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창간…우리것· 민중사랑 실천 | |
세상 떠난 지 11년 그를 기리는 59명의 잡지형식 추모곡 |

» 아 그리운 사람, ‘잡지계 혁명가’ 한창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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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기.
시인 황지우씨는 선배 시인 김수영의 20주기 추도식에서 “씹어먹고 싶도록 그리운 사람이여!”라고 외쳤지만, 어떤 이들에겐 한창기(1936~1997)야말로 그렇게 외쳐 부르고 싶은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 한창기에 대한 그런 목마른 그리움을 품은 사람들이 열한 해 전 세상을 뜬 그를 기리며 책을 펴냈다. 〈특집! 한창기〉에는 사진가 강운구씨를 비롯해 일로, 뜻으로 생전의 그와 인연을 맺었던 쉰아홉 사람의 글이 실렸다. 지난해 10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펴낸 그의 글 모음 〈배움나무의 생각〉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 깊은 물의 생각〉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그의 육필의 산물은 세 권의 책으로 모였고,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은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도대체 한창기는 어떤 사람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글로써 그를 기리려 모여든 것일까. 가까이 사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한창기가 바로 이 말의 진실됨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특집! 한창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다채로움은 한창기 삶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사진가·언론학자·편집자에서부터 디자이너·사업가·국어학자·화가·음악인·출판인까지 참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다 여기 모였다. 그는 “국어학자가 울고 가는” 재야 국어학자였고, 안목이 빼어난 문화재 수집가였고, 전통문화의 부활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라는 특별한 잡지의 편집인-발행인이었다. 한창기라는 이름에 따라붙는 수많은 별칭도 그가 이 잡지들을 창간하고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과 깊이 관계돼 있다. 그의 모든 관심의 물줄기는 이 잡지들로 모여들었고, 이 잡지들을 거쳐 다시 뻗어나갔다. 그를 회상하고 추모하는 글들을 모은 〈특집! 한창기〉가 잡지 형식으로 편집된 것도 잡지 편집인으로서 그의 삶을 기억하려는 뜻의 결과다.

» 〈특집! 한창기〉 강운구 외 58인 지음/창비·2만3000원 |
말하자면 한창기는 그대로 〈뿌리깊은 나무〉였고 〈샘이깊은물〉이었다. 세상에 잡지는 많고도 많지만, 〈뿌리깊은 나무〉가 구현한 독보성과 독창성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언론학자 강준만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의 특별함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국 잡지사는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뿌리깊은 나무〉 이후로 구분된다.” 다른 언론학자 유재천 교수도 단언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0년대 정신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면서, 특히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역이었다.”
한창기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패악이 극에 달했던 1976년이었다. 그는 그 거친 세상에 자태 고운 잡지를 내놓았다. 그것이 조용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을 ‘외화벌이’로 귀결시킨 박정희 독재는 그 살벌한 체제의 보완물로서 ‘민족문화’와 ‘민족주체성’을 내세웠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민족도 문화도 주체도 없었다고 강준만 교수는 말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군사작전식으로 추진된 ‘우리 것 사랑하기’는 실은 ‘우리 것’에 대한 모독이었다. 박정희식 히스테리만 계속되었더라면 ‘우리 것’은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그 ‘박정희식’에 대항하여 참다운 ‘우리 것’을 제시한 사람이 한창기였다. “한창기의 ‘우리 것 사랑하기’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박정희의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강요할 힘도 없었지만, 그는 강요할 꿈조차 꾸지 않았다. 계몽도 아니었고 설교도 아니었다. 그는 세련된 포장과 알맹이로 ‘우리 것’의 값어치를 높여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시대에 ‘우리 것’ 곧 전통의 생활과 문화는 ‘낡은 것’ ‘추한 것’ 취급을 받았다. 서구식 교양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의식이 강했다. 그 자신 교양인이었던 한창기는 바로 이런 생각을 뒤엎었다. 그는 ‘우리 것’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놀라운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름다움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시대의 뒷길에 팽개쳐졌던 전통을 살려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제호가 벌써 그런 의식과 의지를 품고 있었다.
한창기는 독특한 의식과 의지는 잡지의 형식에서도 관철됐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는 잡지계의 오랜 금기를 모조리 깨뜨린 위반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위반은 머잖아 한국 잡지의 새로운 전범이 됐다.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변산공동체 대표)씨는 그 금기 위반을 열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한글 전용 가로쓰기’다. 〈뿌리깊은 나무〉는 권위 있는 교양지들이 고수했던 ‘국한자 혼용’과 ‘세로쓰기’를 모두 버렸다. 그 사실을 두고 어떤 이는 “19세기 말 서재필 박사가 순한글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이래 가장 혁명적으로 한국 고유의 언론 매체를 창간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샘이 깊은물’, ‘뿌리깊은 나무’ |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민족을 민중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민중을 발견한 사람이 한창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민족 문화를 민중의 눈으로 보고 민중의 삶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는 그는 문화적 전위투사였다. 잡지의 민중적 관점은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분야로까지 점차 퍼졌다. 1980년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틀어쥔 신군부가 그 불온함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해 8월호로 〈뿌리깊은 나무〉는 폐간당했다. 민중의 삶에 뿌리를 두고 우리 것의 가치를 키웠던 그 나무는 밑동이 잘렸다.
그러나 한창기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의 위세가 한창이던 시절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한 것이다. ‘여성용 가정잡지’로 등록됐지만 〈샘이 깊은 물〉은 〈뿌리깊은 나무〉의 정신을 올곧게 이은 또 하나의 〈뿌리깊은나무〉였다. 이 잡지에서도 한창기는 ‘당돌하고 발칙한’ 꼿꼿함을 한순간도 굽히지 않았다.
한창기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1남1녀’를 두었다고 말한다. 그 1남이 〈뿌리깊은 나무〉였다면 1녀는 〈샘이 깊은 물〉이었다. 두 잡지를 자식으로 둔 그는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그 자식들에게 쏟았다. 〈샘이 깊은 물〉이 태어난 지 13년 되던 1997년 그는 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특별한 심미안으로 삶의 후미진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창조한 사람이었다.
그의 11주기를 맞아 오는 2월1일 저녁 6시30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뮤지엄카페 ‘고궁뜨락’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식을 연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8. 1. 25.
한창기의 삶 - 세일즈도 잡지도 ‘최고’를 추구한 심미안 | |

» 한창기의 수첩
한창기는 ‘우리 것’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 것’ 전문가이기 이전에 그는 ‘서양 것’ 전문가였다. 그가 삶의 이력을 서양 것을 우리나라에 파는 사람으로 시작했다는 건 기이한 역설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한창기는 그 시절의 출세 코스인 법조인의 길을 거부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지사 창립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 직판 세일즈맨 1세대였다. 그가 〈브리태니커〉 세일즈의 리더가 된 데는 영어 능통자였다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얼마나 영어를 유창하게 했던지 브리태니커 본사 부사장이 그를 만난 뒤 “동양 사람 중에서 한창기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고 한다. 그가 나중에 우리말과 글에서 영어투, 일본어투를 없애고 민중의 입말을 말과 글의 바탕으로 만드는 일에 나섰던 것도 이런 명민한 언어감각 덕이었다고 한다.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창립한 그는 유망한 젊은이들을 불러모아 ‘세일즈 전사’로 키웠다. 그는 본사에서 보내온 ‘브리태니커 사람들의 신조’를 한국 사정에 맞게 다듬어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외우게 했다. “나는 적극적이다. 나는 부지런하다. 나는 합리적이다. 나는 끈기가 있다. 나는 목표가 있다. 나는 나의 능력을 믿는다.…” 종교의식과도 같은 그런 조회를 마친 세일즈맨들은 전국 팔도에서 뛰었다. 당시 고급 피아노 한 대 값이 넘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한창기는 회사 창립 2년 만에 수하의 세일즈 일꾼을 250명으로 늘렸고, 전성기 때는 1500명을 거느렸다. 한창기의 회사는 ‘세일즈의 사관학교’로 알려졌다.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처음 도입한 회사였고, 마케팅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회사였다. “보험회사 중역들이 와서 어떻게 교육시키나 도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이력서를 내고 입사해서 판매사원 교육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브리태니커 신조’는 뒤에 여러 기업체에서 흉내내 회사 이름만 바꾸어 쓰기도 했다.
그에게서 ‘설득의 기법’을 배운 뒤 나중에 사업계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이다. 웅진그룹의 윤석금 회장도 한창기가 키운 ‘세일즈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세일즈맨들에게 단순히 책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사업 종사자이자 교육의 사절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윤 회장의 말이다.
그렇게 서양 것을 팔아 번 돈으로 그가 만든 것이 〈뿌리깊은 나무〉였다. 전성기 시절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구독자는 6만5000명을 헤아렸다. 당시 〈신동아〉의 정기구독자가 2만명이던 시절이었다. 세일즈에서 최고를 지향했던 사람답게 그는 잡지에서도 최고를 추구했다. 그가 추구한 최고는 그대로 그 시대 문화적 심미성의 최전선이었다.
고명섭 기자 (한겨레 신문)
뿌리깊은 우리문화 사랑, 정갈한 말맛 살린 글 오롯 | |
‘뿌리깊은 나무’ 창간 한창기씨 글 모음 출간

» 한창기씨 |
책 모양과 내용도 그랬거니와 그 이름부터 달랐다. 1970년에 <배움나무>가 창간됐고, 이어서 <뿌리깊은 나무>(1976), <샘이 깊은 물>(1984)이 나왔다. 이들은 이 나라 잡지문화, 출판문화 풍토를 바꾸고 우리 정체성에 대한 사유의 차원을 높였다. 이들을 만들고 키웠으며 그 때문에 탄압받기도 했던 한창기(1936~1997)씨. “이 나라 새 세대가 사용할 언어의 흐름을 새 방향으로 바꾸었다고들 다들 인정하는” 타고난 언어 통찰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우리 말과 우리 문화예술을 남달리 깊이 알고 사랑했던 “멋쟁이”였으며, 뒤틀린 역사가 만든 굴곡을 살피고 바로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칠백만이나 되는 서울인구 중에서 무슨 외국의 연주회가 있다고 하기만 하면 연거푸 몰려가는 사람의 수는 수만명이어도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 같은 데에 나오는 사람의 수는 백명 안팎일 뿐인 이 나라의 음악교육엔 아마도 무슨 큰 탈이 있다.” 약 20년 전에 그는 그렇게 한탄했는데, 서울인구 1천만이 넘은 지 오래인 지금은 달라졌을까.
타계한 지 10년만에 그가 첫 잡지 창간 무렵부터 세상 떠날 때까지 27년여 동안 쓴 글들을 엮어 묶은 책 3권이 나왔다. 그가 만든 그 잡지들 이름을 붙였는데, 발표된 순서대로 묶은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매체에 실린 것이든 문화시평류의 글들은 <배움나무의 생각>에, ‘언어’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은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에, 전통과 민속과 문화를 다룬 글은 <샘이 깊은 물의 생각>에 각각 가려 묶어 정리하고 발표연대와 수록매체를 밝혔다.

» ‘뿌리깊은 나무’ |
“나는 아직도 아름다움의 ‘아름’이 ‘앎’이나 ‘지식’이라고 했다던 고유섭씨의 말씀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이 ‘알음’, 곧 ‘아는 사이’를 뜻한다고 믿어, 무엇이 아름답다는 말은 ‘아는 사이’다워서 눈과 귀에 설지 않다는 말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군가 가락에서 어른들이 향수를 느끼듯 서양식 음악도 어쩌다가 우리의 귀에 가장 익숙한, ‘알음’다운 음악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중의 피부에 더 맞닿은 민중음악을 깔보던 일제와 해방 뒤의 역사는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반성할 게 음악뿐이었으랴.
그는 “사람들이 평소에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 작고 가느다란 것들”, 그러나 “만약에 알게 되면 사람들 머릿속에 변화의 작은 불씨를 일으킬 것들”을 그는 늘 생각했다. 민속, 미술, 예악, 언어, 건축, 복식 할 것 없이 온갖 분야의 ‘지킴과 변화’에 대해 문화적이고 인문적인 성찰을 했다. 정갈한 우리 말들을 살린 빼어난 문장이 설득력을 높였다. 사라져 가던 남도의 판소리를 되살려낸 것도 그의 공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엮고 펴낸 이들은 그의 글들이 “삼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고 흥미롭다”며, 눈앞의 이익을 좇는 우리 사회에 삼십년 전 한 문화인의 사유를 던지자는 것이라고 출판의 의미를 새겼다. 한씨가 만든 잡지들의 편집장, 주간 등을 지낸 윤구병, 김형윤, 설호정씨가 함께 엮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
한참을 잊고 있었던 이름이라 반갑기도 했었지만 그가 생전에 내 놓았던 잡지들이 '어디 있지?' 하는 궁금증도 들었지요. 제가 20대 초반의 궁핍과 굶주림을 채우려고 읽었던 책들 중의 하나이고 지금도 이 책들을 잡지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책장의 맨 밑이긴 하지만 한 권도 없어지지 않고 잘 보관돼 있었습니다.
30년을 넘었거나 30년이 다 되어가는 책들 인지라 요즘의 책과는 달리 지질이 별로인 책에서는 특유의 헌책 냄새가 콤콤합니다. 어쩌면 30여 년 전의 제 손때에서 나는 냄새인지도 모르고 냉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게 읽었던 그때 기억의 냄새인지도 모릅니다.

당시 잡지계를 풍미한 16가지 금기를 깬 '뿌리 깊은 나무'를 1976년 3월 창간하여 토박이 문화에 대한 애착과 과감한 문화 비평의 영양소 담뿍 담긴 다양한 찬거리로 차린 맛깔스런 문화 밥상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러나 "계급의식 조장, 사회불안 조성"을 구실로 삼은 신군부에 의해 1980년 8월호, 통권 53호를 끝으로 폐간됐습니다.
2008년 1월 28일 조선일보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
"가장 한국적이며 세계적이었던…"
故한창기를 그리며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기자·편집자·필자 출신 59명 글·사진 모아 추모집 펴내
"문화시대의 가능성을 예비한 앞선 세계인"(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줏대 있는 열린 한국사람"(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 "디자인에 눈을 틔운 한국 출판문화의 자존심"(박암종 동서울대 교수)….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펴내 1970~80년대 정신 문화사적 변혁운동을 했던 고 한창기(1936~97)씨를, 지인들은 이렇듯 즐거이 추억한다. 최근 나온 '특집! 한창기'(창비)는 두 잡지에서 기자·편집자·필자로 일했던 59인이 그의 모습을 퍼즐처럼 짜맞춘 글·사진 모음집이다.
"막 나온 잡지를 훑어보다가 정상적 위치에서 0.2㎜쯤 떨어져 있는 마침표를 발견하고는 노발대발하는 위대한 좀팽이"(강운구 사진가) "닫힌 세상을 열어젖힌 외톨이"(강창민 시인) "천재적 언어감각으로 국어운동을 이끌었고 토박이 말에 집착해 '등'을 '따위'로 고쳐 쓴 고집불통"(손세일 전 국회의원 및 언론인) "이미지 메이킹을 이미 40년 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라는 상찬도 이어진다.

한복 차림의 한창기씨가 1992년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앞에서 웃고 있다. /창비제공
전남 벌교의 궁촌 출신인 한씨는 대학 졸업 후 한국브리태니커의 창립자·경영인으로 문화 운동을 벌여 나갔다. 긴 잡지 제목, 가로쓰기, 큰 판형, 한글전용, 무거운 표지사진 등 "당시 잡지계를 풍미한 16가지 금기를 깬"(윤구병 변산공동체 대표) '뿌리 깊은 나무'를 1976년 3월 창간, 토박이 문화에 대한 애착과 과감한 문화 비평의 "영양소 담뿍 담긴 다양한 찬거리로 차린 맛깔스런 문화 밥상을"(유재천 한림대 교수) 세상에 내놓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러나 "계급의식 조장, 사회불안 조성"을 구실로 삼은 신군부에 의해 1980년 8월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한씨는 1984년 11월 "당돌하고 발칙한"(강준만 전북대 교수) 여성지 '샘이 깊은 물'을 창간해 기품 있는 비판정신을 선보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두 대표적 잡지를 키운 한씨를 두고, 세인들은 "1남 1녀를 뒀다"고 말했다. 한씨는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편집·기획자, 판소리 서적과 음반 제작자, '민중 자서전' 시리즈 발행인으로도 족적을 남겼다.
지난해 한씨의 10주기를 맞아 '뿌리 깊은 나무의 생각' '샘이 깊은 물의 생각' '배움 나무의 생각'(이상 휴머니스트) 등 고인의 글을 묶은 유고집 3권이 나왔다. 시대를 앞서 산 이 출판인을 기리는 책을 쓴 강운구씨 등 필자들은 2월 1일 오후 6시30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카페 고궁뜨락에서 추모집과 유고집 출판기념회를 겸한 한창기 추모 모임을 연다.
박영석 기자 yspark@chosun.com 2008년 1월 28일
글 출처 : 인터넷 조선일보 |
창간호의 '편집자에게'의 축사에는 "또 한 번 더 뿌리깊은 나무의 창간을 축하하며, 오래 사는, 가지가 많은 나무가 되라고 박수를 보낸다"라는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의 축사와 "뿌리깊은 나무가 [나무]가 되려면 통나무가 되어야 한다. 홍수 속에서 곧 뒤집힐 나무가 아니라, 쉬 잠겨 버리는 통나무가 아니라, 물살의 흐름마저 다스릴 수 있는 우람찬 통나무가 되어야겠다. 이런 통나무로 자랄 수 있을까?" 하고 말한 이(이종은 / 경북대 상대)도 있습니다.
편집자의 말에서는 '이 잡지의 출간을 준비하는 기간이 무려 다섯 해가 걸렸다'라는 말과, '샅샅이 따지고 살피기에는 이 다섯 해도 오히려 모자랐다'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축사를 쓴 이들의 바람과 염려에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1976년 3월의 창간호와 1980년 8월의 폐간호입니다.

위의 사진은 유일한 합본 호인 1980년 6,7월 호입니다. 창간호는 550원, 나중의 폐간 즈음은 1,800원으로 책값이 급등하는 것은 제2차 오일 쇼크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창간호 첫 머리의 [예술비평] 미술부문에는 유준상 선생의 "김환기는 무엇이 되어 돌아왔나?"가 게재되었습니다. 1974년 6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이승을 하직한 수화 김환기 화백의 회고전(95, 12, 3. ~ 두 주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을 본 비평입니다. 예술비평은 미술, 음악, 문학, 연극, 영화, 국악 등으로 다양하며 잡지의 첫 머리에 실려있습니다.

창간호 본문의 첫 게재 글은 김우창 교수의 "비범한 삶과 나날의 삶 - 삼일운동과 근대문학"이 실려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의 필자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기라성 같다 할 수 있으며 더러 작고하신 분들도 있고 그때의 소장 학자나 작가들은 요즘에는 대가의 반열에 든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봅니다.

폐간호의 마지막 게재 글은 '걸어서 하늘까지'로 잘 알려진 문순태님의 단편소설 '하늘 새'가 게재되어 있으나 어디에도 폐간의 낌새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편집자의 말에서 "'논설'과 '마파람 소리'는 이달에도 걸렀습니다. 또 '두드러기'도 한 달 걸러게 되었습니다. 걸러는 기사가 많음을 미안하게 여깁니다."라 하고 있습니다.
창간사에서 한창기 발행, 편집인은 "환경은 문화의 집입니다. 사람과 환경은 긴 세월에 걸쳐서 서로 사귀고 겨루어서 균형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런데 개발과 현대화는 이 환경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더 잘 살려는' 사람에게서 변화를 겪은 환경은 공해와 같은 보복으로 사람을 '더 못살게' 하기도 합니다. 또 대중문화의 거센 물결이 이 땅을 휩쓸어 우리의 환경을 바꾸고 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자연의 균형을 잘 지키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뿌리깊은 나무'는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까이 살피려고 합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두 페이지에 걸쳐 하고 있으며 지금 읽어 보아도 아직도 유효하지 싶은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인을 '탁월한 세일즈맨 이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만 보릿고개를 겨우 넘긴 70년대 후반에 문화를 상품으로 한 세일즈를 할 수 있고 했다면 나름대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창간사의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마무리 지었습니다.
"창조는 역사의 물줄기에 휘말려 들지 않고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해서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새로움을 주는 일이겠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그 이름대로 오래디 오랜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바로 이런 새로움의 가지를 뻗는 잡지가 되고자 합니다."
글 출처 : 삼간 三間 |
중앙일보 '국악의 향연' 음원, 1978
성금련 (본명:성육남, 1923.5.7~1986.7.29)
1. 진양조 / 가야금 산조 전곡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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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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