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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교리주의는 오만” - 가톨릭근본주의의 도전 : 한상봉 저│생각하는 신앙

리차드 강 2009. 10. 7. 06:19
“차동엽 신부의 교리주의는 오만”
가톨릭 언론인 한상봉씨 비판
가톨릭근본주의의 도전
〈공동선〉 편집장을 지낸 한상봉 〈지금 여기〉(가톨릭인터넷언론) 편집장이 신간 〈가톨릭근본주의의 도전〉(우리신학연구소 펴냄)을 통해, 가톨릭의 대표적 교리주의자로 꼽히는 차동엽 신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차 신부는 베스트 셀러인 〈무지개 원리〉의 저자로 ‘잘 나가는’ 차 신부다. 그러나 인천교구 소속인 차 신부는 서구에서 보편화한 뉴에이지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신영성운동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신영성운동을 ‘신흥영성운동’으로 고쳐부르자고 주장하는 등 대표적인 교리주의자로 꼽힌다.
저자는 차 신부가 소장으로 있는 미래사목연구소가 펴낸 교리 교재에선 “내 종교가 유일무이한 참 종교이며, 다른 모든 가르침은 설령 그가 그리스도교를 표방해도 다 이단이며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공세적으로 표현하는가하면 “기도란 기도하는 이와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내밀한 나눔이며, 명상이란 ‘함께 있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내 안으로 기어들어가 거기서 자신 안에 있는 거짓자아와 독백을 나누는 것”이라는 폭언까지 일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만일 예수의 구원자적 유일성을 수용하지 않는 것을 죄다 단죄하려고 든다면, 보수적 그리스도교 신자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다 단죄 받아야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빚게 된다”며 “이 얼마나 오만한 발상인가? 항상 종교전쟁은 이런 자들 때문에 발생했다고 역사는 알려준다”고 썼다.
2007-09-17 조연현 종교기자 ⓒ 한겨레 (http://www.hani.co.kr).
     
'고통' 칠레의 조각가 로드리고 모레토 슈미트의 작품
(2001년 방한 전시회 이후 명동 성당에 기증)
     
근본주의 [根本主義, fundamentalism]
국어사전적 정의 : 펀더멘털리즘(fundamentalism) [명사]
[명사]<종교>제일 차 세계 대전 후에 자유주의 신학 및 세속화한 생활에 대항하여 미국에서 일어난, 개신교 내의 보수적인 신학 운동. 성경을 절대화하여 모든 내용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라고 주장하고, 진화론과 같은 근대적인 합리주의를 배격하였다.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이슬람 근본주의, 힌두 근본주의 따위의 제반 종교에 대한 용어로도 사용한다. ≒근본주의.
20세기 초부터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파 사이에서 자유주의에 대립하여 일어난 보수파(保守派)의 신앙운동.
처음에는 침례파에서 일어났는데, 이어서 장로파의 J.G.메첸에 의해 ① 성서무류론(聖書無謬論), ② 예수의 처녀강탄(處女降誕), ③ 육체적 부활, ④ 예수의 속죄사(贖罪死), ⑤ 예수의 이적(異跡) 등 5대 강령의 신조가 제창되었으며, 1920년경부터는 정치가인 W.J.브라이언에 의해 진화론(進化論)이 부정되면서부터, 전 미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하여 한때는 자유와 보수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으나 그 후 점점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근본주의 [根本主義, fundamentalism]
미국 개신교에서 일어난 보수주의 운동.
19세기 천년왕국운동에서 발생했으며, 성서의 완전한 무오류성과 축어적 해석, 육체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동정녀 탄생, 부활, 대속(구속행위) 등을 그리스도교의 근본으로 강조했다. 근본주의는 20세기초 미국의 종교와 세속 분야에 불어닥친 모더니즘 경향들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20세기말에는 많은 교회단체·교육기관·특수 조직들이 이 운동을 이끌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
기원
근본주의의 뿌리는 미국의 천년왕국운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미국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따른 평화의 천년('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로 들끓었다. 초기에는 흩어져 있던 재림에 대한 관심이 나이애가라 사경회(査經會)를 통해 하나로 모아져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경회는 뉴욕 시 침례교 목사 제임스 잉글리스가 1872년 죽기 바로 전에 시작하여 세인트 루이스 장로교 목사이자 영향력 있는 천년왕국운동의 정기간행물 〈진리 The Truth〉의 편집자인 제임스 브룩스(1830~97)가 계속 이어갔다. 이들을 비롯해 초기의 천년왕국운동 지도자들로는 침례교 부흥사인 조지 C.니덤(1840~1902), 성서주석가로 유명했던 윌리엄 J. 어드만(1834~1923), 1873년 감독교회를 떠나 작은 교단인 개혁감독교회의 감독이 된 윌리엄 니콜슨(1822~1901) 등이 있다 (→ 천년지복설).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유명한 보스턴 침례교 목사 아도니람 J. 고든(1836~95)과 캐나다 교회 소속이었던 후론의 감독 모리스 볼드윈(1836~1904) 같은 지도자들이 천년왕국운동에 가담했다. 이들은 해마다 하계 사경회를 열었는데, 사경회는 1899년까지 대개 온타리오의 나이애가라온더레이크에서 개최되었다. 나이애가라 사경회와 연관된 천년왕국론자들은 1878년에 대도시에서 시작된 공공집회들, 예를 들면 뉴욕 시에서 열린 '성서와 예언자 대회' 같은 집회들을 후원했다.
근본주의 견해의 발전
이 천년왕국운동은 몇몇 개신교 지도자들이 노동의 불안정, 사회불만, 점증하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이민 등을 보면서 미국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처음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에서 점차 발흥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말과 1890년대에 등장한 자유주의 성서비평의 도전도 많은 사람들을 천년왕국운동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세기말에 접어들면서 개신교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L. 무디(1837~99)는 노스필드 사경회에서 천년왕국사상의 발표를 위한 유력한 강령을 마련하였다. 천년왕국론자들은 해외 선교사업을 지원하고 선교열정을 불러일으켰는데, 그결과 '학생자원운동'이라는 단체가 생겼다. 또한 그들은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서 성서의 권위와 영감을 변호하는 데 관심이 있는 교수들과 결연했다.
천년왕국론자들은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을 집회에 초청하고 성서를 변호하는 그들의 논지를 받아들였다. 사실상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들 가운데 천년왕국설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어떤 교수들은 그것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양측은 성서의 권위를 위해 서로가 도와준 일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했다.
천년왕국운동이 복음주의 개신교 안의 보수전통파에 끼친 영향은 천년왕국론자들이 성서의 무류성을 옹호하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 1902년에 미국성서연맹을 세우고 〈근본이 되는 요소들 The Fundamentals〉이라는 제목으로 소책자 12권을 펴냈을 때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소책자들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발전시킨 논증을 사용하여 당시의 성서비평 이론들을 공격하고, 성서의 권위를 재천명하였다. 이 소책자들은 지난 세대가 성서비평과 모더니즘에 대해 논박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나이애가라 사경회를 발족시켰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1914년 이전에 죽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선배들처럼 교단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년왕국운동을 변호하는 태도도 훨씬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었다. 19세기말 마지막 몇 해 동안 제임스 H. 브룩스는 예언자적 해석을 놓고 의견을 달리하는 분파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이애가라 사경회는 중단되었으며, 곧이어 천년왕국운동의 대표적인 두 매체였던 〈구호와 진리 Watchword and Truth〉·〈우리의 희망 Our Hope〉 사이에 논전이 벌어져 이 운동은 크게 양분되었다.
근본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 사이의 논쟁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천년왕국론자들은 자유주의의 성장에 경각심을 갖고, 또한 자기들의 눈에 비친 사회의 타락상에 불안을 느껴 뉴욕 시와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들은 1919년 더욱 크고 포괄적인 '세계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 정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대회의 결과 천년왕국운동의 근본성격은 바뀌지 않은 채 이름만 바뀌게 되었다. 나아가 1919년 대회는 다음 30년 동안 천년왕국적 근본주의 운동을 뒷받침해준 항목들을 본래의 강령에 덧붙였다.
이 대회 지도자들은 운동의 강령이 되는 기초들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모더니즘과 모든 악마적 요소들(특히 진화론)을 내쫓도록 요구했다. 그들은 실제로 대학교들을 포기하고 최근에 세운 성서연구원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가르쳤으며, 미국 그리스도 교회 연합협의회가 보여 준 연합 및 협력정신을 비판하고, 또한 만일 이런 식으로 영성(靈性)이 계속 쇠퇴한다면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근본주의연맹은 지도자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창하지는 못했다.
19세기 말엽 미국 교회에는 자유주의파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 소수도 대부분 신학교나 대학교 교수들이었다. 교구민들, 성직자들, 교단 간부들은 그들이 고등비평을 받아들이는 것을 염려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새로운 학설을 심사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한 교단에서는 장로교 교단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의 혁신적인 학설을 제재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면서 성서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할 만한 증거들이 쌓이고, 새로운 신학자 세대가 자유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제재는 포기되었다. 1914년 무렵에는 성공회· 감리교회· 침례교회·북 장로교회 등의 교단에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미국성공회). 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확산되는 일을 막으려는 투쟁은 이미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1920년대에는 자유주의자들을 교단에서 축출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1920년대의 10년 동안 미국에는 공산주의의 위협과 노동계의 불안 때문에 두려움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근본주의자들도 이러한 두려움과 지적 고립주의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개신교 교단이 다 1920년대의 지적 논쟁에 영향을 받지는 않아서 남침례교 같은 교단에는 모더니즘이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다른 교단들, 이를테면 감리교회나 성공회에서는 모더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반면에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잘 짜여 있지 못했으며, 각 교단의 행정조직도 그 문제를 논점으로 부각시키는 데 필요한 운동을 제대로 벌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북침례교와 북장로교에서는 마침내 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장로교에서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는 보수파가 1910년에 천년왕국론자들의 도움을 얻어 몇 가지 필수적인 교리, 즉 성서의 오류없는 영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 능력 등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반드시 필요한 교리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교파가 이를 받아들이도록 했다. 1922년 곧 모더니즘의 대변자가 될 뉴욕의 해리 에머슨 포즈딕이라는 목사가 '근본주의자들은 승리할 것인가'라는 설교로 천년왕국론자들이 해외선교지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에 항의하자, 장로교 보수주의자들과 천년왕국론자들은 침례교도였던 포스딕을 뉴욕 시 제일장로교회의 목사직에서 쫓아냈다.
제임스 H. 브룩스 같은 천년왕국론자들과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였던 그레셤 J. 메이첸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교단을 떠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랬다.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15인 위원회가 구성되어 타협을 모색했다. 이 위원회는 장로교단이 전통적으로 다양한 견해를 관용해왔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수교리를 결정하는 권한을 총회에 부여한 적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보수주의 입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북침례교에서 불화의 초점은 마치 한 정당의 전당대회와 흡사한 기능을 발휘하는 그들의 연차대회에 있었다. 1920년부터 스스로를 미국 근본주의연맹이라고 부른 침례교 단체는 침례교 근본주의를 위해서 연차 예비대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직된 그들은 연차대회에서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시키려 했다. 이 연맹의 작전이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보다 전투적인 몇몇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은 침례교성서연맹을 세웠다. 그러나 장로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례교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은 내분 때문에 몰락하고 말았다.
성서비평의 확산으로 일어난 불안과 진화론에 대한 불만이 1920년대에 팽배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가 찰스 다윈이 가르쳤던 생명의 기원설과 양립할 수 없다고 믿고 진화론을 반대했다. 그러나 진화론을 반대한 사람들 모두가 근본주의자만은 아니었다. 반진화론자들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도록 로비활동을 했다. 테네시 주는 그런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으나, 미국 시민자유연합의 주동으로 1925년 여러 법정에서 도전을 받았다. 데이튼이라는 작은 마을의 과학교사인 존 T. 스콥스는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자 진화론 옹호자로 발벗고 나섰다 (→ 스콥스 재판). 1920년대에 대중의 이목을 크게 끈 두 사람, 즉 장로교 근본주의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유명한 형사재판들에서 피고측 변호사를 맡은 바 있는 클래런스 대로는 스콥스의 고소사건에서 각각 원고측과 피고측의 변호를 맡아 큰 관심을 끌었다.
제도의 발전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근본주의자들은 점차 논쟁이나 전국적인 관심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현대 근본주의의 제도적 구조가 발전했다. 어떤 근본주의자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1936년 그레셤 J. 메이첸의 주도로 미국장로교회를 세운 장로교인들과, 북침례교연맹을 떠나 정례침례교총회를 세운 침례교인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큰 교단에 그냥 남아 있었으나 근본주의자들 대부분은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전천년왕국설 신조에 충실한 군소교단에 가입했다. 그 가운데는 크리스천선교동맹, 플리머스 형제단, 미국 복음주의 자유교회 또는 그 당시 설립된 많은 독립적인 성서교회와 천막교회들이 있다.
현대 근본주의의 뼈대는 대부분 성서연구원과 성서대학에 의해 세워진다. 이 학교들 가운데 시카고의 무디 성서연구원이나 로스앤젤레스 성서연구원 같은 많은 학교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비롯해 정기간행물들을 펴내고, 독자적인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며, 대회를 개최하고, 부흥강사단을 운용했다. 이 학교들은 교단본부와 매우 비슷한 역할을 하면서 그대로 두면 고립되어 있을 교회들을 결속시켰다. 예술과 과학분야에서 오랫동안 근본주의를 지켜온 보루는 시카고 근교에 있는 학구적인 휘턴대학이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 사이에는 미국 사회의 전문가 조직이나 사업조직에 견줄 만한 조직들이 있다. 의사·과학자·운동선수·사회사업가·역사가·사업가·간호사·학생 등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관심이나 직업분야를 위해 특별히 조직된 그룹에 가입할 수 있다. 기독교학생연맹(IVF)과 대학생선교회(CCC) 지부들이 수백 개의 대학교와 대학에 상주하면서 주요 개신교 교단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조직들과 비슷하게 종교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미국과학자협회도 모임을 가져 과학이 성서 및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는 잡지를 간행한다.
개신교의 에큐메니컬 단체들에 대립되는 근본주의 단체들로는 1941년에 설립된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ACCC)와 1942년에 설립된 전국복음주의연합회(NAE)가 있다. ACCC(~1969)는 사실상 칼 매킨타이어 한 사람의 견해를 대변했다. 그는 미국교회협의회(NCC) 같은 커다란 에큐메니컬 단체들을 비판했고, 주관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변했다. NAE는 가입교회들을 위한 협력체이지만, 자체의 계획을 추진하지는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 교회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전후 수십 년에 걸친 경제발전과 1950년대의 신앙부흥운동 및 공산주의자들이 나라를 전복할지도 모른다는 주관적인 위기의식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근본주의의 대중적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인물은 아마 빌리 그레이엄일 것이다.
1950년대에 사회를 둘로 나누어 놓은 공산주의라는 쟁점은 근본주의자들이 믿기에는 해외에서 밀어닥치고,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가치를 전복시키면서 확산되며, 그리스도교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전통적 관심사인 성서비평과 진화론을 매우 닮은 것이었다. 20세기 중엽의 반공산주의 활동은 1920년대 반진화론운동의 역사를 재현한 것이었다. 진화론 논쟁도 생물교과서에 진화론이 강조되어 있는 사실에 실망한 창조론자들(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다시 요구하고 나선 1960년대에 다시 한번 문제로 떠올랐다. 1970년대에는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창세기도 가르쳐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에 이어 이른바 ' 창조과학' 또는 '과학적 창조론'을 가르치려는 시도가 뒤따랐는데, 이 시도는 창조론이나 진화론이 모두 양자택일할 수 있는 과학적 모델이라는 주장을 전제로 삼았다. 이 모든 운동은 미국 법원들에서 헌법에 근거한 도전을 받았다. 근본주의 창조론자들은 보수주의 지역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얻었으며,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부모가 자녀들로 하여금 무엇을 배우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 시기에 버지니아의 침례교 목사 제리 파웰이 이끈 근본주의자 시민조직인 이른바 '도덕적 다수'는 법으로 인정된 낙태, 동성연애권, 여성 평등권 수정안 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학교 기도, 국방비 증가, 강력한 반공산주의 외교정책을 지지했다.
근본주의자들의 신조는 나이애가라 사경회 이래 크게 바뀌지 않았다. 현대 근본주의 역사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큰 흥분을 일으킨 것은 칼 바르트의 신학으로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 데는 근본주의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근본주의자들은 비록 금욕주의자들은 아니지만, 몇 가지 금기사항을 준수한다.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알코올 음료를 마시지 않으며, 춤을 추거나 영화 및 연극을 관람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성서연구원들과 근본주의자 대학들에서는 이러한 행위들이 엄격히 금지된다. 예배의식은 교파마다 다르지만, 대개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부흥운동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근본주의자들의 예배에서는 회중찬송과 회중기도를 곁들인 설교가 공통된 요소이다.
E. R. Sandeen 글
     
한국의 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은 근대의 과학정신과 진화론 및 이에 근거한 성서비평을 수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성서의 문자적 진리를 주장하는 신학적 흐름을 말하는데 이러한 신학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게 된 계기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교파인 장로교의 초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이 선교사들은 청교도주의와 경건주의에 기초한 그들의 신학과 신앙을 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대로 전파했으며, 그것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신학계에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된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 신학수업을 하고 돌아온 박형룡(朴亨龍)에 의해서였다. 그는 메이첸이 주도하는 보수주의 신학이 프린스턴 신학교를 지배하던 당시 프린스턴의 근본주의 신학을 배운 후, 그것을 그대로 한국교회와 신학계에 정착시킨 장본인이었다. 그에게 신학의 유일한 척도가 되었던 것은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성서관은 마침내 한국교회 내에서 신학적 충돌을 야기하게 되었다. 즉 1934년 제23회 장로총회에서 김영주(金英珠) 목사가 쓴 글 중에 "여자는 조용하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고 한 것은 2,000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한 것이 모두 성서에 대한 비평이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라는 이유로 제소되었다. 이에 대해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연구위원회에서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하는 목사는 정확한 성서를 모독한 자인고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권문제에 대하여는 "성서에 여자교권이 전혀 허용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서를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권장조례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는 보고를 했다. 이 보고들이 그대로 통과되어 총회가 이를 선포했다. 다음해인 1935년 총회에서는 유형기 목사의 편집번역인 〈단권성경주석〉이 제소되었다. 이에 대해서도 장로교회에서는 이를 구독하지 말 것과 장로교의 집필자는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결정·선언했다. 그러한 신학노선을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저작은 〈기독교근대신학난제선평 基督敎近代神學亂題選評〉이라는 방대한 조직의 신학저서이다. 이렇듯 근본주의 신학이 장로교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1930년대 이후 자유주의 신학을 한국에 소개한 대표적 인물인 김재준의 성서해석에 대한 장로교단의 징계를 계기로 1959년 한국장로교는 예수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국의 근본주의 신학은 에큐메니컬 운동(교회일치운동)과 타종교에 대한 태도에서도 대화와 타협보다는 정복을 통한 선교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보수교단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합동측과 고신파 내에서는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으며, 일반 신도들도 대부분 이러한 문자주의적 성서관을 유지하고 있다.
申光澈 글
     
The Seven Words of Jesus Christ on the Cross, SWV478
쉬츠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SWV478
Schütz, Heinrich (1585 -1672)
Die Sieben Worte Jesu Christi am Kreuz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