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생상 바이올린 협주곡 3번 Op. 61 - Zino Franchescatti, violin

리차드 강 2010. 11. 17. 21:15

Saint-Saens Violin Concerto No. 3, Op. 61

생상 바이올린 협주곡 3번 Op. 61

Saint-Saens, Camille (1835 ~1921)

3악장 Molto moderato e maest - 1악장 - 2악장

 

Zino Franchescatti, violin

New York Philharmonic / Dmitri Mitropoulos, Cond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신은 천재를 일찍 데려간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프랑스 작곡가인 생상스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천재로 태어났지만 비교적 장수했던 인물이다. 그는 86세까지 살았는데, 천수를 누리는 동안 생상스는 음악의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썼다. 흔히 그는 같은 프랑스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와 비교된다. 프랑크가 아주 신중한 태도로 극히 한정된 분야에서 적은 분량의 음악을 썼던데 반해 생상스는 그야말로 손대지 않은 음악 장르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생상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총 세 곡 남긴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 1번과 제 2번은 그리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반면에 3번 협주곡은 대중적 감성에 호소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인기가 매우 높아 콘서트 홀에서 종종 들을 수 있고 음반도 꽤 많다. 생상스는 비록 낭만주의 작곡가였지만 위대한 고전주의의 형식과 전통을 신봉했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작품 역시 개인의 풍부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 감성으로 작곡되기는 했으나 고전 협주곡에 가까운 튼튼한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제 1 악장 Allegro non troppo

제 2 악장 Andantino quasi Allegretto

1악장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로 소나타 형식이지만 상당히 자유 로운 구성을 보이고 있다. '안단티노 콰지 알레 그레토(Andantino quasi Allegretto)'로 연주되는 2악장은 간략한 서주가 나오고 바이 올린 선율의 출렁이는 리듬이 마치 뱃노래 같이 느껴지는 지극히 매혹적인 악장이다. 3악장은 론도 형식의 작품이다. 바이올린이 론도의 주제를 선창하면 현악기가 코랄 풍의 다른 주제를 들고 나오면서 전개된다. 독주 바이올린의 눈부신 패시지가 환상적이며 끝은 대단히 화려하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함께 스페인의 명 바이 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사라사테에게 헌정 되었던 작품이다.

     

     

Zino Franchescatti

마르세유 출생.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으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자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마르세유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이론을 공부하였다. 1924년 파리에서 데뷔, 이후 프랑스는 물론 유럽 각지에서 이름을 떨치고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필하모니의 연주회에서 파가니니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미국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1946년까지 미국에서 활약하다가 일시 귀국하였으나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고도의 기교와 서정적인 아름다운 음을 특색으로 하며 파가니니의연주에는 정평이 나 있다.

 

Saint-Saens, Camille 생상스 (1835.10.9~1921.12.16)

생상은 아마도 음악사상 가장 어려서부터 음악 재능을 보인 사람일 것이다. 2세 반일 때 피아노를 정확히 쳤다니까 일찍이 절대음감을 가졌음이 분명하고 3세 미만일 때 벌써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으며 3세에 최초의 작곡을 했다. 모차르트보다 2년 여나 앞섰으니 신동도 보통 신동이 아니었다.

7세에 라틴어를 해독했고, 과학, 특히 식물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지질학 표본을 채집하기도 했다 좀더 커서는 천문학에 비상한 열의를 보여 프랑스 천문학회의 멤버가 되었고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점성술에도 흥미를 가졌고 시집을 출판하는가 하면 극작에도 손을 댔으니 '만능'이란 말은 마치 그를 위해 생긴 말인 듯 싶기도 하다.
떠돌이처럼 밤낮 밖으로만 돌다보니 가정 생활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나이 43세 때 둘밖에 없었던 어린 아들들을 수개월 사이에 모두 잃는 불행이 있었다. 그로부터 3년후 생상은 아내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그는 진정한 신고전주의자(Neo-Classicist)로서 바하·모짜르트의 전통 가운데서 길러졌을 뿐 아니라, 그 자신 논리적 구성과 순수 스타일로 인해 칭송받는 작품들을 창출해 냈다. 마지막으로 생상스는 프랑스 민족주의의 한 선배로서, 프랑스 음악을 널리 알리고 개발하려는 뚜렷한 목적으로 - 로맹 뷔시드(Romain Bussine)와 함께 - 「국민 음악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를 설립했다.그는 프랑스 음악을 향상시킨 최초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비범한 재능을 지닌 피아니스트로서, 약간 딱딱한 터치(touch)로 절제된 기민하고 장대한 건반악기 연주 스타일로 인해 동시대인들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고도로 지적인 그의 관심사는 음악의 영역을 초월한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