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제3세계 음악

라 쿰빠르시타 La cumparsita - El Quinteto Buenos Aires│Quinteto Nuevo Tango

리차드 강 2013. 2. 27. 14:19

La cumparsita - El Quinteto Buenos Aires

Symphonic Tango (2001)

Gerardo Rodríguez Sotelo (1897–1948)

Track No.1 - La cumparsita

 

1. La cumparsita
   Composer   Gerardo Rodríguez Sotelo (March 28, 1897 – April 25, 1948)
   Conductor   Ettore Stratta
   Performer   Antonio Agri (Violin)
                      Pablo Ziegler (Piano)
                      Osualdo Berlingieri (Piano)
                      Hector Console (Double Bass)
                      Leopoldo Federico (Bandoneon)
   Genre   20th Century Period / Song / Tango
   Ensemble   El Quinto Buenos Aires
   Period   20th Century
   Recording   Studio
   Venue   Studio ION, Buenos Aires
   Recording Date   11/1991
   Notes   Arranged: Jorge Calandrelli

 

     

 

El Quinteto Buenos Aires(Argentina)

<부에노스 아이레스 5중주단>은 Antonio Agri (바이올린), Leopoldo Federico (반도네온), Pablo Ziegler (피아노), Osvaldo Berlingieri (피아노), Hetor Console (베이스)가 특별히 구성하고 있는 유니트로, 멤버 전원이 피아솔라와는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던 거장들 구성

     

 

 

     

탱고(Tango)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다.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 음악은 모체, 또는 원조로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banera)를 모시고 있다.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2/4박자의 춤곡으로,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인들에 의해 19세기 중엽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아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가우초의 멜로디가 차용된 ‘밀롱가’(Milonga)―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1860∼70년에 즈음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 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된다.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월드뮤직으로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의 거주자 중 75%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 공업 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양식 그대로인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하였다.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 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 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2/4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밀수꾼 등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


● 초기 탱고 음악의 발전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요르도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탱고 음악의 원형이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 바이올린 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확립되었다.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 바이올린 1∼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더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 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탱고 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에서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발탁하기도 했다.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가우초 등의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 음악의 명곡들이었다.

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로베르토 필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이때부터 탱고 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탱고 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탱고 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 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탱고 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 갔다.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크고 작은 댄스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 외교적 고립,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서 버려져야만 했다.


● 아르헨티나 탱고와 콘티넨털 탱고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며, 1910년대에는 유럽의 상류층 사회를 중심으로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이 무렵 유럽을 사로잡은 탱고의 열풍은 미국에도 상륙하는데, 탱고 스텝을 고안하여,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무용가 카스루 부부와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에 의해 확산된 ‘발렌티노 탱고’의 공로가 컸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탱고 음악은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탱고는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유럽의 새로운 탱고 양식 ‘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가 빈민굴과 선술집 등 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서와 계급적인 측면에서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콘티넨털 탱고는 정박자의 리듬을 기초로 한 아르헨티나 탱고에 비해 더 가벼운 리듬감과 우아한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고전음악에 근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반도네온·바이올린·피아노·베이스에 의해 연주되었던 데 반해, 콘티넨털 탱고의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유동적이기는 했지만, 더욱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부가되었다. 또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 대신에 아코디언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콘티넨털 탱고가 댄스 음악의 목적에 치중하고 있음에 반해, 아르헨티나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중심의 노래 언어라는 특성에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 탱고의 부활

에비타의 사망,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둘 해체되었다.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초기 탱고 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탱고 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이런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 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혀진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학에 갇혀 있던 탱고 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피아졸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탱고 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딛은 ‘새로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혀진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졸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1998년 ‘탱고’라는 영화를 연출하여 탱고가 단순한 음악과 춤이 아닌, 그 자체로서 문화임을 일깨웠던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탱고의 영혼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전까지 나의 작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고 탱고의 의미를 밝혔다. 아르헨티나의 생선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며, 처절한 몸부림이다.

“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출처 : 하종욱(재즈 칼럼니스트)

     

 

 

     

◆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1992)

◀ 사진 :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피아졸라.

192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난 그는 3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뉴욕의 노동자 지역에서 살게 된다. 1930년대 뉴욕의 영화산업은 스페인어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영화를 생산해내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의 영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젊은 피아졸라를 만나게 된 스타 가르델은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한 어린이와의 조우에 매력을 느꼈다. 가르델은 자신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El dia que me quieras)에 피아졸라를 출연시켰고, 피아졸라는 이 영화에서 연주도 맡게 된다. 1935년, 가르델이 사망 하기 전에 만든 마지막 영화가 바로 이것이다.

196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5중주단(Quinteto Nuevo Tango)을 결성하였다. 이 때부터 피아졸라는 자신의 탱고를 새로운 탱고, 즉 누에보 탱고로 부르며 기존의 탱고와는 다른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1974년엔 유럽으로 건너가 10년간 파리·암스테르담·빈은 물론, 뉴욕·도쿄 등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탱고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 역시 클래식 음악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1992년 크로노스 4중주단이 발표한 피아졸라의 작품집 《다섯 개의 탱고 센세이션 Five Tango Sensation》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피아졸라를 '탱고의 황제'로 끌어올렸다. 그런가하면 반도네온 연주자로써 피아졸라는 미국의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이나 이탈리아 스타 가수 밀바 등과 같은 대중음악들과도 함께 연주와 녹음 활동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피아졸라는 우리시대에 가장 독창적인 음악을 선사한 작곡가이다. 인스트루멘탈 탱고, 탱고 송, 영화음악, 키타나 플루트를 위한 음악, 실내악, 오케스트라 음악, 오페레타 등, 그가 손대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다. 그의 노력과 성공으로 아르헨티나의 더럽고 가난한 부두 보카 지역 하층민들의 삶으로부터 출발한 탱고는 1960년대 침체기를 맞다가 기적적으로 화려한 부활의 꽃을 피우게 된다.

피아졸라는 춤의 음악 탱고를 콘서트 현장으로 끌어내었고, 감상하기 위한 탱고를 만들기 위해 새롭고 파격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독창적인 화음과 파격적인 리듬, 그리고 새로운 하모니를 구사하여 기존의 탱고가 가지고 있던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고, 탱고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음악적 미래를 제시했다. 그의 탱고 음악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좋은 탱고 작품을 무수히 만들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탱고라는 음악과 한데 어울어질 수 있도록 탱고의 언어와 음악적 카테고리를 극대화시켰다는 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시도들은 탱고를 순수예술의 형태로 변환시키는데 이르렀다. 그는 750여곡에 이르는 방대한 탱고 작품과 더불어, 많은 레코딩을 남겼으며,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서의 지위도 확보하고 있다. 1990년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1992년 7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별세했다.

글 출처 : 곽수근의 음악이야기

     

마토스 로드리게스 & 라 쿰빠르시타

1915년경 우루과이의 마토스 로드리게스Gerardo Rodríguez Sotelo (1897–1948)가 작곡한 것으로 아르헨티나의 속어(俗語)로 가장행렬이라는 뜻이다. 곡은 각각 16절 단위의 3부로 나뉘어 전 곡이 단조(短調)로 되어 있다. 1915년경에 작곡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전세계적으로 레코드만도 수백 종이 넘게 발매되었다.

작곡가는 1897년에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난 Gerardo Matos Rodríguez이다. 그는 건축학도였으나, 우루과이 대학생 연합회에 있던 낡은 피아노를 치면서 탱고를 한 곡 작곡했고, 이 음악은 세계로 퍼져 나간다. 바로 이것이 "라 쿰파르시타"이다. 1917년 5월 몬테비데오에서 Roberto Firpo라는 피아니스트이며 음악 감독이고 작곡가였던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La Giralda"라는 옛날 카페에서 연주하며, 그곳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되는 이가 Matos이다. Matos는 자신의 영감으로 만든 탱고를 당대의 유명 피아니스트인 Firpo에게 보여준다. 거기서 Firpo는 몇부분을 교정하고, 이튿날 밤에 연주한다. 이 연주는 대성공을 거두며, 이 카페는 몬테비데오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모퉁이인 Julio Andes 18번지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얼마 후, Alberto Alonso minotto di Cicco로 구성된 우루과이 4중주단이 "라 쿰파르시타"의 첫 녹음을 한다.

     

 

 

     

라쿰파르시타 (La cumparsita)

La Cumparsita(라 꿈빠르시따 - 라쿰바르시타...가 아닙니다.)는 처음에는 가사가 없는 경음악이었다. 그래서 1924년 가사가 붙어 정식으로 출판될 때까지 빛을 보지 못했었죠. 정확한 작곡연도는 알려진 바가 없고 우루과이 사람인 Matos Rodriguez(마또스 로드리게스)가 1915년에서 1917년 사이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1917년에 지금도 건재한 Ricordi 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악기상점의 주인에게(그 당시엔 Breyer Hermanos 라는 회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상점이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지만) 모든권리를 팔아서 1924년에 Pascual Contursi 와 Enrique Pedro Maroni 두 사람이 가사를 작사해서 1924년 6월 6일에 초연됐다. 그 뒤에 다른 작사자들이 가사를 작사해서 붙이기도 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처음 버전이다.

라쿰파르시타는 탱고 음악의 대표적인 곡이라 할 수 있다. 탱고는 아르헨티나에서 하류층을 중심으로 발생한 춤곡으로 성악과 기악 모두 발전하였다. 탱고는 기본적으로 4분음 2박자의 리드미컬하고 정열적인 음악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자라난 아르헨티나 탱고와 이것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우아한 선율로 발전한 콘티넨탈 탱고로 나뉜다.

아르헨티나탱고가 유럽에 들어와 사교댄스나 살롱뮤직에 적합한 세련된 형태로 작곡된 것을 가리킨다. 멜로디가 우아하고 가요적이며 리듬감도 부드럽고 선율을 중시하여 연주된다. 악단 편성도 자유롭고 보통 반도네온 대신 아코디언을 쓰고 있다.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엽이며 1910년대에는 상당히 붐을 일으켰다.

1914년에는 미국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탱고스텝을 고안해 낸 무용가 카스루 부처(夫妻)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루돌프 발렌티노였다. 그가 춤춘 탱고는 ‘발렌티노탱고’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리하여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유럽에서도 탱고음악이 많이 작곡되고 콘티넨탈 탱고의 스타일이 확립되었다.

당시 활약했던 콘티넨탈탱고의 악단에는 헝가리 출생의 바이올린 연주자 바르나바스 폰게치,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 마레크 베버의 악단 등이 있다. 현재는 독일의 알프레드 하우제와 네덜란드의 마란드악단이 쌍벽을 이루고 있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