 낮 12시 공연이니까 목소리를 깨어 두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죠. 그렇지 않으면 목이 잠을 자게 되잖아요. 관객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뮤지컬계의 대모’라 불리는 윤복희는 현재진행형이다. 공연을 앞두면 여전히 까다로운 모습이 그걸 일깨워준다.
“내 가 공연 인생 58년째지만 여전한 건 여전한 거죠. 공연 며칠 전부터 그래요. 오늘 공연 의상의 콘셉트를 블랙&화이트로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집 안에 있는 옷들을 꺼내서 빨래하고 다림질해서 걸어뒀어요. 그런 준비(마음가짐)가 중요한 거예요.”
그럼에도 그녀의 내공과 연륜이면 조금은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그건 아니죠. 오늘 공연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잖아요. 이건 나이 문제가 아니에요. 과거에 내가 죽을 뻔한 적이 몇 번 있어요. 윤복희가 언제, 어느 날 떠난다는 게 정해져 있지 않잖아요. 그러니 늘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후회를 남기면 그렇잖아요.”

의미심장한 얘기였고, 프로는 아름다웠다. 다음은 윤복희가 떠올린 세상을 떠날 뻔한 순간들.
“1976 년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교통사고가 났는데 다시 생명을 받았어요. 80년대에는 3분만 늦었으면 하나님이 나를 데려갈 뻔한 순간이 있었죠. 무대에서 다친 적도 많아요. 무대 사고로 왼쪽 다리의 근육이 끊어진 상태예요. 이런 말을 안 해서 사람들은 내가 장애인이란 걸 잘 몰라요.”
윤복희는 교통사고 이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그녀의 블랙 상의에 매치한 실버 십자가 펜던트가 선명했다.

     

나를 데려가시기 전에 한 번 통 크게 쉬어보자…

사실 기자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창으로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 ‘창’에 감탄해서 “요즘 창을 배우느냐”고 물었다가 무식한 꼴이 됐다. 윤복희와 창이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자료 검색을 한 뒤에야 알았다.
윤복희 의 부친은 ‘부길부길쇼단’을 이끌며 당시 ‘원맨쇼의 일인자’ 혹은 ‘시대를 앞서 가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윤부길씨.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무렵부터 유랑 극단 생활을 했다. 춤추고 노래하던 그 시절에 창을 배웠다. ‘창’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글로벌 마인드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우리 것을 외국화하는 것도 좋지만, 정말 세계화를 생각한다면 외국 것을 우리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 거죠. 우리 것으로 만들면 굉장히 다른 게 나오거든요(웃음).”

과거로 돌아가면, 윤복희는 어마어마한 한류 스타였다. 나이 열여섯에 워커힐 극장에서 루이 암스트롱과 공연했다. 미 8군 무대에서 활약하던 당시 암스트롱 흉내를 기막히게 냈고, 그게 암스트롱의 귀에 들어가면서 합동 공연을 했다는 일화는 더 기막히다. 이듬해에는 ‘코리안 키튼스’를 결성해 해외 공연에 나섰다. BBC ‘투나잇 쇼’에 출연하고, 라스베이거스에도 진출했다. 원조 한류 스타 윤복희는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고 말한다. 기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윤복희. 그녀의 오빠는 한때 함께 노래 활동을 했고, 현재 목회자의 길을 걷는 윤항기 목사다. 컴패션과의 인연은 차인표·신애라 부부와 연결된다. 선교 뮤지컬 ‘지저스 지저스’에서 차인표가 예수 역을, 윤복희는 막달라 마리아 역을 맡았다. 차인표가 컴패션 밴드를 구성했다는 소식에 윤복희가 “너무 아름다운 일이다. 혹시 뭐 도울 일이 없느냐”고 제안해 컴패션 밴드 활동에 참여했다. 윤복희는 ‘마리아’라는 예명의 라틴 어린이 한 명을 후원 중이다. 사진전을 겸한 이번 컴패션 문화 행사의 주제는 ‘꿈’이었고, 기자는 윤복희의 꿈을 물었다.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섰어요. 하루도 쉬지 않고 무대에서 연습하고 공연을 했더니 무대 인생이 58년이나 됐어요. 물론 무대에서는 늘 즐거웠죠. 난 행운아인 것 같기도 해요. 루이 암스트롱이나 대가들과 공연을 했으니까요. 그러나 무대 밖에서의 꿈을 꿀 만한 여유나 기회가 없었죠. 그건 아쉬웠어요. 다행히 올해 내게 큰마음을 썼어요. ‘그래, 한 번 통 크게 쉬자, 주님이 데려가시기 전에 쉬어보자’는 마음을 먹었죠. 내게 만약 꿈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걸 찾아보고 싶었어요.”

     

드디어 7월, 배낭 하나 메고 유럽 성지 순례의 길…

올해로 데뷔 58년. 그녀의 말에 따르면 2009년은 윤복희의 안식년이다. 주변에서는 ‘일 년을 쉬겠다’는 윤복희의 선언을 듣고 만류하기도 했다. 일하던 사람이 쉬면 병난다는 이유였다.
“아무런 약속이나 계획은 없어요. 그냥 배낭을 메고 전 세계를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머리도 짧게 다듬은 거고(웃음). 그런데 아직도 (휴식이) 익숙하지 않네요.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연습해야 되는 거 아닐까, 자꾸만 재촉을 해요.”
드디어 7월, 윤복희는 배낭을 멘다. 동행은 없다. 짧은 머리의 그녀 혼자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6월에 영국 초청으로 한인의 날 찬양 공연이 있어요. 사람들이 절 보고 싶어 하니 그거는 참여하고, 공연이 끝나면 나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날 거예요. 배낭을 메고 유럽의 성지를 순례할 계획입니다.”
달랑 하나 멘다는 그녀의 배낭에는 뭐가 담길까.

“미니컴퓨터(컴퓨터에는 여행하며 떠오른 일기나 작사·작곡 아이디어를 담는다고 했다. 메모가 아닌 컴퓨터를 사용하는 ‘젊은’ 그녀의 모습이다), 디지털 카메라, 속옷, 스웨터, 반바지….”
젊은 시절 윤복희는 ‘가십 걸’로 유명했다. 미니스커트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이가 윤복희다. 당시 언론에는 그녀가 남자 친구(첫 남편인 독일계 가수 유주용)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국내 입국 시 미니스커트를 입고 도착했다고 소개됐으나, 그것은 오보로 알려졌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녀는 미니스커트 열풍의 신화적인 주인공이다. 지난 인터뷰를 보니,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그녀의 수영복은 비키니라고 했다. 기자는 “혹시 배낭 안에 미니스커트나 비키니는 안 챙기느냐”고 물었고, 이때 윤복희의 눈은 커졌다.
“여보세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느냐는 눈치) 지금은 반바지!”

기자 양반, 내 나이가 몇인지 아우?…

이번엔 윤복희가 하나를 물었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아우?” “예순셋이야, 예순셋.” 여우(女優)들 중 예순이 넘는 나이를 스스로 밝히는 사람을 본 적이 드물다. 윤복희는 나이 듦이나 물리적인 숫자에 대해 당당한 여자가 분명했다. 윤복희, 예순셋, 그리고 그에 대한 설명.
“손이 둘이잖아요. 왜 사람은 손이 둘일까? 양손에 모든 걸 가지려 마라, 한 손은 열어두라는 의미가 아닐까? 난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꿈 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번엔 사적인 부분이었다. 기자는 무대에서의 꿈을 말하는 그녀에게 한 여자로서, 또 사랑에 관한 꿈은 없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윤복희의 평범한 가정생활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내용이 포함된 질문이란 것을 뻔히 아는 윤복희지만 별다른 튕김 없이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한 손은 열어두는 여유로 읽힌다.
“그 쪽은…(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사랑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어릴 때부터 연예계에 있어서인지 일반적인 생활은 아니었으니까요. 이성(사랑)에 대해 뭔가를 가져본 적이 드물었죠. 그래도 어느 분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 감사하죠. 내가 사랑하는 건 포기했고, 그게 불행은 아닌 것 같아요. 주님을 만나면서 이게 사랑이구나를 느끼고 있어요. 그런 사랑이 있을까요?”
그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건, 그걸 포기한다는 건 속상한 일이 아닐까.
“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난 글쎄, 음,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너무 오래 지난 일이니까, 기억이 잘 안 나요.”

서울 강남의 모 아파트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윤복희는 그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동부이촌동 아파트로 이사했다. 조영남은 그녀의 전 아파트를 두고 “연예인의 방이라고 상상을 못할 만큼 수도승처럼 살더라. 집이 절간 같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 적막한 공간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또 외롭지 않을까. 기자는 자꾸 ‘혼자 사는 윤복희=외로움’이란 공식을 세워뒀고, 윤복희는 거듭 그 공식은 틀렸다고 알려왔다.

“난 혼자가 아니잖아요. 주님과 함께 지내니까요. (기자에게) 크리스천 아니죠? 집에 있는 거 재미있어요. 어제도 하루 종일 빨래를 네 번이나 했다고 말했잖아요. 내일이 공연인데 뭘 입을까? 옷장에 있는 블랙&화이트 옷을 모두 꺼내서 빨래했거든요(웃음). 늘 그렇게 사는 건 재밌어요.”
58년의 무대 생활. 다섯 살 꼬마에서 예순셋 ‘뮤지컬의 대모’가 된 그 세월. 모처럼 자신에게 ‘통 크게’ 휴가를 줬다는 윤복희.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면 그녀는 배낭 하나를 메고 유럽의 성지를 돌아다닐 것이다. 혹시나 그녀에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내 미니 홈피에 들어와서 일촌 신청해요. 내가 일촌으로 받아줄게요(웃음).”
’영원한 젊음’ 윤복희와의 인터뷰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며칠 뒤 윤복희의 인터뷰를 정리하는데,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에 호기심 그득한 눈으로 유럽의 어느 곳을 다닐 그녀의 모습이 자꾸 상상되는 것이었다.

기획 강승민 | 포토그래퍼 이진하 | 여성중앙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