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평화의 가요

양병집 1집 - 넋두리(1974) & 리마스팅 몇곡, 그리고 번한곡의 원곡들...

리차드 강 2010. 6. 21. 19:29

1집 넋두리

양병집: 넋두리 1집 (1974 성음)

양병집 Yang, Byeong-Jib 1949~

A면 Track 1. 서울하늘 1 (Track 전곡연주)

1974.03.20 성음 / 양병집 1집 - 넋두리

양병집 Yang, Byeong-Jib

출생: 1949년 02월 02일 / 대한민국
데뷰 (Debut): 1974년 (1집 앨범 '넋두리')
학력: 중앙대학교 음악학과

     

     

Side A

 1. 서울하늘 1
 2. 잃어버린 전설
 3. 타복네
 4. 아가에게
 5. 나는 보았지요

 

4:24
3:30
3:18
1:54
1:54

 

Side B

 1. 너와 나의 땅
 2. 소낙비
 3. 서울하늘 2
 4. 역
 5. 그녀

 

2:39
5:10
3:56
2:28
2:27

     

     

1970년대 3대 저항가수 양병집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sachilo@empal.com 서울신문 | 2007.06.16

김민기, 한대수와 더불어 1970년대 우리나라 3대 저항가수로 일컬어지는 양병집의 첫 음반 ‘넋두리’는 1974년에 발표되었다.

이 앨범엔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접하기 쉽지 않았던 포크싱어, 피트 시거와 우디 거슬리, 그리고 밥 딜런 노래들의 번안곡과 더불어 전래가요 ‘타박네’ 등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 1970년대는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일컬어지는 청년문화가 있었고 그 반대편엔 이농현상과 함께 ‘공돌이, 공순이’로 일컬어지는 또 다른 문화가 자리했다.

양병집의 노래들은 이러한 70년대, 그 앞면과 이면을 관통한다. 삶을 직시하는 노래, 현실을 꿰뚫는 노랫말이 돋보이는 이 음반 ‘넋두리’에 실린 노래들은 일종의 메시지 송이자, 포크송에서 보다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요소가 많은 프로테스트 송(Protest song)이다.

그가 처음 대중들 앞에 등장한 것은 1972년 초. 한 증권사 말단직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당시 ‘월간 팝송’이 주최한 ‘제1회 포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면서부터다. 물론 이보다 몇 개월 전인 1971년 10월, 아마추어로 미 문화원 무대에 섰던 적도 있었다. 이미 10대 때부터 ‘디쉐네’나 ‘미도파 살롱’ 같은 음악감상실을 기웃거릴 정도로 음악광이었던 그는 서라벌예대 음대 작곡과에 입학, 음악에의 길을 택했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증권회사에 입사한다.

본명 양준집(楊準集). 그러나 그는 콘테스트에 동생 이름 ‘양경집’으로 참가해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Its All Right’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역(逆)’으로 3위에 입상한다. 입상자 발표 때 ‘양병집’으로 잘못 호명되는 해프닝을 겪게 되는데 이에 이름을 아예 양병집(楊柄集)으로 바꾼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로 시작되는 이 노래 ‘역’은 은유적인 서술과 현실의 다양한 아이러니를 역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를 통해 그는 당시 노랫말에 쉽게 끌어들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절묘하게 배합해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다. 이후 1972년 6월, 당시 대학생가수들의 산실이자 포크가수들의 못자리였던 제1회 ‘맷돌’공연 무대에 송창식, 김민기, 양희은, 사월과 오월 등과 함께 서면서 점차 주목받게 된다. 이어 명동의 ‘오비스 캐빈’과 ‘네쉬빌’ 그리고 ‘르 실랑스’ 같은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 이때 발표한 음반이 바로 ‘넋두리’. 그러나 1975년 7월5일, 수록 곡 중 ‘서울 하늘’이 공연윤리위원회와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각각 금지곡 판정을 받는다. 발표된 지 1년 4개월 만의 일이었다.

     

     

양병집 1집 - 넋두리 (리듬온 | 2005) 리마스팅 몇곡...

양병집 1집 - 넋두리 (재발매 | 리듬온 | 2005)

양병집 Yang, Byeong-Jib 1949-

1. 서울하늘 1 - 몇곡 연주

 

     

 1-1. 서울하늘 1
 1-2. 잃어버린 전설
 1-3. 타복네

 2-1. 너와 나의 땅
 2-2. 소낙비
 2-4. 역

     

아메리칸 포크에 당시 한국 현실을 빗댄 가사로 대부분 채워져 있는 양병집의 첫 음반 '넋두리'의 금지 사유는 '가사와 창법 저속'이었다. 결국 '저주받은 걸작'이 되어버린 이 음반에는 대체 어떠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까.

첫 곡은 우디 거슬리의 '뉴욕타운'을 개사한 '서울하늘'이다.'내 안경이 졸도할만한 서울에 올라와 나도 한번 벌고 싶어 헤매 다녔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더라.'는 푸념은 1970년대 이농(離農)의 드림과 좌절이다. 그럼에도 '노래나 한 번 불러 보자.'는 식의 자조 섞인 넋두리가 바로 1970년대 젊은이들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과정에서 벽이 되어버린 문턱에서의 어쩔 수 없는 넋두리인 셈이다.

피터 폴 앤드 메리가 발표한 미국민요 '위프 포 제이미'를 전혀 다른 내용의 우리말로 개사한 '잃어버린 전설'은 또 어떤가.'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참다, 참다 스러져간 꽃'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른바 최루탄 가득한 거리에서 이미 사라진 젊은이들을 애도하는 노래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동시에 사회 전반에 드리웠던 월남 파병문제, 그리고 산업화의 그늘을 떠올리게 한다. 전래가요 '타복네'는 어머니로부터 들으며 자란 노래다. 모친 김경패(金景貝)여사는 정태춘 곡인 '양단 몇 마름'의 2절 가사를 직접 만들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후에 '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들(88년)' 음반을 통해 발표하는 '엄마엄마 아 엄마'와 독립군가였던 '부활가' 등도 그의 모친이 유년시절에 귀동냥으로 배웠던 노래를 소중한 패물 건네듯 아들에게 물려준 유산들이다.

한때 새로운 미국국가로 추천되기도 했던 유명한 곡 '디스랜드 이즈 유어 랜드'는 분단국가, 한국의 젊은이 양병집에게로 와서 '너와 나의 땅'이 된다. 이 노래가 나올 즈음, 거리마다 마을마다 나붙은 구호는 온통 반공·방첩이었고 분골쇄신이었다.'빨갱이'라는 용어가 그러했듯 온 국민 전체가 집단으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때로 이남과 이북에서 제각기 불리는 노래는 똑같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되 그 통일에 깊이 박혀 있던 서로간의 공통 인식은 전혀 달랐다. 때문에 '백두산에서 제주도까지, 너(이북)와 나(이남)의 땅'이라는 노랫말 주장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념 아래 금기시된 논조였고 언어였다. 음반은 '노래나 불러보자'는 '서울하늘'에서의 넋두리로 시작되어 풍자, 관조 등을 거친 뒤 '나는 다시 기타를 집어 들고 그 다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자조 섞인 말로 끝맺는다.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했지만 노래만큼은 현재진행형이 되어주길 바라는, 그래서 그는 노래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다분히 포함시키고 있다.

     

양병집 1집 - 넋두리 (1972) 번한곡의 원곡들...

1집 <넋두리>는 번안곡과 구전가요로 이루어짐

Bob Dylan 외

1. New York Town - 외 몇곡 연주

 

     

1. Jack Elliott - New York Town (서울하늘)

2. Peter Paul & Mary - Weep for Jamie (잃어버린전설)

5. Pete Seeger - I Can See a New Day (나는 보았지요)

6. Woody Guthrie - This Land Is Your Land (너와나의땅)

7. Bob Dylan - Hard Rain's A-Gonna Fall (71 Bangladesh 소낙비)

8. Pete Seeger - Lou Marsh (서울하늘2)

9. Bob Dylan -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live, 역 원곡)

10. Pete Seeger - The Thresher (그녀)

3:39

4:12

1:51

2:19

5:56

3:56

5:02

2:28

     

양병집은 신랄한 언어의 풍자가다. 금지음반 ‘넋두리’를 통해 발표된 그의 노랫말은 이전 노래들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창법 또한 독특하다.‘타박네’와 ‘아가에게’를 제외하고 모두 아메리칸 포크 번안곡이지만 양병집이라는 필터를 통해 당시 한국의 현실이 절실하게 그려지고 있다.

현실을 거친 말로, 그리고 특유의 쓴 목소리로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노래들은 당시 1970년대의 갖가지 억눌림과 제약으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그럴싸한 해방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음반 ‘넋두리’는 1974년도에 1500장 정도가 발매,800여장 팔리고 나머지는 모두 회수되었다고 전해진다.

1975년 7월,‘서울하늘’이 금지곡으로 묶인 것과 때를 같이해 양병집은 무대를 떠난다. 증권회사에 재입사, 증권분석가로 변신한다. 그러나 증권회사 직원으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사표를 던지고 서울 신촌에서 라이브 카페 운영을 시작했다.70∼80년대의 신촌은 이른바 청년문화의 메카였고 동시에 그의 라이브 카페는 당시 신세대 뮤지션들의 산실이자 아지트였다. 최성원, 조동익이 찾아왔고 전인권과 허성욱이 등장했으며 해바라기의 이주호와 유익종도 함께 모여 노래했다.

이후 19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자동차 세일즈, 교포식당 경영, 그리고 신문기자 생활 등을 전전하다가 1999년 10월 호주에서 귀국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침이 올 때까지’,‘부르고 싶었던 노래들’ 등 총 여섯 장의 독집음반을 발표, 여전히 무뎌지지 않은 예리한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 2001년 호주 영주권을 반납한 그는 현재 프로듀서로 변신,‘동서남북’,‘16년 차이’ 음반에 이어 최근 BJ 엔터테인먼트를 설립, 김하용덕과 손지연 같은 후배 포크가수들의 음반 제작을 도와주며 포크의 맥을 잇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 박성서 sachilo@empal.com / 서울신문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