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클라라 슈만: 가곡 Lorelai 外 - Barbara Bonney | 클래식 성악

리차드 강 2016. 1. 25. 05:11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 Lorelai

클라라 슈만 가곡 Lorelai 外

Clara Schumann (1819-1896)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Barbara Bonney, Soprano - Vladimir Ashkenazy, piano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결혼 전 이름은 Clara Josephine Wieck.

1819. 9. 13 라이프치히~1896. 5. 20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독일의 피아니스트·작곡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다. 아버지한테서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835년경에 이르자 전유럽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38년에 오스트리아 궁정의 인정을 받았고, 빈에 있는 음악 단체인 '악우협'(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했고, 1841~54년 8명의 아이를 낳았다. 결혼 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일 때문에 연주자로서의 활동이 줄어들었지만,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했으며 자주 순회여행을 다녔다. 1856년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죽은 후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와 직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고, 남편의 작품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을 했다(1881~93년 출판). 그녀가 남긴 작품으로는 관현악곡(피아노 협주곡 1곡을 포함), 실내악곡, 가곡, 여러 편의 피아노 독주 소품 등이 있고, 1983년 조앤 치셀에 의해 그녀의 전기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이 출판되었다.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ihm schlug beklommen mein Herz entgegen.
Wie konnt' ich ahnen, daß seine Bahnen
sich einen sollten meinen Wegen.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er hat genommen mein Herz verwegen.
Nahm er das meine? Nahm ich das seine?
Die beiden kamen sich entgegen.

Er ist gekommen in Sturm und Regen,
Nun ist gekommen des Frühlings Segen.
Der Freund zieht weiter, ich seh' es heiter,
denn er bleibt mein auf allen Wegen.

(Op. 12 No. 2) * 이 곡은 Friedrich Rückert (1788-1866)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그는 폭풍우를 뚫고 왔어요,

걱정스런 나의 마음이 두근거렸지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의 길이
나의 나의 길이 될 것이란 사실을?

그는 폭풍우를 뚫고 왔어요,
그는 나의 마음을 훔쳤어요 뻔뻔스럽게도.
그가 나의 마음을 훔쳤는가? 내가 그의 마음을 훔쳤는가?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뜻을 받아들였어요.

그는 폭풍우를 뚫고 왔어요,
이제 왔어요 봄의 축복이.
남자친구는 멀리 갔어요, 나는 그래도 즐거워요,
왜냐하면 그는 나의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곳에 있든지.

     

Lorelai

Lorelai

Heinrich Heine

Ich weiß nicht, was soll es bedeuten,
Daß ich so traurig bin;
Ein Märchen aus alten Zeiten,
Das kommt mir nicht aus dem Sinn.

Die Luft ist kühl und es dunkelt,
Und ruhig fließt der Rhein;
Der Gipfel des Berges funkelt

Die Schönste Jungfrau sitzet
Dort oben wunderbar,
Ihr goldenes Geschmeide blitzet,
Sie kämmt ihr goldenem Haar.

Sie kämmt es mit goldenem Kamme,
Und singt ein Lied dabei;
Das hat eine wundersame,
Gewaltige Melodie.

Den Schiffer im kleinen Schiffe
Ergreift es mit wildem Weh;
Er schaut nicht die Felsenriffe,
Er schaut nur hinauf in die Höh.

Ich glaube, die Wellen verschlungen
Am Ende Schiffer und Kahn;
Und das hat mit ihrem Singen
Die Lore-Ley getan.

 

로렐라이

하인리히 하이네

왜 그런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슬퍼지네.
옛날부터 전해오는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메아리쳐 사라지지 않네.

공기는 싸늘하고 해거름 드리웠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흘러가고...
산꼭대기는 저녁 노을로 눈부시게 빛나고

저 건너 언덕위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앉아,
금박의 장신구를 반짝거리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내리고 있네.

황금의 빗으로 머리 빗으며,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기이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선율의 노래를...

조그만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혀
암초는 바라보지도 않고,
언덕위만 쳐다보고...

마침내는 물결이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노래로써
로렐라이가 한 것이리라...

     
 

Lorelai

Barbara Bonney, Soprano
Vladimir Ashkenazy, piano

 
     

만은 24세인 1834년 무리한 연습 탓인지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주자로서의 희망을 서서히 접고 작곡, 지휘, 평론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슈만의 명성은 이 쪽에서 빛을 보았다. 음악 비평가로서는 손색이 없었던 그는 쇼팽과 브람스의 음악을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편집하고 있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e fur Musik)는 거침없이 비판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 역할을 하였다.

     

     

1838년 그는 빈의 슈베르트 묘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을 찾아갔다. 그 때 형은 동생이 남긴 미발표 작품, 교향곡 위인(Symphony No. 9 "The Great" D. 944 in C Major)의 초고를 슈만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작품은 슈베르트 서거 1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만은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40년은 가곡의 해로 그의 창작 활동이 극점을 이루는 시기였으며, 독일 낭만파 가곡의 대표적 작품들을 양산한 해이다. 이해의 첫 가곡집 '리더크라이스'도 하이네의 시로 작곡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시인의 사랑'이다. 슈만이 18세 때 하이네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은 후 하이네의 시로 많은 가곡을 썼다. 다음해인 41년은 교향곡의 해, 42년은 실내악의 해, 43년은 오라토리오의 해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이다.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만과 하이네의 인연은 지금도 뒤셀도로프에 남아있다. 하이네의 고향이며, 슈만 부부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텐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다. 슈만이 살던 빌커슈트라세 15번지 노란 3층집 벽에는 '슈만과 클라라가 1852년 9월 1일 부터 1854년 3월 4일 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기념판이 붙어있다. 슈만의 집 길 건너에 하이네 연구소가 있다.

만의 집과 같은 길가인 빌커슈트라세 4번지에 슈만 협회가 있다. 슈만 협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슈만이 뒤셀도르프에서 시립음악단장을 역임하면서 말년의 창작생활을 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슈만의 단추와 지팡이, 클라라의 양산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슈만을 추모하는 것만이 주임무가 아니라, 그의 이곳생활을 병마와 관련시켜서만 생각하는 잘못을 해명하고, 아직까지도 오류가 발견되는 슈만의 악보를 총 정리해서 원작대로의 전곡집을 출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만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844년이다.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현기증과 불안증이 심해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국 후에도 독살의 불안, 금속성의 공포에 시달렸다. 거기에 청력 장애까지 나타났다. 1849년에는 건강이 많이 호전되어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장면들을 솔로,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해 30곡 정도 작곡하였다.

1850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으나 단원과의 의사소통이 힘들고 지병인 류마티즘과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하여 1853년 가을 지휘자에서 해임되고, 10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제 클라라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녀의 어머니는 한때 촉망 받던 소프라노였고 남편 비크의 제자였다. 클라라는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음악가가 될 신동을 낳아 기르겠다는 부모들의 꿈의 대상이었다.

Goethe는 클라라를 여섯 명의 소년 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소녀(The girl has more power than six boys.)라고 극찬을 할 정도의 연주자였다.

만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함께 연주 여행을 할 때면 클라라의 음악성에만 청중들은 갈채를 보냈다. 워낙 섬세하고 민감한 슈만으로서는 감당하기 괴로웠다. 아내에게서 받는 열등감도 그의 정서 불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동의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클라라지만 8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느라 음악 활동은 소강 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슈만의 입원으로 고통과 실망의 세월을 살아야했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도 이 때 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만이 집을 나와 빗속을 걸으며, "클라라, 나는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은 사람이야."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의 발로일 것이다. 슈만은 자신의 천재성에 비해 생시에 인정을 받지 못한 음악가였으니 안타울 뿐이다.

발로 라인강까지 뛰어가 투신할 정도로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1856년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슈만에게 후각과 미각에도 이상이 생겼다. 다리에 부종이 겹치면서 건강은 악화 일로에 놓였다. 7월 28일 전신에 경련이 일었고 29일 46세를 일기로 극적인 인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클라라가 슈만의 아내로 만 기억된다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만이 사망한 후 클라라는 남편의 서한집과 작품전집을 편집했다. 슈만, 쇼팽, 브람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들 작품에 대한 연주 해석은 오늘날에도 규범이 되어있다. 클라라는 말년에 프랑크푸르트 음악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였다.

에 있는 슈만의 무덤에 세워진 기념상에는 남편의 부조를 바라보고 있는 클라라의 전신상이 추가되었다. 본인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이라 전한다. 아내의 조각상이 함께 있다는것은 예외적이지만 인상적이다. 슈만이 타계한지 꼭 40년 후인 1896년 클라라도 남편 곁에 묻혔다.

Joseph Kim 칼럼니스트

     

Barbara Bonney, Soprano

1956년 4월14일, 미국 뉴저지 몽클레어 출생의 보니는 줄리어드 음악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적이 있는 할머니의 피아노 소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바라가 절대 음감을 갖고 있어서 한 번 들은 음악은 거의 대부분 흥얼거린다는 점을 알아차린그녀의 부모가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 주었고 조금 자라선 첼로를 공부시켰다. 13살 때, 메인(Maine)으로 이사가서 그곳 포틀랜드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첼로주자로 활동했다.

     

 

     

2년 뒤, 뉴 햄프셔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첼로를 함께 전공한 그녀는 1977년, 독일어 연수를 위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거기서 느닷없이 발성법과 가곡을 공부하고 싶어졌고 이를 위해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 들어가서 성악공부를 시작한다. 그 결과 잘츠부르크의 합창단에서 솔리스트 활동을 하기에 이르렀고, 1979년 이후 4년 동안 다름슈타트 시립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하면서 레퍼토리를 확대해 나갔다.

1979년 9월12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니콜라이의 "윈저의 즐거운 아낙내들"의 안나역으로 데뷔했고, 이후 약 40여개의 배역을 소화하는 대가수로 성장했다. 1983-1984년 시즌엔 프랑크푸르트 가극장에서 활동했다.

그 후 1984년, 뮌헨 섬머 페스티발을 주제하던 거장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장미의 기사" 오디션에서 그녀에게 소피 역을 제안하여 훌륭히 소화했고, 이듬해 같은 역으로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하는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에 데뷔했고, 같은 해에 파미나 역으로 라 스칼라에도 데뷔했다. 빈에서는 브람스의 레퀴엠에 출연했고, 메트로폴리탄엔 1987년에 스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서 소피역으로 데뷔했다.

1996년, 텔덱 음반사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Decca와 계약하고 레코딩 작업 또한 활발하게 진행하였는데 오페라 이외에도 특히 볼프의 '이탈리아가곡집'을 비롯하여 '멘델스존 가곡집', '슈베르트 가곡집'등이 절찬을 받았다. 명실공히 세계정상의 리릭 소프라노로 떠오른 바바라 보니는 데카와 새로운계약을 체결한 후 4년이 흐르는동안 아슈케나지와 녹음한 '로베르트/클라라 슈만가곡집'을 첫 시작으로 20세기 미국가곡집, 코플랜드, 바버, 아젠토, 슈트라우스가곡집... '스칸디나비안 송'등의 순수하고 은근한 바바리 보니 특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아카데믹한 CD들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노래를 모은 '눈속의 다이아몬드' 앨범은 그라모폰 상의'베스트 독창 앨범 부문을 받는 등 음반상도 수차례 받았다. 2002년에 발표된 영국 가곡 앨범 '맑은 섬(Fairest Isle)’에 대한 평가도 상당하다.

그녀가 성공한 것은 자신이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음악을 선택했다는데 있다. 지금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오페라의 역할은 소수이지만 반면 종교음악 레퍼토리와 여러 나라의 가곡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노노, 바버, 쇤베르크등의 현대가곡도 마찬가지이다.좋아하는 앨범으로는 무디 블루스의 "나이트 인 화이트 새틴"과 에릭 클랩튼의 "라일라" 그리고 그녀가 '리버풀 오라토리오'를 부른 후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었던 폴매카트니 것은 모두 좋아하며, 스트라빈스키의 것으로는 로버트 쇼와 녹음한 "찬송가 심포니"와 트레버 피녹과 녹음한 "브란덴브르크 콘체르토"이다. 언변의 대가인 셰익스피어와 식사를 하고싶다는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이며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단순한 음식을 즐기는 편이다.한국에서도 2000년 9월17일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내한공연을 가졌다.

그녀는 가곡 분야에서만 이미 70여종의 음반을 발표했고, 레이블만해도 London/Decca, Deutsche Grammophon, Teldec, Angel/EMI and Philips 등의 메이저 레비블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그녀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가곡 해석자의 한 사람이다. 투명한 발성의 아름다움, 균형을 잃지 않는 표현력, 지성미에 있어서 그녀와 견줄 성악가가 누가 있겠는가?"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