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Op.39 - Nicholas Angelich│라흐마니노프

리차드 강 2014. 11. 28. 12:21

9 Etudes Tableaux, Op.39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 Op.39

Sergey Rachmaninov (1873-1943)

Nicholas Angelich, piano

     

Etudes Tableaux Op.39-No.1. Allegro agitato in C minor

Etudes Tableaux Op.39-No.2. Lento assai in A minor

Etudes Tableaux Op.39-No.3. Allegro molto in F sharp minor

Etudes Tableaux Op.39-No.4. Allegro assai in B minor

Etudes Tableaux Op.39-No.5. Appassionato in E flat minor

Etudes Tableaux Op.39-No.6. Allegro in A minor

Etudes Tableaux Op.39-No.7. Lento in C minor

Etudes Tableaux Op.39-No.8. Allegro Moderato in D minor

Etudes Tableaux Op.39-No.9. Allegro moderato in D major

     


No.2. Lento assai in A minor - No.7. Lento in C minor

     

<연습곡>과 <그림>이라는 두 개의 말을 구성하여 곡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화려한 기교를 담은 표제적 악곡이라는 점에서는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과 비교된다. 그러나 피아노 서법에 있어서는 그것을 능가하며, 내용의 명확성과 다양성에 있어서 연습곡의 수준을 훨씬 넘고 있다. 프랑스풍으로 "Etudes-tableaux"라고도 불린다. 거장적인 피아노의 기교와 음에 의한 회화적 표현을 연결 짓고자 이러한 곡명이 붙여졌다. 각 곡의 구체적 표제는 분명치는 않으나, 1930년에 레스피기가 이 곡집에서 5곡에 관현악을 배치코자 하였을 때 라흐마니노프가 각 곡의 표제에 관하여 레스피기에게 전달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에 따르면, 작품39-2는 바다와 갈매기, 작품39-6은 빨간 두건의 사나이와 이리, 작품33-4는 장날의 정경, 작품39-9는 그와 닮은 민속적 풍경으로서 동양의 행진곡, 작품39-7은 장례의 행진을 각기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Etudes Tableaux, Op.39 (1917)

어느 곡이나 거장적 피아노 서법이 주목된다. 작품39의 <소리의 그림>은 1916∼1917년에 작곡된 것으로 라흐마니노프의 러시아 시대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다.

제1곡(1916.10.5), 제2곡&제3곡(1916.10.14), 제4곡(1916.9.24), 제5곡(1917.2.17), 제6곡(1916.9.27 개정), 제7곡&제8곡&제9곡(1917.2.2.)의 날짜가 기입되어 있다. 1917년 2월 21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작곡자 자신의 피아노로 초연되었다.

모두 9곡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곡이나 작품의 총체적인 완성을 위해서는 뛰어난 테크닉 뿐만 아니라 악곡 내에서의 다양한 상징성을 포착해내는 직관과 통찰력이 요구된다. 이른바 화려한 표제적 연습곡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열두 곡과 강한 연계성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나,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은 한층 더 확장된 스케일과 기능적으로 다양해진 여러 서법을 통한 내용의 치밀함 등이 그 수준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하겠다.

 

제6곡 알레그로 a단조 3/4박자. 부제 : 빨간 두건의 사나이와 늑대

이 곡집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의 하나이다. 토카타적 성격과 급속하고 자유로운 리듬이 극적 표현을 달성시키고 있다.

 

제9곡 알레그로 모데라토 템포 디 마르치아 D장조 4/4박자.

화려한 교향악적 종곡이다. 동양의 행진곡이라고 불리는데, 주요 주제의 증2도 등을 그 보기로서 지적할 수 있으나, 전체로서 동양적 색채는 한정되어 있고, 오히려 러시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Sergey Rachmaninov (1873-1943)

러시아적 서정을 담아낸 우리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삶을 그린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이 졸업 연주회 때 들려준 인상깊은 음악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기차역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 주인공들(그들은 유부남 유부녀이다)의 복잡한 심경을 노래한 음악이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서 먼저 로맨티시즘의 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또한 20세기 전반기까지 생존했건만 그에게서는 현대 작곡가라기보다는 낭만주의 작곡가의 취향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이것은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가진 한계로 인식되어 당대에는 시대착오적 작곡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낭만적인 작품들은 이제 폄하보다는 연주자나 음악 애호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그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게 만든다. 이런 그의 음악세계는 귀족 출신으로 조국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또 작곡가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길을 걸어온 그의 삶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어머니는 장군의 딸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은 겉보기처럼 평안하지 못했다. 아버지 바실리가 낭비벽이 심한 데다 여러 가지로 무책임했기 때문에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해 나갔는데, 결국에는 빚을 청산하기 위해 부인이 지참금으로 갖고 온 토지까지 팔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홉 살까지는 귀족의 자제답게 넓은 집에서 보냈지만, 오네그의 저택이 팔린 뒤에는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일반교육은 가정교사에게 맡겨졌고, 최초의 음악 교육은 어머니가 했다. 물론 집안에서는 그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군대의 사관 후보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피아노 교사를 초빙해야 할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도 등록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제적인 문제로 파경을 맡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도시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런 불행한 가정문제는 어린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는데, 음악원에서의 일반 과목 성적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하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세르게이의 사촌으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실로티와 의논하여 아들을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문하에 들어가게 했다.

엄격한 스승이었던 즈베레프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술가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교적인 인물로 키워냈다.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의 일요일 오후 모임에서 안톤 루빈슈타인, 타네예프, 아렌스키,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의 유명한 음악가들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피아니스트에서 작곡가로 힘찬 발돋움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에게 받은 음악 수업 덕분에 1887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어려움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88년부터 라흐마니노프는 질로티에게 피아노와 작곡법을, 타네예프에게 대위법을, 그리고 아렌스키에게 화성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작곡가의 꿈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당시 라흐마니노프는 여전히 즈베레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단순히 피아니스트의 재목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라흐마니노프가 작곡을 하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스승과 뜻이 어긋나게 되자 라흐마니노프는 미련 없이 그의 집을 나와 고모의 집으로 갔다. 어머니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공부하라고 했지만 그는 고모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살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그의 첫번째 대작이며 작품 번호 1번인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발표된다. 이 작품의 1악장은 음악원 원장인 사포노프가 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라흐마니노프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등장하여 연주했다. 그리고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학생들보다 1년 앞서 음악원의 졸업 시험을 치르게 되었는데,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단막 오페라 ‘알레코’로 음악원 최고의 영광인 금메달을 받고 졸업하게 되었다. ‘알레코’는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옛 스승인 즈베레프도 화해할 수 있었다. 또한 즈베레프는 제자에게 출판사를 소개시켜주었는데 이후 이 출판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20년간 출판하게 된다.

음악원을 졸업한 젊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작품 활동을 해나가면서 동시에 피아니스트로서도 공식 데뷔를 해서 청중들에게 큰 갈채를 받게 된다. 또 ‘알레코’가 볼쇼이 극장에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여기에 차이코프스키도 참석하는 등 작곡가로서 그의 전망은 밝아 보였다.

한데 전도 유망했던 라흐마니노프에게 예기치 않았던 절망의 시간이 찾아왔다. 1895년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야심작인 교향곡 1번이 1897년 글라주노프에 의해 초연됐을 때 완전한 실패를 거두자 라흐마니노프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이 작품이 다시는 출판될 수 없도록 악보를 회수해버리고 다른 작품의 작곡에도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 졸도라도 한 느낌으로 멍한 나날을 흘려 보냈다. 손이나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어려움 속에 처해 있을 때에도 사촌인 실로티는 유럽과 영국, 미국 등 연주여행을 가는 곳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연주해 세상에 널리 알렸고 급기야 런던의 음악협회에서 라흐마니노프를 런던에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1899년 런던 데뷔 무대를 갖고 난 후 라흐마니노프는 협주곡을 만들어 다시 그곳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1번 협주곡이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 라흐마니노프는 새 협주곡을 쓰려고 했지만 교향곡 1번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가 존경하던 톨스토이를 찾아가 조언을 듣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자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최면 요법에 의한 심리 치료를 받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되다

결혼까지 하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새롭게 자신감을 얻어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자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몇 년을 활동하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1917년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으로 향했다. 곧 가족들도 뒤를 따랐고 프랑스, 스위스에서 활동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 정착해서는 작곡보다는 연주 활동에 치중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그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그는 4개월 동안 40여 회의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물론 그는 당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뛰어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거대한 손과 큰 체구에서 터져나오는 강렬하고 화려한 기교는 가는 곳마다 청중들의 박수 갈채를 이끌어냈다.

그의 탁월한 피아노 실력은 이미 음악원 시절부터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였다. 항상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무대에 올랐던 그는 페달 사용을 지극히 절제했음에도 빌로드 같이 부드러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작품도 직접 연주했는데 이렇게 바쁜 연주 생활에 쫓기느라 작품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1926년이 되어서야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랩소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교향곡 3번, 칸타타 ‘종’, ‘3개의 교향적 춤곡’ 같은 작품을 썼다.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1929년 4월부터 1941년 12월 사이에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유진 오먼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녹음했는데, 지금 우리는 이 음반들을 통해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전설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적 서정을 노래한 음악가

피아니스트로서는 최고의 명성을 날린 그였지만 불행히도 작곡가로서는 평론가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했다. 새로운 작곡기법을 찾아 나선 20세기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오히려 그의 정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로 뒷걸음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음악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밀한 음악언어에서 풍겨나오는 로맨티시즘의 향기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관현악 기법이 빚어내는 그의 음악적 개성은 시대를 뛰어넘어 그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피아노 음악에서 이루어놓은 성과는-낭만적 정서와 내면의 고뇌를 실은 비르투오시즘에 있어서-역시 그와 같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쇼팽과 리스트에 견줄 만하다. 또한 미국에 살면서도 서구 생활 양식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고, 언제나 러시아를 그리워했던 라흐마니노프였는데, 그는 어느 시기의 작품에서건 러시아적인 서정을 담아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무리하게 연주여행을 강행하며 살아가다 끝내 몸이 상한 라흐마니노프는 1942∼43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를 결심했는데, 그는 1943년 2월 17일 연주여행을 마친 후 병세가 악화되고 말았다. 검사 결과 그의 병은 암이었고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라흐마니노프는 그로 한 달여 뒤인 3월 28일 미국 땅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길영│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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