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바흐 무반주 첼로조곡 BWV 1007 ~ BWV 1012 - Heinrich Schiff, cello│바로크

리차드 강 2017. 8. 18. 21:44

Bach Suites for Cello Solo BWV 1007 ~ BWV 1012

바흐 무반주 첼로조곡 BWV 1007 ~ BWV 1012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Suites for Cello Solo 제1~ 6모음곡 듣기

 

Cello : Heinrich Schiff

1951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6살 때부터는 피아노를, 10살 때부터는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빈(Wien)에서 토비아스 쿠네(Tobias Kuhne)와 앙드레 나바라(Andre Navarra) 문하에서 첼로를 연마하고 1971년에 빈과 런던에서 데뷔했다.

한편, 지휘 공부는 스바로브스키(Swarovsky) 클라스에서 했다. 약 10여년간 첼리스트로 활약하던 가운데 지휘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해서 1986년엔 지휘자로도 데뷔했다. 이후 하인리히는 첼리스트와 지휘자라는 두 길에서 균형 잡힌 활동을 하고 있다.

지휘자로서 하인리히의 그간의 행적을 기록해보면 다음과 같다.

▶ 1990∼1996년, Northern Sinfonia(노던 신포니아) 예술감독
▶ Copenhagen Philharmonic(코펜하겐 필하모니) 수석 지휘자
▶ Musikkollegium Winterthur(빈터투르 무직콜레기움) 수석 지휘자
▶ Deutsche Kammerphilharmonie(도이치 캄머필하모니) 수석 객원지휘자
▶ Stuttgart 방송교향악단 수석 객원지휘자
▶ 객원지휘 : Philharmonia, Halle, Orchestra of the Age of Enlightenment, Munich Philharmonic, Dresden Staatskappelle, Rotterdam Philharmonic, Santa Cecilia in Rome, Oslo Philharmonic, Swedish Radio Symphony, Helsinki Philharmonic, Vienna Symphony, Camerata Salzburg, Tonhalle Orchestra Zurich, and Los Angeles Philharmonic, 독일의 여러 방송교향악단들.

한편, 오페라 지휘도 병행하고 있는데, 모차르트의 '요술피리', 베토벤의 '피델리오', 바그너의 '방황하는 화란인',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을 지휘했다.
물론, 지휘자로서 음반도 여러장 냈다. Northern Sinfonia와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음반을 발표했다.

첼리스트로는 지난 27년간 세계의 수많은 메이저 오케스트라들과의 협연은 물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리사이틀을 가져왔다. 특히 20세기 현대음악 연주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연주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Berio, Casken, Cerha, Gielen, Henze, Krenek, Lutoslawski, Penerecki, Rihm, Zender과 같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고 음반을 발표했다.
바로크와 클래식에서도 수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EMI)과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Philips)으로는 디스크 그랑쁘리 상도 받았다.

   

   

작품구성

프렐류드(Prelude;전주곡)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있었던 양식으로 주로 건반악기나 플류트를 위한 곡들이 많다. 16세기에는 <프렐류드와 푸가>처럼 다른 곡과 함께 연결되어 쓰이기도 했다. 춤곡들이 정형화 된 반면, 프렐류드는 자유스럽고 즉흥적이며 토카타풍, 카덴차풍의 요소도 가미되어 전체 모음곡의 성격 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파블로 카잘스가 파악한 전6곡의 전주곡의 특성을 보면 제1번은 낙관적(Optimis tic), 제2번은 비극적(Tragic), 제3번은 영웅적(Heroic), 제4번은 장중함(Grandiose), 제5번은 격정적( Tempestuos), 제6번은 목가적(Bucolic)이라 했는데 이러한 전주곡의 성격이 각 모음곡의 전체 분위기와 성격을 나타내고 이끌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알르망드(Allemande) 15세기 초, 독일 쪽에서 발생한 춤곡으로 그 역사가 길다. 대개 4/4, 또는 2/4박자이고 속도는 일반적으로 적당한 빠르기인 알레그로와 모데라토 사이다. 대략 1620년 경부터 모음곡의 제일 앞에 놓이게 되었고, 점차 춤곡으로서의 특성이 희미해졌다.

쿠랑트(Courante) '달리는', '빠른'이라는 뜻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두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이탈리아 식은 코렌테(Corrente)라고 부르며 이미 16세기 프리츠 윌리엄(Fritz William)의 버지널 북(virginal book; 건반악기집)에도 실려 있다. 3박자의 빠른 패시지가 특징이다. 프랑스식 쿠랑트 프랑스의 옛 춤곡 형식이다. 힘차고 생동감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전후반이 같은 리듬 패턴을 취하고 있다. 약간 느리며 3/2, 6/4박자로 폴리포니한 경향이 있다.

사라반드(Sarabande) 가장 장중하고 위엄있는 곡이며 느린 3박자로 대개 둘째 박자에 무게가 실린다. 원래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속무곡인 이 춤곡은 1650년경 까지만 해도 매우 속되고 외설스러운 빠른 춤곡으로서 한때 금지 당했던 시기도 있었다. 17세기 경부터 다소 느려지면서 품위있는 춤이 되었다.

미뉴에트(Minuett) 프랑스어로 '작은 스텝'이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하 시대에는 우아하고 매끄러우며 빠른 3박자의 춤곡이었다. 원래 프와튀(Poitu)지방의 민속무였으나 루이 14세 때 궁중무로 다듬어졌고, 19세기에 들어와서 그 속도가 다소 느려졌다.

부레(Bourree) 원래 오베르뉴(Auvergne)지방에서 발생한 춤곡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도시로, 그리고 궁중으로 들어 오면서 빠르긴 하지만 안정되고 경쾌한 춤곡으로 정착되었다.

가보트(Gavotte) 프랑스 지방의 산사람들을 지칭하는 가보츠(Gavots)에서 변형된 말이다. 대개 2/2박자 인데, 17세기초 궁중무로 수용되었고, 룰리(Lully)에 의해 베르사이유궁 발레의 핵심 부분으로 받아들여졌 다. 통사 가보트 1,2 즉 전,후반으로 짝을 짓는 데 후반부에는 가끔 뮈제트(Musette; 같은 음의 저음이 계속 울리는 것)가 나타난다.

지그(Gigue) 16세기 경부터 영국에서 유행했던 빠른 춤곡이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을 거쳐, 1635년 당시 영국 궁정의 류트 연주자였던 프랑스인 고티에(Gautier)에 의해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부점 리듬, 넓은 음정 도약, 푸가적인 요소를 띠면서 발전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빠른 경과구, 화성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이상과 같이 모음곡은 서로 다른 성격의 다섯 가지 춤곡을 동일한 조성으로 묶은 것으로, 우리나라 기악 독주곡인 산조와도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기본 장단에 중중모리 또는 휘몰이 등이 첨삭되는 점에서 흡사하다. 모음곡은 프렐류드와 알르망드를 교향곡의 제1악장에, 사라반드를 제2악장, 미뉴에트, 가보트 등 은 스케르쵸 악장, 그리고 지그를 피날레 악장에 각각 대입해 볼 수도 있겠다.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프랑스, 이탈리아 음악의 새로운 양식과 여러 민속 음악적 요소들이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종합예술가" 바하를 통해서 독일의 음악적 전통과 어우러지고, 여기에 종교적 경건함마저 스며들어, 음악사에 길이 남아 "성전(聖典)"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최고의 내용과 절대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1. Suites for Cello Solo No1 in G major BWV 1007

제1모음곡 사장조 BWV1007 <제1곡> 전주곡은 즉흥적 요소가 강한 자유로운 형식으로 흔히 보통의 템포를 취하고 있다. 사장조 4분의 4박자. <제2곡> 알망드 사장조 4분의 4박자. 마찬가지로 보통의 템포에 의한 2부 형식의 곡이 다. <제3곡> 쿠랑트 사장조 4분의 3박자. 활기 있고 빠른 템포의 2부 형식에 의한 이탈리아풍 코렌테다. <제4곡> 사라반드 사장조 4분의 3박자. 느긋하고 장중한 기분인 스페인 기원의 춤곡으로 2부 형식이 다. <제5곡> 미뉴에트는 제1미뉴에트와 제2미뉴에트로 나누어졌으며, 제1은 사장조, 제2는 사단조의 각 각 2부 형식의 곡이지만 실제로는 제1 미뉴에트, 제2 미뉴에트(트리오) 후에 제1미뉴에트가 이번에는 반 복없이 재현된다고 하는 복합 3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제6곡> 지그 사장조 8분의 6박자, 여기에서는 역시 이탈리아풍의 템포가 빠른 지가를 채택했다.

2. Suites for Cello Solo No2 in D minor BWV 1008

제2모음곡 라단조 BWV1008 <제1곡> 전주곡은 4분의 3박자로써 더욱 가슴을 설레게 하며 조곡의 도입부보다도 비통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소절이 쌍으로 겹치게 되는 것이고. 연관된 그룹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제2곡> 알망드 꿰뚫는 듯한 소리의 반영으로 지속이 되는데 조금 조용한 듯하다. 그러나 동시에 제1조곡의 알라망드보다는 다양하게 수놓아진다. 이는 아주 어려운 더블 스토핑(Double Stopping)의 기법이 사용되는데, 調音은 많은 디테일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다. <제3곡> 쿠랑트는 다른 곡으로써 이태리 작곡가들이 바이올린을 위해서 작곡한 다음 널리 유행되어 쓰여진 것이다. 빠르고 명쾌하게 진행되며 동시에 바흐의 상상적인 힘이 대단한 형상의 힘으로 나타나게 된다. <제4곡> 사라반드 Sarabande드는 아주 명확하게, 똑똑한 리듬으로 구성되었다. 세개의 그룹으로 이룩된 이룩된 이 곡은 각기 네 소절로써 그룹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러한 곡의 첫번째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5곡> Menuet Ⅰ/Ⅱ 미뉴엣은 단계적으로 상승되는 것 같이 연주되어진다. 디드로오트라고 하는 사람이 백과사전에 평하기를 미뉴엣은 "고상하고도 간결한 우아함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제6곡> 지그 Gigue 8분의 3박자. 이 음악은 프랑스음악과 접촉함으로 생긴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하겠다.

3. Suites for Cello Solo No3 in C major BWV 1009

제3모음곡 다장조 BWV1009 전6곡 가운데서 가장 인기있는 모음곡이다. 전주곡은 4분의 3박자이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에 미뉴에트 대신에 4분의 4박자의 부레를 둔 것 외에는 다른 모음곡과 같은 배열이다. 부레는 미뉴에트와 마찬가지로 제1, 제2 부레가 모였으며, 다시 그후에 제1 부레가 반복없이 연주된다. 이 제3모음곡의 부레는 경쾌한 리듬으로써 진행되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4. Suites for Cello Solo No4 in E major BWV 1010

제4모음곡 내림 마장조 BWV1010 전주곡이 4분의 3박자인 것 외에는 제3모음곡과 같은 구조이다. 전주곡은 4분의 3박자이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에 미뉴에트 대신에 4분의 4박자의 부레를 둔 것 외에는 다른 모음곡과 같은 배열이다. 부레는 미뉴에트와 마찬가지로 제1, 제2 부레가 모였으며, 다시 그후에 제1 부레가 반복없이 연주된다.

5. Suites for Cello Solo No5 in C minor BWV 1011

제5모음곡 다단조 BWV1011 이 모음곡에는 제1현을 A음에 조현한 것과 G에 조현한 것의 두 가지 원고가 있다. 거기에 따라서 일부 의 음이나 운지법에 차이가 나타나지만 작품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제 1곡의 전주곡은 느긋하고 무게 있는 기분의 4분의 4박자의 서주와 8분의 3박자의 활발한 부분으로 구성된 이른바 프랑스풍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이 가보트(제1, 제2, 제1로 연주된다)인 것 외에는 다른 다섯 곡과 같은 배열이다.

6. Suites for Cello Solo No6 in D major BWV 1012

제6모음곡 BWV1012 전6곡 가운데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기개와 도량이 웅장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원래는 4현의 첼로용이 아니라, A현의 위에 다시 E현을 더한 5현의 악기 비올라 폼포자를 위해 쓰여진 것으로 3옥타브 이상에 걸친 음역을 사용했으며 그 때문에 첼로로써의 연주는 대단히 어렵다. 제 1곡의 전주곡에서 볼 수 있는 f와 p의 교대에 의한 같은 프레이즈의 에코적인 반복은 바로크의 특징 적인 양식이다. 춤곡 부분은 제5모음곡과 같은 구성이다.

   
   

   
   

작품 개요 & 배경

바로크 음악양식을 완성한 바흐는 1685년 독일에서 출생해 1703년까지 바이올린, 비올라, 오르간을 비롯해 음악교육을 받고, 아른슈타트, 뮐하우젠에서 오르간 연주자 생활을 하다 1714년 바이마르 궁정악단 수석 연주자기 되었다. 1717년부터는 쾨텐의 레오폴트 공작의 궁정악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그는 생애 최초로 교회음악 작곡(칸타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곡활동을 하였다. 그후 1723년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장에 취임하여 6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직하면서 작곡활동을 계속하였다. 첼로를 위한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무반주 첼로 조곡(모음곡)"은 1720년경 쾨텐시절에 쾨텐 궁정오케스트라 단원인 첼리스트 아벨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올린과 같이 화려하고 다양한 음색을 가지지도 못하고 기교의 범위도 좁은 그 당시의 첼로는 독주용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단지 합주에서 저음을 보강하고 다른 악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는데, 바흐가 이 "무반주 첼로 조곡"을 작곡함으로써 독주악기로서의 첼로의 가능성을 규명하고 그 위상을 높여 첼로 역사의 커다란 획을 그었다.

현재 흔히 첼로 음악의 구약성서라고 불려지는 "무반주 첼로 조곡"은, 19세기 이후 다른 바흐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다가 - 연주하기가 너무 어렵고 음악성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아 연습곡 정도로만 연주되고 있을 뿐이었다 - 20세기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가 발견, 연구, 연주하여 그후 첼로 음악의 최고의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새로운 양식의 도입과 독일 음악의 전통, 그리고 종교적 깊이까지 더해 그 내용과 형식의 절대성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 모든 첼리스트들이 정복하고 싶어 하는 필수적인 그리고 최고의 목표로 여겨지고 있다. 이 곡의 발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카잘스는, 13살 무렵 바르셀로나의 어느 고악보 가게에서 이 곡의 악보를 발견하고 12년간 홀로 연구 끝에 공개석상에서 연주하여 세상에 그 진가를 알리게 되었다. 거기에 대한 카잘스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우연히 한 가게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발견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적인 신비가 이 6곡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라는 악보에 담겨져 있었다. 그때까지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고, 나도 선생님도 이 곡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발견은 내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조곡 전 6곡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 1번 낙관적(Optimistic), 제 2번 비극적(Tragic), 제 3번 영웅적(Heroic), 제 4번 장엄한(Grandiose), 제 5번 격정적(Tempestuos), 제 6번 목가적(Bucolic) 이러한 특성은 각 곡의 프렐류드(Prelude, 전주곡)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제 1번부터 제 6번까지 모두 프렐류드-알르망드-쿠랑트-사라반드-미뉴에트(혹은 부레나 가보트)-지그의 6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대개 3번과 5번이 완성도가 높다고 하지만, 연주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이 무반주 첼로 조곡의 첫 관문인 1번은 바흐가 "1번"으로 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만큼 1번은 전체 조곡의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그 첫 주제를 제시하는 교향곡에 있어서의 1악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이 1번부터 우리가 접근해 가는 것은 전체 6곡을 모두 이해하는 첫 걸음으로써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 1번은 그렇게 난해하지도 않고 특히 프렐루드가 개방현으로 연주되는 풍부한 울림때문에 많은 분들이 이 곡을 좋아하게 되신 후 직접 첼로를 배워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최근 CF에서 로스트로포비치 (EMI) 연주가 잠시 쓰임으로해서 대중적인 인기까지 끌고 있으니 더욱 반갑다.

첼로의 성자(聖子),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카탈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고 카잘스는 열한 살까지 오르간과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그 다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를 배웠다.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에 간 카잘스는 벌써 뛰어난 연주가였다. 그가 첼로를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으로 남에게 배운 것은 그의 나이 열 살 때 호세 가르시아에 의해서였다.

내가 처음 첼로 소리를 들은 것은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를 들은 당시였다. 그 이전에는 그런 악기를 본 적도 없었다. 첫 악장 첫 번째 음이 나오는 순간 나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 그야말로 인간적인 소리였다. 연주회가 끝나자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저거야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예요」 그때부터 평생 동안 나는 첼로와 같이 살고 말았다.

이때부터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카잘스의 연주 실력은 대단했다. 아직 어렸던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 토스트>라는 선술집 겸 도박장에서 연주를 했는데 당시 <카페 토스트>의 단골 손님 중 하나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술집을 콘서트 홀로 바꿔놓았고, 급기야 그 콘서트홀을 사원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러던 중 어린 카잘스의 연주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스페인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왕궁에 초빙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고, 그에게 첼로 ''갈리아노''를 하사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 받았으며 마드리드 음악원을 나왔다. 이 당시 카잘스는 그의 선생에게 배운 주법보다도 자신이 만들어낸 운지법이 훨씬 연주하기 쉽고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후로는 이 새 주법의 발견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만약 카잘스라는 첼로의 성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첼로는 지금과 같은 화려한 솔로 악기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파블로 카잘스와 첼로의 성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첼리스트 카잘스를 말할 때 그가 첼로의 새로운 운지법을 고안해냈다는 것 말고,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만남이다.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풀사이즈의 첼로를 사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부둣가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렀다. 많은 스코어(score: 악보)들을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우연히 낡고 색이 바랜 한 묶음의 스코어를 발견했다. 아, 그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다.…나는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그 악보를 품고서 돌아와 방에 처박혔다. 그리고 몇 번이고 계속 탐독했다. 그때 내 나이 열세 살이었지만 그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항상 생생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는 말로써는 다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이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12년간 매일 밤 그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스물다섯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주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알버트 칸, 『나의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잘스』>

무려 200여 년간이나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바흐의 걸작『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둘은 항상 붙어 다녔고 이 곡으로 인해 카잘스는 첼로의 마에스트로가 되었지만 카잘스로 인해 이 곡은 첼로의 성서가 되었다. 첼로가 지니고 있는 깊은 표현력을 최대한 활용한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이 곡에 대한 카잘스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카잘스는 이 곡을 발굴한 지 47년, 공개로 연주한 지 35년이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다.『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래서 1936년부터 39년까지 3년 동안에 녹음되어 전 3매 전집으로 발매되었다.

가르시아의 지도로 첼로를 익히기 3년만에 그는 벌써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가 되었고, 1898년, 친구이자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첫번째 오페라 「카르멜파의 마리아」의 리허설 지휘를 맡으며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그는 지휘자로서보다는 첼리스트로서의 활동을 많이 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에게 당시 유럽을 휩쓴 제1차세계대전의 대살육은 그를 자살 직전까지 몰고 갈 정도로 절망하게 했다.

파리는 많은 뛰어난 작가들, 화가들, 음악가들이 모이는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여기에서 카잘스는 화가인 드가(Degas),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작곡가 라벨(Ravel)과 생상(Saint-Saens), 그리고 카잘스가 유명한 몇몇 초기 녹음을 함께 했던 음악가 이자이(Ysaye), 티보(Thibaud), 코르토(Cortot) 등과 사귀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이자 위대한 인간이었던 카잘스

카잘스는 파리에서 연주하랴, 관광하랴, 친구들과 사귀랴 매우 바빴지만, 다른 방면의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인생 철학도 발전시켰다. 그는 어떻게 웃는가, 행복한가를 알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경력,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릴리안 리틀해일스(Lillian Littlehales)가 자신의 책에서“카잘스는 인류의 정신 생활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으며, 종교적, 사회적인 질문들에 대한 그의 감상적인 마음은 거의 위험한 수준이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카잘스 역시 정신의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었던 한 젊은이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심지어 자살까지도 고려했다. 리틀헤일스는 또한 카잘스가‘계시록’으로 받아들였던 칼 맑스(Karl Marx)의 저작들도 읽었다고 쓰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으며, 파시즘 또는 다른 어떠한 폭정에 의해 저질러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분연히 항거할 것을 결심했다. 마침내 그는 그의 지적이고 정신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정신적 방황과 연구는 형성기였으며, 그 자신의 인생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미쳤다. 1958년에 국제연합의 총회장에서 카잘스가 그의 첼로를 연주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향인 카탈로니아 지방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191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조직한다. 그는 관현악단의 운영비를 자신의 첼로 연주로 나오는 개런티로 메우며, 세계적인 작곡가와 지휘자들(쇤베르크, 프로코피예프, 클렘페러, 앙세르메 등)을 초빙해 연주하여 그의 관현악단은 꾸준히 성장해 간다. 그의 이런 활동들은 애향심의 발로이기도 했으나 음악은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라는 카잘스의 음악관에 따른 것이었다.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은 약 10년 동안 활약했으나 1936년 7월 파시스트군이 바르셀로나를 습격하는 바람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카잘스는 이때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카잘스는 단원들에게 조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이 곡을 연주하자고 단원들과 약속하고 남프랑스의 프라데로 망명했지만 이들에게 이 곡을 연주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10년간 첼로 연주를 멈추다

스페인 내전이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그는 프라데에서 프랑코가 다스리는 스페인에서 망명해 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10년 동안은 그의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47년 카잘스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는 한 절대로 첼로를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프랑코의 스페인을 승인한 나라에서는 일체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상무장관이던 스테포드 크리프스 경이 어째서 영국이 프랑코 정권을 승인했는지를 설명하겠다며 그를 초대하자 카잘스는 "그는 정치를 말할 속셈이지만 나는 도덕을 논하고 있는 거야"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은둔생활은 1950년 바흐 서거 200주기를 맞이하여 끝난다. 프라데에서 개최하는 바흐 음악제에 참가한 때문이었다. 이 고장에서는 그를 흠모하여 모여든 세계의 음악가들에 의한 음악제가 탄생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바흐의 대가"인 카잘스를 위한 모임이 발족되어 프라데에서 축전을 열었다.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리는 크라이슬러를 비롯하여 역시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시게티, 그리고 피아니스트 제르킨과 같은 세계 일류 연주가가 그를 위해 불과 5,4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온 것이다. 이 프라데의 음악제는 카잘스가 어머니의 고향 푸에르토리코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여 옮겨 갈 때까지 매년 베풀어졌다.

파블로 카잘스의 백악관 연주 모습(케네디 대통령 재임 당시)
- 미국과 케네디의 비밀에 대해서 파블로 카잘스가 좀더 많이 알 수 있었다면 백악관 연주도 거부했을 지 모른다. 당시의 기록필름을 보면 케네디 대통령이 카잘스 앞에서 얼마나 예의바르게 굴려고 애썼는지 볼 수 있다.

80세의 나이에 20세의 제자와 결혼하다

카잘스가 푸에르토리코로 옮긴 뒤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는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협력으로 카잘스 음악제를 베풀기로 하였다. 수도 산판에서 열리는 음악제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성황을 이룬 것 두말할 것 없다. 그는 독주자로서도 많은 연주회를 갖고 레코드도 녹음했지만 프랑스 사람인 피아니스트 코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티보와 함께 트리오를 만들어 활약했다.

이 트리오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것이었으나 티보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코르토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홀로 남아 활동해야 했다(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일설에는 티보가 사고 당하기 이전부터 트리오는 해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티보가 파시스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에 파블로 카잘스가 그와는 더 이상 연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나이 80세에 이르렀을 때 그는 갑자기 ''심장 관상동맥 혈전증''이란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푸에르토리코섬의 총독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치의를 불러 그를 치료하게 한다. 얼마 후 그는 완치되어 건강한 몸을 되찾게 되고 80세의 노인은 방년 20세의 제자 마르티타 몬테스와 결혼한다. 카잘스는 둘 사이의 나이 차에 어색해 하며 "신랑이 장인보다 30세나 위인 경우는 흔치 않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젊은 아내를 맞이하여 100세까지는 문제없이 살겠다고 장담하던 카잘스는 그 약속을 못 채우고 1973년 10월 23일 푸에르토리코의 아우크시료 무토오 병원에서 향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카잘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 역시 바흐라고 한다. 평소 그가 ''내 아들''이라고 귀여워 했던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이 연주했다. 카잘스의 부인 몬테스가 요청했다고 한다. 카잘스가 죽은 2년 뒤 49세의 노총각 이스토민과 카잘스의 젊은 미망인 마르티타는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같았던 사람과 아내였던 여인, 두 사람이 ''카잘스 페스티벌''을 이어가고 있다.

한 평생 첼로만을 연구하고 사랑했던 첼로의 성인이었던 파블로 카잘스. 그는 예술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고 실천했던 한 사람의 훌륭한 인격자이자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강하고 의연한 생활 자체로서 그대로 더없이 훌륭한 예술의 경지와 결부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카잘스는 잔인한 대학살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던 인류의 20세기를 인간이 견뎌낼 수 있도록 신이 내려준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자료출처:http://windshoes.new21.org/classic-casals.htm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

1.작곡배경 및 경과

1717년말,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 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가 그 곳 궁정악단의 악장이 되었다. 당시 그를 맞이한 사람은 당시 23세의 레오폴트로서 그는 쾨텐의 군주였다. 이 젊은 영주는 아름다운 테너 음성을 가지고 궁정악단에도 참가하여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쳄발로 앞에 앉아 통주저음의 반주를 맡을 정도로 아마추어의 경지를 벗어난 음악애호가였다. 이 영주의 신임과 이해를 얻은 바흐는 막혔던 봇물이 터져 흐르듯 이 기악곡의 창작에 매진해 나갔다. <<관현악 조곡 1,2번>>, <<브란텐부르크 협주곡>> 전6곡, <<두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이 바로 이 시대에 태어난 바흐의 기악곡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바흐는 이미 모델로서 배운 비발디 등 이탈리아 기악작품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특히 현저한 점은 악곡편성의 기본이 되는 주제라든가 동기의 철저하고도 치밀한 논리적 전개다. 당시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의 자격을 가진 첼로의 명수 아벨이 있었다. 바흐는 이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악곡의 걸작들을 썼던 바, 오늘날 남아있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전6곡과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쾨텐의 궁정 첼리스트였던 아벨을 위하여 작곡된 것이지만, 그보다는 당시까지 독주악기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던 첼로의 적극적인 연주기법 개발을 위해, 즉 첼로라는 악기의 연주교법을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명곡은 바흐가 죽은 뒤 무려 200년 가량이나 묻혀 있어서 전혀 연주되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이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이상으로 어려운 기교를 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6번처럼 현재의 첼로로서 연주하기는 매우 곤란한 고음역으로 씌어진 곡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이 명곡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현대 최고의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덕택이다. 카잘스는 12세때부터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보여준 천재였다. 그러나 카잘스가 특히 좋아했던 악기는 첼로였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첼리스트였던 마드리드의 호세 가르시아 (Jose Garcia)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카잘스는 곧 마드리드에 있는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정식으로 익히는 한편, 실내악에 대한 연구도 체계적으로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13세 때의 일이다. 카잘스는 13세가 되면서부터 첼로주법의 결함을 깨닫고 새로운 기법을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카잘스는 바르셀로나의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버려져 있는 악보뭉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무한한 감동을 가지고 듣고있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였던 것이다. 카잘스의 나이 겨우 13세때 발견된 이 악보 뭉치야말로 근대 음악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 때부터 카잘스는 이 악보를 꾸준히 연구하여 12년간에 걸친 고심끝에 전 6곡을 완전한 형태로 연주하는데 성공했다. 실로 200년 동안이나 묻혀있던 보석의 찬란한 빛이 어둠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카잘스와 이 모음곡은 하나의 동류항이 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가 이 모음곡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주한 것은 1909년 그의 나이 23세 때였고, 처음으로 녹음을 단행한 것은 나이 60이 되어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이 곡은 모든 첼리스트들이 도전해야 할 처음이자 마지막 한계점이요, 궁극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 모음곡을 가리켜 '첼로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

2. 특징

바흐가 쓴 기악곡 가운데서도 이 조곡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이나 하프시코드를 위한 조곡도 대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조곡은 언제나 무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바흐 이전에는 알라망드, 쿠랑트, 사라방드와 지그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러 종류가 되는 이러한 무곡의 양식화는 각각 다른 역사적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같은 형식의 무곡이라도 양식의 대조를 존재하게끔 인도하여 왔다. 미뉴엣과 가보트, 부레 등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새로운 무곡이었다. 바흐가 이 무곡들을 채택했을 때만해도 발레나 오페라에서는 이 춤들이 추어지곤 했었다. 바흐는 이 무곡들을 전통적인 조곡의 사라방드와 지그 사이에 삽입하였다. 그 시대의 다른 작곡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새로운 율동적인 생활을 위해서 춤이 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대한 시위는 보통 전통수용의 반동이라는 범위안에서 성취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곡을 작곡하는 데 있어서의 아이디어는 아주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무반주의 현악기를 위한 작품은 비올라 다 감바나 바이올린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조곡에 있어서의 무곡 악장들은 대개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주제와 상통하는 것과 화성을 암시하는 것 등이다. 전주곡을 머리에 두고 무곡들은 연주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도입적은 곡들은 여러가지 형식이 있는데, 형태가 대조되는 전주곡의 6조곡에서의 내용의 성격화는 다른 형태의 전통무곡과는 다르게 선택된 새롭고 짧은 무곡 등을 삽입함으로 다른 곡들과 의식적으로 다르게 한 의미는 바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했다. 각 조곡에 있어서 조성의 선택도 같은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도입악장의 선택도 같은 의도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무곡의 형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한편 바흐 조곡의 에디션은 그의 둘째 부인 막달레나의 필사본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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