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인 '노동자의 아버지' 도요안 신부
구름에 뜬 신앙이 사람에게 위로는 줄 수 있어도 참된 聖德이란 일상 생활속에서 나타나는 것
최보식기자 congchi@chosun.com 2007.05.04
“신부님은 늙고 병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내 앞에서 수척한 노인으로 앉아 있는 벽안(碧眼)의 신부에게 물었다. 너무 말라서 잿빛 수도복과 면바지가 헐렁했다.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자루 포대 속에 몸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1959년 미국 신학생으로 한국에 왔고, 그 뒤로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 일하다가 이렇게 늙고 병들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노동자의 아버지’로, 다른 쪽에서는 ‘정치 선교사’로 불렸던 도요안(70) 신부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질문의 뜻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가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나는 질문을 반복했다.
“말을 다 알아 듣는데 대답하기 힘들어요. 사람은 늙어가야죠 뭐. 살아가면서 늙어가는 것이 느껴지죠.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마다 그 느낌이 다 달라요. 생겨난 대로 주어지는 대로 적응해야죠. 물론 늙고 병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걸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늙어가는 것도 삶의 한 부분 아닙니까? 난 그렇게 받아들여요.”
세상은 그를 모른다. 그는 뉴스에 날 만한 ‘사건’을 벌이지 않았고, 반정부 시위나 투쟁 대열에 앞장 선 적이 없었다.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시절, 그는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노동의 존엄성을, 노동이 공동선(共同善)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노동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행위임을 가르쳤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교육과 대화를 통해 진정한 변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쪽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권의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매스컴의 화끈한 조명을 받는 ‘뉴스 인물’은 아니었다. 노동계 안에서는 비폭력 노선으로 인해 정부 프락치로 오해 받은 적도 있었다. 이 땅에서 그런 세월을 40년 보낸 것이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 가톨릭 노동사목회관 숙소에서 만난 그는 어제도 하루 종일 투석을 받았다. 신장암으로 신장 하나를 떼어낸 뒤 나머지 신장에도 종양이 생겨 그마저 절반을 잘라낸 상태다. 매주 두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한다. 또 척추에도 종양이 생겨 척추와 갈비뼈를 이식했다. 그런데 얼굴빛은 맑았다.
―당초 한국땅에 왔을 때 이렇게 늙어갈 줄은 예상 못했지요?
“여러 사람들과 사건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난 시간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어요. 시간이 빨리 갔지요.”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알고 선택했습니까?
“6·25에 대해서만 알았고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었어요. 제가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수련하면서 선교사를 지원했지요.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니까, 위 어른들이 저를 한국으로 보냈어요. 김포공항이 막 퀀셋(Quonset) 막사로 지어졌을 때였지요. 거기서 영등포 도림동 천주교회로 가는데 온통 밭이었고 포장된 길이 없었어요. 추운 겨울에 왔지요.”
―내가 과연 여기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까?
“그런 생각은 없었지만 모험이었어요.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고 일하고 언어도 배워야 하고 문화도 알아야 했으니, 그런 복잡한 심정은 있었지요. 그러나 젊은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살아나갈 거라고 생각했죠.”
이틀 뒤 그는 밤기차로 광주에 내려갔다. 거기서 선교 업무와 함께 살레시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미국 돈 보스코 신학대 학생인 잭 트리솔리니는 ‘도요안’이 됐다. “다른 신부님이 제 이름을 지어줬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3년 뒤 유럽으로 신학 공부를 떠났다가 1968년 그는 정식 신부가 돼 되돌아왔다.
―왜 한국으로 되돌아 오신 겁니까?
“선교지역이 이쪽으로 발령났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시작을 했으니 끝까지 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다른 문화에 들어가서 깊이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데로 가겠어요?”
―그 당시 한국은 보잘것없지 않았습니까? 말하자면 더럽고 가난하고.
“더럽고 가난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해요. 제가 미국에 살았을 때 거기도 굉장히 가난했죠. 여기로 오기 직전까지 그랬으니까, 저는 가난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다시 오신 뒤로 왜 하필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게 됐나요?
“원래 도림동 영등포 지역에 공장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때는 제일 먼저 산업화 된 지역이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요. 내가 속한 살레시오 수도회는 원래 근로청소년을 위한 사명감이 있어요. 또 제 가족들도 다 노동계 사람들이었어요. 어머니는 공장 생활을 했고 아버지도 트럭운전수였고, 저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그분은 선반 기술자였지요. 우리 가족이 다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왜 성직을 택하셨죠?
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하느님께서 저를 불렀죠. 불렀기 때문에 그랬어요.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이런 길로 못 가지요”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한국 노동계와 함께 컸다고 봐요. 처음 도착한 1959년부터 3년간 광주에서 보냈는데 그때는 거의 산업이 없었죠. 그런데 다시 왔던 1968년에는 한국의 산업화가 시작됐어요. 그러니까 모든 게 새로웠죠. 아이들은 무작정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저는 이들을 위한 기술 교육 시설을 만들었고, 기숙사를 운영했고,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지요.”
―언어소통이 되었습니까?
“사람들과 계속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배웠지요. 모르면 많이 배우게 돼요.”
―신부님은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도 받아주러 다니셨다면서요?
“과거에 여러 번 있었어요. 정부의 근로감독관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안 했죠.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 밖에 없었죠. 요즘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서 그런 문제가 있지, 한국 안에서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문제가 드물죠.”
―돈 받으러 갈 때 어떻게 했습니까?
“기업주를 설득시켜야죠. 사람이 일했는데 왜 돈을 안 줘요. 그렇잖아요? 돈이 없다는 기업주도 있지만 자기 사업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싶어서 돈을 안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그러나 일을 시켰으면 임금을 줘야죠.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직접 임금을 받아냈습니까?
“직접 제가 받으면, 브로커지. 될 수 있는 대로 회사 상사들을 설득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만 오는 거지요. 내가 찾아가면 당황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고 대꾸하고 시비를 걸려고 했지요. 아무튼 여러 반응이 있었지, 한가지가 아닙니다.”
―신부님은 ‘악덕 고용주’라는 표현에 동의를 합니까?
“제가 마음 속에 악덕기업주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그런 걸 표현하면 합의를 못 봐요. 중요한 것은 합의를 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는 거죠. 옛날과 비교하면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은 많이 강해졌고 제 역할을 하게 됐죠. 때때로 너무 지나치게 강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있어요.
이제 보호 받지 못하는 근로자 문제는 비정규직이에요. 이는 굉장히 광범한 개념이지만, 소위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같은 일 하면서도 월급 30~40%를 덜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는 빠른 시일 내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하지요. 빈부차이가 너무 생기기 전에 그래야 합니다.”
―항상 노동자의 편이었지요?
“항상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올바른 방향의 편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노동자가 잘못하면 그것도 지적을 해야 하죠. 그럴 수도 있죠.”
―노동자에게 야단을 친 적도 있습니까?
“야단 칠 필요가 없고, 야단 칠 역할이 아니에요. 제 역할은 이성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업주나 근로자들에게 ‘이것은 옳다, 옳지 않다’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지요.”
―영세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용주의 고충도 많지요?
“특히 작은 기업주들의 어려움이 많다고 봐요. 우리나라에서(그는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했다) 재벌이 운영하는 큰 회사의 근로자들은 월급도 잘 받고 그렇지만,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고생을 많이 합니다. 하청업자들이 큰 기업주한테서 돈을 받지 못하면, 하청업자의 근로자들도 돈을 제대로 받지도 못해요. 그게 큰 문제일 거예요.”
―신부님은 1970년 전태일(全泰壹) 분신 자살 사건 때 현장에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없었어요. 제가 그 사건 이후 신문을 보고 전태일 친구들을 찾아갔을 뿐이죠. 그 전에 어떻게 알아요. 점쟁이도 아니고. 그때까지 평화시장에 대해서도 몰랐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한국 노동계를 발견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죠. 한국에는 항상 새로운 현상이 생기는 법이죠. 전태일 친구들과 함께 평화시장을 여러 번 돌아다녔죠. ‘토끼장’을 알아요? 평화시장의 미싱 작업장에서 여자아이들이 몸을 구겨서 앉을 수는 있어도, 머리가 다락 천정에 닿아서 서 있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토끼장이라고 불렀죠.”
―그런 상황을 보고 신부님은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아프죠.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인데. 시골에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살 아주 어린 여자아이들이 환경도 안 좋은 데서 일하면서, 결핵에 걸리고 다른 병들도 많이 있었어요. 당시 전태일 친구들이 ‘여자 근로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그런 사람 필요하다’고 해서, 가톨릭 노동청년회 여자멤버 중에 적당한 사람을 찾아 보내줬어요. 그 여자분이 노조를 만들었고 거기에 몇 천명이 가입했어요. 근로자들 중에는 계속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부분 형편이 안 됐어요. 그래서 교실을 만들었고, 의원(醫院)도 지었어요. 하지만 1980년에 삼청교육대, 그런 거 있었죠? 그래서 노조위원장은 감옥에 끌려갔고, 교실은 없어지고 의원도 없어지고 그랬습니다.”
―정말 고용주를 미워한 적이 없나요?
“옛날에는 몇 명 미웠죠. 그러니까 그 얘기를 안 할거예요. 진짜 악(惡)으로 아이들을 이용하는 기업주는 참 안 좋아요. 특히 그런 사람들이 소위 천주교 신자라고 밝히면, 그것에 대해서 참 답답하게 생각했죠. 어떤 여자 사장이 있었는데, 그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은 공장에서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일했어요. 성탄절이나 쉬는 날이 있으면 그걸 채우기 위해 미리 24시간 일을 더 시켰어요. 그 여자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때 항상 제 선물을 가지고 와요. 어느 날 그 여자가 와서 아주 맛있는 것을 주었는데, 제가 ‘제발 주지 마십시오. 그냥 가지고 가라’고 했어요(당시 기억에 그는 괴로운 듯 손사래를 쳤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인간다운 시간표를 마련해주면 어떤 선물보다 낫다’고 했어요.”
―노동자의 권익은 결국 노조 운동을 통해서 지켜지는 것으로 보았나요?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참된 노동 운동, 노조 활동은 노동자들의 올바른 복지를 위한 활동일 뿐이라고 했어요. 노조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고 항상 말했어요. 노조활동을 진짜 노동자들의 복지 촉진을 위해 제대로 한다면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현장은 정치현장이었지요. 그래서 신부님은 ‘정치 신부’라는 비판을 받은 건가요?
“그런 비판을 받았어도, 저는 정치개입을 안 합니다. 옛날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래요.”
―박정희 정권 시절 반(反)정부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나요?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나를 ‘반정부 선교사’로 판단했죠. 공항출입국 대장의 제 이름 밑에는 빨간 두 줄이 그어져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당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과거에 기분 나쁜 게 한 두 번도 아니었어요. 노동자들에게 지나친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해요. 그런데 박정희 시대 때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굉장히 많은 나라들을 보세요. 그 쪽 권력자들은 돈을 모아서 외국으로 보냈죠. 한국에서는 그런 게 비교적 드물었어요.”
―노동자의 희생은 국가 발전 단계에서 불가피한 것이었을까요?
“좀 합리적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좀 더 대화가 있었더라면 그만큼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중요해요. 지도자가 대화하도록 그런 분위기를 마련하면,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당시의 한국이 현재의 이런 한국이 될 것이라고 예상 했습니까?
“한국 사람들은 정말 자유롭게 살수 있으면 굉장히 좋게 발전할 것으로 생각했죠. 그러니까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어요.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계속해서 발전이 있었잖아요. 난 희망으로 봤어요.”
―거리에서 투쟁 같은 것은 안 하셨나요?
“(고개를 흔들면서) 그런데 투쟁이라는 말이 올바른 것을 주장하는 뜻이라면, 투쟁이라고 하세요. 올바른 것에 대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죠.”
―신부님이 생각하는 올바른 것은 항상 올바른 것입니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에요…. 1960~70년대 한국에서 제일 고생하는 사람들이 젊은 노동자들이었죠.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 구조를 옛날 젊은 노동자들이 다 건설한 거예요. 물론 정주영, 이병철이나 이렇게 큰 재벌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한국노동자들 없이는 못 했을 거예요. 정주영 같은 분도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어떤 무리 속에 집어 넣으면 아마 그렇게 (큰 기업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시골에서 서울로 막 올라왔어도, 일생 동안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교육에 대한 갈망도 있었지요.
어떤 근로자 모임에 기업주가 ‘너희들 게을러서 무식하다’고 그랬다는데, 내가 아이들에게 ‘게을러요? 무식해요?’라고 묻습니다. 게으르고 무식한 사람이 있긴 있지만 대다수는 안 그래요. 부지런하게 똑똑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 제가 주로 걱정하는 분야가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이지요. 그 사람들이 자주 임금 체불을 당하고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를 못해요.”
―이주노동자들을 대하는 걸 보면 한국사람들이 모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난 항상 광범위하게 대답하기 싫어요. 케이스 별로 달라져요. 왜냐하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어요. 우리나라 기업주들 중에 아주 잔인한 사람들도 있고 불쌍한 사람들도 있어요. 재작년인가 태국 여성들이 안산의 공장에서 무슨 가스 유출로 몸이 마비됐지요. 기업주가 안전장치에 대해 너무 생각을 안 한 거죠. 그런 기업주는 나쁘죠.”
―그런 사람들도 나중에 구원될 수 있습니까?
“그건 하느님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에요. 누가 구원 받는가 안 받는가,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인데, 그러니까 우리도 죽이는 일에 협조하면 안되죠.”
―외국에서는 한국의 노조를 ‘강성(强性)노조’라고 합니다. 신부님 견해는 어떤가요?
“아직도 배우는 과정 아닙니까? 그런데 기업주도 자기 문제가 없어요? 양쪽이 문제가 있을 거예요. 서로 대화하는 것을 배워야죠. 노동운동의 기술은 노사가 좀 절충할 줄 알고, 서서히 함께 커야지요.”
―구원과 영성(靈性)을 생각하는 성직자로서 사회현실에 너무 개입한다는 고민은 없었습니까?
“일상생활을 통하여, 자기 삶을 건설하고 자기의 영원한 운명도 건설해요. 나는 그렇게 봐요. 구름에 뜬 신앙이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는 있어도, 참된 성덕(聖德)이라는 것은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야죠. 십계명을 보세요. 십계명도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기준이에요.”
―혼자 살면 외롭지 않습니까?
보름 전 그는 사제 서품 40년을 맞았다.
“혼자 사는 것은 아니고. 내가 속한 살레시오 수도회 공동체가 있어요. 내가 아프니까 여기 와있는데 다른 신부님, 서울 교구 신부님들과 함께 살고 있어 외로울 시간이 없어요. 사람들도 여기 많이 찾아오고. 생활이 바빠요. 내가 좀 건강이 더 좋으면 더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데 옛날과 비교하면 덜 해요.”
―평생을 이렇게 사셨는데 그렇게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다는 뜻인가요?
“혼자 있다고 외로운 것이 아니오. 가족이 있다고 해서 외로움을 안 느껴봤어요? 누구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지요. 물론 저도 때때로 혼자라는 생각도 있어요. 그렇지만 내 위주로 생각하는 시간이 없어요. 혼자 있을 때는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참 온전하게 보낼 수도 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걸 어떻게 대답해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하겠죠.”
―신부님은 화를 잘 안내실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화를 잘 냈다고 사람들이 말을 해요. 나이를 더 먹어보세요. 남자는 늙어가면 아주 순해져요.”
그는 아이처럼 웃었지만, 그 웃음 속에도 피로한 기색이 있었다. 몸이 불편한 신부는 숙소의 문 기둥에 기대어 우리를 작별했다. 바지가 여전히 헐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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