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
스승이 그리운 시절; 이 시대의 스승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요사이는 정말로 영혼의 스승, 진정한 스승이 그리운 시절이라고 말한다. 편집자는 원고를 청탁하는 말에서 이 시대가 정신공황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닌가 물었다. 그 말 속에는 어느 시절인가에는 진정한 영혼의 스승이 있었고 그래서 풍부한 정신을 맛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여 본다. 정말로 진정한 스승이 있었던 시대가 있었을까? 다시 말하면 우리가 나중에 '그분은 참 스승이었다'고 말하는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를 참 스승으로 받아들였느냐는 말이다. 간혹 몇 사람은 그렇게 보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르고 지나치면서 그냥 막연하게 이 시대에 왜 스승은 없는가 하고 개탄하면서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 분은 진정한 스승이다 하면서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거부하거나, 가까이 갈 수 없어서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실 스승이 있다 없다는 만남의 경험에서 오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그냥 어디에 덩그러니 떠 있는 달처럼 어디에서나 쳐다보거나 항상 불어오는 바람처럼 어디에서나 얼굴에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어떤 만남에서 스승은 빛이 나고 찾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스승이 없는 시대라고 하는 것도 거짓인지 모른다. 스승과 제자는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이러한 만남은 무수히 많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을 난세라고 말하고, 진정한 스승이 없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굉장한 권위와 카리스마를 가지고 굉장히 큰 따르는 무리를 거느린다. 크고 작은 스승들이 무수히 많은 곳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런데도 스승이 고갈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난세인가?
우리가 위대한 스승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별 것 아닌 사람들이 어느 날 굉장한 스승으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날인가 아주 적은 무리들, 아니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에게 빛이 반짝하는 말이나 행동으로 감동을 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차차 퍼지고 퍼져서 어떤 사람들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그를 통하여 빛을 보았고, 해방감을 느꼈으며, 고향과 같은 포근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답답함을 풀게 되었고, 미래를 보며 어떤 비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스승으로 공인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스승이라고 하면 굉장한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어느 사람에게 반짝 빛나는 빛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하면 그와 같은 횟수가 많아지고 넓어지는 것뿐이다. 때때로 그와 같은 반짝 빛나는 밝음을 내 곁에 항상 붙어 있던 친구로부터 발견할 수가 있고, 우리 집 이웃에 허름한 옷 속에서 흰 이빨을 드러내놓고 히멀건히 웃는 아저씨에게서 발견하게 되며, 어떤 때는 내가 혼내주고 나무라던 자식이나 제자에게서 그것을 보기도 한다. 물론 힘들게만 보이던 지극히 평범하거나 좀 모자란 듯이 보이던 가까운 선생에게서 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 때 아- 하는 탄성을 지른다. 바로 저기에 그런 그윽하고 깊은 모습이 있었구나 하고. 그 만남이 귀하게 떠오른다. 여기에서 스승을 본다.
함석헌의 경우 오산학교에 다닐 때 교장으로 잠깐 일하던 유영모가 부임인사에서 학(學) 자를 풀이하는 것을 보고는 감동하고 놀래 자빠진다. 그 순간 젊은 함석헌은 유영모를 향하여 모든 마음의 문을 열어 두었다. 숫기 없는 함석헌은 선생을 찾아 자주 만나서 깊은 대화는 못하지만 혼자서 마음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던 중에 시절이 분분하여 유영모는 교장의 자리를 떠나게 된다. 그 때 기차역까지 바래다 드리는 길 걸어감에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내가 오산에 온 것은 함 당신을 만나기 위함인 것 같소' 한다. 이것이 만남이다. 이미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나이와 선생과 제자라는 것을 떠나서 마음 속에서 순수한 감정들이 만나고, 내면에 있는 빛들이 서로 비추기 시작한다. 이미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던 내 속에 있는 '그 님'이 서로 알아보고 반가워한다. 유영모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서 함석헌은 무한한 계시를 받지만, 동시에 유영모는 함석헌에게서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본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서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함석헌의 활동이 유영모에게는 경이로움이면서 희망이었고, 집에 들어앉아 가만히 명상하는 유영모는 함석헌에게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그러니 일마다 함석헌은 유영모를 떠올리고 소리 없이 물었고, 유영모는 험난한 세상에서 온전하게 삶을 살아가는가 맘졸이면서 제자 함석헌을 그리워한다. 제자들의 모임에 스스럼없이 참석하여 배우고 격려하면서 함께 자란다. 언젠가 유영모는 온 식구를 동원하여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하였단다. 누가 오기에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단다. 귀한 손님이 오시기 때문에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자 함석헌이 온다고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는 제자 함석헌을 지극히 존경하는 자기 스승을 맞이하는 예로서 하였던 것이다. 어느 증언에 의하면 최남선이나 여운형 같은 사람들이 올 때에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몸뚱이 함석헌을 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그이의 몸을 입고 온 '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몸을 입은 그 '님'이 유영모에게 비치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그 몸 속에 비치는 빛의 맞부딪침이다. 빛은 빛을 알아보는 것. 그래서 한 눈에 들어온다. 함석헌이 남쪽으로 내려온 뒤 유영모의 강의에 계속 참석한다. 유영모는 제자 함석헌의 강의에 맞바꾸어 참석한다. 어쩌면 그들의 강의는 무수히 많은 청중을 향하여 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밖에 없는, 속에 그 '님'을 품은 그 한 사람을 향하여 베푼 것인지 모른다. 말과 행동은 무수히 많은 군중을 향하여 할 때도 있는 것이지만, 그 무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님의 빛'을 향하여 비추는 빛의 투사다. 즉 유영모의 강의는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제자 함석헌의 영혼을 향하여 내던져졌고, 함석헌의 강의는 가장 두렵고 존귀한 스승 유영모를 향한 비추임이었다. 그러니 그 강의는 지극하고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것을 사제동행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는 각각 자기의 고유한 길을 가야한다. 그들은 서로 갈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자식이 부모를 떠날 때 아픔이 있듯이, 제자가 스승을 떠나 독자 노선을 걸을 때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빛이 제대로 비치려면 스승은 제자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하고, 제자는 스승을 파먹고 누르고 뛰어 올라야 한다. 때로는 배신으로 보이고, 때로는 타락으로 보이고, 때로는 오만불손이요 천하의 불효로 보일 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탯집을 박차고 나오는 새생명처럼, 제자는 스승의 날개품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스승이 품는 힘이 강하고 강할수록 박차고 나르는 힘이 더 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서로 자기 길을 갈 때는 소리가 요란할 수밖에 없다. 생명의 만남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떠남은 부메랑현상이다. 돌고 돌아 다시 근원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말씀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유영모는 제자 함석헌이 복잡하고 형편없이 돌아가는 현상세계에 관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진리를 파기에 깊이 정진하고 촐랑대지 않기를 바란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함석헌이 받은 시대의 말씀은 그것과 달랐다. 깊이 명상하고 사람들의 살림틀을 바꾸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한 가지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 못된 세력을 향하여 빛을 비추지 않으면 안되었고, 말을 들을 귀가 있는 자를 향하여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마음으로 정진하는 스승 유영모와 죽을 때까지 사회를 향하여 몸과 맘을 던지는 함석헌의 길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갈등하는 듯이 보이고, 딴 살림을 차린 듯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근원은 하나다. 하나로 비치는 그 '님의 빛'을 각각 다르게 받았을 뿐이다. 아니 다르게 반사할 뿐이다. 두 사람이 받은 빛은 같은 빛이었지만, 반사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반사빛을 받은 또 다른 빛들은 같은 작용과 반응을 경험한다. 역시 그 반사하는 빛을 받아 그 속에 있는 '님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점이다. 지금 이른바 유영모 제자들의 작업과 함석헌 제자들이 하는 작업이 합일에 도달하려는 움직임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를 찾는다. 유영모를 우리 시대의 빛으로 다시 보고, 함석헌을 이 시대의 빛으로 다시 볼 때 이 두 빛은 한 점에 모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비쳤던 빛은 더 풍성한 모양으로 반사된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참 스승이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스승은 타고나는 것인가? 누구인가가 만드는 것인가?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지금 무수히 많은 선생들이 있다고 하는데도 이 시대의 스승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승이 없다면 자기 자신이 스승이 될 맘을 왜 가지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의 상황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생각하여 본다. 그 시대 이스라엘 역시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많았다. 나라를 잃고, 정신은 빠져버렸고, 쓸만한 인재는 나타나지 않고, 사회도덕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시궁창에 굴러 쳐 박혔고, 민중들의 사기는 밑 모르게 쳐질 대로 쳐진 상태였다. 어디에도 구원의 빛이 없고 손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하고 암울한 상태였다. 듣느니 탄식소리뿐이요, 나느니 죽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일반 씨 들의 탄식이 하늘에 닿았을 때 어느 깨끗한 맘에 깨달음이 있었고, 어느 깨끗한 반사기에 반딧불 같은 빛이 비쳤고, 어느 깨끗한 귀에 지극히 작고 부드러운 소리가 깊은 사랑 속에서 들렸다. 그 소리는 때로는 무섭게, 때로는 훈훈하게 파장을 타고 마른 풀밭에 불길처럼 번졌다. 들판에 널려 있는 마른풀은 씨 들의 간절한 마음, 하늘의 말씀, 시대의 소리를 기다리는 애타고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할 때 내 마음이 열리고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려 울리는 스승의 소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분명히 어디엔가 한 사람 있어서 하늘과 땅과 진리와 역사와 사람의 소리를 모아듣는 일에 정성을 쏟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언젠가 간절한 우리 앞에 흙 같고, 물 같으며, 햇빛 같고, 고향 같은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다. 결코 백마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내 곁에 와서 살짝 앉을 것이다. 그래도 못 알아맞히면 성난 파도가 되어 우리를 뒤덮을 것이다. 이 시대에 스승이 없음은 스승을 맞이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가 와 있는데도 볼 수 없이 눈에 티가 끼었기 때문이고, 수없이 많이 던지는 말을 듣기에 지나치게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기 이전에, 내 속에 있는 스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그 빛을 받을 수 있는 반사경, 그 사랑을 담을 수 있는 마음 밭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스승은 거기 그렇게 어엿이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매우 든든한 마음이 자리를 잡겠지. 스승은 이미 내 속에 와 계신다.(2001년 4월 10일)
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 5월호 김 조 년(한남대 사회복지학부, 사회학)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
방상복 신부님께서 닮고 싶어 하는 분으로...
나도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마음이 춥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