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아들 곁으로...

리차드 강 2011. 9. 3. 16:39

태일이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아들 곁으로 가셨다.

1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끝내 잠들다...이소선 여사 소천

지난해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한 이소선 여사. 당시 "우리는 항상 밀리고 있고, 뒷발질만 맞고 있는데 전체 노동자가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며 "여러분이 하나가 되지 못해서 노동자들이 분신을 한다. 하나가 돼서 싸워야지 그렇지 안되면 밀려나고, 인권이 언제 짓밟히지 모른다"고 말했다. ⓒ김철수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향년 82세로 3일 별세했다. 이 여사는 지난 7월18일 서울 창신동 자택에서 심장 박동이 멎으며 쓰러져 48일 간 의식을 찾지 못하다 이날 오전 11시 45분 영면했다. 전태일재단 측은 3일 낮 이 여사의 운구를 별세한 한일병원에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로 이송하고 빈소를 차렸다.

» 2010년 전태일 40주년 신년에 만난 이소선 여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 여사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은 이후 계속 의식을 찾지 못했고, 지난달 24일에는 집에서 가까운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왔다.

서울대병원에는 벌써부터 이 여사의 삶을 기리고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기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소식을 접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트위터 등 인터넷상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이날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어머니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드님과 만나시고 차별도 억압도 없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소서"라고 밝혔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도 트위터에 애도의 글을 전했다. 그는 "노동자의 어머님, 민중의 어머님 이소선 어머님, 아드님 전태일 열사 만나러 가는 길이 급하셨나요"라면서 "다시 일어나셔서 이 땅 노동자들에게 단 한마디 말씀이라고 하시고 가시지 그대로 가셨나요, 모든 짐 내려놓고 편히 가소서"라고 말했다.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좀 더 오래 사셔서 노동자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꼭 보셔야 하는데 죄송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면서 "이제 모든 것 다 산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잠드소서"라고 트위터에 전했다.

이외에도 탤런트 김여진, 개그우먼 김미화, MBC 아나운서 오상진, SBS 아나운서 박선영을 비롯한 많은 네티즌들의 애도 글이 잇따랐다.

고 전태일 열사의 모친 이소선(81)여사의 임종은 네명의 유가족이 지켜보았고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등 이씨의 지인과 김용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씨의 주검은 오후 12시 20분께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예정이고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태일재단이 장례실무를 담당할 예정이다. 장례형식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논의되지 않았다.

이 여사는 지난 7월18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자택에서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으며 쓰러질 당시에 30분 동안 심장박동이 멈춰 뇌의 상당 부분이 손상됐다.

이 여사는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자식을 둔 부모들의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창립을 이끌었으며,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왔다.

유족으로는 아들 전태삼씨와 딸 순옥ㆍ순덕씨가 있다.


"내가 못 다한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소. 내가 죽고 없으면 엄마가 댕기면서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고... 그렇게 외쳐 주소"

41년 전, 화상으로 온 몸에 붕대를 감은 22살 아들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 당부한 유언이다. 아들 전태일의 마지막 말을 지키는 것, 그것만이 고인의 살아가는 삶의 이유였다.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였던 이소선 여사가 3일 소천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 노동자의 평범한 어머니였지만 1970년 11월 13일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날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며 분신자살하면서 고인은 민주화 투사로 거듭났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였지만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전태일'이 돼 살아갔다. 전태일 열사에게 자극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벌이며 고인을 찾아왔다. 고인은 이렇게 찾아온 이들을 연결시켜 주거나 공권력에 쫓기는 이들을 숨겨줬다. 수배중이던 고 조영래 변호사를 애인으로 위장시켜 경찰의 포위망을 뚫기도 했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장기표씨를 숨겨주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김대중 정부 시절 중반까지 20년 넘게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다니며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생활을 하며 4번이나 구치소에 다녀왔다. 노동자의 대모였던 고인에게 나이가 더 많았던 문익환 목사나 김대중 대통령도 깍듯하게 '어머니'라 불렀을 정도였다.

1986년에는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을 모아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을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고 죽기 직전까지도 고문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유가협 회원들과 함께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현장에는 언제나 고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쓰러져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부산 한진중공업 3차 희망의 버스를 타는 일을 상의했을 정도였다. 별세하기 전까지도 아들 전태일이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만들어 앞 뒤 색깔이 다른 겨울 속바지를 입었던 고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었던 아들 전태일을 잃은 천불이 일어 신경안정제를 먹어도 잠들지 못하는 밤이 숱했다.

"나는 올 때까지 다 와서 이 달에 갈지 훗 달에 갈지 몰라. (40년동안) 갈 데 안 갈 데 다 다녔는데 변한 게 없어서, 우리 아들한테 가서 할 말이 없어서 큰 일인기라"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짊어졌던 고인. 우리가 고인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아닌 고인의 이름 석 자 이소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CBS 이대희 기자] 2011.09.03 2vs2@cbs.co.kr.

     

'노동자 민중의 대모' 故이소선 여사의 40년 '전태일의 삶'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30일 저녁 서울 시청 광장에서 열린 전태일 40주기 추모 문화제에서 연설을 마친 후 만세를 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독립운동가이던 아버지 아래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일제 정신대에 끌려갔다. 정신대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힘이 들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故 이소선 여사의 투쟁이 시작된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내가 이걸 보고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죽는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전태일 열사의 유언에 이소선 여사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라고 약속했다. 전태일 분신 이후 이소선 여사의 삶은 투쟁의 삶 그 자체였다. 이 여사는 아들 전태일의 유언을 몇배로 지켰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40여년 간 이소선 열사는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불렸다.

70년대에서 80년대, 90년대로 이어지는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의 핍박 속에서 이 여사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수없이 죽어갔던 또다른 아들, 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전태일열사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몸부림치는 이소선 어머니의 모습 [출처=전태일 재단 사진 캡쳐]

외부에 알려진 이 여사의 투쟁은 1970년 전태일 분신 이후부터 시작됐다. 전태일 분신 2주 만에 설립된 청계피복노동조합과 1985년 구로동맹파업,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활동 현장에서 굳건히 연대했다.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을 당시 이 여사는 노조 고문으로 추대됐다. 그해 12월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당국의 강한 탄압에 항의하다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집단자살을 기도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청계피복노조를 지켜내고자 하는 이 여사의 의지는 굳건했다. 결국 1984년 청계피복노조를 다시 복구시켜 고문으로 추대됐다.

1973년에는 노동교실을 개관해 함석헌 선생을 초청했다는 이유로 그해 내내 당국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수배중이었던 장기표 씨를 숨겨줬다. 잡혀간 장기표가 재판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자 이 여사가 검사를 나무라며 "나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아가라"고 외쳤던 일화는 유명하다. 이 여사는 장기표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구속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81년에는 두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그해 서울시는 청계피복노조 해산명령을 내렸고, 이에 노조 간부와 조합원들과 함께 해산명령에 항의해 아프리에서 농성을 벌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등으로 구속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아들 전태삼과 함께 감옥생활을 했다.

전태일 정신을 받든 이 여사의 투쟁적 삶은 노동운동가들 뿐 아니라 모든 재야운동가들의 귀감이 됐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에게도 이 여사는 어머니였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의 인연은 전태일이 사망하자 김 전 대통령이 병원에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이 여사는 목숨을 건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18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투쟁을 하다 심한 구타를 당했었고,1987년 청계노조 사무실을 탈환하고자 진입하다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 실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또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하다 안타깝게 죽어간 젊은이들의 유가족들을 한데 모아 1986년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만들었다. 이 여사는 유가협 초대 회장을 지냈다. 회원들과 함께 1988년~89년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을 벌였고, 1989년에는 범민족대회 판문점 예비회담 남측 대표로 참가하려다 불구속 입건됐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담소를 나누는 이소선 여사. ⓒ 김철수

1990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지시 무죄선고 항의 치안본부에서 시위를, 1991년 백골단으로부터 폭행당해 숨진 강경대 열사의 타살 등과 관련된 항의 투쟁들을 전개했다.

1998년에는 의문사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법 제정을 위한 422일 천막농성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 후 노동자.농민.학생 등 민중들에 대한 탄압이 또다시 활개를 치면서 이 소선 여사는 편안한 말년을 보내지 못했다. 이 여사는 쓰러져 병상에 눕기 전까지도 각종 정권 규탄 집회에 참석, 탄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볻돋워주며, '이 시대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여줬다.

부산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타는 일을 상의했고, 200일이 넘게 크레인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만나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태일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던 이소선 여사. 사람들은 전태일을 기억하면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을 기억한다.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이소선 여사.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할것 같냐”

2008. 12. 05 [한겨레] 한승동 기자, 정용일 기자

» 고 전태일씨 어머니 이소선 여사 인터뷰 정용일 기자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후마니타스·1만2000원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야기 500일간 구술 녹음해 책으로 내
“소외받고 고통 당하는 비정규직 정규직이 나몰라라 해선 안돼”

“다시는 뭘. 이제 일이년이나 살겠어. 이게 마지막이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일이 있어 간 김에 인사만 하고 “다시 뵙겠습니다”며 돌아서던 오도엽(41)씨는 뜻밖의 대꾸에 되돌아섰다. 처음으로 이소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팔순의 그는 이미 “집회장에서 붉은 머리띠를 매고 독설을 퍼붓는 이소선”이 아니었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태일의 어머니도, 노동자의 어머니도, 노동운동가도 아닌 그냥 이소선, 내 할머니 같았다.”

그렇게 해서 오씨는 서울 종로구 창신2동에 있는 기념사업회에 주저앉았다. 그때가 2006년 11월. 2년이 넘은 지금까지 500여일간 그는 ‘어머니’와 동거하면서 주로 늦은 밤 “누군가에게 혼잣말처럼 되뇐” 그의 한 많은 이야기를 녹음테이프에 담았다. 180시간이 넘는 긴 분량이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는 그 80년의 기억 중에서 “세상에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펼쳐놓은 것”이다. 이소선의 삶은 한국 노동운동사, 아니 한국 현대사를 바꿔 놓은 그의 큰아들 전태일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지만, 이 책은 전태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소선의 이야기다. ‘노동운동의 대모’, ‘열사의 어머니’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자연인 이소선이 살아온 얘기에 초점을 맞췄다. 이소선이 이처럼 속속들이 털어놓은 적은 없다.

1980년대 쫓기던 대학생 지명수배자로 창원공단에 ‘잠입’한 뒤 15년간 노동현장에 있다가 시와 기록문으로 두 차례 ‘전태일 문학상’을 받으면서 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은 오도엽씨는 지난 2년간의 체험을 토대로 이소선을 “누구보다도 독특한 자신의 향기를 가진 사람, 그러나 향기를 내뿜는 순간 자신은 스멀스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떤 기억을 말하든 이야기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내세우거나 높일 필요를 의식조차 못 하는 사람이었다. … 지금껏 살면서 했던 실천과 선택은 늘 주변 사람들의 절박한 요청에 성실하게 응답하고자 한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역할은 바로 이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오씨는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가슴에 불이 일어” 새벽 4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뒤적이며, 매끼 당뇨와 혈압과 골다공증과 백내장 약을 세 주먹씩이나 삼켜야 하고, 이젠 5분 거리에 있는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사무실을 가는데도 서너 차례 이상 멈춰 쉬어야 하는 이 늙은 여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내는 영원한 응원가이자 희망의 위안”이라고 했다.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소선 여든의 기억〉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열사님은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게 말이냐? 어느 부모에게 자식이 열사겠냐. 그냥 아들이야. 태일이는 열사도 투사도 아닌,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야. 그라고 분신자살했다고 한다. 어디 자살이냐. 항거지. 분신항거라고 해야 해. … 태일이를 열사니 투사니 하지 말고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해. 전태일 동지. 그게 맞지 않냐. 태일이는 지금도 노동자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동지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 달라고 좀 써라.”
“태일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미쳐버리고”, “한번 이야기를 하면 사흘을 아파서 누워 있어야 하는” 그가 오씨에게 처음 눈물을 보인 것은 기구한 가족사와 어릴 때 헤어져 일본으로 간 오빠 얘기를 할 때였다. 이소선은 그때 홀로 뒤란 흙바닥을 긁으며 부른 노래를 뜬금없이 흥얼거리며 눈물을 훔쳤다. 일본에 있던 오빠와는 태일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연락이 닿아 만났으나 지금은 딴 세상 사람이 됐다. 존재조차 몰랐던 언니 소식도 70년 만에 들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오씨가 “이소선은 독재와 싸운 일보다 가난과 싸운 일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고 했던 지독한 가난은 대구 달성공원 옆 남산동 포목상 아들이었던 남편 전상수의 거듭된 사업 실패와 요절에 따른 숙명이었다. 염천교 밑 거지형제들과 함께 자기도 했던 중앙시장의 ‘거지엄마’ 이소선의 인생은, 살아 있다면 올해 환갑인 태일의 청천벽력과 같은 죽음(1970년 11월13일)과 함께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그러나 책에서 그 사건 자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책은 피 묻은 영안실 옷들을 수거해 세탁한 뒤 팔기도 한 헌옷장사, 시래기 주워 파는 장사를 하며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라면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한 태일의 가난한 동료들과 함께 “노동청장이 찾아와 거만을 떨자 아예 목덜미를 이빨로 깨물어 쫓아버릴” 정도의 결기로 세상과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 어릴 때의 기억 등으로 채워져 있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때 ‘전태일노동상’을 주고 단상을 내려가던 이소선이 갑자기 뒤돌아 와 사회자한테서 마이크를 낚아채고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다며 쏘아붙였다.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하냐.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정규직 할 것 같냐. 정규직이 비정규직과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되어 발목에 쇠사슬 차고 노예처럼 일하게 될거다.”

이소선은 “이런 얘기 무슨 재미가 있다고 읽겠느냐”고 했지만, 오씨는 요즘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부쩍 많이 쓰는 이소선의 구술에서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읽어냈다. “누군들 미쳐 살 만큼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고맙다는 말, 다 못하고 헤어지고 떠나보낸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모두가 내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고맙다. 지겹도록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립다. 보고 싶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謹     부디 소천하시어 사랑하는 아들과 행복하소서.     弔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