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악(국악)

앨범: 김죽파 (金竹波). 한국의 가야금 음악 Korean Kayagum Music: Sanjo

리차드 강 2012. 2. 26. 12:07

Korean Kayagum Music: Sanjo

한국의 가야금 음악 (1995 킹레코드)

김죽파 (金竹波). Kim, Jook-Pa / 본명: 김난초, 1911-1989

1. 민속풍류 民俗风流 - 2. 가야금 산조 伽耶琴散调

 

* 가야금:죽파 / 장고:김동준

음반 이름: 김죽파.한국의 가야금 음악/산조.민속풍류<Korean Kayagum Music Sanjo>
음반 구분: 정규, studio
장르: 국악
스타일: 산조
발매일: 1995.09
발매 일자: 1995 / 대한민국.
제작 / 기획사  서울음반

Artist: Chukp'a
Album: Korean Kayagum Music: Sanjo
Recording Date: Sep 28, 1985
Label: World Music Library
Type: Compilation
Time: 61:37
Genre: International
Style: Asian Folk, Asian Traditions, Korean, North/East Asian Traditions

     
     

1. 민속풍류 民俗风流
2. 가야금 산조 伽耶琴散调

06:22
52:55

     

     

음반 설명

죽파의 산조는 다른 산조에서는 휘모리 보다 빠른 장단을 보통 단모리라 했는 데'세산조시(농악장단에서 그이름을 따왔다)'라고 하는 것과 앞의 다스름에 이어 뒷다스름이 있는 것이 겉모양에서 보이는 특징이고 그 내용을 보면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여성적인 세련미로만 흐르는 재빠른 모양새도 아닌 중용적인 은근미와 깊은 맛이 또한 특징이다.이러한 이루기 힘든 경지는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혈연적인 것에서 부터 그가 추구해온 쉼없는 정진,인고의 예술 인생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음반해설서 중)

 

김죽파 金竹波 Kim, Jook-Pa

출생 1911.02.19 | 한국
사망 1989.09.10
활동유형 여성| 솔로 | 가야금
활동장르 국악
스타일 산조

김죽파(金竹波, 1911년 ~ 1989년)는 대한민국의 가야금 산조 명인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김창조의 가락에 새 가락을 짜넣어 김죽파 류 가야금 산조를 구성하였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김창조에게서 가야금을 배웠고 11세 때부터 할아버지의 수제자인 한성기에게서 가야금 풍류, 산조, 병창을 배웠다. 13세 때부터는 연주 활동을 시작해 전국에서 이름을 떨쳤다. 1926년에 서울로 올라와 연주 활동을 하였으며, 산조, 병창, 민요를 녹음하였다. 197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먹거리로 가득 찬 음식점 골목에서 현란한 간판을 채우고 있는 글자 중 가장 큰 공통분모를 보이는 것은 ‘원조'라는 글자일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유사(有史)함을 인정받으려는 듯 원조라는 글자를 상호 앞에 앞 다투어 내건다. 원조를 인정받는 다는 것은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를 인정받는 것이다. 이는 곧 현재의 위치가 일시적 시발점이 아닌 과거로부터의 회귀를 용납 받는 것이며 동시에 계보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은 원조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음식 맛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대손손 이어진 손맛에 배어있는 세월의 적층에 오감을 만족하며 ‘역시 이 맛이야'라고 자신의 선택을 옹호하는 것은 원조가 가지고 있는 역사를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음악에 이러한 원조격 맛이 있어 잠시 들여다 볼까한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를 이어받은 김죽파의 가야금 산조가 그것이다. 함화진의 『조선음악통론』과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음악사』, 『문학예술사전』에서는 가야금 산조의 원조를 김창조(金昌祖, 1856-1919)라 칭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와 산조의 음악양식적 배경을 통해 산조의 출현시기를 19세기 말로 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시각에서는 김창조를 산조의 창시자라 칭하는 것에 이의를 갖기도 하지만 김창조가 현재 연주되고 있는 많은 유파의 가야금 산조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그의 제자 한성기(韓成基, 1889-1950)에게 이어져 김창조의 손녀인 김죽파(金竹波, 본명 : 蘭草, 예명 : 雲仙, 1911-1989)에게 전수되었다. 김죽파 가야금 산조에서 원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가야금 산조의 원조격인 김창조의 가락이 그의 손녀인 김죽파로 이어져 두 산조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혈연과 학연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김죽파에게 전수된 김창조와 한성기 가락의 수용 · 변화 형태는 문재숙 교수의 두 논문 “김죽파 가야금 산조의 연원”과 “김죽파 가야금산조의 역사적 변천”에서 자세히 다루어져 악보와 음반을 통해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 김창조의 가락을 이은 한성기 산조에서 김죽파에게로 전수됨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위 두 논문에서는 김죽파 가야금 산조에 전수된 가야금 산조 1세대인 조사(祖師) 김창조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산조 2세대인 스승 한성기 가야금 산조가 김죽파의 삶의 변화와 함께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는지를 상세하게 담고 있어 김죽파 가야금 산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지침서의 역할을 한다. 아래의 김죽파의 생애와 김죽파 가야금 산조의 변화에 대한 설명은 위 두 논문에서 발췌하였다.

김죽파는 1911년 2월 11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부면에서 태어났다. 이후 8세 경부터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당시 권번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던 조부 김창조로부터 가야금을 배움), 11세 때 3년간 조부의 수제자인 한성기로부터 가야금(풍류, 가야금 병창, 가야금 산조)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이후 1926년 16세의 나이로 조선권번에 기적을 두고 1932년 22세에 결혼하기 전까지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였으며 이때에 김운선이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취입하기도 하였다.

이시기의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 1931년에 즁머리와 원머리 2면으로 녹음된 《김운선 가야금산조, Polydo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음반에 나타난 이시기의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 형성기라 할 만큼 스승인 한성기의 산조 가락을 많은 부분 계승하고 있다. 악장구성, 악장별 조구성, 조현법과 변청, 선율 등 많은 부분이 한성기의 산조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부분적이지만 병창선율을 삽입하거나 새로운 가락을 삽입한 형태도 나타난다.

결혼(1932년, 22세)과 동시에 김죽파는 권번과의 인연을 끊고 무대를 통한 음악활동을 한동안 접는다. 남편과의 사별과 동란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삶 등으로 적극적인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부산 피난 이후 1955년 서울로 돌아와 다른 유파의 명인들을 만나며 음악적 성숙도를 넓혀간다. 1968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전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978년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죽파 가야금 산조의 특징이 바로 이시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음악적 변화를 나타낸다. 성금연 가야금 산조의 휘모리와 김윤덕 가야금 산조의 단모리의 영향을 받아서 ‘세산조시'악장이 만들어졌으며 다른 유파에서 볼 수 없는 중모리의 우조계면 선율 등 한성기의 산조를 계승하던 결혼 전의 음악적 양상과는 달리 김죽파 산조의 굵직한 틀들이 하나하나 자리 잡혀가고 있었다.

1971년 채보된 김죽파 가야금 산조에서는 초기와는 달리 한성기의 진양조 시작선율을 비 김창조계 가야금 산조처럼 한 옥타브 아래로 연주하는 형태가 보이는가 하면 김종기, 강태홍, 김태문 등의 선율을 자신의 가락에 수용하여 구성한 형태도 보인다. 김죽파는 1956년에 심상건에게서 산조를 사사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겹청조현법과 세산조시의 변청이 나타난다. 청밑에 4도 아래음을 조현하여 저음역을 보강하고 심상건 산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변청을 수용하여 음악적 변화를 폭넓게 표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78년 문화재 지정이후 생을 다할 때까지 김죽파는 활발한 교육활동과 연주활동을 한다.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며 ‘휘모리'악장의 첨가와 새로운 창작선율을 구성하여 50여분이 넘는 대곡을 완성한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악장 구성(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은 이시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김죽파에 의하면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약 30분, 한성기는 약 35분여를 연주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에 비하면 그 가락을 전수한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 50여분이 넘는 대곡으로 시조(始祖)에 비하여 양적 분량이 약 두 배 가량으로 확대되었지만 김죽파의 60여년의 음악생활을 생각해보면 불과 30여분이 안돼는 곡이 추가되었다. 시간대비를 간략히 하면 1년에 30초의 선율이 추가된 꼴이다. 서양 속담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흔히 예술세계에서 남긴 업적과 훌륭한 예술작품의 시대초월성을 표현한 것이라 설명된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 표현은 서양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며 예술의 원 뜻 Art는 기술을 의미하며 ‘인생은 짧고 배워야할 기술은 많다'라는 원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김죽파의 가야금 산조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표현에 참 적절한 예이다. 60여년의 피나는 노력으로 30여분의 가락을 완성하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했으니 말이다.

분명히 김죽파 가야금 산조에는 김창조로부터 물려받은 한성기의 가락이 곳곳에 배어있고 또 틀을 이루고 있다. 물려받은 유산이 적체되지 않고 시 · 공간적인 배경에 따라 변화해 나아가는 것이 유파, 제, 바디와 같은 용어를 쓰는 전통음악 장르의 특징이다. 판소리나 산조가 이에 적절한 예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해진 방향도 정해진 귀착점도 없다. 단지 자신과 처절하게 싸워 이긴 예술가의 혼만이 지속적으로 추가될 뿐이다. 원조는 단순히 과거지사로 논의되어서는 그 참 가치를 얻기 힘들다. 원조가 진정한 원조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 시발점도 중요하거니와 시 · 공간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혹자는 산조가 본연의 변화형태를 잃었으니 이시대의 산조는 ‘산조'가 아니라 ‘죽은조'라고 말한다. 물론 산조는 허튼가락을 뜻하는 散調이지만 과거 유파나 같은 계보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던 모습을 그리워하는 푸념의 표현인 것이다. 물론 지금도 새로운 가락을 첨가하고 연주기법과 양식을 연구하며 노력하는 연주자들에 의해서 산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이 연주자들의 산조를 대하는 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산조를 향유하는 향유층의 감소와 시대적 음악 선호도의 변화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만일 지금도 산조가 전성기를 누리며 만인에게 인기를 받던 시대처럼 산조의 수용층이 두텁다면 아마도 음식점 간판의 무수한 ‘원조'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CD자켓에 ‘원조○○○산조'라는 말이 횡행할지도 모른다.

김죽파의 가야금 산조는 가야금 산조의 원조격인 김창조의 가락과, 이를 이은 한성기의 가락이 근간과 틀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김죽파의 60여년의 음악생활에서 고민하고 노력한 세월이 한음 · 한가락이 되어 담겨져 있다. 위 본문에서 언급한 김죽파 가야금 산조의 변화과정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원조 김죽파 가야금 산조'를 들어보면 그 맛이 더욱 새롭지 않을까 한다.

글: 이정엽 (국립민속국악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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