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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레 스승 '로이 선생님'을 추억하다│문화가 산책

리차드 강 2009. 5. 14. 18:29

한국 발레 스승 '로이 선생님'을 추억하다

     

한국 발레 스승 '로이 선생님'을 추억하다 │ 김수현기자의 문화가 산책

2006-08-16 20:03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더위의 기세가 아직은 수그러든 것 같지 않은데, 건강하게 여름 보내고 계신지요. 오늘은 한국 발레의 스승인 미국 태생의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 한국명 이용재 선생의 타계 소식을 듣고 쓴 글을 보내드립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여름의 막바지, 보람차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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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서울 발레 시어터 김인희 단장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은 김 단장의 목소리에 '무슨 일인가' 했었다. '슬픈 소식이 있어서요~' 하는 김 단장의 말에,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로이 선생님이 돌아가셨구나!'  내 예감은 맞았다.

로이 토비아스는 올해 79살. 미국 태생으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최연소 단원, 뉴욕 시티 발레의 창단 멤버이자 수석 무용수까지 지냈던 무용가다. 그러나 1988년, 유니버설 발레단의 3대 예술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한국 발레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 발레 시어터의 창단과 함께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한국인 무용가들을 길러냈다.

'한국 발레의 스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김인희, 제임스 전 등 쟁쟁한 무용가들을 모두 가르쳤고, 수많은 작품을 안무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직업 발레단들의 초창기 기틀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버설 발레단 예술감독 취임 이전에도 국립발레단의 객원 안무가로 활동한 바 있어 3대 직업 발레단과 모두 인연을 맺은 셈이기도 하다.)

16일 타계한 국내 직업 발레단의 스승 로이 토비아스(오른쪽 두번째)가 1990년대 서울발레시어터 단원들을 지도하던 모습.//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6.8.16 (서울=연합뉴스)

한국 무용수들의 열정과, 한국 땅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로이 토비아스는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이용재'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어, 경기도 여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그는 노환 때문에 몇 년 전부터는 서울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간병인과 함께 살아왔다.

김 단장은 로이 토비아스 선생님이 조금 전에 돌아가셨고, 나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하는 것이라며, 타계 소식을 널리 알려야 할까 하고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공연 담당 기자들에게 알려야지요' 하고 대답했다.

김 단장이 나한테 먼저 전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인의 가장 최근 모습을 취재해서 보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스승의 날을 즈음해 고인을 인터뷰하고, 그와 제자들의 특별한 인연에 얽힌 이야기를 보도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김 단장을 만날 때마다 '로이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었다.

경황이 없어 아까 전화할 때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고인에게 김 단장은 제자이면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짧은 부음 기사를 써놓고 나니,  김 단장의 목소리에 서렸던 슬픔이, 새삼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난해 인터뷰했을 때의 모습이 떠오르며, 뒤늦게 내 눈시울까지 시큰해졌다.

당시 인터뷰를 마치고 썼던 글 말미에는 '로이 토비아스가 곧 다시 건강해져서 한국 발레의 발전을 계속 지켜볼 수 있게 됐으면, 그리고 그 때 다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하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그를 다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 소망은 이뤄지지 못한 셈이다. (당시 인터뷰 후에 썼던 글은 블로그 http://ublog.sbs.co.kr/shkim0423에 다시 올렸다. 위의 사진도 당시 찍었던 것이다. 김인희 단장의 모습도 보인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한국인 무용가 이용재'로,

한국 땅에서 세상을 떠난 로이 토비아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한국인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 이야기

'한국인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 이야기   2005-06-14 

SBS뉴스레터 - 김수현 기자의 문화가 산책 중에서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한동안 출장 다녀오느라 조금 바빴습니다.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니벨룽의 반지’ 마린스키 프로덕션을 취재하고 왔습니다. 요즘 각광받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열린 공연이었습니다. 이미 뉴스에 나갔고, 제 뉴스 스테이션에도 사진과 함께 소개해 드렸는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의 이야기를 전해드릴까 합니다. 이번 달 SBS 매거진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기고했었습니다.

 

로이 토비아스, 한국 발레의 스승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SBS의 김수현 기잡니다.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내가 뭘 해야 하나요? 마음 같아선 춤을 춰 드리고 싶은데.......”

 

저는 명함을 내밀었지만, 제 앞에 앉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명함을 받아들지 못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춤을 추고 싶지만’, 이제는 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이 할아버지가, 한 때 무대를 장악하던 무용가 로이 토비아스란 말입니까.

로이 토비아스. 올해 78살. 미국 태생.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최연소 단원. 조지 발란신의 직계 제자로 뉴욕 시티 발레 창단 멤버이자 수석 무용수. 이후 미국과 유럽 주요 발레단에서 활동. 1988년 유니버설 발레단 예술 감독으로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 시작. 1995년 서울 발레 시어터 창단과 함께 예술 감독 취임.

그러나 제가 그를 인터뷰하려 한 것은 이런 화려한 이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한국인 제자들과 맺은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한국 발레를 있게 한 공로자입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초창기 기틀을 닦았고, 서울 발레 시어터는 창단 때부터 함께 했습니다. 유니버설 발레단 문훈숙 단장, 서울 발레 시어터 김인희 단장, 안무가 제임스 전 등 현재 한국 발레를 이끄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몇 년을 별렀던 인터뷰

2001년, 그는 제자들의 나라인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자신도 한국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용재’라는 이름의 한국인으로 귀화 수속을 밟습니다. 제자들과 맺은 인연 때문에 한국에 뼈를 묻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역에서 물러나 경기도 여주 시골의 한적한 집에 정착했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을 맞는 즐거움으로 자연 속에 묻혀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김인희 단장에게 ‘로이 선생님을 인터뷰하게 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김 단장이 ’로이 선생님‘이라고 할 때 그 말에 담뿍 묻어나는 존경과 애정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전에 기품 있는 그의 모습을 몇 차례 공연장에서 보고 깊은 인상을 받기도 한 터였지요.

하지만 인터뷰는 한동안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스케줄이 맞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정치부로 부서를 옮겼고, 한동안 그를 잊고 살았습니다. 다시 문화부로 돌아오면서 저는 묻어놨던 ‘숙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김인희 단장을 만나 ‘로이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었습니다. 김 단장의 얼굴에 수심이 떠올랐습니다.

“사실은 로이 선생님이 굉장히 편찮으세요. 지난해 정말 큰 고비를 넘겼어요. 저희는 정말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줄 알고 전세계에 있는 선생님 제자들에게 모두 연락까지 했을 정도였죠. 다행히 기적적으로 회복되긴 했는데, 요즘은 거동이 불편해서 집에서만 지내세요.”

그는 요즘 시골집을 떠나 서울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간병인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김 단장을 비롯한 제자들이 생활비를 도와드리고, 자주 방문해 말동무를 해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기대는 않으면서도 인터뷰를 요청했고, 며칠 뒤 그가 인터뷰를 승낙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뜻밖이라고 여기면서도 기뻐하며 인터뷰 약속을 잡았습니다. 화창했던 5월의 어느 토요일, 그의 아파트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그러니 몇 년을 별러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나는 한국인입니다"

그는 부쩍 쇠약해진 모습이었고, 제자들의 도움 없이는 잘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눈빛은 빛났고 말씨는 열정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과 제자들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외국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아, 내가 집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한국 발레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은 자랑스러움으로 더욱 빛났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발레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게 감사하고 멋진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인 무용수들이 유명한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할 때마다 외국에 있는 친구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놀랍다’고 해요. 나는 ‘당연하지!’ 하고 대답해 줍니다. 한국인 무용수들은 체격 조건도 좋은 데다, 유연성과 힘까지 갖췄어요. 유연성과 힘을 함께 갖춘 경우는 흔치 않죠. 무엇보다도 춤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대단합니다.”

그가 웃으면서 덧붙인 말에 저는 일순 숙연해졌습니다.

“훗날, (한국 발레가) 더 큰 꽃망울을 터뜨릴 때는 내가 이 자리에 살아서 볼 수 없겠지요. 그래도 나는 행복해요. 지금은 봄이고, 봄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계절이니까요.”

 

'정신적 기둥' 같은 존재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 공연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살아있는 발레 백과사전’이라고 부릅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금도 그의 존재는 제자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김인희 단장은 서울 발레 시어터를 창단하고, 지금까지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스승이면서 ‘정신적 기둥’ 같은 존재였던 것이지요.

“힘들 때면 로이 선생님에게 하소연도 많이 했었어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용기와 희망을 주셨어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라, 수면 위로 코를 내놓고 숨만 쉬면서 견디고 있어라,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거다, 미국에서도 민간 발레단이 이렇게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정부나 재단의 도움 없이 순수 민간 발레단을 운영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이 토비아스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한국에서 민간 발레단의 가능성을 보여준 제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의 요즘 소원은 한 가지, 올 가을까지 공연장 나들이가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자들과 창단부터 함께 했던 서울 발레 시어터의 10주년 기념 공연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말을 멈추고 크게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단, 나를 극장으로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이 많아야겠죠.”

나중에 저는 김 단장에게서 그가 인터뷰를 승낙한 것도 제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자존심이 강해 쇠약해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던 그가, ‘발레단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터뷰는 지난 스승의 날에 방영됐습니다. 그토록 별러서 했던 인터뷰였건만 방송으로 나간 리포트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혈연보다 더 진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제 능력이 부족했고, 제약도 많았습니다. 다만 오래 묵은 숙제를 드디어 해냈고 사제지간의 특별한 인연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는 걸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오는 9월, 서울 발레 시어터의 10주년 기념 공연장에서 그를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자들의 소망대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더욱 눈부신 한국 발레의 발전을 지켜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그를 인터뷰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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