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슈만 - 정신병동에서 죽어간 낭만파의 대가│香音 클래식

리차드 강 2016. 1. 20. 15:00

슈만 - 정신병동에서 죽어간 낭만파의 대가

슈만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54

Robert Schumann 1810-1856 독일

1. Allegro affettuoso

 

Emil Gilels, piano - Karl Bohm - London Symphony Orchestra

     

슈만 - 정신병동에서 죽어간 낭만파의 대가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작곡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논하는 글에서 슈만의 창조력의 쇠퇴를 호되게 비판했다. '슈만의 마지막 작품을 거론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작곡된 최후의 음악은 그의 정신력과 상상력이 한결같이 쇠퇴를 거듭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뿐인, 연속적인 현상에 최후의 일익을 담당한 데 불과했다. 그는 지각도 없었고 자기비판의 능력도 없었다. 사실 슈만은 자신의 불멸성의 몫을 상실함이 없이 로써 창작을 중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좀 너무 심한 소리 같지만, 사실 슈만의 명성이 각광을 받았던 것이 그의 초기작품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슈만은 1830년, 즉 20세 때 작품1 <아베그 변주곡>을 완성한 이후로 처음엔 순전히 피아노곡만을 작곡했는데(작품 23까지) 그의 걸작에 속하는 가장 독창적인 <사육제-작품9>와 아인슈타인의 이른바 은 모두 그가 20대 때 작곡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주장대로라면 슈만은 26세에 작곡을 중단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슈만은 그 자신 '나이팅게일처럼 - 죽을 때까지 노래한다' 고 말했듯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가곡을 작곡했으며, 심포니, 오페라, 합창곡, 실내악 할 것 없이 음악의 모든 형식을 두루 섭렵하면서 계속 작곡을 했지만, 연령에 비례해서 영감이 점차 그를 저버렸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음악의 영역에서 일찍이 개화한 천재가 끊임없는 쇠퇴의 징후를 보여주는 예로서 로베르트 슈만만큼 두드러진 경우도 드물 것이다. 슈만의 이와 같이 창조력의 쇠퇴는 그의 복잡한 정신생활과 무관하지 않은 육체적 질병에서 초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슈만은 지난 1세기 동안 의학상의 아주 다양한 판단의 검토 대상이 되어 왔으며, 따라서 신중한 감식진단상의 논쟁의 변천은 바로 그 자체가 의학사의 한 장에 필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슈만의 생애는 초인적인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희생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 싶다.

로베르트 슈만은 다섯 남매 중의 맨 막내로, 저술가며 출판업자였던 그의 부친은 슈만이 태어나던 해(1810년)에 신경질환을 앓게 되어 여생을 이 병으로 시달리게 되는데, 슈만의 평생의 지병이라 할 신경증은 부친에게서 그 소질이 유전되었을 것이다. 교양 있는 유복한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슈만은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소년이었으나 15세 때 부친과 누이를 사별하고 또 뒤엔 형수와 형의 죽음을 잇따라 겪은 다음부터 점차 과묵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형수의 죽음으로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슈만은 4층의 창 밖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위층에서 사는 데 공포를 느껴 곧 같은 집의 아래층으로 이사했는데, 이 고소 공포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이미 슈만은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생기가 가끔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이미 가끔 거의 정신착란의 상태에 빠지곤 한다.'

17세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속에서 슈만은 자신이 정신이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자주 토로하고 있다. 또한 그는 18세 경에 이미 환청을 경험하고 있다. '영원한 음악이 밤새도록 들려와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1831년 라이프찌히에 체류했을 땐 콜레라 공포증에 걸려 그는 로마로 도피여행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아무튼 그의 일기는 불안에 짓눌리는 한 영혼의 위대한 고뇌의 기록이라 할 만한 것이다. '격렬한 충혈,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감, 숨막힘, 순간적인 의식상실 등이 쉴새없이 번갈아 일어났다. - 1833년', '나 자신을 스스로 고문하듯이 무서운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 1837년', '파멸이 다가왔는지 혹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것인지... 나는 이제 완전히 제 정신이 잃은 불쌍한 사람이나 다름없다. - 1845년', '독살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공포, 그리고 특히 금속으로 된 물건에 대한 공포감' 등등... 참으로 정신분석학의 살아 있는 표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흔히 슈만을 논할 때 그가 음악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완전한 지성인' 이라는 사실이 자주 강조되지만, 실제로 지식인으로서의 음악가, 시인이면서 높은 교양을 지니기도 했던 작곡가란 그리 흔치 않다. 음악가란 일종의 하청업자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널리 못 박혀 있었던 당시에 슈만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 듯이 작곡을 하는 장인으로서가 아니라 사상으로 음악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유형에 속했던 것이다. 물론 심오하고 교양이 깊은 정신이 만들어 낸 음악이 반드시 더 위대한 것인가는 별문제에 속한다. 오히려 슈만에게 있어선 과도한 자기분석과 지나치게 복잡한 정신, 높은 교양, 심오한 사상 등이 창작에 방해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음악학자들은 자발적인 영감에 인도된 청년시절의 그의 작품을 최고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창작으로 자신을 소모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쉬지 않고 계속 작곡을 했지만, 갈수록 그의 음악은 양에 비례해서 질적으로 저하되었으며, 심지어 1850년 이후의 작품들은 차라리 슈만의 창작 목록에서 제거되는 것만 못하다고 극언하는 평자들도 많다. 대체로 학자들은 1846년에 작곡한 피아노 햡주곡 가단조를 적어도 슈만의 가장 독자적인 천재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최후의 것, 즉 그의 [백조의 노래]로 보고 있다. - 제1부

슈만의 만년의 작품 속에는 창작에 대한 의지와 이미 더 이상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절망적인 심리상태와의 깊은 단절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그는 마치 사제가 종교에 헌신하듯이 음악의 사도로서 예술에 봉사했던 것이지만, 그의 체력은 그의 창작욕을 감당하지 못했다. 후일 슈만의 딸 오이게니가 자신의 부친은 정신의 과로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도 이런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의 가장 친근한 가족조차 이 음울하고 사귀기 어려운데다 신경이 과민하고 변덕스러운 남자가 어떠한 강박관념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가를 뚜렷이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자신의 생명력을 서서히 파괴하는 대가에 의하여 창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슈만은 낭만주의 음악의 중심인물로 많은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 작곡가의 정수를 대변한다. 그의 음악은 시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 그 자신 '나는 나의 음악교사에게서 보다 훨씬 더 잔 파울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고 고백했을 정도로 잔 파울은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또는 베버보다 한층 더 그의 음악적 창조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또한 작가이며 작곡가였던 호프만과 괴테 및 바이런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애매한 갈망과 파괴적인 정신구조, 그리고 이른바 [베르테르 유형]의 자살유행병 같은 것으로 깊이 물들어 있었던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슈만의 풍부한 감수성과 감각 과민증, 그리고 폐쇄적인 성격과 마치 정상과 비정상 사이를 줄다리기하는 것 같은 그의 내면 생활 등을 생각해 볼 때, 그가 평생에 걸쳐 지옥과도 같은 고뇌와 갈등, 거기다 온갖 복잡한 육체적 질병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무서운 창작력에 소진되어 서서히 붕괴해 간 그의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던 것이다.

1850년 40세가 되던 해에 슈만은 뒤셀도르프 시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었다. 처음에 힐러로부터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청을 받았을 때 슈만은 그곳에 정신요양원이 있다는 것이 불안해서(그는 광기를 상기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싫어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시의 끈질긴 요청에 제의를 수락했던 것이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이 새로운 지위가 그에게 행복과 성공을 보장해 주는 듯 싶었으나 얼마가지 않아 이 과묵하고 내성적인 작곡가와 사교적이고 수다스런 라인란트인들 사이엔 심한 오해가 생겨났다. 슈만은 이들을 음악에 진지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생각했고, 한편 힐러 밑에서 잘 훈련된 코러스와 오케스트라는 그의 느슨한 기율과 지휘자로서의 결함을 의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뒤셀도르프의 신문들도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1850-51년의 시즌 동안 슈만은 도합 8회의 예약 연주회를 지휘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신작인 <미뇽을 위한 레퀴엠- 11월 21일>, <신년 노래 - 1월 11일>, <내림 B장조 심포니 - 2월 6일>, 그리고 <밤의 노래>와 실러의 <메시아의 신부>에 부친 '서곡"(둘다 3월 13일) 등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큰 조직의 지휘자로서 부적합했던 슈만은 대도시적인 음악경영체의 내부에 으례 야기되는 불화와 숨겨진 음모, 자신의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갈수록 이 직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1853년 10월 27일의 연주회가 그가 뒤셀도르프에서 지휘한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심히 모욕당한 기분으로 뒤셀도르프를 떠났다.

뒤셀도르프 체류 당시 그의 건강이 얼마나 나빴던가는 그 자신의 다음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는 1년 중 거의 절반은 심한 신경난조 때문에 병적 상태에 있었다.' 1852년 봄에 루머티스성 질환, 심각한 우울증, 그리고 지속적인 불면증이 시작되었으며, 그는 리허설 도중에도 피로 때문에 쉬어야만 했다. 게다가 그는 지휘하고 있을 때 가끔 모든 박자가 너무 빠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의사가 권한 라인의 수욕요법도, 부인 클라라와 함께 쉐베닝겐으로 간 보양여행도 아무 효과가 없었으며, 현기증 발작과 환청이 잇따라 일어났다. 1853년 7월엔 결국 신경졸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치료를 맡았던 의사는 단언했다. '이 사람은 불치의 뇌질환에 걸려 이미 절망적 상태입니다.'

슈만이 1853년 9월 30일자의 일기 속에 '함부르크에서 온 브람스씨' 라고 기입했을 때, 모든 점에서 그의 생애가 종말에 와 있다는 것을 그 자신 감지했을까?

슈만은 당시 스무 두 살된 바이올리스트 요아힘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를 위해 바이올린을 위한 환상곡과 협주곡을 작곡한 적이 있는데, 브람스는 이 요아힘의 새로운 친구로서 뒤셀도르프 슈만 가를 방문했던 것이다. 당시 브람스는 스무 살이었다. 슈만이 기우는 달이었다면 브람스는 떠오르는 별이었다. 작곡가로서도 피아니스트로서도 브람스는 슈만 부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슈만은 당장에 [새로운 길]이란 제목의 글로써 자신의 열광을 표현했으며, 이 글은 10월 28일자의 [음악 신시보] 에 발표되었다. 여기서 브람스는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하는 사람' 이란 호칭을 달고 세상에 소개되고 예고되었다. 세상이 아직 그의 작품의 단 한 음부도 들어보기 전에, 슈만의 추천에 따라 유명한 음악출판사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사는 브람스의 작품을 보지도 않고 받아들였다. - 제2부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가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는 바로 슈만의 창작 활동의 마지막 단계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운명의 비통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당시 클라라는 서른 네 살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 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미모와 재능에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느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다. 이 시기에 슈만은 클라리넷과 비올라 및 피아노를 위한 '작품 132'를 비롯해서 '피아노를 위한 로만쩨' 다섯 곡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했지만, 이 같은 창작의 양에 비해 질적으로는 훨씬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실 클라라와 요아힘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연주를 솔직히 거절했다.

거기다 뒤셀도르프 시의 음악감독의 직위도 사실상 상실된 상태였고(슈만이 떠난 뒤에도 시는 1855년까지 디렉터의 봉급을 그에게 지불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별도의 계약이 이루어질 구체적인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아마도 이때 이미 클라라와 불화가 숨길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던 듯하다. 문자 그대로 슈만은 사면초가였다. 1854년 2월초에 슈만이 요아힘에게 쓴 편지 속에는 그의 건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나는 이제 마지막입니다.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잉크로 자주 당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또한 글과 글 사이엔 후에 가서야 밝혀질 암호가 들어 있답니다.'

2월 10일에 슈만은 '심히 고통스러운 청각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날 밤에도 되풀이되었고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제 그는 머릿속에 끊임없이 울리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음악'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 환상은 특히 그의 다른 고통과 관련해서 매독의 진단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17일에 그는 한밤중에 일어나 천사들이 그에게 노래해 주었다는 내림 E장조의 주제(실제로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의 메아리임) 을 작곡했다. 그러나 18일과 19일에 천사들은 호랑이와 하이에나 모양의 악마들로 대치되어 [지옥]의 공포로써 그를 협박했다. 이따금 천사의 목소리가 위안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나 이 같은 상태는 1주일이나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간간이 맑은 정신이 들었을 때 두 통의 사무적 편지를 쓰고 내림 E장조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곡을 작곡할 수 있었다.

26일 저녁에 슈만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기를 정신요양원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클라라와 의사는 그를 설득해서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전날 작곡한 변주곡들을 깨끗이 복사한 뒤, 잠시 혼자 있게 된 틈을 타 집을 뛰쳐나가 라인 강의 다리 위에서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날은 사육제의 월요일이었는데, 그는 우선 결혼반지를 강물에 던지고 나서 이어 자신도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부들에 의해 구출4되어 집으로 실려 왔다. 이후 여러 발 동안 집에 있으면서 그는 클라라를 절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4일에 본 근처의 엔데니히에 있는 리하르쯔 박사의 사설 요양원으로 실려 가게 됐을 때까지도 그는 결코 클라라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슈만의 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날, 자살하려고 집을 나섰을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어머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옆방의 문이 열렸고, 아버지가 거기에 잠옷 바람으로 서 계셨습니다. 얼굴은 몹시 창백했습니다. -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치셨습니다. '오오, 하나님!' 그런 뒤 아버지는 다시 사라지셨습니다. 나는 아버지 방으로 가보았으나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가 방에서 다시 나왔을 때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크게 소리치며 우리집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부들이 아버지를 강에서 끌어올렸던 것이지요. 가까이 가보니 아버지는 두사람의 팔에 안긴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한 사람의 감시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며칠 후에는 마차에 태워져 떠나 버리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위의 창가에 서서 아버지가 마차에 오르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마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안마당까지 들어와 있었거든요. 하젠클레버 박사와 감시인이 아버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아버지가 곧 건강을 되찾고 돌아오실 거라고 말했지만, 우리 곁에 같이 서서 보고 있던 처녀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슈만은 8시간 동안이나 마차 속에서 흔들리고 난 후 엔데니히 요양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격리된 신세가 되었다.요양원에 수용된 이후 슈만의 상태는 점차 회복되어 산책도 하고 다시 작곡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환각도 없어졌으나 여전히 그에겐 약간의 위치감각의 장애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불안증은 아직도 가끔 재발되었는데, 그럴 때면 그는 실내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왔다 갔다하며 때로는 무릎을 꿇기도 하고 손을 비틀어 짜기도 했다. 또한 그는 클라라에게 수개월 동안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았다. - 제3부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는 클라라의 편지를 원했고 9월 14일엔 그녀에게 답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7개월 동안 클라라와 브람스, 요아힘 그리고 출판업자 짐록과도 통신을 계속했다. 클라라의 초상화는 1년이 지나서 가져오게 했는데, 요양원으로 슈만을 방문했던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당시 초상화를 대하던 슈만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오오, 내가 당신의 사진을 그에게 갖다 주었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깊은 감동을 당신이 보셨더라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서 점점 가까이 사진을 들여다보다 마침내 그는 입을 뗐습니다. '아아, 얼마나 오랫동안 원하던 초상화인가.' 그리고 사진을 내려놓았을 때 그의 두 손은 몹시 떨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한층 가까이 대고 사진을 자꾸 응시했답니다.(1855년 2월 23일-24일자로 뒤셀도르프에서 베를린의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

요아힘과 브람스는 슈만을 방문했지만, 의사들은 클라라가 요양원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의 출현이 슈만을 흥분시켜 상태를 악화시킬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2월에 브람스가 방문했을 땐 네 시간 동안이나 두 사람은 함께 있으면서 피아노로 듀엣을 연주하기까지 했다. 이때 슈만은 정신이 지극히 명료했고 기분도 좋았으며 요양원 밖에까지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다. 때때로 그는 엔데니히에서 멀리 떠나고 싶다는 갈망을 은밀히 브람스에게 털어놓곤 했다. 그리고 이 같은 갈망은 뒤에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시 되풀이되고 있다.

최근 우리가 한 산책은 그리 멀리 나간 게 아니었네. 훨씬 더 멀리 나갔어야 했는데, 이곳에서 완전히 멀리! 1854년 3월 이래 1년 이상이나 똑같은 생활, 똑같은 풍경일세, 다른 장소로 멀리 가고 싶네! 생각해 봐 주게! 벤라트는 너무 가깝고, 도이츠나 혹은 뮐하임이 어떨는지(1855년 3월 11일자의 편지)

그러나 슈만의 간절한 소망은 끝내 충족되지 못했다. 만약에 그의 소망대로 장소를 멀리 옮겼더라면 상태가 나아졌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같은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파가니니 기상곡> 악보(작품 3과 10인 편곡이 아니고, 그가 발병 직전 착수하고 있던 피아노 반주용)을 보내 달라고 하면서 악보용지도 부탁하고 있다. 어쨌든 그는 죽을 때까지 작곡을 멈출 수는 없었던 것이다.

브람스는 4월 2일에 다시 슈만을 방문했지만, 이 방문은 슈만을 몹시 흥분시켰다. 슈만은 자신의 염원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점점 더 정신이 이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855년 여름에 슈만의 친구로서 그의 전기를 남긴 J. 폰 바질리예프스키는 열려 있는 문을 통해 슈만이 피아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정신과 육체적인 힘을 깡그리 파괴당한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심장이 찢어질 듯이 고통스럽다...'

슈만의 체력은 날로 쇠퇴해 갔으며, 취각과 미각 장애 외에 양쪽 발에는 심한 부종까지 나타나 있었다. 5월 5일 클라라에게 쓴 편지는 클라라가 그에게서 받은 최후의 편지였다. 9월 10일에 리히르츠 박사는 완전한 회복이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클라라에게 알렸다.

1856년 6월 8일, 슈만의 46회 생일에 브람스는 슈만이 그가 생일선물로 준 지도를 펴 놓고 도시와 나라들의 알파벳식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7월 23일엔 엔데니히로부터 슈만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고 클라라가 달려왔다. 그러나 위기는 지나갔고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을 보지 못한 채 뒤셀도르프로 돌아갔다. 그녀는 27일에 브람스와 함께 엔데니히로 다시 와서 거의 2년 반만에 처음으로 남편을 만났다. 그는 클라라를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겨우 '나의 - 나는 알고 있어' 라고 만 말했을 뿐이다. 슈만은 죽기 전 몇 달 동안은 발음이 분명치 않은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7월 28일엔 심한 정신 경련이 종일토록 계속되었으나 브람스와 클라라는 벽의 작은 창을 통해 그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수주일 동안 슈만은 음식물의 섭취를 거부했으며, 다만 클라라의 손으로 약간의 포도주와 젤리가 입 속으로 넣어졌을 뿐이다.

7월 29일, 화요일 오후 4시에 슈만은 마침내 그토록 오랜 인고의 삶에서 해방되었다. [해방] - 과연 이 말 이상으로 그의 죽음에 적합한 표현이 달리 또 있을까? 죽음에 의해서만 이 불우한 천재는 그의 생명을 끊임없이 소진시키는 자신과의 격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최후의 수 시간 동안 그는 아주 조용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히 잠들었다. 임종의 순간에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슈만이 스승으로 삼았던 잔 파울의 말처럼 낭만주의란 진실로 '한계가 없는 아름다움'이라면, 아마도 모든 예술가 가운데 가장 낭만적이었던 슈만이야말로 이와 같은 아름다움과의 영적 교섭을 통해 점차 이 지상에선 생존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그리하여 그는 이승의 마지막 벗이었던 젊은 브람스에게 기꺼이 독일 낭만주의의 성화를 맡겼던 것이다.

글 : 음악가의 만년과 죽음

     

     

Piano Concerto in A minor, Op.54

슈만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Op.54

작품개요 및 배경

슈만은 1810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하는 문학가였다. 그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친은 그것을 불안히 여겨서 라이프찌히 대학에 보내서 법률을 공부시키지만 그는 이 대학의 비크박사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가 음악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음악에의 열정이 지나쳐서 슈만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만다. 그래서 연주가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린 슈만은 작곡과 지휘 평론 등에 길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그의 이름을 드높게 만들었다. 비크박사와의 관계로 슈만은 그의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비크박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승리를 거두어서 맺어지게 된다. 결혼 문제로 오래 동안 비크박사와의 다툼에 심신이 피로해진 슈만은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1856년 7월 29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팔에 안겨 편안히 생애를 마쳤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은 가곡이 있으며 음악 평론집 "음악과 음악가"가있다. 슈만은 피아노 독주곡에서는 수많은 걸작을 썼으나 피아노 협주곡은 이 한 곡을 완성했을 뿐이다. 20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30세가 되기까지는 피아노 독주곡만을 작곡했으며 1840년에는 가곡을 이듬해인 1841년에는 관현악곡을 중심으로 작곡했다. 이러한 변화는 클라라와 결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협주곡의 최대의 특징은 제1악장의 제1주제가 제2악장과 제3악장에서도 변형되어 활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멘델스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슈만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피아노만을 중요하게 다룬 것이 아니라 관현악과의 일체성 속에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발휘된 작품이다. 낭만적인 향기가 감도는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동일한 악기편성에 의한 모차르트 K581(수타틀러 5중주)과 쌍벽을 이루는 걸작으로서 이 두작품은 또한 클라리넷을 쓴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빼어난 명작들이다. 이후 브람스와 뮐펠트는 함께 자주 연주회를 하게 되었으며 뮐펠트는 넓은 지역을 다니며 브람스가 그에게 작곡해 준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작품 구성

[악기편성] 피아노, 플룻2, 오보에2, 클라리넷2, 파곳2, 호른2, 트럼펫2, 팀파니와 현악5부.

 

제 1악장 Allegro affettuoso a단조 4/4박자

독특한 무드를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악장이다. 관현악의 화음과 강력하고 리드미컬한 독주 피아노에 의한 인상적인 서주 후에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로맨틱하고 쓸쓸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는 제2, 제3악장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멜로디이다. 독주 피아노가 주제를 확보하여 발전시키는데, 이 동안에 관현악이 여러 가지 형태로 주제의 동기를 보여준다. 클라리넷으로 부는 멜로디가 제2주제에 해당하지만, 음형으로서는 제1주제와 비슷하며, 고전적 소나타 형식처럼 확실한 분석은 불가능하다. 독주 피아노가 주제의 동기를 투티로써 높게 연주하여 전개부로 들어가고 있다. 속도는 안단테로 느려지며, 독주 피아노와 클라리넷, 플룻이 주제를 전개하는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부분이다. 돌연 독주 피아노가 격렬하게 서주를 나타내서 관현악과 번갈아 가며 진행되고, 조바꿈을 겹친 후에 목관 악기가 제1주제를 a단조로써 불어서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에서는 제시부에서 나온 멜로디를 여러 가지로 변형, 처리하여 슈만이 쓴 카덴짜로 들어간다. 코다에 이르러 알레그로 몰토로 속도를 빨리하여 화려하게 마치고 있다.

 

제 2악장 Andante grazioso F장조 2/4박자

3부 형식으로 간주곡(Intermezzo)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지극히 달콤한 정감에 차 있으며 낭만적이며 느긋한 협주곡풍의 목가라고도 할 수 있다. 현과 피아노의 아름다운 응답으로 주제가 펼쳐나간다. 이러한 분위기는 아마도 지금까지의 협주곡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일 것이다. 이것이 1악장 제1주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중간부는 C장조로, 갑자기 첼로에 표정이 풍부한 낭만적인 선율이 연주된다. 이때에 피아노의 움직임은 아주 슈만답다. 이것을 다른 악기가 이어받고 F장조로 돌아온다. 곡은 다시 제1부의 재현에 해당되고 있는 제3부에 접어들어서 최후에는 속도를 점차적으로 늦추어서 1악장의 제1주제를 클라리넷과 파곳으로 느긋하게 장조와 단조로 두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는 쉴 틈 없이 바로 제3악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 3악장 Allegro vivace A장조 3/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 첫머리의 강력한 제1주제가 독주 피아노로 연주되는데, 이것도 제1악장의 제1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주제는 독주 피아노에 의해서 확보되고 진행되며 현악기에 의한 리드미컬한 제2주제로 전개된다. 이곳은 C장조로 조바꿈되어 있다. 단순한 음형이기는 하지만, 쉼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3박자가 아닌, 2박자로 들리는 교묘한 수법이다. 전개부는 관현악에 의한 제1주제의 투티로써 시작되며, 현악기가 푸가로써 전개된다. 오보에 등에 의한 인상적인 멜로디가 삽입되며, D장조로 제1주제가 나타나 재현부로 전개된다. F장조와 D장조는 개성적인 상호 관계는 없으나 감각적으로는 신선미가 있는 조바꿈이다. 슈만의 작품은 코다가 긴 편인데, 이 곡도 270마디를 넘는 긴 것이다. 관현악의 투티로 시작하여 흡사 전개부처럼 발전되어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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