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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딘: 교향곡 2번 나단조 Op.5 - Carlos Kleiber-Sinfonieorchester Stuttgart│국민파 음악

리차드 강 2014. 11. 28. 12:06

Symphony No.2 in B minor, Op.5

보로딘 교향곡 2번 나단조 Op.5

Alexander Borodin 1833-1887

1. Allegro - 2.3.4 전악장 연주

 

Carlos Kleiber - Radio-Sinfonieorchester Stuttgart

     

러 시아의 소위 ‘5인조’의 한 사람인 보로딘의 완성된 교향곡 중에서는 제2번이 걸작이고 연주될 기회도 많다. 이 곡은 교향곡 제1번의 초연이 호평이었음을 발판으로 삼아 작곡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오페라 <이고르공>의 작곡때문에 진행이 늦어져 1877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고르공>에서 사용되지 못했던 소재들이 이 교향곡에 사용됨으로써 <이고르공>과의 접근을 느끼게 한다. 또한 옛 슬라브음악도 사용되고 있으므로 매우 강한 민족색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표적인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곡 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보로딘의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의 개정에 의한 악보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레코드는 앙세르메의 연주가 소위 러시아 음악에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이 보로딘의 교향곡에 있어서도 특히 러시아의 민족색 즉 슬라브적인 정취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색채감과 명쾌한 리듬감, 세찬 양감 등으로 해서 야성적이라기 보다는 다소 도회적인 세련미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아 뛰어난 연주이다. 스베틀라노프와 소비에트 국립교향악단의 협연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함으로 인해 소련의 연주답다 라고 느끼게 되는데 그렇다고 거친 것은 아니고 비교적 단정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그리고 힘찬 큰 진폭에서 러시아적인 정감이 물결처럼 전해온다. 그 때문에 스베틀라노프의 끈적거리는 표정 등은 없고, 오히려 보로딘 특유의 야성미와 도회적인 세련미가 잘 융합되어 있다. 이러한 여주는 역시 소련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저력인 것 같다.

     

     

보로딘 교향곡 2번 나단조 Op.5

이 교향곡 전체에 넘치는 것은 국민적 특질인 열렬함이며, 이 웅대한 가락에는 중세 러시아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보로딘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곡의 원고를 다듬어 오다가 1876에야 겨우 완성했으며, 이듬해 2월 26일에 초연, 런던에서는 1896년에 초연되었다.

 

제 1악장 Allegro. Allegro animato assai

악장 전체에 걸쳐 빛나는 '표어'와 같은 주요 주제가 대단한 기백과 힘찬 저력을 지닌 악상을 암시한다. 제2주제는 이에 비해 서정적이며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동양풍 수법의 안개 속에서 힘차고 높게 불려진다.

 

제 2악장 Scherzo-Presstissimo-Allegrtto Tempo 1

찬연하고 아름다운 스케르쪼조는 마치 불꽃놀이의 광채처럼 빛난다.

 

제 3악장 Andante.

하 프 반주를 수반한 클라리넷의 독주가 제 3악장을 서주하기 시작하고, 이윽고 호른이 주요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이 서로 어울리는 듯한 아름다운 가락이다. 이것이 동양적인 정서로 이어져 제 3주제를 연주하고, 그 뒤의 짧은 전개가 굉장한 클라이맥스로 이끌어간다.

 

제 4악장 Allegro.

영웅적인 성격의 주요 주제가 높이 불려짐과 동시에 빛나는 전개부가 있으며, 열정을 담은 제 2주제가 번쩍이는 빛을 발한다. 곡의 분위기는 조금씩 고조되어 가다가 관현의 총합주로 마친다.

     

Alexander Borodin, 1833-1887

러시아 가극의 왕 브르틴은 1833년 11월12일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1887년 2월27일 레닌그라드에서 서거했다. 보로딘에 관한 모든 문현은 1933년에 이르기까지는 그의 출생이 1834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로딘의 문하였던 유언집행자인 데아닌의 아들이 조사해낸 바에 의하면 1833년이 정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보로딘 자신도 늙은 하년가 말하는 것 그대로 믿도 자기가 낳은 해를 1년을 틀리게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언제나 낙천주의며 좋을대로만 믿어버린 것이 그의 성질이었다.

보로딘은 코가사쓰에 있어서 이메레치아 왕족의 후예가 되는 게데아노프공이 61세떼 24세가 되는 젊은 후처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다. 공은 1845년에 죽어서 그는 규률이 없는 여자의 손에서만 자랐다. 소년은 일찍부터 음악과 자연과학에 대한 예민한 흥미를 보였다. 10세 때부터 음악교사를 따라 프리유트 첼로외에 피아노를 배우고 하이든, 벤토벤, 멘델스죤의 작품을 외웠다. 동시에 음악의 연구도 계속하여 특히 둔주법을 공부했다. 이점이 그의 특색으로 19세기의 러시아 작곡가중에서 다성법에 대해서 나면서부터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보로딘 뿐이었다. 이 경향은 후일에 더욱 현저하게 되어 실내악을 쓰게 되었다.

1856년에 그 학교에서 병일학의 교수조수로 임명되었으나 그 2년전부터 육군병원의 병원 부의사가 되어있었다. 그 병원에서 근무중에 못솔그스키와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보로딘은 일생을 통하여 약화학 방면과 이중적인 활동을 병행했으나 수년후에는 작곡가로서 한층 더 활동하게 되었다. 1859년에 과학연구를 대성시키기 위하여 하이텔벨크에서 이태리 스위스, 파리등에 파견되었다. 이 3년간의 외국여행에 의해서 바그너의 가극, 이태리의 가극, 독일의 실내악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하이텔벨크에 전지요양을 하고 있던 카테리나-프로토포포이라는 피아니스트이 노인처녀와 같은 호텔에서 알게 되었다. 그 여자를 통하여 보로딘이 그다지 알지도 못했던 쇼팡과 슈망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혼하였다. 19세의 생일을 맞는 직전에 러시아로 돌아와서 제차 우연한 기회에 못솔그스키와 만나 후자를 통하여 바라키레프의 친구를 얻게되었다. 바라키레프의 지도를 받으면서 Bb장조 제1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것이 완성되기까지는 5년이 경과했다. 그간 카테리나와의 행복한 결혼을 하여 내과학원에서는 명예교수에 승격되었다. 1865년에 당시 해군사관으로서 세계일주의 도상에 으르는 릴스키-콜사코프와도 알게 되었다.

1867년에 제1교향곡을 발표한 후 제2교향곡의 계획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가곡과 가극을 지향했다. 러시아 5대가의 유력한 상담역이된 평론가 스탓소프의 권고로 이골공(Prlnce Igor)의 가극을 착상했다. 그러나 실제의 일은 제2교향곡편이 먼저 전첩되고 1871년 제1악장이 쓰여졌다. 전부의 완성까지는 6년을 요했다. 한편 가극 이골공의 작곡에 참고자료로서 중앙아시아 민요의 수집 등으로 연구를 했다. 제2교향곡의 후 악장은 이러한 재료로부터 많은 암시를 받았다. 제2악장의 스켈쓰오나 마지막 악장에는 선면하게 이골공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제2의 초연은 1877년 2월에 나프라우닉크의 지휘로 레닌그라드의 화족회관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이곡은 러시아의 청중에게 알려지기 전에 외국에서 진가를 알게 되어 특히 리스트가 비싸게 사들였었다. 근대교향곡 사상에 대표적 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 곡의 착상은 1875년에 소급하여 러시아의 작곡가 쓴 제1류의 실내악곡이다. 그리고 이곡은 베토벤의 주제에 암시 되어서라는 부제가 있어서 이 주제는 Bb조 4중주곡 작품130의 마지막 곡에 나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과학상 및 교육상에도 많은 일을 하였다. 실천연구와 학생을 위해서는 그 자신의 주머니에서 비용까지 지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작곡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1876년에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로 “내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여름의 휴가나 또는 어떤 병에 걸려 방에 들어 박혔을 때 뿐이다.”라고 썼다.

1877년 유기 화학연구를 위해 독일에 여행하여 리스트를 방문했다. 이 회견이 그의 음악이 독일에 소개되는 유력한 기회가 되었다. 1875년에는 달단의 춤외에 수곡이 이골공을 위해 작곡되었으나 그 이외의 것은 몇년 동안 여전히 진전이 없이 부진했다. 그 중 1880년에는 회화적관현악곡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Dans Ies Steppes de P-Asia centrale)와 제 3번의 현악4중주곡 D장조를 썼다. 전자는 러시아의 애국적 제재에 의한 활인화의 반주로서 쓰게 된것이고 후자는 보로딘의 아내에게 주었다. 출판한 것은 그의 사후였다. 제1의 것보다 서정적이며, 즐기기 쉬워서 연주되는 것도 많았다. 그의 아내는 그 전부터 병약했으나 더욱 병상이 악화되고 기후가 추운 레닌그라드를 떠나 모스크바에서 휴양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있는 모스크바를 보로딘은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내어서 모스크바에 병문안을 갔으나 그 대신 작곡은 더욱 부진했다. 1887년의 사육제의 최후의 날에 학원의 교수들에 의하여 개최되는 무도회에 출석했다. 원기 왕성한 그는 축연의 도중에 별안간 기분이 나빠지고 몇 초간에 동맥암이 파열되어 죽었다. 아렉산-디네프스키 사원 못솔그스키의 무덤 가까이 묻히고 작곡의 주제와 그가 연구한 문화논문의 정칙이 비석에 조각되었다. 아내도 얼마 몇개월 후에 죽었다. 보로딘은 가극 이골공을 착수하여 죽을때까지 18년간이나 이 작품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프로로그와 제1-2막을 완성했을 뿐으로 나머지는 단편적인 대로 남았다. 그의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제3막을 수작하고 제4막을 썼으며 서곡과 3막을 완성하였다. 그라즈프는 보로딘이 때때로 피아노를 치는 것을 상상하면서 작곡하였다. 이리하여 이골공이 레닌그라드의 제국극장에서 상연된 것은 작곡자의 사후 3년이 지나서인 1890년 10월에 상연되었다. 이제 와서는 이 동양적인 색채가 짙은 멜로디와 원시적인 호탕함에 넘치는 관현악 배치의 작품은 러시아가극의 일품으로서 즐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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