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좋은 정태춘

건너간다 - 정태춘│시대의 노래

리차드 강 2009. 6. 25. 04:22

건너간다 - 정태춘

9집 - 정태춘 박은옥 20주년 기념 (1998, HKR)

정태춘 鄭泰春 / Cheong, Tae-Choon 1954-

Track No.6 - 건너간다

 

건너간다

(작사, 곡:정태춘 Cello:허윤정 편곡:최성규)

강물 위로 노을만
잿빛 연무 너머로 번지고
노을 속으로 시내버스가 그 긴긴 다리 위
아,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
아, 지루하게 불안하게
여인들과 노인과 말 없는 사내들
그들을 모두 태우고 건넌다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고,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
흔들리는 대로 눈 감고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깊은 잠에 빠진 제복의 아이들
그들도 태우고 건넌다

다음 정거장은 어디오
이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오
저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 둘 건너
천박한 한 시대를 지나간다
명랑한 노랫소리 귀에 아직 가물거리오
컬러 신문지들이 눈에 아직 어른거리오
국산 자동차들이 앞 뒤로 꼬리를 물고
아, 노쇠한 한강을 건너간다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이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

Credits

레코딩 엔지니어 : 윤정오
마스터링 엔지니어 : 서상환
기획사 : 삶의 문화 / 레코딩 스튜디오 : 한국음반 스튜디오 / 마스터링 스튜디오 : Sonic Korea

Recording Mixing Engineer 윤정오, 이훈희 (한국음반 B STUDIO) 최성규 (대전 Dream STUDIO) / Mastering 서상환 (Sonic Korea) / 사진 김승근 / 디자인 P&T / 진행 김영준 / 기획 제작 1998년 2월 삶의문화

     

임옥상 6.25후 김씨일가 / 1990 / 131 x 198cm / 종이부조+석채

     

임옥상 이사가는 사람 / 1990 / 177 x 135cm / 종이부조+아크릴릭

     

임옥상

임옥상의 가장 큰 덕성은 생명력, 곧 변화와 경험에 대한 적극성과 능동성이다. 이것이 임옥상의 밑천이고 장점이다. 생존의 강렬하고 끈질긴 에너지, 자기 긍정의 정신, 건강한 상식과 깨어 있는 의식, 욕심과 근면성, 기업성과 기획성, 빠른 눈치, 단순화의 힘, 빠르게 중심으로 들어가기, 이런 것들이 임옥상의 기본 생존 능력이자 생명력이다......,

임옥상은 쉽게 그리기의 자유로움으로, 그 뻔뻔스런 오리 궁둥이 춤으로, 당대의 사회 현실과 문화를 가로지르며 금기와 억압과 불안을 조롱하고, 두려움과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황량한 전근대의 들판에 저항의 들불을 지피는 일을 즐겼다. 쉽게 그리기의 그 자유와 용기는 여러 겹의 저항을 내포한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유리된 기존 미술의 신화와 허구에 대한 거부이자 당시 사회 속에서의 언론과 대학, 문화계 등 지식인 사회의 무력감에 대한 자괴감의 표현일 것이다.

임옥상은 그 특유의 쉽게 그리기의 자유와 때로는 무슨 암호나 수수께끼 같은 혼성적이고 기이한 회화 형식으로, 자기가 건너고 있는 한 시대의 착잡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폭로하고 은유하고 저주하고 선동하는 일을 쉬지 않고 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 그는 단연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정태춘·박은옥 정동진 / 건너간다 삶의 문화/한국음반, 1998

'환멸의 90년대' 시대성찰

[정동진 / 건너간다]는 5년 간의 깊은 사색과 성찰의 산물이다. 그의 표현대로 '환멸의 90년대' 한가운데를 건너가면서 느낀 짙은 상념이 묻어난다. "흐르지 않는" "노쇠한 한강을 건너가"는 지친 도시의 사람들이 부대낀다. 중년의 정태춘은 그 가운데서 피로감에 휩싸여 "환멸의 90년대를", "천박한 한 시대를", "이 고단한 세기를" 쓸쓸하게 지나가는 동안 섣불리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다("건나간다"). [무진 새노래]의 기개, [아, 대한민국]의 격정과는 거리가 있음은 물론이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 만한 세상", 해방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몇 년 전과도 사뭇 다른 목소리다. 나지막하고 차분한, 그러나 피로감에 싸인 목소리.

그런데 그 목소리는 도시를 벗어나게 되면서 놀라운 힘으로 전화된다. 박은옥이 부르는 첫 곡 "정동진"에서는 새로운 시작점 "정동진"의 동해 바다 위에서 쌍무지개를 발견한다. 부부가 함께 부르는 마지막 곡 "수진리의 강"에서는 변함 없는 들녘에서, 도회지 골목길에서 힘들고 고단하지만 꿋꿋하게 보내는 일상적 삶의 힘을 덤덤하게 그린다. 어쩌면 일상적 삶의 힘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리라. 앨범을 규정하는 이상의 세 곡에서 정태춘은 여전히 빼어난 노랫말로 시각적 이미지를 뚜렷하게 그려내며 잔잔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전해준다.

"민통선의 흰나비"에서는 철조망으로 분단된 땅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으며, "5.18"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월에 대해 분노를 담아 노래한다. 이 노래들에선 여전히 또렷한 정태춘의 비판적 사회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정신을 음악적,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능력 역시.

이 앨범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수려하고 우아한 편곡에서 찾을 수 있다. "정동진(1)"은 전반적인 곡조 진행, 특히 선율이 1984년 곡 "우리는"을 빼닮았다. 그렇지만 생동감 있는 기타 라인과 꿈틀거리는 슬라이드 기타는 이 노래의 주제의식과 걸맞는 생명력을 더해준다. 곡마다 적절하게 배치된 관악기와 현악기 연주는 지금까지 이들의 음반(그리고 거개의 한국산 음반)에서 늘 모자랐던 부분을 훌륭하게 보완해준다. "민통선의 흰나비"의 리코더와 스트링, "가을은 어디"의 재즈 감각이 가미된 세련된 클라리넷과 색서폰, "5.18"의 아코디언과 스트링, "건너간다"의 가슴 저미는 첼로, "수진리의 강"의 오보에와 혼...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을 때마다 귀에 거슬렸던 판에 박힌 신시사이저와 드럼 프로그래밍을 생각해볼 때 이 앨범에선 무척 신경 쓴 느낌이다. 물론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한 작업이기에 가능했겠지만 새로 가세한 편곡자 및 연주자 최성규에게 공을 돌려야 될 듯하다.

또 다른 조력자로서는 윤민석과 조동익이 있다. 멜로디언 소리가 아련한 세박자의 "들국화"와, 평온함 속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소리 없이 흰 눈은 내리고"는 '민중가요' 작곡가로 유명한 윤민석이 작곡한 사랑노래들이다. 정태춘이 아닌 작곡가의 곡을 부르는 가수 박은옥을 발견할 수 있다(박은옥의 솔로 음반을 구상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또 두 곡은 "정동진(2)"와 함께 조동익이 편곡하고 박용준, 함춘호 등의 연주자로 참여한 곡이기도 하다. 익숙한 (그래서 큰 감흥이 없는) 이들의 편곡과 연주보다는 정태춘이 작곡하고 최성규이 편곡한 곡들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정동진(1)"과 "정동진(2)"를 비교해서 들어보기 바란다).

[정동진 / 건너간다]에서도 여전히 말의 힘, 노래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힘이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든, 멍하게 살아가다가 문득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깨우침이든, 세상의 불의와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변혁 의지이든 간에 말이다. 2002. 04. 19

이볼 evol21@netsgo.com | editor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