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좋은 정태춘

손님 - 정태춘│무작정 좋은 정태춘, 박은옥

리차드 강 2009. 6. 25. 04:29
손님 - 정태춘
정태춘 박은옥 4집 : 떠나가는 배 (1984, Jigu)
정태춘 鄭泰春 / Cheong, Tae-Choon 1954-
Track No.2 - 손님
 
     
손님 - 정태춘
(작사:정태춘 작곡:정태춘 편곡:이정선)
길잃은 작은새는 어디로 갔나
연약한 날개도 애처로운데
지난 밤 나그네는 어디로갔나
바람도 거세게 애달퍼라
사랑으로 맞아주렴
우리는 모두가 외로우니까
따뜻하게 안겨주렴
언제나 또 반가운 손님처럼
갑자기 누구라도 올듯하여
설레임속에서 기다리는데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외로운 나그네의 노랫소리
     
     
     
     
정태춘·박은옥 - 떠나가는 배 (지구, 1984)
듀엣으로 재출발하는 이야기꾼의 노래들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정태춘의 솔로 음반'과 '정태춘·박은옥의 듀엣 음반'의 구분이 명확한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음악산업계이든, 소비자든 대충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서태지의 솔로 2집 음반을 '서태지 6집'이라고 부르는 관행이나 비슷하다. '서태지와 아이들'과 '서태지'가 상이한 아티스트이듯, '정태춘'과 '정태춘·박은옥'이라는 아티스트는 충분히 구분할 필요도, 가치도 충분하다. 비유가 그리 적절치는 않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1985년에 발표된 [북한강에서]와 1988년에 발표된 [무진 새 노래]와 더불어 '듀엣으로서의 정태춘·박은옥'의 초기 작품을 이룬다. 정태춘으로서는 솔로 음반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1980)와 [우네](1982)가 일부 팬들로부터는 여전한 지지를 받았지만, 상업적으로 불운한 결과를 맞은 상황에서 권토중래 끝에 발표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고, 박은옥으로서는 '결혼한 여가수'라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관행에서 약점을 극복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즘 말로 하면 '시너지 효과'가 충분하다.
앨범의 구성은 '재출발'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아직 '공동창작 및 공동연주'이라는 듀엣의 미덕은 완전히 발휘되고 있지 않다. 비닐 LP로 앞면의 전체인 여섯 곡과 뒷면의 네곡은 정태춘이 만들고 부른 곡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중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촛불", "탁발승의 새벽노래", "나는 누구인고", "얘기" 등은 이전에 이미 발표한 곡들이다. '다시 팔기'라는 혐의를 둘 수 있는, 그리고 지구 레코드라는 한 시기를 풍미한 '메이저'의 입김이 작용한 흔적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을"은 공연예술위원회의 검열에 따른 수정을 벗어나 본래의 가사를 들을 수 있는 기쁨을 주고, 세 박자의 민요 가락에 '한국적 풍자'의 백미를 보여주는 가사를 가진 "얘기"는 이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도 타이틀곡 "떠나가는 배(이어도)"의 단조의 비장미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이 곡은 "시인의 마을"과 "촛불" 이후 정태춘에게 대중적 멜로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곡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렇지만 "떠나가는 배"에 대해 '작곡력은 인정할 수 있지만 편곡은 관습적 가요'라는 생각이 든다면, 드디어 이 앨범의 진정한 가치인 '두 아티스트의 공작'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태춘이 만들었지만 박은옥이 부른 "우리는"은,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정태춘이 불렀으면 밋밋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또한 세상에 대해 보다 넓고 깊게 보겠다는 '조짐'을 암시하는 곡이다. 그리고 박은옥이 작사를 맡은 "사랑하는 이에게"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듀엣 발라드이자, '결혼식 축가용'이자, "사랑하고 싶소"('총각 버전')의 '성인 버전'이다.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박은옥이 작곡을 담당한 "하늘 위에 눈으로"에서 경쾌한 리듬 위의 스토리텔링은 박은옥이 단지 정태춘의 '조수' 이상임을 보여준다.
앨범은 마지막 부분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후미에 위치한 "나그네"는 "시인의 마을"에 이어, '양악(洋樂)'인 어쿠스틱 포크만으로도 한국의 전원적 서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아름다운 소품이다. 이 곡에 이어 앞서 언급한 "얘기"로 마무리되면 '구수한 이야기 참 잘 들었습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음악의 주인공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니 총평은 '믹싱이나 편곡이 귀에 거슬린다'는 청자를 배려하면서 끝내야 할 것 같다. 신통한 생각이 없으니, 그저 '음악의 의미란 소리의 물리적 효과와 스토리텔링 사이의 틈새에서 만들어진다'는 우회적 답변을 전하고자 한다.  20020415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수록곡
(Side A)
1. 떠나가는 배 (이어도)
2. 손님
3. 시인의 마을
4. 님은 어디 가고
5. 사랑하고 싶소
6. 시장에 가면(건전가요)
(Side B)
1. 우리는
2. 사랑하는 이에게
3. 하늘위에 눈으로
4. 촛불
5. 나는 누구인고
6. 나그네
7. 얘기
     
     
한국 포크 음악 발전에 있어서 정태춘의 업적
* 이 글은 김형찬의 "한국 포크 음악 발전에 있어서 정태춘의 업적"이란 글 중 일부입니다. 원문이 원고지 120매에 육박하는 긴 글이라서, 부득이 후반부와 결론 부분만을 발췌하여 싣습니다. 따라서 글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한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원문을 보고 싶은 분은 필자에게 이메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시인의 마을"부터 "아, 대한민국..."까지
가수이자 작곡자인 정태춘은 1978년 "시인의 마을"이 수록된 데뷔 앨범을 들고 주류 대중음악 시장에서 작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런데 그 당시의 대중음악계를 살펴보면 1970년대 초반 청년문화의 태동을 선언했던 포크 중 낭만적 포크는 갈수록 팝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비판적 포크가 지녔던 문제의식은 그 자체가 지닌 낭만적이고 지식인적인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유형 무형의 압력에 굴복하게 된 상태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적 록 음악의 탄생을 보여주었던 신중현 사단은 포크 가수들과 더불어 1975년에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정지당하게 된다. 이것은 1975년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영구집권 의지를 노골화하던 유신정권이 장차 정치적 반대세력이 될 수 있는 청년문화를 봉쇄하기 위하여 가장 만만한 대중음악을 희생양으로 삼은 결과였다. 이 빈자리를 채운 것이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 이후 김훈, 최헌, 윤수일 등에 의한 팝화된 트로트였다. 청년문화를 일거에 말살시켰던 유신정권은 대학가요제라는 통로를 신설해서 청년문화의 분출구를 마련해 준다. 권력과 자본의 입김 하에 놓인 청년문화가 자생적으로 성장할 리는 없었고 자연히 신인 가수의 등용문으로 변모하며 초기의 풋풋함은 곧 사라지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 정태춘의 등장과 작은 성공은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어느 집단에 속하지 않은 개인의 성공이 어려운 대중음악계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대학생이거나 대졸자가 주도했던 포크나 대학가요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대중적 감수성의 팝 트로트 그룹에도 속하지 않는 평지돌출적 인물이었다.
정태춘은 경기도 평택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 기타를 배우고 중학교 때 현악반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며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으며 고등학교 때는 그 당시 유행하던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포함한 포크 음악을 들으며 청년기를 보냈으며 음대에 진학하기 위해 바이올린 레슨을 받다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이영미, [정태춘], 한울, 1989).
스무 살에 그가 작곡한 "나그네"의 가사를 보면 시골 마을의 정경이 아주 생생하고 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렇게 자신의 주변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능력은 그가 이후에 현실세계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사춘기적 방황으로 인해 답답한 농촌을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극단적인 낭송조의 선율인데 이것은 두 마디를 단위로 솔-라-시-도-레-도라는 음으로만 일관되게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그 단순한 반복성에 눈을 돌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음악적 형상화가 이루어진다. 이것은 김민기의 "친구"의 전반부에서 잘 드러나는 양식으로 김민기의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인데 앞으로 그의 노래에서 음악적 형상화를 위해 사용될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다음에 주목해야할 그의 초기 작품으로 1974년에 작곡된 "얘기"가 있는 데 그 첫 절 가사를 보면 "담 넘어 뒷집의 젊은 총각 구성진 노래를 잘도 하더니"(기대) "겨울이 다 가고 봄바람 부니 새벽밥 해 먹고 머슴가더라"(실망)와 같이 대립되는 두 부분이 대조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가 이 곡의 제목을 "얘기"라고 했듯이 이 곡은 그가 앞으로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얘기하는 노래꾼으로 변모해 나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변모에 있어서 이런 대조법은 그가 얘기를 전개하는 중요한 틀이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그는 1978년 군에서 제대한 이후 [정태춘의 새 노래들]이라는 첫 앨범을 발표하는데 대표곡인 "시인의 마을"을 보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에 한국에 유입된 미국 모던 포크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기타, 하모니카, 드럼을 사용한 포크 록적인 악기사용, 쓰리 핑거(three finger) 기타 주법이 그것이다. 또한 1976년에 작곡된 "서해에서"의 기타로 연주되는 전주의 대위법적 진행에서는 그가 공부했던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가사 내용은 앞의 곡 "나그네", "얘기"에서와 달리 사색적, 관념적 언어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그가 군 입대를 계기로 고향을 떠나온 상태에서 그의 내면적 세계가 고향에 있을 때와 달리 관념적인 언어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여기서는 그가 앞서 사용했던 낭송조의 선율이 곡을 전개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는데 그의 노래 가사가 많은 얘기를 담은 산문적인 자유시의 형태를 갖게 될 때 주로 쓰이게 된다. 따라서 그의 이후의 작품 [아! 대한민국...]에서는 서사적인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주된 수단으로 쓰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이 그의 창법인데 그의 목소리는 바이올린과 같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국악 현악기와 같이 소리가 울리면서 여러 가지 공간적인 표정을 가지는 곡선적인 것이다. 그 목소리를 담아내는 선율의 호흡은 서양음악처럼 단위박자를 지키는 엄격한 것이 아니라 프레이즈 단위로 적당히 박자를 맞추어 나가는 자유로운 것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다양함과 긴장감을 가지므로 음폭의 변화가 별로 없는 단순한 낭송조 선율과 결합할 때 진가를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런 낭송조의 선율과 창법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는 유장한 선율을 만들어내는데 "시인의 마을" 후반부 가사 "나는 고독의 친구... 시인이라도 좋겠소"의 8마디가 그것이다.
1980년에 발표한 그의 세 번째 앨범 [우네]는 앞면이 국악기의 반주로 되어 있는데 서양 악기와 서양 음악으로 음악을 배운 그가 국악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가야금, 해금, 피리의 실내악 악기 위주의 반주 형태에 노래만 얹어 부른 것으로서 김민기가 "두어라 가자"에서 시도했던 것과 같은 차원이며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성과는 "여드레 팔십리"에서 도약적 음정으로 구성된 시김새의 활용과 셋잇단음표에서 꾸밈음의 사용으로 민요적 선율어법을 확립한 것인데 이것은 그의 창법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정태춘의 독자적인 음악 어법으로 자리잡으며 김민기가 미국의 모던 포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음악 어법을 시도만 하고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정태춘은 어느 정도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가 1978년 데뷔와 동시에 자신의 음악세계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은 성공을 거둔 요인을 분석해 보겠다. 유신정권 말기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마냥 밝고 즐거운 그래서 시대의 분위기와 더욱 어울리지 않는 대학가요와 사랑 타령 일색의 감각적인 팝 트로트에 잠시나마 빠져들었던 대중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무언가 분명히 알 수 없는 사색적인 가사의 노래에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들 내면의 불만과 불안의 단초를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끌렸던 것이다. 또한 그의 창법과 선율구조가 주는 색다른 느낌으로 대중들은 그를 다른 가수들과 구별되는 느낌(흔히 이것을 '토속적'이라고 부른다)을 주는 가수로 받아들였으므로 그의 작은 성공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85년 [북한강에서]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그는 초기에 시도했던 음악적 어법이 정착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강에서"를 보면 "시인의 마을"에서 보였던 낭송조의 선율의 쉼 없는 연결이 주된 양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수로 데뷔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으나 도시인으로서 서울 생활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이 새벽강에 나와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위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자연 속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며 사색에 잠기는 노래에서 음의 도약이 없이 좁은 음역으로 쉼 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선율은 그가 추구하던 자신의 내면세계에 아주 어울리는 형식으로 자리잡는다.
또 다른 곡 "장서방네 노을"의 전반부는 비나리의 형식을 빌어서 자유로운 리듬으로 느리게 노래를 하고 후반부는 조금 빠르게 노래하며 대조를 이루는데, 이 후반부에서 드럼이 북의 느낌을 주도록 사용된다. 이것은 그가 1980년도 세 번째 앨범에서 국악 반주를 그대로 사용하던 단계에서 반성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진 부분이며 앞으로 그가 북이 가진 역동성과 신명성에 매료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반주에 어울리게 그의 창법도 질적인 변화를 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의 마을"에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어둡고 거칠며 허무적인 분위기마저 풍기지만 이 곡에 이르면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허무적인 분위기가 없어지고 단단하고 또한 당당한 느낌을 주며 이를 배경으로 '라도레미솔'의 5음계로 이루어진 민요적 선율은 역동적인 느낌을 주고 그가 시도한 창법과 선율이 서로 잘 호응하면서 성숙한 단계에 이른 느낌을 주고 있다.
"북한강에서"를 발표하던 1985년 그 해에 그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다른 시도를 하게 되는데 1987년까지 3년 동안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소극장을 순회하며 라이브 콘서트를 한다. 이것은 들국화와 김현식을 필두로 한 동아기획 사단이 록 음악으로 전국 순회 라이브 콘서트를 하면서 1970년대 포크 4인방이 굳건한 아성이었던 트로트를 밀어내고 대중음악에서 청년문화의 주도권을 얻어낸 이후 두 번째의 중흥을 꾀하던 상황 속에서 록 음악이 아닌 또 다른 축인 포크 음악을 통해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직접 대중을 만나면서 자신의 음악적, 사회적 고민들을 얘기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사회 속으로 뛰어들 채비를 갖추게 된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는 격변을 겪게 되는데 민중들에 의한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화국이 무너지고 정치와 사회를 보는 대중들의 시각에 상당한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후 1988년에 정태춘은 전국순회공연으로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앨범인 [무진 새 노래]를 발표한다. "고향집 가세"의 고향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고향이다. 2절의 "내 고향집 담 그늘의 호랭이꽃 / 기세 등등하게 피어나고 / 따가운 햇살에 개흙마당 먼지만 폴폴 나고 / 음 툇마루 아래 개도 잠들고 / 음 뚝딱거리는...." 같은 가사를 보면, 이제까지의 고향은 몸은 떠나왔지만 마음은 떠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던 과거의 고향이었던 반면 비록 퇴락하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이지만 그 변화된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씀으로써 현재적 시점에서 고향을 묘사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몸과 마음이 모두 농촌을 떠나 도시의 생활에 적응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함으로써 과거의 고향인 자연 속에서 위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 속에서 그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발견한 희망을 근거로 드디어 홀로서기를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가야 가자"에서 잘 나타난다. 할매손도 어매손도 놓고 삼천리 강산을 어깨 펴고 걷겠다고 말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악기 사용에 있어서 변화된 모습인데 양악기 없이 국악기로만 반주하는 외형적 모습은 1980년의 3집에서와 같지만 그 내면적 모습은 완전히 그 양상을 달리한다. "여드레 팔십리"에서 노래는 전형적인 국악 반주에 종속된 모습을 보이지만 "아가야 가자"에서는 북이 전면에 깔리는 가운데 다른 악기들이 적당한 부분에 제한적으로 등장하면서 노래를 살리기 위해서 반주가 자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그가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며 국악기라는 재료에 물화되지 않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용을 해나가겠다는 변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또한 이 곡을 통해 그는 북이 갖는 가능성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1988년 겨울 서울 청계피복노조의 집회에서 노래를 부른 이후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다. 그 해 12월부터 [송아지 누렁 송아지]라는 이름의 줄거리로서 내용상 연결되는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하는데 우리 소는 얼룩소가 아니라 누렁소라는 자각은 그의 음악적, 사회적 자각을 함께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진 새 노래]에서 시도했던 북의 가능성을 확장시켜 20여 개의 북으로 춤과 반주를 같이 함으로써 북이 갖는 신명성과 집단성이라는 미학을 획득하게 된다. 이 공연이 기천명 수준의 청중을 대상으로 한 실내의 공연임에 비해 1989년에 전국의 각 대학 총학생회와 결합하여 행한 전교조 지지 공연은 만 명이 넘는 청중을 대상으로 한 야외공연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중의 진보성을 흡수하면서 사회현실과 음악이 갖는 힘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지식인으로 출발한 김민기는 자신의 음악적 발전을 지식인 그룹 속에서의 작업을 통해 이룩할 수 있었고 비합법적인 소규모 지하공간에서 노동자들과의 생활과 창작으로 자신의 문제의식을 단련해 나갔다. 이에 비해 어느 집단에서도 속하지 못한 비지식인으로 출발한 정태춘은 모든 것을 혼자 몸으로 부딪히며 해나갈 수밖에 없었고 또한 합법적이고 열린 대규모 야외공간에서 문제의식을 단련했으므로 그의 태도는 김민기에 비해 더욱 실존적이었으며 그 성과 또한 김민기의 시도를 계승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차원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지점은 한국에서의 포크 음악이 정태춘에 의해 대학가를 통해 노래운동이라는 형태로 이어오던 흐름과 만나서 음악운동이라는 자생적 언더그라운드를 형성하여 사회적 확산력을 갖게 되는 지점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문제의식을 단련시킨 그는 이런 형태의 음악이 더 이상 제도권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음을 잘 알게 되면서 나아가 이런 제도권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계획을 세우는데 1990년대 발표하는 앨범 [아! 대한민국...]이 그것이다. 그는 공륜의 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하여 대학가나 집회현장에서 배포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은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과 같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하는 효과는 김민기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어느 정도 대중적 명망을 가진 자신이 의도적으로 불법 음반을 만들어 구속됨으로써 사전심의의 부당함을 공론화시키고 그것의 철폐로 이어나간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공윤이라는 기구를 앞세운 국가가 사전심의라는 절차를 통해 음악을 걸러내는 것은 표면적으로 저질, 퇴폐 음악의 추방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저항의 싹을 잘라내고 통제의 논리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자신들이 선호하는 획일성, 통속성, 순수성이라는 미학을 관철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정태춘은 간파해냈던 것이다.
1970년대의 5공 정권은 김민기의 구속이 몰고 올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 두려워 구속을 못했지만, 1990년대의 6공 정권은 정태춘을 구속함으로써 문화의 통제장치가 손상을 받고 자신의 미학의 허구성이 폭로되는 문화적 파장이 두려워서 그를 구속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싸움을 통해 1996년 마침내 음반의 사전심의 폐지를 얻어내는데 이것은 김민기가 제시했던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어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 대한민국...]에 이르러 그의 사회의식은 훨씬 날카롭고 근본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들 세상"과 "그대 행복한가"에서는 김민기처럼 은유적이고 포괄적인 문제의식의 드러냄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발생시키는 사회구조에 주목하고 근원적 저항을 위해 우리의 정치적 보수성과 패배적 인식을 걷어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런 자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얘기"에서 사용했던 대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의식세계가 고향과 땅에 머물러 있을 때 자연과 그 속에서의 삶을 생생히 그려냈던 그의 묘사력은 그의 의식세계가 좁은 지역의 고향을 떠나 한국 전체로 향하고, 농촌으로서의 땅을 떠나 도시에 사는 인간으로 향하게 되면서 한국이라는 사회의 모순구조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억압을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의식세계를 내면에 가두어 두기를 거부했고, 지배층이 제시하는 순수주의 미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1988년의 "장서방네 노을"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민요적 창법의 질적 변화와 역동성의 가능성은 1990년의 "우리들 세상"에 이르면 또 한번의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여기서 가사의 내용은 해학적인 풍자정도가 아니라 야유하고 비꼬고 조롱하며 외치는 내용으로 바뀐다. 따라서 그의 창법도 신랄한 야유조로 거친 역동성으로 바뀐다. 이렇듯 그의 창법의 변화는 의식세계의 변모를 담고 있고 그가 확립한 민요적 창법은 미국의 모던 포크 또는 그것을 수입한 양병집, 서유석, 한대수, 김민기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한국적 포크의 특성을 보여주는 요소이다.
이 앨범에서 그는 감상하기 위한 노래에서 벗어나 상황을 묘사하고 현실을 고발하고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이야기의 차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시인의 마을" 이후에 사용된 낭송조의 선율이 주된 양식으로 쓰이는데 이것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때 생기는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앞서 말한 야유조의 창법 외에도 다양한 국악 리듬과 국악기의 사용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들 세상"을 보면 야유를 퍼부을 때는 빠른 굿거리로,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는 중모리 리듬이 사용되고, "황토강으로"에서도 전반부와 후반부를 중모리와 중중모리로 변화를 주고 있으며, "일어나라 열사여" 후반부에서는 부활과 해방을 얘기할 때는 국악기를 사용해서 행진곡 풍의 리듬을 엮어낸다.
1980년 [우네] 앨범에서의 기계적인 국악기 사용을 반성하고 1988년 [무진 새 노래]에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고 1989년 전국순회과정에서 북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후 1990년 [아!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정도의 정리된 생각을 가지고 국악기를 사용해 나가게 된다. "일어나라 열사여"에서는 처음부터 강하고 일정하게 내려치는 북소리가 전곡을 일관하며 비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그가 획득한 북의 가능성에 근거한 것이며 후반부 행진곡풍의 부분에서 신명나는 꽹과리 소리로 부활과 해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 세상"에서는 국악기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 부유층의 사치와 노동자의 빈곤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꽹과리와 태평소가 부유층을 야유하는 느낌으로 사용되고 대금은 노동자의 절망을 애절하게 묘사하며 후반부에서 패배, 순종, 체념, 비굴의 의식을 내리치고 우리들 세상을 건설하자고 외치는 부분에서는 장구, 꽹과리, 태평소가 파괴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이 [아! 대한민국]에서는 [우네]에서와 같이 모든 국악기가 다 함께 기계적으로 사용되면서 연주에 노래가 종속되면서 생기는 양자의 불일치를 극복하고 국악기가 양악기와 함께 적재적소에 이미지의 형상화에 효과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연주가 가사의 내용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김민기가 국악 양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에 비하면 질적인 발전이며 한국 포크 음악에 있어서 자신의 전통적 악기를 포함해서 어떻게 악기 사용에 있어서 독자적인 방식을 획득할 것인가를 보여준 하나의 좋은 선례로 평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촌놈 정서와 땅의 정서로 일군 한국적 포크
195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모던 포크는 1960년대 말에 한국에 들어와 서유석, 양병집, 한대수에 의해 미국 모던 포크의 양식이 선을 보이고 그 적용을 타진하고 초보적인 사회풍자를 이루어냈다. 김민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의 연가(戀歌)를 극복하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발전했으며 지식인의 관념성을 벗어나 민중의 사고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그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에 의해 작품성이 강화되었다. 또한 앞의 세 사람과는 달리 주류대중음악과 결탁하거나 활동을 중단하지도 않고 자신의 작업과 음악적 발언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시도를 최초로 하였고, 또한 민요적 국악적 양식을 선보이며 서구의 음악 어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김민기는 양병집, 서유석, 한대수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한 정태춘에게 극복되어야 할 명제를 남겨두게 된다.
정태춘도 초기에는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내면세계에 몰두했었으나 직접 대중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하다가 1980년대 후반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을 맞이하여 사회변혁 운동의 중심에 스스로 뛰어 듦으로써 시대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당대를 살아가는 음악인으로서 음악을 통해 발언하는 실천적인 대중예술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본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던 포크의 중요한 정신이며 그것의 한국적 실현이다. 이런 활동을 근본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전심의를 거부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킴으로써 자본과 권력의 미학에 도전하고 사전심의 폐지라는 구체적 성과를 얻어내는데, 이것은 분명히 김민기가 남긴 명제의 극복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미국 모던 포크의 음악 어법에서 벗어나려는 김민기의 시도를 계승하여 한국 포크의 음악 어법 정립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갖는 몇 가지 중요한 특성에 기인하는데, 그 하나가 도시의 지식인이 아닌 시골의 농사꾼 출신이라는 '촌놈 정서'다.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서구화를 향한 개발과 파괴로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적 정서, 미의식과 같은 전통문화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에 그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에 서구화에 맹목적으로 빠져들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언어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촌놈정서'는 속성상 세련되게 꾸미지 않는 소박함과 투박함을 지니는데 "봉숭아", "서해에서"와 같은 서정적인 곡에서 잘 드러나고 "그대 행복한가"에서의 절제하지 않는 과잉된 표현, "우리들 세상"에서의 적나라한 어휘의 사용에서 잘 드러난다.
이 '촌놈 정서'는 이런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중심을 지켜주는 정신이 없으면 반대로 자신을 재빨리 버리고 도시적, 서구적 감수성에 적극적으로 동화되기도 하는데 그 중심되는 정신이 그가 일관되게 유지하는 '땅의 정서'다. 이것은 그가 두 발로 농촌의 땅을 딛고 서 있을 때는 자연에 대한 성실한 묘사를 가능케 하는 반면, 몸은 농촌을 떠나왔으나 마음은 떠나오지 못했던 군대시절이나 도시 생활에 부적응을 겪던 시기에는 중심을 잡지 못한 관념적 사고를 보여주며, 그런 과정을 거쳐 도시생활에 적응하고 사회라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섰을 때는 현실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저항하는 노래꾼으로 변모하게 한다. 또한 이것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낭송조의 선율을 만들어냈으며 땅과 노동의 정신에 입각한 민요를 바탕으로 그의 가장 큰 무기인 민요적 창법을 만들어 냈다.
이 '촌놈정서'와 '땅의 정서'가 어우러져 결국 정태춘이라는 존재의 조건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바탕으로 그는 꾸준하고도 뚝심 있는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모두가 무모한 짓이라고 고개를 저을 때 홀로 그는 국회의원들을 직접 만나면서 법안 개정심의에 참가하여 사전심의 폐지라는 성과를 얻어낸다. 1990년 들어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회변혁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쉽게 자신의 과거에 괄호를 치고 현실적 노선으로 전환하거나 무기력에 빠질 때 그는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하면서 현실의 모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일상에 스며들어 있을 뿐이라며 무기력을 떨치는 희망을 노래했다. 이는 그의 행동 자체가 서사적인 것이며 자신이 한국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그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국 포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계속 담당해 나갈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20020430 김형찬 khc012@hanmail.net | guest contributor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