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만나야 한다
김현성 [blueisland@hananet.net]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도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꽃피는 봄날이다. 보리 싹은 싱싱하게 겨울을 잘 이겨낸 용사처럼 푸르다. 남쪽 바다에서부터 불어왔을 봄바람이 맑은 파도소리를 들려주듯 머릿결을 흔드는 3월. 봄기운이 더딘 북녘 땅에도 곧 훈기 있는 바람이 손에 잡힐 때이다.
두 해 전, 나는 8.15 민족대회 공연단의 일원으로 몇몇 가수들과 평양에 갔었다. 이미 TV와 이런저런 매스컴을 통해 그 쪽의 상황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평양 순안공항에서부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마치 예전부터 보아왔던 착각을 하게 했다. 가는 곳마다 서있는 동상이며 붉은 글씨로 넘치는 구호들. 가끔 지나는 그곳 사람들에게 우리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쑥스러운 듯 입을 가리며 답례를 해왔다. 평양시내는 자동차가 많지 않아서 공기가 매우 맑다. 하늘도 한참이나 멀리 내다보일 만큼 쾌적하다. 우리가 묵었던 대동강변의 양각도 특급호텔 36층에서는 대동강 전체가 보이는 듯 했다.
평양은, 1970년대 초 남쪽의 어느 살림살이가 재현된 것 같은 모습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도로변의 즐비한 아파트들도 자세히 보면, 창문을 비닐로 막아 놓은 모습도 보인다. 오랫동안 벽면의 칠이 벗겨진 채로 있었던 듯, 그래도 창가에는 예쁜 꽃이 심어진 화분이 8월의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준다.
다음날, 우리는 평양의 남문(우리의 남대문 같이 생긴)앞에서 북쪽의 공연단과 함께 특별공연에 참가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야지요 한세상에서/ 우리의 동해바다 아직 푸르고 / 함경도 평안도 고향 말씨 그대로 남아있듯 / 만나야지요 만삭의 기쁜 노래가 가득하게 바람 맞으며 / 금강산 묘향산 봉우리에 / 꿈 많은 조각구름 얼굴을 알아 볼 때 / 만나야지요 하나의 길로 / 그 길에 아이들 동무 되어서/ 무궁화 진달래 동산에서 꽃들이 만발할 때 / 꽃사태 눈부시네
- <만나야지요> 전문 김현성 작사,곡,노래 -
노래를 부르는 내내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이렇게 한 시간여 만에 올 수 있는 평양이었던 것을. 남이며 북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그리운 만남인가.
그날 내내 울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양각도 호텔스카이라운지에서 일행과 함께 대동강 맥주에 취해 먼 불빛이 자꾸만 흔들렸다. “만나야지요 한 세상에서 ....”
냉면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평양 옥류관의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대동강 푸른 물이 내려다보이는 옥류관 테라스에 잘 차려진 구수한 빈대떡과 냉면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봉사원 아가씨들의 살가운 미소 또한 기억한다. “냉면을 맛나게 먹으려면 사리위에 식초를 쳐서 드시라우요 육수에 식초를 쳐서 먹으면 안됩네다”
서울 마포의 을밀대라는 곳이 옥류관 냉면맛과 유사하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처음에는 심심한 맛이었다가, 계속 먹으면 깊은 맛을 알게 된다. 간혹 그 곳을 일부러 찾을 때면 일행들에게 옥류관 냉면 얘기가 고명처럼 푸짐하다.
사실 남쪽의 식당들은 조미료를 너무 많이 쓴다 싶다. 본래의 맛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럽게 한다. 이미 길들여진 내 입맛은 평양에서의 첫 식사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모든 맛이 이렇게 심심해서 어찌 밥을 먹나 싶었다. 하지만 한 두 끼를 계속 먹으니 먹는 것마다 맛이 살아난다. 껍질 채로 먹는 사과 맛도 일품이다. 얇은 껍질에서 풍기는 사과의 향내는 모양보다 훨씬 좋다. 많은 추억 중에서 무엇인가를 맛나게 먹었던 기억 또한 평생 간직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맛을 떠올리며 여러 가지 얘기를 기억해내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순안공항에서 많은 그 곳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또 만납시다 우리민족끼리 통일합시다!” 귀에 생생하다. 헐벗은 북녘의 산이 내려다보이는 듯싶더니 비행기는 벌써 인천공항에 내린다. 마치 영화를 찍고 온 기분이다. 구리 빛으로 그을린 북녘 사람들의 얼굴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추운 겨울 무사히 보냈는지....
부러진 가지에서도 싹이 돋아 생명을 노래하는 3월, 대동강 둑에도 개나리가 피었으리라. 화사한 봄날, 남이나 북이나 모두 꽃처럼 만나야 한다.
- 2005 / 3 월간에세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