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꺼진 창의 주인은 누구인가? - 이장희 조영남, 오현란 한국 가요사에서 번안곡이 차지하는 비중은 양적인 면에서 창작곡에 못지 않다. 적어도, 대중 가요의 유아기라 볼 수 있는 70년대 까지 한국 가요의 절반은 외국의 것을 가사만 바꾼 번안곡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경제가 미국의 무상원조에 의지한 나머지 자생력을 잃었던 것처럼, 한국의 가요도 미국 흉내내기를 통해 그 싹이 자라기 시작했으니, 유명 팝 음악에 한글 가사만 살짝 얹은 번안곡의 남발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번안곡의 범위가 미국의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럽 음악에 까지 그 손길을 뻗쳤다는 정도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윤 심덕의 <사의 찬미>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의 곡에 가사를 얹은 번안곡이었고, 운동권에서 만들어지고 불려진 5.18 조가 <5월의 노래 2>도 미셸 폴나레프Michel Polnareff의을 일부 수정한 곡이니, 번안 가요의 범주는 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번안곡과 뉴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개사곡이다. 원곡 가사 그대로를 번안해서 가사로 삼는 곡이 아닌 경우를 일컬어 개사곡이라고 하는데 대개의 번안곡들이 외국 곡의 가사를 그대로 번역해서 가사로 쓰지 않으니 번안곡보다는 개사곡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고, 그 범위도 개사곡 쪽이 더 넓을 듯 하다. 개사는 또 다른 의미에서는 패러디의 기능도 함께 가진다. 기존의 가요의 가사를 비틀어 세태를 풍자한 운동권 가요들은 새로이 멜로디를 익혀야 하는 창작 운동권 가요와는 달리, 그 가사만 새로 외우면 되는 편리함으로 대중들을 쉽게 아우르는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개사는 또한, 헌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는 패션의 역할도 해 낸다. 귀에 익은 멜로디에 당 시대의 정서를 담은 가사를 얹어 분위기를 환기시킴으로 해서 추억과 새로움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인기를 모았던 모 방송국의 짝짓기 프로그램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절절하고 애잔한 분위기를 조성했던오 현란의 <원(願)>은 조 영남이 부른 <불꺼진 창>에 새 가사를 얹은 개사곡이다. 외국곡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 사이트의 지식 검색에서 원곡으로 소개되고 있는 이태리 가곡이 원곡이 아니라,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작곡하고 노래한 이 장희가 작곡하고 가사를 붙여서 자신의 삼촌 뻘인 조 영남에게 주었던 순수 창작 가요 <불꺼진 창>이 원곡이다.김 도향, 손 창철이 함께한 듀엣 투 코리안즈의 곡으로도 발표가 되었었으며, 작곡자인 이 장희가 자신의 음반에 담기도 했던 곡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미풍양속 침해를 이유로 세 가지 버전이 동시에 금지곡이 되어 버린 곡이기도 하다. 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이런 오해를 불러 일으킨 첫번째 책임은 오 현란 자신 또는,오 현란의 음반을 제작한 제작자가 져야 한다. 같은 노래에 불어 가사를 붙여서 <불꺼진 창>이라고 소개를 했으니, 누구든지 샹송이나 깐초네의 번안으로 오해할 충분한 소지를 제공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책임을 오 현란이나 음반 제작자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은 원곡을 정확하게 명시하지 않은 표기상의 오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더 큰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 책임은 한국 가요를 필요 이상으로 경시하는 우리 감상자들의 몫이다. 오 현란의 <원(願)>은 원곡인 <불꺼진 창>의 뽕짝 필을 완전히 제거한 세련된 유럽 풍의 리듬 & 블루스 곡이다. 한국적 정서라고는 신파조의 가사뿐, 전체적인 분위기는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오 현란의 목소리나 창법도 상당한 매력을 발산한다. 너무 매끄러운 개작도 때로는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을 몰고 올 수 있는 일인가 보다. 그 두 개의 노래가 서로 상봉하는 순간 산지기도 오죽 당황스러웠으면, 저작권 관련 사이트에 접속해서 <불꺼진 창>의 작곡자를 찾아 봤을까. 낯이 뜨거워 질 일이다. 우리는 왜 우리 것을 이리도 가볍게 여기고 살고 있단 말인가. 세련된 분위기로 윤색된 새로운 노래가 귀에 익었다 싶으면, 우린 왜 바다 건너의 것으로만 여기게 되었을까? 시인 랭보Arthur Limbaud의 말처럼 먼 곳이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요의 태동기처럼 낯 두꺼운 번안과 샘플링이 또 다시 난무하는 21세기 가요계에 대한 불신감 때문일까?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오 현란이 부른 <원(願)>은이라는 외국 가곡에 한글 가사를 붙인 번안 가요가 아니라, 한국 가요계의 유아기에 활동한 몇 안 되는 싱어 송 라이터 이 장희가 작사 작곡하고 조 영남이 처음으로 부른 <불꺼진 창>이라는 사실을. 출처: 山ZIGI VINAPPA (http://blog.naver.com/vinappa) [불꺼진 창]은 참 여러사람에 의해 불려지고 새롭게 다시 불리우고 있다. 조영남 이장희를 시작으로 김재성, 노길한, 지노, 투코리언스, 오현란등이 부른 각각의 [불꺼진 창]은 그 나름대로 모두 애절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왜 조영남의 [불꺼진 창]이 가장 와 닿는것일까? 마치 내게도 한번 정도 있었을만한 데쟈뷰와 같은 상황에서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꺼진 창]을 바라보는 내 모습에 스스로 슬픔을 덜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