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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 Viva! Mozart

리차드 강 2012. 5. 20. 19:40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 Viva! Mozart

18세기 유럽은 ‘불멸의 천재’를 감당 못했다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35년 삶의 흔적 안타까워... 생활고에 시달린 빈 생활 10년 동안 12번이나 이사
`피가로의 결혼` 만든 `돔 골목길 5번지 시대`가 절정기... 베토벤·하이든도 방문

▲ 18세기 슈테판성당과 시민들의 모습. 모차르트의 시신은 1791년 12월 6일 화살표(←)의 시신보관소에 여러시간 방치되어 있었다.

빈의 겨울은 뼛속 깊이 춥고 변덕스럽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비, 진눈깨비, 눈을 번갈아 뿌리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락가락한다. 그날 늦은 오후 빈에는 짙은 안개가 끼어있었다.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인부들은 대여섯 구의 시체를 마차에 싣고와 구덩이에 내던졌다. 자루에 담긴 시신들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고 그 위에 흙이 덮여졌다. 1791년 12월 6일 오후 빈 교외의 공동묘지 생 마르크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 그렇게 행려병자의 시신처럼 파묻은 시체 중에는 불멸(不滅)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가 있었다.

그후 214년이 흘렀다. 모차르트가 묻힌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는 더 이상 교외가 아니다. 당시 모차르트 부인 콘스탄체와 몇 명의 친구들은 마차를 타고 1시간 걸려 이 공동묘지 입구에 도착했지만 지금은 버스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지난 11월 22일 오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기자는 공동묘지에 들어섰다. 공동묘지는 1784년부터 1874년까지 90년간 사용되었다. 공동묘지 정문에는 ‘모차르트 2006’과 관련된 장소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완만한 경사의 길을 100여m쯤 오르니 왼편에 ‘모차르트 묘지’가 보인다. ‘W. A. Mozart 1756~1791’. 이게 전부다. 흔한 묘비명도 없고 그 옆에 어린 천사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요절한 천재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돔골목길 5번지의 `피가로의 집`

빈시(市)는 60년 뒤 모차르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지를 파헤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모차르트 팬들은 모차르트의 어이없는 비참한 죽음 앞에 애통해 하고 묘비명조차 세우지 않은 18세기 빈 사람들의 처사에 분노한다. 21세기의 그들은 18세기의 빈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청천벽력 같은 존재 모차르트는 빈에서 35년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다. 1781년 봄부터 1791년 겨울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13곳에서 살았다. 모차르트는 빈의 20여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모차르트의 흔적은 대부분 빈의 한복판 슈테판성당을 중심으로 도보로 10~25분 거리에 펼쳐져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천재음악가는 절정의 10년을 보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754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최초로 제국의 심장부인 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빈의 인구는 17만5000명. 빈 인구는 1800년에 23만2000명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빈은 인구 20만의 도시였다. 2005년 빈의 인구는 200만명. 도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모차르트가 살았던 흔적들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곳은 라우헨슈타인가(街) 8번지. 병약한 몸으로 의뢰받은 ‘레퀴엠’을 작곡하다 미처 끝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그 집. 라우헨슈타인가 8번지는 빈 최고의 번화가 카른트너가와 인접해 있다. 모차르트 팬들은 가슴 아파한다. 말년의 모차르트가 얼마나 돈에 쪼들려 힘들어했는지를. 천재음악가의 비참한 마지막 나날을 지켜본 그 집이 있던 자리에는 빈에서 가장 화려한 스테플 백화점이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백화점 후문에는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사망한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망진단서에 기록된 그의 사인은 급성 속립성 발진. 입관은 프리메이슨단의 의식에 따라 두건이 달린 검은 외투가 입혀졌다.

그의 장례식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슈테판성당에서 치러졌다. 9년 전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에서 생의 마지막 의식이 초라하게 치러졌다. 성당으로 들어가서 왼편에 있는 십자가소성당. 모차르트의 시신은 이곳에서 약식 장례식이 끝난 뒤 성당 뒤편 시신보관소로 옮겨졌다.

그는 여기서 여러 시간을 이름 없는 이들과 함께 누워있었다. 모차르트가 누워있는 곳에서 돔(Dome) 골목길 5번지까지는 100여 걸음,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모차르트는 누워있으면서도 돔 골목길 5번지에서 보낸 아름다운 나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골목길도, 집도 옛날 그대로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4~1787년까지 3년여 살았다. 모차르트가 이 집 2층에 살면서 유명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고 해서 ‘피가로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모차르트 전문가이드 라이너 레훼브는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의 대성공으로 이곳에서 경제적으로나 명성으로나 가장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한다. 1995년 타임지가 지난 1000년의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선정한 곡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 아니었던가.

▲ `돈조반니`를 쓴 장소에 있는 부조

피가로의 결혼’을 쓴 1785년에 그는 피아노 5중주곡을 썼다. 평론가들은 1785년을 창작과 성찰에 있어 위대한 해라고 평가한다. 2층은 큰방 네 개와 작은방이 두 개나 되었다. 모차르트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상상력에 불이 붙을 때까지 방안을 중얼거리면서 왔다갔다 했다.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는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7살의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명성을 듣고 독일 본에서 14일간의 마차 여행 끝에 빈을 찾아온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모차르트를 만났고 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최고의 찬사를 했다. 동시대의 위대한 음악가 하이든 역시 이 집을 방문한다. 18~19세기 위대한 음악가 3인이 흔적을 남긴 집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21번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은 1967년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영화명이 별칭이 되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도를 든 사람들이 연달아 모차르트하우스 앞을 서성거린다. 2006년 1월 27일부터는 박물관 모차르트하우스로 문을 연다. 입장료는 9유로. 비록 비참한 말년을 보냈지만 모차르트가 이 집에 살면서 한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그래도 덜 미안하다.

모차르트는 돔 골목길에서 교외로 이사를 했다. 란트-하우프트가(街) 75~77번지. 모차르트가 1787년 4월부터 1787년 12월까지 9개월을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이 집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썼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한 이 공동주택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모차르트 얼굴이 벽에 부조(浮彫)되어 있다.

1788년 모차르트는 빈 교외의 집, 베링게르가 26번지에서 교향곡 39·40·41번을 비롯한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월세로 이 집에 들어왔다. ‘시내 나가기가 어렵지만 봄 여름 가을 동안 정원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풍광이 좋다’고 편지에 썼다. 지금은 지하철 2호선 쇼텐트역에서 내려 전차를 갈아타면 금방이다. 전차에서 내려 베링게르가를 걷고 있는데 눈발이 더 거세진다. 1788년, 모차르트는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 아닌가. 가장으로서 그의 인생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집으로 이사온 첫날밤 프리메이슨 동지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쓴다.

아시겠지만 분할대금을 받아서 살다보면 다음번 돈이 나올 때까지는 참 어렵거든요. 아니 생활해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요. 얼마간이라도 모아둔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역시 무일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이번에 호의를 베풀어주시면 저로서는 우선 급한 지출을 적당한 때에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은 지불을 미룰 수 있는 한 미뤄온 상태라 수입이 들어와도 바로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안좋거든요.”

▲ 모차르트 숨진 장소

모차르트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는 순간 눈발에 실려 들려오는 교향곡 선율을 들었다. 그것은 교향곡 40번 G단조였다. 기자가 40번 교향곡을 허밍하자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 역시 따라했다. 우리는 교향곡 40번을 읊조리면서 걸었다.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옛날 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자리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코시 판 투테와 교향곡 39~41번을 작곡했다’라는 안내판만이 반긴다. 돈을 구걸하는 비굴한 편지를 써야만 했던 그 손으로 모차르트는 어떻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그것도 단 10주 만에 쓸 수 있었을까. 그 앞에 서니 40번 G단조는 더 큰 볼륨으로 울려왔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전율이었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살아 있었다.

 

고향을 떠나 위대해진 모차르트

빈 서부역에서 잘츠부르크행 기차를 탔다. 열차표를 사니 317㎞의 거리라고 찍혀나온다. 18세기 잘츠부르크~빈은 마차로 6일이나 걸렸지만 21세기의 우리들은 3시간10분 만에 가는 거리다. 모차르트가 음악가로서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잘츠부르크와 과감히 결별을 선언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종교권력이 주는 안정된 삶을 거부한 채 빈에 온 것은 1781년. 빈에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며 황금기를 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생활하는 이런 상황은 그를 후대(後代)에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게 했지만 당대(當代)에는 비참하게 만들었다.

▲ 모차르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묘소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차를 타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가는 천재 음악가의 여정을 생각해본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는 종교권력의 권위주의에 숨막혀 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장 시절을 모차르트는 ‘군주 밑에서의 종살이’라고 표현했다. 모차르트는 요리사나 시종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푸대접을 받았고 대주교는 음악가 하인이 앞문으로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뒷문 출입을 명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당당히 앞문으로 출입했고 이것이 대주교의 미움을 사 궁정악장직에서 해고된다. 모차르트는 빈으로 온 직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제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밥을 빌어먹더라도 절대로 또다시 그런 군주 밑에서 종살이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잊혀지지 않을 모욕이었으니까요.”

35년 인생의 25년을 보낸 곳, 잘츠부르크. 이곳은 모차르트가 살았던 18세기와 거의 변함이 없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잘츠부르크 인구는 1만5000명. 특히 생가가 있는 구시가는 250년 전 그대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시가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인구는 15만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로 잘자흐강 건너편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는 유년의 학습기(1756~1774)와 작품 성숙기(1774~1781)로 구분되곤 한다. 유년의 학습기는 생가에서 살던 시절을, 작품 성숙기는 보통 ‘모차르트 저택’으로 불리는 마카광장 8번지에서 살던 때를 각각 말한다. 게트라이더 생가가 너무 비좁자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자흐강 건너편, 마카르트 광장의 집으로 이사왔다. 1774년 이후 이 집에서 모차르트 누나 난네를이 1784년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 눈을 감았다.

▲ 모차르트 생가(왼쪽)과 살던 집.

잘츠부르크 생가에서 만난 생과 사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50곡 이상을 작곡했다. 널리 알려진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하프너 세레나데, 바이올린 협주곡 K216 등이 있다. 이 집에서는 음악가 가족의 단란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모차르트가 뮌헨에서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780년 11월 15일)와 역시 뮌헨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1775년 1월 14일),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에게 보낸 편지(1787년 3월) 등이 있다. 모차르트 가족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이것이 결국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이 집에는 난네를이 쓴 일기장(1780년 9월)도 전시돼 있다. 난네를의 일기를 통해 18세기 생활상이 그대로 복원된다.

모차르트가 1780년 무렵 사용한 포르테(forte)피아노도 눈길을 멈추게 한다. 안내원은 “모차르트는 이 포르테피아노로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설명한다. 이 집에서는 모차르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게 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모차르트는 장난기가 많았고 실제로 언행이 천진난만했다. 종교권력이 개인의 사생활조차 간섭할 만큼 엄격했던 18세기의 사회 분위기에 비춰보면 모차르트는 별종으로 보였을 법하다. 이 집에는 일종의 표적 맞히기 게임 그림이 세 개가 붙어있다. 모차르트가 즐겨했던 놀이다. 그가 1777년 11월에 보낸 편지에서 묘사된 대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고 한다.

구시가의 300년 이상된 건물에는 전부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주교가 살았던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내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16~18세기 종교권력의 가공할 파워를 몸서리치게 체험하고도 남는다. 어린 모차르트는 이 성채에 갇혀 깊은 밤 무서움에 떨며 작곡하곤 했다.

생 피터스 교회는 모차르트가 1783년 C단조 미사곡을 처음으로 연주한 곳이다. 모차르트는 2층에서 직접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였던 모차르트는 미사곡 연주를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모차르트 흔적 찾기의 하이라이트는 생가(生家)에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아버지 레오폴트가 쓴 바이올린 교본을 보며 켰던 바이올린, ‘마술피리’를 작곡할 때 사용한 피아노 전신인 클라비코드(clavichord)도 모차르트 팬들의 발길을 오래 붙든다. 클라비코드에는 콘스탄체의 친필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기자는 생가의 전시물 중 ‘탄생과 죽음’이라는 코너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성당교구의 통계에 따르면 잘츠부르크에서 1751~1760년에 1795명이 태어났고 이 중 1071명이 열 살 이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 부모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다섯을 잃고 모차르트와 난네를만이 살아남았다. 영아 사망률이 60%에 달하던 시절에 모차르트는 가까스로 생존했다. 모차르트는 아홉 살 때 다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역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 중 두 아들만이 살았다. 이것을 보면 모차르트가 35년을 산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신의 섭리가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 평전’을 쓴 필립 솔레르스가 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해석을 내렸던 게 생각났다.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2005.12.31


그가 남긴 626곡, 영화로 다시 듣는다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아마데우스’의 교향곡 25번, ‘쇼생크 탈출’의 피가로의 결혼 등 배경음악으로 잘 알려져

▲ 영화 `아마데우스` (1984년작)

모차르트는 음악의 모든 분야에서 히트곡을 남긴 ‘전천후 작곡가’다. 댄스 음악으로 인기 차트 1위에 오른 뒤 곧바로 발라드를 쓰고, 무거운 록 음악을 선보였다가 다음 곡은 재즈풍으로 갈 줄 아는 작곡가다. 농구로 따진다면 어시스트와 슛뿐 아니라 리바운드와 골밑 싸움까지 능수능란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셈이다. 지금도 이런 음악인이나 스포츠 선수가 있다면 당장 천재나 신동으로 불리며 추앙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차르트가 더더욱 사랑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의 고전음악사를 돌아봐도 그렇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에는 아직 교향곡 같은 소나타 형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다. 교향곡이 꽃 피웠던 고전파 시기의 주요 작곡가들은 거꾸로 오페라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악성(樂聖)’ 베토벤조차 오페라는 ‘피델리오’ 한 편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 뒤 이어진 낭만파 시기에는 자기 전문 분야로 특화가 더욱 심해졌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대표적이다.

치우침 없이 오케스트라와 독주곡, 기악과 성악, 심지어 종교 음악까지 골고루 걸작을 남긴 작곡가가 바로 모차르트다. 그렇기에 ‘모차르트로 향하는 길’은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속의 장면에 흐르던 곡을 통해 모차르트로 가는 접근로를 살펴본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교향곡 25번

하인들은 식사를 들고 방문을 두드리지만 방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주인님,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가 다 먹겠어요.” 농담을 하지만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새나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피투성이의 노인이 이름을 외치며 쓰러진다.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장면. 작곡가 샬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죽음에 빠뜨린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긴박감이 넘치는 이 장면에서 삽입되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 1악장. 모차르트가 남겼던 41편의 교향곡 가운데 일부일 뿐이지만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는 관객의 뇌리에 박혀버린 멜로디다.

▲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년작)

음악팬은 보통 말러나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까지 근대와 현대를 잇는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에 열광하지만, 음악인들은 “너무나 투명하기에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더욱 연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90여명의 단원이 내뿜는 박력 넘치는 교향곡에선 연주 중간에 비교적 숨을 곳도 많지만, 40~50여명의 소편성으로 연주해야 제맛을 내는 모차르트의 교향곡에선 숨을 구석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식 번호가 붙어있는 41편의 교향곡에 곧바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CD로만 대략 19장 분량. 번호가 붙지 않은 관현악곡은 더 많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관현악이 흠뻑 무르익은 30~40번대의 중·후기 교향곡이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이 시기의 교향곡에는 유럽 각국의 도시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교향곡 31번 ‘파리’, 35번 ‘하프너’, 36번 ‘린츠’, 38번 ‘프라하’ 등이 대표적이다. 모차르트가 작품 발표나 연주를 위해 방문했던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도시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 작품부터 출발하면 좋다.

최후의 3편인 교향곡 39~41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걸작이다. 교향곡 41번에 붙어있는 별명은 로마 신화에서 최고의 신을 뜻하는 ‘주피터’.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녹음한 명(名)지휘자로는 브루노 발터, 칼 뵘,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이 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클라리넷 협주곡

▲ 영화 `쇼생크 탈출`(1995년작)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수상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캐런(메릴 스트립)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남편의 애정편력에 고통받는다. 농장일에서 보람을 찾으려는 캐런은 탐험가인 데니스(로버트 레드퍼드)를 만나며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이들이 아프리카의 대자연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탐험을 떠났던 데니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2개월 전의 작품인데도 구름 한 점, 티끌 하나 찾기 힘들 만큼 영롱하다. 피아노 협주곡 27곡, 바이올린 협주곡 5곡과 호른 협주곡, 바순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과 플루트 협주곡까지. 이 가운데는 정확한 작곡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곡도 있지만, 모차르트는 협주곡에서도 다양한 악기를 독주 주자로 등장시켰다.

27곡에 이르는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의 왕정을 휩쓸고 다녔던 인기 연주자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곡들이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됐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나 20번을 먼저 들으며 접근하면 좋다. 숨지기 직전까지 모차르트에 천착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의 음반을 피아노 협주곡의 명연주자로 꼽는다.

13세의 소녀로 카라얀에게 발탁된 이후 정상의 자리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는 모차르트 250주년을 맞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5곡)을 최근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 오페라 `마술피리`의 팸플릿.

은행 간부 앤디(팀 로빈스)는 아내를 죽인 혐의로 두 번의 종신형을 받고 쇼생크 교도소에 수감된다. 재능을 살려 간수에게 세금 감면에 대해 조언을 해준 뒤, 폭력적인 감옥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교도소에 구색을 갖춘 도서관을 만들고, 도서와 음반을 사회로부터 기증 받는다.

어느날 기증 받은 레코드 가운데 끼어있던 음반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앤디는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이 음반을 튼 뒤, 마이크를 통해 교도소 전체로 방송해 버린다. 동료 죄수들은 “이탈리아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쇼생크는 모두 자유를 느꼈다”며 행복해 한다. 앤디는 2주간의 독방 생활을 벌로 받게 된다.

죄수들의 말문을 막아버린 이중창이 ‘편지의 이중창’. 알마비바 백작의 바람기에 고통받는 백작부인 로지나와 시녀 수잔나, 두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름다운 이중창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도 자유에 대한 염원과 아름다운 음악이 어루어진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런데 왜 하필 ‘피가로의 결혼’일까. 오페라의 줄거리를 훑어보면 꽤 복잡한 복선이 영화에 깔려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백작 부인과 수잔나는 백작을 유인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 이중창을 부르며 편지를 쓴다. 오페라 종반부에 편지를 받고 수잔나와의 밀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알마비바 백작은 여인에게 반지를 끼워주지만 알고보니 수잔나의 옷을 입은 백작부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반발과 귀족 사회에 대한 정치 풍자가 유쾌하게 버무려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감옥 생활에 적응하려던 앤디는 자신의 무죄 입증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교도소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고 멋지게 탈출한다. 핍박받던 자가 핍박하는 자를 조롱하는 영화의 내용은 오페라와 꼭 닮아있다. 영화에서도 극적 반전을 암시하는 대목이 바로 모차르트의 이중창으로 처리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는 당대 시대에 대한 유쾌한 풍자와 반전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 때문에 시대 배경을 현대로 바꿔도 별 무리없이 즐길 만하다.

▲ 파파게노골목에 있는 빈극장 현관의 `마술피리` 조형물.

대표적인 오페라 연출가가 피터 셀라스. 이 대담무쌍한 연출가는 ‘피가로의 결혼’의 배경을 20세기 후반 뉴욕의 트럼프 타워에서 일어나는 남녀간의 밀고 당기기로 바꿔버린다. 유럽의 전설적인 호색한이었던 ‘돈 조반니’는 할렘의 흑인 악당으로 변신한다.

모차르트 오페라는 ‘다 폰테 3부작’으로 불리는 중·후기작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대본을 쓴 작가. 요즘 대중가요 식으로 따지면 다 폰테는 작사가, 모차르트는 작곡가인 셈이다. 모차르트가 그와 짝을 이뤄 협업한 작품으로는 ‘여자는 다 그래’로 흔히 번역되는 ‘코지 판 투테’와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가 유명하다.

전곡을 들으려면 2~3시간에 훌쩍 이르기 때문에 처음엔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접근하는 것도 방법. 유명 아리아와 서곡으로 작품의 맛을 익힌 뒤, 용기를 내어 전곡 영상물(DVD)이나 음반에 도전하자. 처음엔 아리아들이 귀에 먼저 들어오지만 모차르트 오페라의 정수는 ‘중창’에 숨어있다. 등장 인물들이 제각각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대사와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데 모차르트 오페라의 묘미가 깃들어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 한국에서는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 ‘지옥의 복수심이 내 가슴 속에 끓어오르고’로 너무나 유명하다. 초절정 기교가 필요한 ‘밤의 여왕’ 역을 가장 잘 소화하는 소프라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조수미다.

모차르트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는 칼 뵘, 에리히 클라이버 등이 유명하며 최근에는 작품 당시의 연주 방법으로 원전(原典)의 맛을 살리는 ‘정격 연주’가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지휘자 르네 야콥스의 음반이 대표적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 ‘레퀴엠’

▲ 영화 `엘비라 마디간` (1967년작)

다시 영화 ‘아마데우스’. 질투에 사로잡힌 샬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인 ‘레퀴엠’을 쓰라며 돈을 건넨다. 실제로 모차르트에게 이 작품을 위촉한 주인공은 아내의 기일에 맞춰 연주하려고 했던 발제크 백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눈물의 날(Lacrimosa)’의 음표를 새겨넣던 붓끝은 끝내 멈추고 만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이 바로 ‘레퀴엠’이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스스로를 위한 진혼곡으로도 해석된다.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 앞에는 보통 ‘K’라는 약호가 붙는다. 나중에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번호를 붙인 쾨헬의 이름을 딴 것. 하지만 쾨헬 이후에도 많은 작품들이 발견됐다. 모차르트의 최후작인 레퀴엠은 K.626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해석되는 ‘키리에(Kyrie)’부터 ‘분노의 날’로 불리는 ‘디에스 이래(Dies irae)’, ‘눈물의 날’까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

음반사 EMI는 최근 100곡의 유명 곡을 음반으로 묶어서 저렴한 가격에 펴내는 ‘100 시리즈’를 발매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모차르트가 ‘베스트 모차르트 100’이라는 음반명으로 포함돼있다. 그만큼 장르별로 히트곡이 많다는 뜻도 된다. 이 같은 발췌 음반을 통해 모차르트 음악의 윤곽을 파악한 뒤, 교향곡·협주곡·관현악곡·독주곡·실내악오페라·성악곡 등 친숙한 장르부터 출발하면 좋다.

모차르트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커다란 웅덩이를 곡의 곳곳에 파놓았다. 처음부터 섣불리 전곡(全曲)에 도전하는 건 시간과 정력 낭비. 어쩌면 발췌 음반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모차르트일지 모른다.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danpa@chosun.com)


성공비결은 ‘유목민 정신’과 ‘블루 오션 개척’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어릴 때부터 순회연주 통해 유럽 각국의 문화 흡수,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음악 만들어내

▲ 모차르트 일가. 왼쪽부터 누나 난네를, 모차르트, 부친 레오폴트.

아홉 살에 교향곡을, 열두 살에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해 불과 서른다섯 해를 살면서 626개의 번호 붙은 작품을 비롯해 거의 1000여곡을 남긴 천재. 기악과 성악, 종교음악과 오페라를 불문하고 클래식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이룩한 빛나는 성과.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 산골 마을 잘츠부르크를 1920년 제1회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현대음악 축제의 발상지로 만들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람객과 최정상의 아티스트를 불러모으는 매력. 심지어는 ‘모차르트 효과’ 학설까지 만들어낸 작곡가.

과연 모차르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유목민 정신’과 ‘블루오션의 개척’이다. 그는 당시에 쉽지 않던 순회 연주여행을 통해 어릴 때부터 유럽의 음악적인 특징과 성과를 한몸에 익힐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개발하고 다져놓았다. 모차르트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인 것만은 아니며, 18세기 후반 유럽에 만연한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계몽의 물결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 장차 도래할 독일 낭만주의의 시대를 개척한 준비된 음악가였다.

교회나 절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향후 작곡가들이 일하는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빈에 자리잡았던 만년(1781~1791)에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고, 사적·공적 ‘아카데미’(예약 음악회)와 위촉에 의한 것이거나 흥행을 위한 작곡 등에 의해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적절한 관용을 통해 피지배 세력의 반감을 완화시키려 했던 지배계급은 증가하는 오락과 문화 수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곧 프리랜서 작곡가가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시켰고, 모차르트는 그 초기에 가능성을 시험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 첫 수혜자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노마드(nomad)’ 모차르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의 유목민 정신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교육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선배인 바흐가 평생 독일 중부의 안할트 작센 지방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나, 헨델이 주군(主君)의 명을 어기고 영국에 머물다가 뒷날 그가 영국의 조지 1세가 되자 화(禍)를 면하기 위해 ‘수상 음악’을 작곡했다는 등의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 이들은 온 유럽의 수도를 자신의 안방처럼 드나들던 이탈리아 음악가들과는 사뭇 다른 처지였다.

그러나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시골에서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한 레오폴트의 신념과 음악을 좋아하고 너그러운 성품이던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백작의 배려로 어린 볼프강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연주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에 시작된 여행은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요즘이라도 좀처럼 꿈꿀 수 없는 다채롭고 강도 높은 것이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영혼을 깨운 이탈리아 여행

▲ 18세기에 실제로 쓰였던 마차 여행용 집꾸러미.

부자(父子)는 1762년 뮌헨과 빈을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3년 간의 장정(長征)을 시작한다. 이때 지나간 도시는 다음과 같다.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슈베칭겐, 프랑크푸르트(괴테와의 유일한 만남), 브뤼셀, 파리, 런던(바흐의 막내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교류), 겐트, 로테르담, 리옹, 제네바, 로잔, 베른, 취리히, 빈터투어, 울름 등.

이 초기여행은 흔히 곡마단 원숭이의 공연에 비유되며 뒷날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들의 돈벌이 행각을 잇따르게 했다.(그 최대 희생자는 곧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다.) 단순히 베르사유나 쇤부른과 같은 유럽 최고의 궁전과 드높고 웅장한 교회를 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이동 중에 마차 창 밖으로 보았을 천혜의 자연과 계절의 변화, 기착지마다 겪었을 다양한 서민의 인생사는 음악 이면(裏面)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의 성과가 어린 모차르트의 감수성에 얼마나 심대하게 작용했을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하물며 각국의 언어 습득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모차르트의 진정한 음악교육은 괴테가 그랬듯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1768년 빈을 방문해 첫 오페라인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을 작곡했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잠시 머문 모차르트 부자는 첫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밀라노에서 만난 작곡가 잠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神父)에게 최첨단 음악을 전수받는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어린 모차르트는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K87), ‘알바의 아스카니오’(K111), ‘루치오 실라’(K135)를 차례로 작곡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오페라의 종주국에서 배운 것을 체화(體化)한다.

유목민 모차르트의 청년기를 결산하는 마지막 수업 여행은 1777년에 이루어진다. 이때는 그 전까지 남편과 아이들(볼프강과 그의 누이 난네를)을 떠나보내고 ‘기러기 엄마’ 처지로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던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가 동행한다. 어머니와 함께 떠난 모차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보유한 독일 만하임 궁전을 방문해 그곳 음악가들과 교류한다. 이어 파리를 찾은 모차르트는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심대한 시련인 모친의 사망을 맞게 된다.

상심하여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음악에 대한 이해도, 인정머리도 없는 새 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임명장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하고 하인처럼 부린다. 예속 예술가로서 겪게 되는 모멸감의 시작이었다.

모차르트를 ‘한때 잘츠부르크에 살던 반짝한 작곡가’가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클래식 음악의 아이콘’으로 만든 계기는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K366)의 작곡이다. 뮌헨의 사육제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한 이 작품은 그곳을 방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귀족 판 스비텐 남작의 눈에 띈다.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남작의 추천과 주교를 견제하려는 계몽군주 요제프 2세의 뜻이 맞아떨어져 모차르트는 마침내 고향을 떠나 빈에 정착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은 이 1781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791년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영구(永久)한 음악의 수도로 발돋움하게 된다.

 

유랑의 연속, 유럽음악의 총결산

▲ 모차르트에 영향을 준 요셉 하이든(1732~1809)

이토록 모차르트의 인생은 잠시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유랑의 연속이었고, 그의 작품은 당대 유럽이 이룩한 다양한 시도의 총결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재가 시대의 반영이라 해도 ‘그때 그곳’에 모차르트가 없었더라면 베토벤의 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모습도 상당히 다른 양상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통합자로서 모차르트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모차르트가 진입한 ‘블루오션’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왜 현대 작곡가는 모차르트처럼 곡을 쓰지 않는 거야?”라고 말할 만큼 그의 작품은 동서양 연령층을 불문하고 쉽고 기분좋게 이해된다. 그러나 오늘날 귀를 즐겁게만 하는 모차르트의 곡들도 작곡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18세기 무렵 독일 대부분 궁정악단의 요직은 이탈리아 음악가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알프스산맥 이남(以南)의 것이 진정 선구적인 것이고 귀감으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심지어 레오폴트 모차르트조차 그토록 꿈꾸던 악장직(職)을 평생 이탈리아 연주자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어쩌면 그가 신동인 아들을 데리고 평생 떠돌았던 것도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좌절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토록 유럽 전역을 주름잡은 이탈리아 작곡가들도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모차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차르트의 유랑 정신이 진정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수업여행을 통해 얻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의 앞선 양식과 형식에 독일 정신을 접목했다는 점이다. 독일은 오랜 세월 문화지체에 빠져있었지만, 18세기 중반에 들어 문예사조 전반에 걸쳐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레싱과 헤르더에 이어 젊은 괴테가 눈을 뜨던 시기다. 모차르트는 유럽 음악계에서 미개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독일의 정신과 가치를 부각시킨 진정한 유목민인 것이다. 그러면 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모차르트는 자신이 배워온 신문물을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장르 자체에 혁신을 꾀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교향곡은 연주회나 오페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보조수단이 아닌 진정한 예술적 실체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바겐자일, 반할 등이 시도했던 바로크 양식과 소나타 형식의 결합을 적극 받아들여, 교향곡의 3악장 미뉴에트(minuet, 4분의3 박자의 춤곡)에 트리오를 삽입한 4악장으로 구성을 확립했고, 오보에와 호른 외에 플루트와 바순, 트럼펫과 팀파니를 편성에 추가했다. 무엇보다 하이든의 단조 교향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모차르트의 표현의 깊이를 말할 수 없이 깊게 만들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작곡한 교향곡은 모두 여섯 편으로, 피날레를 향해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건축적이고 조화로운 양식은 진정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 덕분에 향후 독일의 교향곡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어느 작곡가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루지 못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모차르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각 가정과 살롱, 음악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기를 살았다. 이전의 쳄발로에 비해 풍부한 셈여림의 표현이 가능해졌고, 소나타 양식을 구현하고 명인기(名人技)를 가진 연주자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악기가 곧 피아노이며, 모차르트는 평생 이 악기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그가 남긴 30여편(다른 사람 곡의 편곡 포함)의 피아노 협주곡은 독주 피아노와 관현악이 긴장과 융합을 거듭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대 교향악적인 협주곡의 모태가 된다. 바로크 시대 빠른 두 악장 사이의 경과구 역할에 그쳤던 느린 악장을 중요시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2악장 ‘로망스’나 영화 ‘엘비라 마디간’으로 유명한 21번의 2악장 등은 가깝게는 베토벤, 멀리는 말러의 느린 악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피아노 협주곡에 등장하는 관악 합주(하르모니무지크)는 당시 빈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의 오페라 속 등장인물들이 엮어 내는 앙상블과 같이 아기자기하다.

 

미지의 시장 ‘국민 오페라’ 개척

▲ 18세기 빈 교외의 모습.

무엇보다 모차르트가 개척한 새로운 블루오션은 ‘국민 오페라’라는 미지의 시장이었다. 그는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 음악이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진정 새로운 독일의 양식을 심고자 노력했다. 과거 신화와 영웅이 대부분이던 오페라의 소재는 그에 의해 시민사회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장황한 아리아와 형식적인 레치타티보(오페라에서 대사로 이뤄진 부분)가 주(主)를 이루던 음악은 중창으로 된 앙상블의 확대로 재편되었다.

실내악에 남긴 업적 또한 괄목할 만하다. 모차르트는 드물게 현악 5중주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여섯 편의 현악 5중주는 1번을 제외한 모두가 빈 시절에 씌어졌다. 모차르트는 이 영역에서 125개의 현악 5중주를 남긴 보케리니를 모델로 삼았다. 그와 다른 점은 편성에 있어 첼로가 아닌 비올라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악 4중주에서 시도된 선율의 응집력과 유연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 장르의 가치는 베토벤도 아닌 슈베르트의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다시 평가되니 모차르트의 앞선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남긴 스물세 편의 현악 4중주 중 빈에 정착한 뒤 남긴 열 곡은 궁핍한 생활 속에 씌어진 보석 같은 예술이다. 특히 하이든의 Op33을 듣고 감동해 작곡했고, 그에게 헌정된 ‘하이든 사중주’ 전6곡은 고전주의 소나타 양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하이든은 이 곡을 들은 뒤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전한다.

“성실한 인간으로 신 앞에서 맹세코 말하지만 당신의 자식은 제가 직접, 또는 평판으로만 알고 있는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훌륭한 감각과 매우 뛰어난 작곡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뻘되는 하이든과 나눈 우정은 모차르트의 인생 속에서 무척 예외적인 요인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의 자신감은 당대 많은 평범한 예술가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공(公)의 악장으로 매여 있었던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모차르트는 그가 간 길이 대부분 처음이 되었던 프리랜서 예술가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무시한 철부지 어린애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당시 유럽 상류층에 파고들었던 프리메이슨 결사의 일원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세 석공(石工)들의 모임에서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모임이 일설처럼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독립 등의 산파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모차르트가 이 결사에 가입해 승격을 위한 관문을 거쳤음은 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직인(職人, Gesell)’의 모임인 ‘사회(Gesellschaft)’라는 오케스트라 속에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만년의 오페라인 ‘마술피리’에 잘 녹아 있다.

통과의례를 통해 성숙한 시민이 되고자 했던 모차르트에게 시대는 너무 가혹했던가? 궁핍한 프리랜서의 삶으로 일관하다 비참하게 가버린 천재. 빈에서의 10년이 조금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기대감은 훗날 베토벤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1792~1868)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위장한 모차르트가 뒤에서 조종한 꼭두각시였을지 모른다는 그럴 듯한 픽션을 낳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토록 모차르트는 19세기에 만개할 모든 음악 장르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또한 전속의 개념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예술적 충동에 생계를 맡긴 최초의 예술가였다. 모차르트는 그의 듣기 편한 음악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가도 그 예술의 가치가 마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이다. 2006년 그의 탄생 250주년이 가고 나면, 오래지 않아 2020년 잘츠부르크 축제 100주년이 또 한번 그를 기리고 찬양할 것이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hanno21@hanmail.net)


“모차르트는 우주의 우연이 낳은 천재”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모차르트 전문가 이윤국 교수... “관객을 밀고 당길 줄 아는 놀라운 심리가”

▲ 모차르테움의 이윤국 교수

“오페라 ‘돈 조반니’ 가운데 ‘카탈로그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이 곡은 힙합(hiphop)이고 랩(rap)입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모차르트 전문가인 지휘자 이윤국(52)씨의 말투는 경쾌하고도 단호했다. 극중 돈 조반니의 시종인 레포렐로가 부르는 아리아 ‘이게 내 주인이 사랑한 여인들의 명단’은 흔히 ‘카탈로그의 노래’로 불린다. 이탈리아에서 61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 100명, 터키에서 91명 등 돈 조반니가 농락한 여인들의 숫자가 운율을 타고 노랫말로 적나라하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지휘도, 연주도 랩처럼 경박할 만큼 흥겹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음악 인생은 모차르트와 떨어질래도 떨어질 수 없다. 13세 때 미국 뉴욕으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 과학고를 졸업한 이씨는 윌리엄스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과학도 출신의 음악가인 셈.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학교에서 지휘와 작곡을 수학한 이씨는 모교(母校)인 모차르테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모차르트 전문가가 말하는 모차르트의 매력은 뭘까. “개인적으로 우주의 우연을 믿지 않지만, 딱 한 번의 우연이 있었다면 모차르트의 탄생이라고 생각해요. 레오폴드 모차르트라는 당대의 음악가를 아버지로 뒀던 집안 배경부터, 어려서부터 유럽을 돌아다니며 연주활동을 했던 재능까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음악인입니다.”

전문가치고는 상투적인 정답을 늘어놓는 것 아닐까?

“지금은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매일 들을 수 있으니 그의 천재성을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당대의 2류 작곡가와 한번 비교하면서 들어보세요. 듣는 이와 밀고 당길 줄 아는 놀라운 심리전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이 천재 작곡가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남아있을까. 이씨는 “아직 많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작곡을 할 때 늘 ‘1번 연주’의 효과를 노렸습니다.”

무슨 뜻일까. “당시엔 음반도, 방송도 없었어요. 콘서트에서 듣는 대부분의 음악은 신곡이었습니다. 따라서 단 한 번만 들어도 청중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음악적 효과를 계산하며 세심하게 곡을 만들어나간 거지요. 청중은 모차르트의 콘서트에 앞서 ‘오늘은 또 무슨 곡일까’라고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이씨는 모차르트가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부터 세레나데까지 모차르트가 얼마나 많은 경음악(輕音樂)이나 잔치용 음악을 썼는지 아십니까. 교향곡과 협주곡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실제로도 귀족보다 당대의 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때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얘기가 모차르트 효과의 핵심이다. 사실일까?

“지능지수를 올릴 수 있다는 속설은 믿지 않아요.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수학적이며 논리적이기 때문에 뇌를 한번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묵은 찌꺼기를 씻어주는 역할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은 클래식 음악이 고전(古典)이지만 당시엔 유행 음악이었다”면서 “당대의 음악을 당대의 방식으로 해석할 때 우리의 현대음악에 대한 힌트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이씨는 피아노 협주곡 27곡이야말로 작곡가의 인생이 녹아있는 ‘음악 자서전’이자 모차르트로 다가갈 수 있는 ‘접근로’라고 했다.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모차르트의 변화를 모두 느낄 수 있어요.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됐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에선 달콤함을, 피아노 협주곡 20번에선 대조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지요.”

1992년부터 잘츠부르크 캄머 필하모니의 창단을 주도해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씨는 ‘모차르트 해’에 폴란드, 프랑스 등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잘츠부르크 캄머 필하모니와 함께 초청받아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다.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danpa@chosun.com)


빈과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특별전시장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첫 친필 악보부터 미완성 유작 `레퀴엠`까지 일반에 공개... 2006년 일년내내 각종 전시회 열려

▲ 새로 단장한 잘츠부르크 박물관.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생애 첫작품(오른쪽)이 일반에 최초로 공개된다.

2005년 11월 22일 오후 6시 빈 중심가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2층 강당. 오스트리아의 각계 명사 300여명은 미동도 없이 한 시간 동안 행사를 지켜보았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2005년 11월 23일 모차르트의 미완성 유작 ‘레퀴엠(Requiem)’ 실물 악보를 일반에 공개하기에 앞서 각계 인사를 초청해 공개행사를 치렀다.

행사가 끝난 뒤 드디어 레퀴엠 악보를 보는 시간. 레퀴엠의 장엄한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초청받은 인사들은 줄을 서 진공처리가 된 유리상자 안에 든 원고를 살펴보았다. 레퀴엠 전문 해설가가 옆에 서서 수없이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질문에 답했다.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작곡하면서 라틴어로 썼는데, 유리상자 뒤편의 벽면과 유리상자 앞 관의 뚜껑에는 라틴어 원고 일부를 적어놓았다.

‘REQUIEM AETERNAM DONA ELS DOMINE ET LUX PERPETUNA LUCEAT ELS’(영원의 진혼곡은 사람들에게 주님을 주고 영원의 빛은 그들을 비추리니).

알려진 것처럼 레퀴엠은 모차르트 사후 오랜 세월 소유권 분쟁을 겪어야 했다. 모차르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죽자 그의 비서 프란츠 쥐스마이어가 마무리한 게 레퀴엠이다. 실물 악보는 부분 부분 나뉘어 각기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합스부르크제국 도서관이 1831년과 1833년 각각 부분 원고를 입수했고, 1838년 마침내 완전한 레퀴엠 원고를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과 이곳에 전시중인 레퀴엠 악보의 일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2006년 1월 29일까지 레퀴엠 원고를 일반에 공개한다. 도서관 측은 실물 악보를 입수하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고 어떻게 하여 레퀴엠 마지막장의 귀퉁이가 떨어져나가게 되었는지도 밝히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는 의뢰받은 장송곡 ‘레퀴엠’을 쓰다 미완성의 상태로 세상을 떠나 가장 비극적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모차르트 관련 전시회는 이렇게 레퀴엠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2006년이 아니면 평생 못 볼 모차르트 관련 전시회는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진혼곡 악보 공개를 시작으로 그 장엄한 서막을 올렸다. 물론 국립도서관에 레퀴엠 악보만이 전시되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1쇄본을 비롯해 모차르트의 역사적인 자료들이 전시된다. 또다른 모차르트 전시회는 빈 중심가의 박물관 알베르티나(ALBERTINA)에서 펼쳐진다. 전시회 이름은 ‘모차르트-경이를 체험한다’. 모차르트 연구로 세계적 명성이 높은 ‘다 폰트 인스티튜트’가 제공하는 이 전시회는 모차르트가 살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화려한 시대로 돌아가게 한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기의 로코코, 고전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초기 낭만주의운동까지 18세기의 예술, 문화, 패션, 과학, 도덕, 성, 이상 등이 복원된다. 또한 모차르트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된다. 모차르트가 입었던 옷도 전시된다. 알레르티나 박물관 모차르트 특별전은 2006년 3월 17일부터 9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슈테판 성당 뒤편의 돔 골목길 5번지 모차르트하우스는 1월 27일 박물관으로 문을 연다. 모차르트하우스는 3개 층이 전부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모차르트가 빈에서 작곡가로서 독창적인 역량을 보인 시기에 르트가 살면서 작곡했던 생활환경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3층은 모차르트를 오페라 작곡가로서 집중 조명한다. 4층에서 방문객들은 모차르트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개인적인 환경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이 펼쳐진다. 모차르트하우스는 항구적으로 전시되는데, 개관과 함께 빈 최고의 명소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빈 모차르트 해’ 조직위원회는 매년 18만명이 이 박물관을 관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잘츠부르크의 ‘비바 모차르트’

▲ 알베르티나 박물관.

이제 모차르트가 1781년까지 살았던 고향 잘츠부르크로 가보자. 먼저 2006년에만 볼 수 있는 전시회는 ‘비바(Viva) 모차르트’가 있다. 2006년 1월 27일부터 2007년 1월 7일까지 공개된다. ‘비바 모차르트’는 레지덴츠 광장의 SCAM 신관, 잘츠부르크 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비바 모차르트’의 최고 볼거리는 모차르트가 최초로 작곡한 곡(K. 1)의 친필 악보.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 피아노의 전신인 하프시코드 작품으로 작곡했다. 모차르트 생애 첫 번째 악보가 일반에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음악 신동 모차르트를 가장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는 전시물이다. 2006년이 아니면 또 언제 공개될 지 알 수 없다. 이 친필 악보는 전시회가 끝나면 지하 저장고로 들어가 보관된다.

‘비바 모차르트’는 이와 함께 다양한 멀티미디어쇼로 바로크시대를 재현한다. 무도장에서는 바로크시대의 옷을 입고 바로크음악에 따라 춤을 추고, 바로크시대의 음식과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또한 18세기 모차르트가 즐겨했던 다트게임도 해볼 수 있다. 잘츠부르크 박물관을 구경하다 힘들면 테라스로 나가 커피를 마시자. 잘츠부르크 성당 사이로 호엔잘츠부르크 성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이 끝내준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 게트라이더 9번지에서도 특별전이 일 년 내내 펼쳐진다. 모차르트 생가의 특별전은 그의 생애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여준다. 특별전은 그의 전생애를 사계(四季)로 나눠 묘사된다. 잘츠부르크의 유년시절(12월 5일~3월), 유럽 전역 여행(4~6월), 일자리를 찾아서(7~10월), 빈에서의 시간들(10~11월)이다. 이 전시회는 미국의 저명한 감독이자 무대 미술가 겸 디자이너인 로버트 윌슨이 설계하고 연출했다.

잘자흐강 건너편 마카르트광장의 모차르트 저택에서는 베로나 시절의 모차르트 초상화가 특별 전시된다. 1770~1772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로나 볼로냐 등을 여행하며 음악을 공부했다. 개인이 소장하는 초상화 ‘베로나의 모차르트’는 2006년 1월부터 3월까지만 일반에 공개된다.


빈과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특별전시장

모차르트 2006’을 기획한 사람들
“관련행사 수익금 중 일부로 모차르트 펀드 조성 신인 음악가 지원”

▲ 프란츠 파타이.

‘빈은 천재를 축하한다’‘잘츠부르크는 천재를 축하합니다’.

지금 빈과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축하행사로 흥분해있다. ‘모차르트 2006 빈’을 주관하고 있는 인물은 프란츠 파타이 조직위원장. 1987년부터 문화예술 분야에서 조직ㆍ기획으로 활동해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는 인물이다. 한국에도 유네스코 음악협력 일로 세 차례 방문한 바 있다. ‘모차르트 2006 빈’ 기획은 2003년 12월부터 시작했다. 파타이 조직위원장은 빈에서 모차르트 250주년을 축하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빈은 세계적인 음악도시다. 모차르트는 여기서 마지막 10년을 살다 죽었다. 우리는 음악과 음악인과 음악 기반시설에 투자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모차르트는 250년 전에 태어났다. 우리는 250년 전의 시대와 다리를 놓고자 한다. 모차르트라는 음악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음악 신동들은 어떻게 되고 있으며 음악가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은 어떤가? 젊은 음악가를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가?”

‘모차르트 2006 빈’은 오페라극장, 뮤지컬극장, 박물관, 음악홀 등이 기획해 만들어낸 프로그램을 통합 조정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모차르트 2006 빈’은 2006년이 지나면 모차르트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파타이 조직위원장은 “모차르트 관련 행사로 팔리는 티켓 금액의 1%를 적립해 조성된 자금으로 신인 작곡가, 현대 음악인을 지원할 것”이라면서 “그 금액이 얼마가 될지는 사실 나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빈에는 여러 위대한 음악가가 살았는데, 왜 유독 모차르트냐”고 묻자 파타이 조직위원장은 이런 대답을 했다.

▲ 잉게 보르딜.

“베토벤은 천국으로 갔지만 모차르트는 천국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35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곡을 쓴 음악가는 역사상 없었다. 요즘도 그렇게 작곡해내는 음악가는 없다.”

‘모차르트 2006 잘츠부르크’ 조직위원회는 1999년 태동했다. 주정부 공무원이 혼자 사무실을 열고 하나씩 조직을 시작했다. 그가 현재 사무총장으로 있는 잉게 브로딜이다. 브로딜 사무총장은 “개념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면서 주정부와 시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냈다”고 말한다. 그는 “잘츠부르크는 빈과는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경쟁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모차르트 고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빈과 잘츠부르크는 각기 특색에 맞게 ‘모차르트 2006’ 행사를 따로 준비했지만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마케팅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두 도시를 묶어서 함께 하고 있다.

‘모차르트 2006 잘츠부르크’ 조직위원회 직원은 모두 5명. 여기서 극장들이 각기 개발한 프로그램을 조정하고 이들을 한데 모아 달력과 공식 모차르트 매거진을 제작했다. 로고는 국제공모전을 통해 영국 펜타그램사(社)의 작품을 선정했다.

브로딜 사무총장은 “2006년 동안 잘츠부르크에서 하루 이상 자고가는 방문객이 2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한다. 그는 2006년이 지나면 이제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도시로 세계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 모차르트 관련 정보 사이트

www.mozart2006.net / www.mozarteum.at / www.bestofmozart.info / www.salzburg.info / www.wienmozart2006.at / www.vienna.info / www.theater-wien.at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오스트리아는 지금 '모차르트 세일' 중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모차르트 초콜릿에 모차르트 커피, 아마데우스 치즈... 브랜드 가치, 오스트리아 전체와 맞먹어
"2006년은 모차르트 해" 빈·잘츠부르크 새단장하고 각종 행사 2600여개 준비 "지구촌 축제로"

▲ 빈 중심가 서점 진열장의 모차르트 관련 서적들.

지구촌 가족이 인종ㆍ국적ㆍ연령ㆍ성별에 관계없이 열광하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똑같은 어법으로 지구촌 가족이 인종ㆍ국적ㆍ연령ㆍ성별에 관계없이 매일 듣는 음악은 단연 모차르트다.

2005년 11월 어느 날 기자가 건 상대방의 휴대전화에서 통화대기음이 흘러나온 것은 아홉 통. 그런데 아홉 통의 통화대기음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두 곡이었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Eine Kleine Nacht Musik)와 교향곡 40번이었다.

천재 모차르트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FM 라디오가 아니더라도 영화음악에서, 대형서점에서, 피자집에서, 큰 건물의 로비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18세기 인물인 모차르트가 쓴 작품은 19세기와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하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떠다닌다.

2006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태(胎)를 묻은 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1756년 1월 27일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바로 아래 게트라이더 골목길 9번지 노란색 집에서 태어난 모차르트.

▲ 잘츠부르크 공항안에 있는 쓰레기통 표면.

이제 오스트리아에서 모차르트는 귀로 듣는 것을 넘어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은 5감각(感覺)으로 모차르트를 느끼고 즐긴다. 보잘 것 없는 쓰레기통의 뚜껑에도 모차르트의 유명한 프로필(옆얼굴)을 넣어 디자인했고 열쇠구멍에도 그의 옆얼굴을 옮겨놓았다.

오스트리아는 2006년을 ‘모차르트 해’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범국가적으로 준비해왔다. 탄생 250주년 축제의 중심지는 빈과 잘츠부르크다. 빈과 잘츠부르크 시내를 걸으면 모차르트가 넘쳐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해’를 위해 도시 전체를 개조하는 데 7000만유로를, 빈은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3000만유로를 각각 투입했다.

▲ 모차르트 기념우표

잘츠부르크 주정부와 시 당국은 잘츠부르크를 대표하는 축제극장을 새롭게 리노베이션하는 데 2906만유로라는 거액을 들였다. 새해 6월 23일부터 8월 31일까지 벌어지는 음악사상 유례가 없는 대사건을 위해서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22곡, 뮤지컬 코미디 등 가극 작품이 모두 단 6주 동안 이 축제극장에 올려진다. 2006년 한 해 동안 빈에서만 모차르트 관련 공연 등 각종 행사 2600여개가 열린다. 하루 평균 7개가 열리는 셈이다.

빈 중심가의 서점 진열장에는 아예 모차르트 관련 서적 수십 권만을 진열해놓고 있었다. 현재 구입가능한 영어 프랑스어 독어로 된 모차르트 전기 수는 모두 47권. 한국어로 번역된 전기, 평전 등을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모차르트가 비즈니스에 가장 널리 애용되는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먹고 마시는 분야’다. 그 유명한 미라벨 모차르트 초콜릿은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이제 안파는 가게가 없다. 잘츠부르크에는 대량 생산하는 미라벨 초콜릿 외에도 하나씩 손으로 싸서 만드는 은색 포장지의 퓌어스트 초콜릿도 있다. 값은 한 개당 1유로가 넘는다.

▲ 건물 쓰레기통의 모차르트 프로필

모차르트 초콜릿은 독일에서도 제조되어 팔린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세계에서 팔리는 모차르트 초콜릿의 종류만 30여개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제품은 황금색 미라벨 상표가 붙은 초콜릿으로, 현재까지 판매량은 약 15억개로 추정된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는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기념품이다. 오스트리아산(産) 치즈 중 최고급 상표는 아마데우스. 치즈에까지 ‘모차르트’라는 성을 쓰기가 미안했는지 이번에는 이름을 붙였다.

카페의 도시 빈 중심가에는 유명한 모차르트 카페가 있다. 물론 커피 메뉴에도 ‘모차르트 커피’가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커피를 시키면 커피잔, 받침접시, 냅킨 등 모든 부속물에 모차르트 그림이 새겨져 있다. 빈을 처음 찾는 외국인이 어떻게 모차르트 카페를 찾지 않고 또 모차르트 커피를 주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차르트 카페가 아니더라도 모든 카페는 ‘모차르트 커피’를 팔고 있다.

▲ `모차르트 해` 심벌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여전히 영화 주제음악으로 가장 많이 애용된다. 피아노협주곡 21번이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것을 비롯해 모차르트 작품을 배경음악으로 쓴 대작 영화는 자그마치 47개나 된다.

▲ 빈 시내의 모차르트 전문 매장

흔히 세계적 브랜드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곤 한다. 코카콜라는 얼마 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모차르트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대영제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셰익스피어와 모차르트, 둘 중 우리는 일상에서 누구를 더 많이 느끼고 있나.

2005년 11월 말 1주일간의 빈·잘츠부르크 취재 중에 만난 모차르트 행사 전문가들에게 공통으로 물어본 질문이 이것이었다. ‘빈 모차르트 해’ 조직위원장 프란츠 파타이는 “그걸 누가 계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자를 빈에서 이틀 동안 안내한 모차르트 전문가이드 라이너 레훼브는 “수십조달러는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의 4중주곡을 단돈 몇 푼에 팔아넘겨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피아노 소나타들도 순전히 팔아먹기 위한 것들입니다”라고 쓴 1790년 6월 12일자 편지처럼 모차르트는 곡을 써서 돈 받고 팔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음악의 저작권은 저작권 소유자의 사후(死後) 50년까지 유효하다. 만일 모차르트가 저작권법이 있을 때 태어났다면 그의 자손들까지 저작권법의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모차르트는 부인 콘스탄체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지만 이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모차르트 가문은 그 아들대에서 끊기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어디에도 모차르트 후손이 없다.

▲ 모차르트 초콜릿

모차르트 얼굴을 넣은 초콜릿을 만들거나 커피를 팔아 아무리 큰돈을 벌어도 제조회사나 카페는 누구에게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아니 지불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마찬가지로 빈 필 오케스트라나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도 돈을 십원도 안내고 마음대로 모차르트곡을 연주한다. 다만 음반회사에서 빈 필이 연주한 교향곡 41번(주피터)을 쓰고 싶을 경우 빈 필에 돈을 낼 뿐이다.

알려진 것처럼 말년의 모차르트는 고리대금까지 써야할 만큼 곤궁했다. 돈을 돌려막는 일도 있었다. 묘지를 살 돈도 없이 비참하게 죽었기에 그는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내 시신 여러 구를 한꺼번에 파묻는 샤흐트 구역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의 35년을 산 모차르트. 그 자신은 당대에 돈도 명예도 없이 영광을 누릴 후손(後孫)조차 남기지 않고 갔다. 어떻게 한 인간이 이렇게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주고 갈 수가 있을까. ‘모차르트 평전’을 쓴 프랑스 작가 필립 솔레르스가 한 모차르트 전문가에게 물었다.

“모차르트가 저작권료를 받는다면 얼마나 될까요?”

이 전문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스트리아를 통째로 살 수 있을 겁니다.”

▲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해` 홍보물

18~19세기 빈은 유럽에서 예술과 지성의 중심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빈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막을 내리면서 오스트리아는 아드리아해(海)를 낀 대제국에서 내륙국가로 쪼그라들었다. 히틀러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게 1938년이고, 오스트리아가 2차대전 후 4개국 분할통치를 거쳐 중립국으로 독립한 것이 1955년이다. 그 다음해인 1956년이 모차르트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이를 특별하게 기념할 여력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그후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뚜렷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에서 찬란한 역사의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하고, 오스트리아에 와서 캥거루를 찾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잘츠부르크는 그동안 유럽에서는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에서는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찍은 도시로 더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 ‘모차르트 길’을 갖고 있는 도시가 200개라는 사실은 유럽인들이 모차르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웅변한다.

잘츠부르크 공항의 별칭은 ‘아마데우스 공항’이다. 또 잘츠부르크 공항은 관제탑을 비롯해 공항 내부 여러 곳에 ‘잘츠부르크 공항-W. A. MOZART’라고 표기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주정부와 잘츠부르크 시당국은 ‘모차르트 2006’을 계기로 ‘잘츠부르크=모차르트’라는 인식을 세계인에 각인시킨다는 생각이다.

▲ 빈 시내의 `모차르트 카페`

2006년은 오스트리아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06년 상반기 오스트리아는 EU(유럽연합)의 순회 의장국이 된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같은 절묘한 기회를 계기로 수도 빈을 유럽 예술활동의 중심지로 확실하게 부각시킨다는 계획이다. 21세기의 코드는 문화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모차르트에서 확인하고 있다.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Adoration of the Magi, Gentile Da Fabriano 1423
Tempera on wood, 300 x 282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Vesperae solemnus de comfessore In C major K.339 No.5

수도자의 저녁 기도 C 장조 K.339 중

Mozart, Wolfgang Amadeus (1756-1791)

제5곡 - 'Laudate Dominum-주를 찬양하라'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