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聖음악

앨범: 베를리오즈: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 - Noel Edison, cond (1999 Naxos)

리차드 강 2016. 2. 4. 07:24

Requiem (Grande Messe des morts), H. 75 (Op. 5)

베를리오즈: 레퀴엠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

Hector Berlioz (1803 - 1869 프랑스)

1. I. Requiem et Kyrie - 전악장 연주

     

Michael Schade (Tenor)
Toronto Mendelssohn Choir & Youth Choir

Noel Edison, Cond.

     

Album Title: Berlioz: Requiem
Composer: Hector Berlioz
Conductor: Noel Edison
Performer: Michael Schade (Tenor)
Choir/Chorus: Toronto Mendelssohn Choir
                       Toronto Mendelssohn Youth Choir
Orchestra: Elora Festival Orchestra
Audio CD (June 18, 1999)
Number of Discs: 2
Format: Audio CD
SPARS Code: DDD
Recorded in: Stereo
Label: Naxos
Copyright: (C) ℗ 1999 Naxos
Total Length: 1:26:12
Genres: Classical Music, Opera & Vocal, Modern Era
Styles: Choral

     

미켈란젤로 / 최후의 심판 (부분)

     

   Requiem (Grande Messe des morts), for tenor, chorus & orchestra, H. 75 (Op. 5)   (84:07)
   Catalog No.   H 75
   Composer   Hector Berlioz (1803 - 1869)
   Lyricist   Mass Text
   Conductor   Noel Edison
   Performer   Michael Schade (Tenor)
   Choir/Chorus   Toronto Mendelssohn Choir
                           Toronto Mendelssohn Youth Choir
   Orchestra   Elora Festival Orchestra
   Genre   Requiem / Romantic Period
   Date Written   06/1837; France
   Period   Romantic
   Date of Recording   11/1998 (11/08/1998-11/11/1998)
   Venue   Church of the Transfiguration, Markham, ontario, Canada

1. I. Requiem et Kyrie
2. II. Dies Irae
3. III. Quid sum Miser
4. IV. Rex tremendae
5. V. Quaerens me
6. VI. Lacrymosa
7. VII. Offertorium
8. VIII. Hostias
9. IX. Sanctus
10. X. Agnus Dei

12:28
12:27
03:00
06:10
04:51
09:44
08:33
03:52
12:18
12:45

     

원죄(原罪) 바티칸, 시스틴 성당

     

위 미켈란젤로 그림 두 장, 종교음악 음반에 예전에 가끔 등장했던 그림이다. 레퀴엠 음반의 그림으로는 적당할지 모르겠으나, 섬찟한 느낌에 평소에 좀 별로라고 느껴졌었다. 최후의 심판 전체그림에는 실제 더 섬찟한 부분들이 많아서, 그 중 좀 덜한 부분만을 여기 올렸다. 특히 지금 듣는 마지막 곡 'Agnus Dei'와는 영 안 어울린다. 저승으로 떠나는 '신의 어린 양'을 부디 불쌍히 여기시사,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원하는 노래인데 말이다.

 10번 Agnus Dei

이 곡 Agnus Dei를 따로 듣기로 플레이어를 띄우고, 타이머를 11분에 맞춰 마지막 부분을 들어보시라. 그리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눈 감고 음악에만 흠뻑 빠져 들어 보시라. 나는 그 부분을 오래전에 처음 듣고서, 하늘나라로 승천하는 영혼이 상상되던데... 마치 하늘로 오르는 천사의 날개짓을 연상케 하는 현악의 느릿한 아르페지오 반주와 그 반주의 날개에 안겨서 승천하는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듯, 아련히 들려오는 합창단의 아멘 연송. 이어서 천국의 문을 노크하는 듯한 북소리가 멀어지면서,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은 전곡이 끝난다.
 
교회를 잘 안나가는 내가 애엄마한테 전에 이 부분을 들려주면서 이런 내 느낌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나를 뿔 단린 외계인 보듯 뻔히 쳐다보던 애엄마 말쌈이, - 일요일날 정 교회 나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라. 대신 집에서 딴 짓 말고 이 '아멘 연송'이나 들으면서 얌전하게 1주일 내내 속세에서 묻은 떼를 씻어내는 경건한 시간을 갖으라 - 고 하시더라. "교회 나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라" 이건 전혀 예기치 않았던 횡재였다. 일요일날 쉬지도 못한 채 목욕재개하고 개줄 처럼 목댕기 메고 교회에 끌려나가시는 분은, '횡재'라는 표현을 납득하시리라.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특징을 갖는 프랑스 음악 답지않게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또 상당히 거창하다. 음악에 문학적,철학적인 배경을 갖고자 시도한 것이나, 악상과 관현악 편성 또한 그 규모가 엄청 크다는 얘기다. 그의 대표작인 '환상교향곡'을 듣자면, 그 구성과 내용이 곡 이름 처럼 상당히 몽환적인 이야기들과 악상으로 넘치는데, 괴짜 기질이랄까? 천재나 선구자의 특징인 베를리오즈의 이런 성격은 그의 다른 음악들에도 예외 없이 반영돼 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이 조국인 프랑스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더욱 인정받았던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정작 그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던가? 베를리오즈도 프랑스에선 찬밥이었다. (찬밥신세는 나도 우리집에선 마찬가지다. 도무지 안 알아준다. 이 점, 슬픈 현실이라고 오늘날 개탄해 마지않는 바이다)

나는 이 Agnus Dei를 가장 즐겨 듣지만,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에서 꼭 빠뜨리지 말고 들어야 할 부분이 또 있는데, 바로 2번 곡 Dies Irae(진노의 날)라는 곡이다. 이 곡은 정말 베를리오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항상 음악에서 뭔가 새롭고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이 곡 끝나면 꼭 들어보시라.

진노의 날은 말하자면, 말세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조물주의 시그널 음악이다. 사또 행차 나팔처럼 말이다. 그런 즉 거의 모든 레퀴엠에서 이 진노의 날은, 듣는 사람을 말세의 공포로 위압하려는 듯한 음향을 들려주는데. 모든 레퀴엠을 통털어서 가장 극적으로 그 위압감을 표현하는 나팔소리가 바로 베를리오즈의 이 곡일 꺼라 생각한다. 베르디의 레퀴엠도 오페라 작곡가인 만큼 대단한 느낌을 전하지만, 내 생각으론 베를리오즈가 한 수 위다.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보통 관현악 편성보다 서 너배나 더 많이 동원되고, 그 배치 또한 공연장의 음향조건을 고려해서 객석 뒷면에서도 트럼펫을 연주하게 하는, '음향기사'로서의 안목 까지를 베를리오즈는 적용한다. 대단한 테크니션이다. 성질 급하신 분은 2번 곡을 따로 듣기로 띄워서, 타이머를 5분 후로 맞춰서 한 3분만 집중하여 들어보시라. 해일, 아니면 화산폭발에 비유해야 할까? 그 울부짖는 금관악기와 타악기 소리에 가슴 설레임을 맛보실테고, 공학(工學)의 개념조차 성립되지도 않았을 170년 전에 만들어진 '음향공학적'인 소리라는 점에 경탄을 금치 못 하시리라.

베를리오즈는 곡 하나에서도 어쩌면 이렇게도 그 특징들을 세분하여 나타낼 수 있었을까. 기도하는 간절함으로 애틋하게 합장드리는 Offertorium, Santus, Agnus Dei, 그런 잠시 후 엄청난 입체음향을 울리면서 마치 조폭 같이 우왁스런 주먹으로 최후의 심판을 우리에게 으름짱 놓는, Dies Irae와 Rex tremendae, Lacrymosa. 오래전 '샤를르 뮌시'가 지휘하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초기 스테레오 음반으로 이 곡을 처음 들었던 그 감격. 베를리오즈가 요구했던 연주자 규모를 갖췄던 녹음이었던 덕분일까? 앉은 자리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여기 올린 연주는 상대적으로 최근의 녹음이면서도, 그 규모 때문에 40년도 넘은 샤를르 뮌시의 음향에 미치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환상교향곡 또한 샤를르 뮌시의 오래된 RCA 음반에서 각 악장의 특징이 제대로 살아난다는 생각이다.

글쓴이: 굴비장수

     

     

나는 레퀴엠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혹시 염세적인 사람 아닌가?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자살할 만큼은 염세적이지도 않다. 하긴 염세적인 사람이 전부 자살한다면야 인구문제도 걱정 없겠지. 차라리 염세적인 사람들이 이 미운 세상을 냉소로 대응하면서, 나 보란듯이 깡다구있는 생명력을 보이지 않을런지. 염세의 원로 격인 쇼펜하우어 또한 마을에 전염병이 들어오니까,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바득거리며 도망갔다지 않던가.

.... 괜히 끝 감당도 못할 거면서 '염세' 같은 머리 아픈 말을 꺼낸 것 같다. 그만 할란다. 그냥 간단히 이 벅적대는 세상은 느긋하게 풍류나 즐기며 살기엔 적당치 못하다면 됐을텐데...

그래도 레퀴엠은 좋다. 참새 가슴털 만큼이나 짧고 가벼운 요즘 세상으로 부터 도피하듯 빠져들수 있는 그 진득하고 엄숙한 분위기. 그 비장감이 좋아서 가끔씩은 온 집안의 불을 다 꺼버린 채, 나는 '레퀴엠 듣는 남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작품 개요

이 곡은 1837년에 작곡된 곡으로 이 무렵, 베를리오즈는 그의 음악인생의 활력기로 파리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그의 작품에는 창조적인 열광의 20세기 음악의 대담함을 선취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는 또한 미지의 영역을 병합하여 제약을 벗어 던졌고 일탈을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경향이 이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를리오즈는 신앙을 갖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곡과 함께,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L'Enfance du Christ》《테 데움 Te Deum》등 교회음악이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02번 Dies I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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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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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레퀴엠이란 음악 형식에는 ‘Dies Irae 디에스 이레’란 곡이 포함된다. 라틴어 ‘Dies Irae’는 ‘진노의 날’로 번역된다. 예수 재림 때 악한 자들을 심판할 바로 그날을 주제로 쓴 곡이 ‘Dies Irae’이다. ‘Dies Irae’가 포함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예외는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이다. 죽은 이는 물론 그와 관련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 레퀴엠인데 이상하게도 레퀴엠에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가 빠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교회 음악 가운데 가장 무서운 최후 심판을 경고한 것은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35살 때인 1837년에 작곡한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이다. 보통 사람들은 줄여서 그냥 레퀴엠이라 부르지만 말이다.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은 1830년 7월의 프랑스 혁명에서 희생당한 2천 여 명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역사에서 ‘영광의 3일’로 명명되는 프랑스 혁명이 파리를 휩쓸고 있을 때, 자신의 사랑과 좌절을 형상화한 <환상 교향곡>의 마지막 부분을 작곡 중이었다. 그 곡을 끝내자 베를리오즈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권총을 들고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환상 교향곡>을 거론하지만 베를리오즈 자신은 <레퀴엠>을 꼽았다. “하나의 작품만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작품을 버려야 한다면, 나는 <죽은 자를 위한 대 미사>를 남겨두도록 자비를 구할 것”이라고도 했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레퀴엠을 연주하려고 할 때 몇 가지 주문사항을 오케스트라 스코어에 표기해 놓았다. ‘디에스 이레’란 두 번째 곡 때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요구한 것이다.

우선 큰 북의 일종인 팀파니의 숫자를 보자. 요즘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당시까지의 관현악곡들은 한 명의 팀파니스트가 최대 세 대의 팀파니를 연주했다. 그런데 베를리오즈는 예수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영광의 재림과 악인들의 받을 심판 묘사를 위해 16대의 팀파니와 10명의 연주자를 요구했다. 거기에 큰 북 연주자 2명과 심벌즈 연주자 10명, 그리고 탐탐이란 타악기도 4명이 필요했다. 보통의 관현악곡에서는 타악기 연주가가 4명이면 충분한데, 지금으로부터 176년 전에 베를리오즈는 무려 26명의 타악기 주자를 요구했던 것이다.

     

     

오케스트라에서 금관 악기들인 트럼펫, 트럼본, 튜바 등의 악기는 음악의 스케일을 표현하는데 제격이다. 베를리오즈는 심판을 위해 천상에서 소리를 높이는 천군과 천사들의 묘사를 위해 콘서트 홀 2층 동서남북에 38명의 금관 악기를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16대의 트럼펫(과 코넷)과 트럼본, 6대의 튜바가 동원됐다.

오케스트라에는 이미 보통 편성의 3배인 12대의 호른, 그리고 4명의 코넷(트럼펫)과 4명의 튜바가 편성되어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세상 종말에 있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후 심판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총 58명의 금관악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 입장에서 보자면 규모가 큰 관현악 곡이라고 해도 금관악기는 11명(트럼펫3, 트럼본3, 호른4, 튜바1)을 넘지 않았다.

금관악기와 타악기 연주자로 벌써 80명을 훌쩍 넘겼기 때문에 그보다 소리가 상대적으로 작은 현악기의 증원 또한 불가피했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50명의 바이올린과 20명의 비올라와 20명의 첼로를 요구한다. 21세기에도 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 연주자는 8명이 표준인데 18대를 요구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세 배로 들어났기 때문에 합창단도 210명을 요구하였다. ‘만약 공간이 허용된다면 오케스트라의 두 배나 세 배의 합창단, 그러니까 700-800명의 합창단’을 쓰라는 주문과 함께 말이다. 좀 허세를 부린 측면이 없지 않은 곡이지만 베를리오즈의 ‘Dies Irae’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최후 심판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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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베를리오즈

지휘자 샤를르 뮌시

     
 

엑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1803. 12. 11 ~ 1869. 3. 8 프랑스)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다. 1830년에 발표한 《환상 교향곡》으로 유명해졌다. 베를리오즈는 "표제 음악"(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했다.

베를리오즈는 전세대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폰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von Gluck) 그리고 후세대인 리하르트 바그너나 아르놀트 쇤베르크처럼 특별한 음악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베를리오즈를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지만, 베를리오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이미 음악원 시절부터 악기의 표현력에 관심을 기울여 교수들과 자주 싸웠던 베를리오즈는 음색과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평을 받으며 후기 낭만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주장한 베를리오즈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곡 활동을 했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는 파리에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생전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프랑스 음악계로부터는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프랑스 음악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죽은 후였다.

 

생애

초기

남프랑스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 때까지 가정에서 일반교육을 받았고, 아들도 자신처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강요로 19세때 파리로 와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에서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 23세에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 이때문인지 베를리오즈는 유년 시절에 플루트와 기타를 조금 만졌을 뿐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그는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교육

파리음악원에서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보수적인 교수들과 음악적으로 자주 마찰. 특히 당시 파리 음악원장이었던 작곡가 루이지 케루비니와도 부딪힘. 하지만, 이 시절 베를리오즈는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에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들후기 현악 사중주를 연구하기도 했다. 특히 음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악기 사용법을 연구. 이때 그가 작성한 악기 사용법은 훗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증보했고, 지금까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쓰인다.

경력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1826년을 전후한 1820년대는 음악가를 준비하는 시기. 1830년대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린 때. 1830년, 로마상 콩쿠르에서 1830년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로 대상을 받은 베를리오즈는 로마로 유학. 그러나 향수병에 시달린 끝에 본래 3년간 로마에 있어야 했지만 18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

이 시기에 베를리오즈는 파리를 방문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여배우 해리엣 스미드슨을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해리엣 스미드슨은 세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오필리아 역을 맡았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환상 교향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환상 교향곡》발표 후 잇달아 작품을 발표하면서,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명성을 높이 올렸다.

그러나, 1839년 오페라《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가 참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1842년부터 베를리오즈는 외국으로 공연여행을 떠났다. 1842년 ~ 1843년에는 독일을 여행했고, 이 여행 중에 《로마의 사육제 서곡》을 작곡했다. 1845년 ~ 1846년에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에서 공연을 가졌다. 자신감을 회복한 베를리오즈는 1846년에 일시 귀국하여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이란 오페라를 발표했지만, 또 실패하고 1847년 러시아로 공연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고, 러시아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귀국했다.

1850년, 만국박람회 개최를 축하하는 공연이 열렸다(박람회는 1851년 런던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 공연에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테 데움》이 공연되었다. 같은 해에 베를리오즈는 필하모닉 협회를 조직하여 파리에서 음악 활동을 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계속된 실패로 인한 경제적 궁핍과 프랑스 음악계와 마찰은 그의 생활은 고달팠다. 그러나, 185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생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연주여행도 계속했는데, 1867년 ~ 1868년까지 러시아 공연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1869년 3월 8일, 베를리오즈는 지병으로 파리에서 병사했다.

 

 

음악 세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을 많이 만들었다. 프랑스 작곡가로서는 예외적인 대규모 기악곡의 창작에 몰두,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관현악법에 의하여 감미로운 음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대담 분방한 표현은 때때로 격정적인 폭발에 도달하기도 한다. 또 그는 스스로 베토벤의 사도로 자처하였고, 또 그 영향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외관은 그다지 프랑스적이지 않지만 작품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음의 원조법적 사용, 음의 선명한 배합, 명쾌한 선율 등은 극히 프랑스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평생 빈곤하게 지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환상 교향곡>이 있는데, 이 음악은 '표제음악'의 대표적 성격을 지닌다.

그의 음악 세계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그답게, 음악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된 베를리오즈는 "표제 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을 기법을 창시했다. 그는 악기의 음색과 효과를 최대한 이용 환상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위해서 베를리오즈는 대규모의 관현악단을 조직했다.

베를리오즈의 데뷔작이자, 대표곡인 《환상 교향곡》의 경우 문학적 사실 묘사를 교향곡의 각 부분과 연결하고 있다. 환상 교향곡외에도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1828년 ~ 1829년), 《이태리의 해롤드》(1834년), 《로미오와 쥴리엣 독창과 합창》(1839년), 《죽음과 승리의 대 교향곡》등도 마찬가지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들도 이런 양식을 따르고 있다.

 

주요 작품

관현악곡
《웨이벌리 서곡》
《종교재판관 서곡》
《환상 교향곡》
《리어왕 서곡》
《로브로이 서곡》
《로마의 사육제 서곡》
《해믈릿의 종막을 위한 장송행진곡》
《해적 서곡》
《트로이 행진곡》
《이탈리아의 해롤드》
《꿈과 카프리치오》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
《트로이 사람들》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죽은자를 위한 대 미사》레퀴엠

연주회용 드라마
《파우스트의 겁벌》

관현악 가곡
《독창곡 에르미니》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아름다운 나그네》
《부르타뉴의 젊은 양치기》
《여죄수》
《여름밤》
《자이드》
《오필리아의 죽음》

글과 저서
《회상록》
《관현악법》

출처: 위키백과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