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내 죽음을 헛되이 마라 │ 11월 13일 다시보는 전태일

리차드 강 2009. 4. 11. 00:37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정신은 살아있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조영래 / 돌베개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6가에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세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외친 그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근로기준법 책을 자신의 몸과 함께 불태웠다. 한국의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불꽃을 올린 절규였다.

<전태일 평전>은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군사독재 시절,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엮은이로 돼있을 뿐 저자조차 분명치 않은 책이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1970년 초 작품 초고) 고뇌하던 전태일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1970년 8월 9일의 일기) 하는 결단으로 갔다.

그의 삶과 죽음을 눈물겹게 복원한 이 평전의 저자는, 서문에서 ‘부패와 특권과 빈곤과 폭압이 없는 내일을 위하여 숨죽여 준비하고 투쟁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전태일은 간다’고 서문에서 썼다.

그 저자는 인권변호사 고 조영래(1947~1990)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된 그는 도피생활 중 3년여에 걸쳐 이 평전을 썼다. 하지만 당시 그의 이름은 저자로 드러날 수 없었고, 1990년 12월 제목을 바꾸고 저자를 밝힌 책의 개정판 발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사망했다. 전태일과 조영래,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하나의 이상을 갖고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모든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화제의 책] 빛나는 역사 <청계, 내 청춘>

 [프레시안 강양구/기자]

"모든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 전까지 대한민국에 '노동자'는 없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는 '노예'가 있었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기계'가 있었을 뿐이다. 전태일이 '불꽃'이 된 순간 모든 게 변했다.

1970년 11월 27일, 전태일이 죽은 지 꼭 2주일 되던 날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그 때부터 37년간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불꽃'이 되었다. 소설가 안재성이 청계피복노조 산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청계, 내 청춘>(돌베개 펴냄)은 바로 꺼지지 않는 불꽃의 기록이다.

 

불꽃에 화답하다

▲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스스로 '불꽃'이 돼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마석 모란공원의 묘. ⓒ전태일기념사업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전태일이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불꽃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거리로 나섰다. 최종인, 신진철, 주현민, 조병섭 등. 그들은 검붉은 피로 쓴 혈서를 손에 들고 불꽃이 된 친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입에 되뇌던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 역시 그들의 불꽃에 풀무질을 했다.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뤄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굳어가는 온몸을 쥐어짜며 친구의 다짐을 받던 전태일은 결국 밤 10시가 조금 지나 간호사가 침대를 옮기려는 순간 세상을 떴다. "배가 고프다." 평생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던, 그래서 모두가 가난을 극복하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마지막 말이다. 이제 그의 불꽃은 고스란히 어머니 이소선에게 또 친구들에게 전해졌다.

"전태일의 유언은 실현되었다. 이소선 어머니와 친구들은 그가 붙여놓은 조그마한 불씨를 되살렸다. 그리고 또다시 태어난 수많은 전태일이 그 불꽃을 거대한 불길로 피워 올렸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름 없는 수많은 미싱사, 재단사, 시다들이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역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일궈냈다. 청계피복노조의 역사는 바로 그들의 역사다."

 

'다른' 전태일을 만나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태일 평전>(돌베개 펴냄)을 통해 전태일을 알았다. 변호사 조영래는 1970년대 초, 수배 상태에서 전태일의 일기를 토대로 친구의 구술을 받아 몇 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이렇게 힘들게 쓰인 이 책은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1983년에야 빛을 본다.

"<전태일 평전>은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에게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과 희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치고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은 이가 없고, 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조영래는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한 개정판이 나오기 한 달 전인 1990년 12월 세상을 떴다.

<청계, 내 청춘>은 엄혹한 시절에 쓰인 <전태일 평전>에서 미처 담지 못한 전태일의 모습을 복원한다. 전태일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바보 흉내도 마다하지 않는" 낙천가였고, "저녁마다 단벌 바지를 잘 펴서 요 밑에 깐 뒤 아침이면 줄이 잘 선 바지를 입고 나가는" 멋쟁이였다. 또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뛰어난 '공상가'였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끊어진 지 오래인 불모의 시대에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노동 문제를 제기한 것도 (전태일의) 풍부한 상상력의 결과였으리라.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불태워 얼어붙는 사회를 녹이려 했던 것도, 이전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전태일은 '사랑'이다

▲ <청계, 내 청춘>(안재성 지음, 돌베개 펴냄, 2007). ⓒ프레시안

전태일은 자신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재단 기술을 이용해 끔찍한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예민했다. 그는 특히 끔찍한 노동 조건에 처해 있었던 어린 여성 노동자를 구하고자 했다.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고, 재단사가 돼서는 그들의 임금을 높이고자 애를 썼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종교적인 신념처럼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글이나 말 속에서 신의 존재나 신앙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하게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가 기독교로부터 배운 것은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정신'이었다."

이런 전태일의 '사랑'은 청계피복노조 27년의 역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가 그토록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야말로 청계피복노조의 불꽃이었다. 10대 중반에 단춧구멍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던 이들이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통해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노예'가 아닌 '노동자'로 거듭나는 장면은 <청계, 내 청춘>에서 가장 감동적이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마치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동료의 아픔을 인식했다. 또 자신보다 더 못한 가난한 이웃의 처지에 눈을 돌리게 됐다. 그들이 사내도 견디기 힘든 온갖 고초를 버티며 청계피복노조를 지켰던 것은 이런 각성에서 비롯됐다. 만약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청계피복노조 27년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은 '삶'이다

<청계, 내 청춘>은 청계천 터줏대감 박명옥을 소개하며 청계피복노조 27년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한때 청계피복노조 부위원장을 했던 그는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미싱을 탄다. 1956년부터 청계천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째 미싱을 타고 있는 셈이다. "노동은 그녀의 삶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다며 대통령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불꽃이 된 전태일이 각인된 27년 청계피복노조의 역사는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정말 "노동의 고통, 노동의 기쁨, 노동의 슬픔"을 아는가? 당신들은 자신의 불행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예민했던 전태일 정신을 기억하는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안재성은 수많은 청계피복노조 관계자의 도움으로 <청계, 내 청춘>을 쓰면서 특히 전태일과 관련해서 기존에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거나, 주목 받지 못했던 내용을 소개한다. 전태일의 분신 상황과 관련된 내용도 그 중 하나다. 애초 <전태일 평전>에는 분신할 때 김개남(가명)이라는 친구가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바로 옆에서 이것을 지켜본 사람은 김영문이었다. 분신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이들이 상황을 조영래에게 잘못 전달하면서, 김영문이 김개남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것으로 <전태일 평전>에서 잘못 묘사된 것이다.

김영문은 전태일이 분신한 1년 후 군대에 가 있어서 조영래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할 처지가 못 됐다. 조영래도 수배 중이어서 취재가 제한적이었다. 이런 사정 탓에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전태일 평전>에 수록된 것이다. 안재성은 "잘못된 기록은 오랫동안 김영문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고 지적한다.

조영래도 <전태일 평전>으로 마음고생을 했다. 조영래는 "자신의 글이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좋은 면도 있는 반면, 이를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분신으로 죽은 것을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안재성은 "그는 의도를 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함으로써 이후 많은 사람이 분신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강양구/기자 /FONT>(tyio@pressian.com)

     

만화로 부활한 ‘영원한 노동자’… 아! 전태일

[한겨레] 〈태일이 1·2 〉
박태옥 글·최호철 그림·<고래가 그랬어> 기획/돌베개·각 권 1만원.

연재 만화 묶어 1·2권 먼저 출간
역사적 위인보다 인간 전태일에 초점
“청소년과 어린이에게 열사 만나게 하고파”

1983년 대학 2학년 때 ‘그’를 처음 알게 됐다. 대학 신문사 기자로 들어간 뒤 맨처음 주어진 ‘취재 지시’가 그 어머니를 인터뷰하라는 것이었다. 고 전태일 열사와 그 어머니 이소선씨. 그의 일대기를 담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1984년에 출간됐으니 그 당시 선배가 준 자료는 1970년대 이래 ‘지하’로 유포되고 있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초고’였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도 금기였고, 그 어머니 역시 ‘요시찰 인물’이어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찍히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자율화’란 이름으로 유화정책을 펴고 있던 전두환 정권은 제도언론과 달리 길들여지지 않는 대학 언론매체들에 대한 통제를 어느 때보다 강화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사히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쓴다 해도 제대로 실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처럼 엄혹한 상황이었던 까닭에, 이소선씨와 인터뷰는 대학생 초보기자의 첫 취재로는 ‘잠을 못 이룰 만큼 버겁고 가슴 떨리는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흔쾌히 취재에 응해준 이소선씨를 만난 순간 그 모든 고민이 사라졌다. 마치 이웃집 아줌마처럼 푸근하면서도 담대한 ‘투사 어머니’의 기백에 압도돼 ‘무슨 일이 있어도 기사를 써야 한다’는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오는 13일은 지난 70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한복판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불사른 22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37주기를 맞는다. 때맞춰 나온 <태일이 1·2>는 가난과 굶주림과 핍박 속에서 ‘불꽃 희생’으로 사랑과 연대의 힘을 일깨워준 ‘영원한 노동자의 벗’ 전태일의 삶을 만화로 그려낸 것이다. 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2003년 10월부터 2005년 6월까지 연재된 내용 가운데 ‘1, 2부’가 먼저 나왔다.

이미 <전태일 평전>, 전태일 수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이소선씨 회상록 <어머니의 길> 등을 펴낸 이 출판사는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거리가 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열사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1부 어린 시절’과 ‘2부 거리의 천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왔으나 가계가 기울어 청옥초등학교를 중퇴한 뒤 대구·부산 등지를 떠돌며 뿔뿔이 헤어져 살던 태일의 가족이 1965년 서울에서 극적으로 재회하기까지를 담고 있다. 특히 사기를 당한 뒤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가정폭력과 생활고에 지쳐 병든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십대 가장’으로서 가출과 굶주림과 헐벗음에 시달리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소년 태일의 꿋꿋한 의지가 감동적이다. 열여섯 살에 이미 구두닦이, 손수레 뒤밀이, 신문팔이, 우산장사, 꽁초 줍기 등등 수많은 밑바닥 일을 죽을 힘을 다해 해냈지만 한번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열사의 위인전이 아니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체험기’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굶주림은커녕 과식으로 비만병을 앓고, 공부의 기회가 넘쳐 과외에 어학연수에 국외유학을 떠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상상조차 쉽지 않은 이야기인 만큼, 4·19혁명이나 5·16쿠데타 같은 당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그 시대상에 대한 이해를 도운 작가들의 노력이 눈에 띈다.

내년 11월 전체 5부로 완간될 계획인 후속편에는,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바탕으로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보조로 취업한 태일이 하루 16시간 살인적인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며 노동운동에 눈 떠가는 과정, 사업주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맞서다 해고당한 뒤 노동법을 배워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삼동회)’를 만들고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과정, 그리고 1970년 사업주들과 정부의 위선과 기만에 항의해 ‘불꽃 산화’를 하기까지의 삶이 이어진다.(전태일기념사업회www.chuntaeil.org 참조)

그 날 밤 명동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배가 고파요.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세요”라며 숨져간 아들을 품에 안고 끝내 혼절했던 어머니 이소선(78)씨는 오늘도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분신 사망한 전기공 정해진씨의 빈소와 같은 날 분신을 시도해 3도 화상 중태를 입은 서울우유 조합원 고철환씨처럼 ‘제2, 제3의 태일이’가 그를 쉬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그날이 오면'은 전태일 추모가였다

[내 안의 전태일⑦] 작곡·작사가 문승현

오마이뉴스(news)

청계천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오마이뉴스>는 7월 21일부터 <전태일 거리, 시민의 힘으로 만들자>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오는 9월 15일까지 진행될 이번 행사 기간 동안 고 전태일 열사에 대한 릴레이 기고 및 인터뷰 등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일곱번째로 '그날이 오면'의 작곡ㆍ작사가인 문승현 전남대 교수의 기고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청계피복노조의 노동자 기타반을 운영한 것,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 겉만 보면 내가 전태일과 맺은 인연은 그것이 다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의 가장 높고 푸른 하늘을 그에게서 보았다. 지금껏 내 속에 남아있는….

▲ 동료들과 함께한 전태일 열사(뒷줄 가운데).

ⓒ2005 전태일기념사업회
1986년인가? 아니면 85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성문밖교회, 도시산업선교회라고 불렀던 곳.

그곳에 서울대 노래동아리 메아리의 후배, 지금은 경기문화재단의 문화예술대학 학장이 된 김보성이 김영인이라는 가명으로 노동자 기타반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가 공연을 요청해왔다.

'노동자를 상대로 공연을 한다….' 모험이고 기대였다.

고려대 연극회 출신으로 노래동아리 노래얼을 창단한 사람, 지금은 김보성과 함께 경기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당시 나의 가장 가까운 동지이자 선배 표신중과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때 '노래모임 새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라는 문화단체에 소속된 전업적인 노래활동가들의 모임. 가수도 작곡가도 아니고 활동가라는 이름이 더 격에 맞고 영광스럽게 느껴지던 시절.

망원동 세 평짜리 차고. 늦겨울이었나? 아니면 초봄? 한기 때문에 갖다놓은, 냄새나는 석유난로가 기억난다. 냄새나는 담요가 그 옆에 있었을 것이다. 컵라면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고 조영래 변호사의 명작. 그 걸 재료로 표신중은 대본을 짰고 나는 주제곡을 만들고 있었다.

제목은 '불꽃'으로 하자. 책의 내레이션이 좋고 시간도 별로 없으니 공연도 내레이션으로 끌고 가다가 중간중간 노래를 삽입하자. 그 게 당시, 전업적이긴 하나 두말없이 아마추어였던 우리들의 공연구성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노래'극'이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이야기가 있으니까.

예술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던 시대. 난 그런 풍조가 늘 마음에 걸렸다. 음악의 완성도는 늘 내 중요한 가치였다. 나는 책이 뿜어내는 향취와 이미지를 음악으로 고스란히 옮겨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내용을 그 짧은 가사로? 음악으로? 과연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태일은, 그 '어느 청년 노동자'는, 그의 '삶과 죽음'은 너무 크고 무겁고 눈부셨으니까.

그렇게 해서, 일곱밤을 새웠다.

원래 가사.

'한 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빛나는 눈물들 /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짧은 추억도 / 아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빛나는 눈물들'을 '뜨거운 눈물들'로, '짧은 추억'을 '아픈 추억'으로 누군가 바꿔놓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혹은 그들이) 원망스럽다. 노래이미지가 약간 망가졌으니까. 무게+넓이+눈부심의 이미지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었는데.

노래말에는 노동ㆍ해방ㆍ투쟁 등의 용어가 필요치 않았다. 전혀.

숭고한 아름다움. 내 젊은 날의 유일한 신앙은 그것이었던 것 같다.

전태일이 그것을 내게 선사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버전

노래모임 새벽 버전

     

전국 노동법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 1988

총파업가 : 1집 / 노동자노래단

Track.26 - 전태일 추모가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