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제3세계 음악

Horar La Vida - Mercedes Sosa (1992 Tropical Music)

리차드 강 2014. 1. 20. 05:50

Honrar la vida - Mercedes Sosa

Sino (September 21, 1993)

Mercedes Sosa (1935. 7. 9 ~ )

No.2 - Horar La Vida

 

1. Y Dale Alegria A Mi Corazon

2. Horar La Vida

3. La Solitaria
4. Caruso
5. Rio De Camalotes
6. Luna
7. Sina
8. La Ultima Curda
9. Encuentros Y Despedidas
10. Palito De Tola
11. La Media Pena
12. Cinco Siglos Igual

No...
Permanecer y transcurrir
No es perdurar, no es existir
Ni honrar la vida
Hay tantas maneras de no ser
Tanta conciencia sin saber
Adormecida.

Merecer la vida no es callar ni consentir
Tantas injusticias repetidas
Es una virtud, es dignidad
Y es la actitud de identidad
Mas definida.

Eso de durar y transcurrir
No nos da derecho a presumir
Por que no es lo mismo que vivir
Honrar la vida.

No...
Permanecer y transcurrir
No siempre quiere sugerir
Honrar la vida
Hay tanta peque? vanidad
En nuestra tonta humanidad
Enceguecida
Merecer la vida es erguirse vertical
Mas alla del mal, de las caidas.

Es igual que darle a la verdad
Y a nuestra propia libertad
La bienvenida.

Eso de durar y transcurrir
No nos da el derecho a presumir
Por que no es lo mismo que vivir
Honrar la vida.

 

 

아르헨티나의 민중의 어머니이자 대륙의 목소리, 대지의 소리로 칭송받는 메르체데스 소사는 남아메리카의 새노래운동,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냉전 이데올로기 시대에 이념적 대립의 구도 속에서 미국의 정보전과 제3세계 군부지원 속에서 폭압적인 지배의 시기를 경험해야 했던 제 3세계에서 벌어진 누에바 깐시온 운동은 인간과 생명에 관한 경외로 가득찬 시와 노래운동을 통해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남미 문화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고, 소사는 누에바 깐시온은 가장 극적인 해석자로 알려져 있다.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을 상징했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출생했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이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2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소사가 출생한 '뚜꾸만'(Tucuman)은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포한 곳이기도 했다. 뚜꾸만은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전통문화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행동주의의 본산으로 음유시인 '아따우알빠 유팡키'(Athaualpa Yupanqui)가 소년시절을 보내며 인디오 전통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자신의 음악적 뿌리를 확인하고 정신적 자양분을 흡수했던 곳이다.

소사의 조부는 께추아족 인디오였으며, 조모는 프랑스인이었다. 세상을 떠난 누이 '코차'가 푸른 눈을 가진 반면, 소사는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 그대로다. 전통 춤을 가르치는 강사로 생활하던 소사는 1965년 코치킨 포크 페스티발에서 안데스의 전통의상을 입고 안데스의 전통북인 '봄보'를 직접 연주하며 노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페스티발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필립스사는 그녀와 첫 음반 계약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설은 시작된다.

1960 년대에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통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라 일컬어지는 Violetta Parra, 누에바 깐씨온의 선구자 아타후알파 유팡끼Atahualpa Yupanqui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에 참여했다. 군부의 탄압을 피해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그가 노래한 주옥같은 명곡들은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그를 민중의 대모로 추앙받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뮤지션들이 대부분 싱어송라이터였던 것과 달리 소사는 작곡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사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누에바 깐시온의 최고의 해석자로서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 아르헨티나의 아리엘 라미레즈와 레온 히에코, 쿠바의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파블로 밀라네스 그리고 브라질의 밀톤 나시멘뚜와 쉬쿠 부아르키 등 소사의 목소리를 통해서 이들의 노래는 마치 소사 자신의 말과 음악인 것처럼 완벽하게 해석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타 파라의 [Gracias a la vida], 아따우알빠 유팡키의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스탠더드가 되는 노래들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이라는 별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1970년 세계 최초로 성립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인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이들 누에바 깐시온의 거장들에게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장했지만, 아옌데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고, 군사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 아옌데는 끝까지 대통령 궁을 사수하다 결국 군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아르헨티나의 2차 페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누에바 깐시온 운동진영에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1975년 아르헨티나의 군부 쿠데타로 극심한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79년 체포되어 추방되었고 프랑스로 망명한다.

이후 1982년까지 존 바에즈, 밥 딜런, 해리 벨라폰테 등과 반전 공연을 하며 전세계를 순회하던 소사의 목소리는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고, 스페인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소사의 목소리에 신들리듯 빨려들어 특별한 감동을 경험했다.

그녀는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와 함께 군부정권이 몰락함으로써 서글프게 민주화를 맞은 조국으로 돌아간다. 귀국 공연에서 그녀가 들려준 목소리는 놀라운 것이었다. 오랜 동안 고난을 겪어야 했던 민중의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들려주기도 하며, 때로는 신념에 찬 우렁찬 외침을 거침없이 청중들에게 전달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따뜻한 웃음과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었으며,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삶과 음악을 일치시킨 위대한 가수에게 바치는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었고, 오랜 동안 자리를 비웠던 조국에서 그 갈채는 극에 달했다.

이후 1997 년까지 활발한 앨범 활동과 공연활동을 펼치던 소사는 망명시절 겪어야 했던 오랜 정신적 고통과 불안의 축적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쓰러지고 만다. 무려 5개월 동안 병상에서 삶과 죽음을 오간 그는 무려 30kg이나 줄어든 몸이었지만 다시 1998년 기념비적인 앨범 [Al Despertar(잠에서 깨어나)]를 발표하여 평단과 관객의 갈채 속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도 세계를 순회하며 평화와 생명의 목소리로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그녀가 언제까지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 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대자연을 닮은 그의 절창은 앞으로도 영원히 고통받는 수많은 민중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신비의 목소리로 기억될 것이다.

글 / 조장훈

     

'라틴 아메리카의 목소리'라 불리는 아르헨티나 민중가수 메르체데스 소사(Mercedes Sosa)는 우렁차지만 저음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을 깨우는 듯한 노래로 인종과 민족을 떠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우리 나라에선 영화 '정사'의 사운드트랙에 그녀의 노래가 삽입되면서 그저 무드있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기억하기 쉽지만, 사실 미국의 포크가수 조안 바에즈(Joan Baez)처럼 적극적으로 정치적 운동에 나서며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양심적이고 용감한 가수로 유명하다.

메르체데스 소사는 1935년 아르헨티나의 San Miguel de Tucuman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많은 가수들이 그렇듯이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중심으로 이른바 'Nueva Cancion Movement'라는 당대 현실의 순수한 표현을 지향하는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 운동의 창시자인 시인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즈(Armando Tejada Gomez)와 가수였던 남편 마누엘 오스카 마투스(Manuel Oscar Matus)의 도움으로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 역시 각종 정치적 운동에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를 부르며 몇 장의 앨범을 발표한 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남미의 불안한 정국은 그녀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70년대로 넘어오면서 'Nueva Cancion 운동'은 칠레의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부에 의해 철저히 탄압을 받게 되었고 소사의 음악활동 역시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군사 정부의 감시를 받아오던 중에 1975년 공연 도중 청중들과 함께 체포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침내 1979년 그녀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3년간의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공백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82년 다시 복귀하여 성공적으로 공연을 가졌고 이후 지속적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순회공연을 가지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2000년 처음 신설된 라틴 그래미 시상식에서 Best Folk Album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35년 동안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포크가수로의 외길을 지켜온 그녀는 이 시대 최고의 포크가수로 손꼽힌다. 그리고 여전히 그런 그녀의 인생 역정은 사랑과 기쁨, 희망과 평화를 갈구하는 그녀의 노랫말에 그대로 녹아들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주고 있다.(조안 바에즈와 듀엣으로 부르는 "Gracias A La Vida"는 정말 감동적이다).

글/ 김승익(fernando@koreamusic.net)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