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베토벤: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Op. 125 - Claudio Abbado, cond

리차드 강 2010. 12. 20. 15:43

Symphony no 9 in D minor, ("Choral") Op. 125

베토벤: 교향곡 9번 라단조 "합창" Op. 125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Album Title: 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Choral") Op. 125

 Composer: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Date Written: 1822-1824
 Period: Classical
 Country: Vienna, Austria
 Studio/Live: Live
 Venue: Salzburg, Austria
 Conductor: Claudio Abbado
 Ensembl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Wiener Philharmoniker)
                   Konzertvereinigung Wiener Staatsopernchor(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Performer: Gabriela Beňačková (Slovak soprano)
                   Walter Hagen-Groll (Chorus Master)
                   Marjana Lipovsek (Contralto)
                   Hermann Prey (German lyric baritone)
                   Gösta Winbergh (Swedish tenor)

Audio CD (February 13, 1987)
SPARS Code: DDD
Format: Import
Recording Time: 1:13:00
Label: Deutsche Grammophon Imports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 Molto Vivace

3. Adagio Molto E Cantabile

4. Presto - Allegro Assai (Gabriela Benacková)

17:13

14:21

17:10

24:01

     

     

 

교향곡 9번 (합창)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무렵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교향곡 9번 d 단조》 (Op. 125) 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잃고 청각장애인이 될 무렵 작곡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으로, 1824년에 완성되었다. 명성있는 작곡가의 교향곡으로는 처음으로 성악을 기악과 같은 비중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합창 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바로 4악장에 나오는 합창(및 독창) 때문이며 그 가사는 프리드리히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작품들은 물론 서양 고전 음악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네 번째 악장에 나오는 음악은 유럽 연합의 공식 상징가로 사용되며(독일어 가사는 공식은 아님), 자필 원본 악보는 2003년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서 미화 3백3십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소더비경매장의 스티븐 로 박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는 예술작품으로서는 최고가로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리어왕과 같은 수준이다."

     

역사 Histofy

작곡

교향곡 9번의 초고

1822년, 런던 필하모닉 협회 (현재의 왕립 필하모닉 협회)에서 교향곡을 의뢰를 받은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의 작곡을 1822년에 시작하여 1824년에 마치게 된다. 그의 교향곡 8번(1812)이후 약 12년 만의 일이었다. 사실, 베토벤은 일찍부터 "환희의 송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1793년에 이미 곡을 붙였다고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스케르초의 주제는 1815년에 작곡한 푸가에서 비롯되었다.

교향곡에 성악, 합창을 도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교향곡에 성악적 요소를 도입하는것은 베토벤뿐 아니라 그 모두에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친구인 안톤 쉰들러는 후일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4악장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전보다 훨씬 힘들어했습니다. 쉴러의 환희의 송가를 적절하게 도입하는 것 때문이었죠. 그러던 어느날 베토벤은 방에 들어와서는 '해냈어, 드디어 해냈다고!'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러대고서는 '불멸의 쉴러에 대한 송가를 부르세'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보여줬지요." 그러나 저런 착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베토벤이 오늘날과 같은 4악장을 완성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초연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초연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베토벤은 롯시니같은 이탈리아출신의 작곡가들이 주류를 이루던 빈보다는 베를린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과 후원자들이 빈에서 초연을 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초연 당시 공동 지휘를 했던 베토벤은 12년 만에 처음 공식 무대에 서는 것이었는데, 그 날 공식적인 지휘자로 되어 있던 극장의 음악감독 미카엘 움라우프는, 2년 전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의 리허설을 베토벤이 지휘하였다가 실패한 사실을 기억해, 연주자와 성악가들에게 베토벤의 지휘를 따르지 말고 자신의 지휘를 따를 것을 미리 이야기했다고 한다. 기록과 참여자들의 회고에 나타나는 일화가 여럿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 따르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의 연주가 끝나 청중들의 박수가 울릴 때까지도 지휘를 계속하고 있어 알토를 맡았던 독창자 카롤리네 웅녀(Caroline Unger)가 그를 돌려 세워 인사하게 했다고 한다. 또 베토벤은 청중들로부터 다섯 번의 '기립 박수'를 받았는데, 당시 황제 부부가 공연장에 입장할 때 세 번의 '기립 박수'를 받던 통례에 비추어 볼 때, 귀족도 아니며 게다가 (궁정에서는 하인으로 취급되던)작곡가에 불과했던 베토벤이 다섯 번의 '기립 박수'를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5월 23일의 두 번째 공연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현재

이 곡의 두 번째 시작 부분은, 미국 MSNBC의 종합 시사 보도 프로그램인 키스 올버맨의 카운트다운(Countdown with Keith Olbermann, 2003년 3월 31일 ~ ) 방송 도입부에 차용되어 널리 사용중인 듯 하다.

편성

목관악기
피콜로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2 대의 플루트
2 대의 오보에
2 대의 클라리넷(B-flat, C, A)
2 대의 바순
콘트라바순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금관악기
2 대의 호른(1, 2) (D, B-flat)
2 대의 호른(3, 4) (B-flat 베이스, B-flat, E-flat)
2 대의 트럼펫 (D, B-flat)
3 대의 트롬본 (알토, 테너, 베이스) (두 번째와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타악기
팀파니, 트라이앵글, 심벌즈, 베이스 드럼
성악 (네 번째 악장에서만 나옴)
소프라노 독창, 알토 독창, 테너, 베이스, 합창단 4 성부 (소프라노, 알토, 테너-I/테너-II, 베이스)
현악기 제1 및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이같은 편성은 베토벤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큰 편성이다. 초연 당시에 베토벤은 매 관악 파트마다 두 명의 연주자들을 지정해 편성을 확대했었다.

구성

모두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다.

1. 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 Molto vivace
3. Adagio molto e cantabile
4. Presto/recitative - Allegro ma non troppo/recitative - Vivace/recitative - Adagio cantabile/recitative - Allegro assai/recitative - Presto/recitative: "O Freunde" - Allegro assai: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Alla marcia - Allegro assai vivace: "Froh, wie seine Sonnen" - Andante maestoso: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dagio ma non troppo, ma divoto: "Ihr, stürzt nieder" - Allegro energico, sempre ben marcato: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 "Seid umschlungen, Millionen!" - Allegro ma non tanto: "Freude, Tochter aus Elysium!" - Prestissimo: "Seid umschlungen, Millionen!"

글 출처: 위키백과사전

 

4악장 가사 - 이탤릭으로 된 부분은 베토벤이 고친 부분이다.

O Freunde, nicht diese Töne!
Sondern lasst uns ang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Freude! Freude!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Wir betreten feuertrunken,
Himmlische, dein Heiligtum!
Deine Zauber binden wieder
Was die Mode streng geteilt;
Alle Menschen werden Brüder,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Wem der große Wurf gelungen,
Eines Freundes Freund zu sein;
Wer ein holdes Weib errungen,
Mische seinen Jubel ein!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ennt auf dem Erde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le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Freude trinken alle Wesen
An den Brüsten der Natur;
Alle Guten, alle Bösen
Folgen ihrer Rosenspur.
Küsse gab sie uns und Reben,
Einen Freund, geprüft im Tod;
Wollust ward dem Wurm gegeben,
Und der Cherub steht vor Gott.

Froh, wie seine Sonnen fliegen
Durch des Himmels prächt'gen Plan,
Laufet, Brüder, eure Bahn,
Freudig, wie ein Held zum Siegen.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ss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ss ein lieber Vater wohnen.
Ihr stürzt nieder, Millionen?
Ahnest du den Schöpfer, Welt?
Such' ihn über'm Sternenzelt!
Über Sternen muss er wohnen.

(피날레 반복)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ss der ganzen Welt!
Brüder, über'm Sternenzelt
Muss ein lieber Vater wohnen.
Seid umschlungen,
Diesen Kuss der ganzen Welt!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오 친구여, 이 곡조보다 더 한 것 없으리!
더욱 희망찬 노래를 부르세
더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환희여, 신성한 불꽃이여
천국의 딸이여!
우리는 그 불길에 이끌려 왔노라,
당신의 지성소가 천국이니.
당신의 마법으로 다시 뭉쳐
문화는 비록 다를지라도
모든 인류는 한 형제가 된다.
당신의 날개가 펄럭이는 곳에서

누구나 이렇게 태어났도다.
우정으로 하나되도록,
누구나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며
옳도다, 누구나 서로의 영혼을 부르리
찬양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는 이 없으리
우리의 모임 안에는

모든 생명이 기쁨을 마시며
자연을 숨 쉬고,
모든 선과 악
그녀가 뿌린 장미 꽃길을 따르리.
그녀는 입맞춤 그리고 포도주
그리고 죽음조차 빼앗아갈수없는 친구,
기쁨은 벌레에게도 주어지는것
그리고 지품천사는 신 앞에 선다.

태양이 떠오른다 기뻐하여라,
천국의 영광스런 계획속에.
형제여,경주하여라,
그리고 행복한 영웅이 되어라.

모든 사람들은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 위한 입맞춤을!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주가 있으니.
억만의 인민들이여, 무릎을 끓겠는가?
세상 만물을 느끼는가?
별들 뒤의 그를 찾으라
별들이 지는곳에 그는 있다.

(피날레 반복)
모든 사람들아, 서로 포옹하라!
온 세상 위한 입맞춤을!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주가 있으니.
이 포옹을 받으라!
온 세상 위한 입맞춤을!
환희여, 신성한 불꽃이여!
천국의 딸이여!
환희여, 신성한 불꽃이여!

Love

Peace

Freedom

   

"Choral"

     

     

■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June 26,1933 - )

이탈리아 태생의 지휘자. 1967년 10월 유잔 오먼디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회견 석상에서 신진 지휘자에 화제가 미치자 "10년 전만해도 유망한 신진 지휘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 로린 마젤,이스트반 케르테스,주빈 메타, 클라우디오 아바도,세이지 오자와 - 이 5명의 신진은 장차 틀림없이 거물이 될 유망주다" 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서 이스트반 케르테스가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였고,나머지는 이후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마에스트로로 우뚝 섰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만 해도 이 말이 있은 4년 뒤에 세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정상인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니 유진 오먼디의 예상은 정확했다.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물론 마에스트로 아바도에게 많은 경쟁자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베를린 필의 사이먼 래틀,로얄 콘서트헤보우의 마리스 얀손스,저 멀리 미국의 제임스 레바인,가까이는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정명훈까지. 모두 다 그의 경쟁자일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현재의 커리어로 아바도를 능가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전반까지 세계 음악계를 이끌어 온 위대한 지휘자들중 한사람으로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자리에서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을 이끌어 왔다. 말러,슈베르트,라벨,차이콥스키 멘델스존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포함하여 다수의 녹음들과 세계 음악 팬을 사로잡았던 많은 콘서트들은 그가 지휘자로서 이루었던 업적과 명성을 대변하고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33년 6월 26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미켈란젤로 아바도(Michelangelo Abbado)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서 1962년까지 밀라노 현악합주단의 지휘자로 있다가 1965년 밀라노의 베르디 음악원 원장이 된 빼어난 음악가였다. 또 형인 마르첼로 아바도(Marcello Abbado)는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으며 1966년 페사로 음악원 이사장에 취임했고,이후 파르마 음악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이러한 음악 일가의 일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의 형과 더불어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음악교육을 받았다. 이후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엔쪼 카라체에게,작곡을 파리베니에게 사사하였고,피아노와 작곡 교사 자격을 따고 1955년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한편 아바도는 10세 때부터 독학으로 지휘법을 공부하여 실내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면서 지휘자로서의 꿈을 키웠고,밀라노 음악원에 재학중에는 안토니오 보토(Antonio Votto)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또한 잘츠부르크에서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와 피아노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56년부터 3년동안 아바도는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당시 지휘법의 대가 한스 스바로프스키(Hans Swarowsky)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당시 주빈 메타도 그와 동문으로써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스바로프스키 밑에서 합리적이고도 기초를 중시하는 교육을 받은 것이 후에 아바도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1958년 아바도는 미국 탱글우드에 있는 버크셔 음악센터에서 행해진  쿠세비츠키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바도는 파르마 음악원의 교수직뿐만 아니라 지방의 여러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계약을 맺었으며,1960년에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갤러콘서트에서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3년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Dimitri Mitropoulos) 지휘자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 8월 14일 아바도는 빈 필하모닉(Wiener Philhamoniker)과 함께 말러의 <교향곡 제2번 - 부활>을  지휘하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하여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아바도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이 크게 확립되었으며,이때 카라얀도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 뒤로는 적극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듬 해,1966년에는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빈 필하모닉의 기부금 콘서트 시리즈로 빈 데뷔 무대를 가졌고,이해에 처음으로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시즌 최초로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Capuleti ed i Montecchi)>의 공연을 지휘했다. 또한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를 지휘하여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이로써 아바도는 일약 오페라 지휘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를 지휘하지 않는 콘서트만의 지휘자는 있을 수 없다.

이로써 스칼라 극장과의 긴밀한 관계가 생겨 1968년에는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심포니 콘서트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이탈리아 최고의 오케스트라의 명예로운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를 지휘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70년에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Don Carlo)>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고,1971년 정식으로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는 그 뒤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도 지휘하였다. 특히 아바도는 재임 기간중 전통 이탈리아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위해 1982년 "오케스트라 델라 스칼라(Orchestra della Scala)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아놀드 쇤베르크,루이지 노노,죄르지 리게티 그리고 칼 하인츠 스톡하우젠 같은 현대음악 작품들의 뛰어난 해석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

1971년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빈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이해 그는 뮌헨 음악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를 지휘하였으며,1972년에 베를린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를 지휘하였다. 제20회 뮌헨 올림픽 기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와 코러스를 지휘하여 베르디의 <레퀴엠>과 오페라 <아이다>를 연주한 것도 1972년의 일이다. 1973년에 빈의 모차르트 협회에서 모차르트 메달을 그에게 주었다.

이해에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및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함께 미국을 연주 여행하였고,빈 필하모니와 함께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도 연주 여행하였다. 이때가 1973년 3월이었으며 아바도의 첫 한국 방문이었는데,그는 2일간에 걸쳐 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를 연주하였다. 더욱이 이 해에 아바도는 런던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4년 아바도로서는 최초의 모차르트의 오페라인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을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바도는 착착 그 활동의 무대를 넓혀 온 셈인데,그 활동 무대 확대 방식도 용의주도하였다. 이것은 레퍼토리의 선택 방식에서도 볼 수 있다.

1981년 봄까지 아바도는 이탈리아의 지휘자로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메카로 이름난 스칼라 극장의 음악 감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푸치니에 의해 대표되는 베르디 이후의 베리스모 오페라라고 불리는 오페라를 조심성 있게 피해 왔다.

한편으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시하고,더욱 루이지 노노의 신작 초연을 종종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아바도의,굳이 말한다면 지성파(知性派)라고 할 수도 있는 지휘자로서의 본연의 자세가 떠오를 것이 틀림없다. 사실 아바도의 연주는 열기에 가득 찼다든가 또는 정열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이 걸맞지 않으며,오히려 지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명쾌하고,조금의 애매모호함도 없으며,그 작품의 양식적인 아름다움을 뚜렷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휘자로서는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는 아바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마도 그 정교하고 치밀함을 잃지 않으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풍부한 표현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아바도는 문자 그대로 지휘자로서 수재 코스를 걸어 왔고,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1978년 아바도는 유럽 공동체 청소년 관현악단(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설립하였다. 이듬 해인 1979년에는 10여년 동안 꾸준히 관계를 지속해왔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고,1988년까지 9년동안 음악감독으로 재직하였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객원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에 아바도는 1985년,구스타프 말러에 대한 음악적 공헌으로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로 부터 메달을 수여 받았다. 1986년 "말러 청소년 교향악단(Gustav Mahler Jugend Orchestra)"과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를 조직하여 예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아바도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음악 감독직을 맡았으며,빈 시의 총 음악 감독직에 임명되는 영예도 누렸다. 특히 재임기간중 아바도는 1988년에 현대음악 페스티발인 "빈 모던(Wien Modern)"의 첫 주최를 담당하였으며,지금도 매년 아바도의 감독 하에 이 축제는 열리고 있다. 1989년 정식 상임 지휘자가 없는 빈 필하모니의 준상임 지휘자로 있었으며,1989년 카라얀의 사망으로 그의 휘하였던 베를린 필의 제5대 음악 감독으로 취임해 세계적인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베를린 필이라는 막강한 악단의 광채를 컨트롤하지 못해 애를 먹어 보이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특유의 스타일로 이 대 악단의 또다른 면을 부각시키는 명연을 펼쳐보였다. 그중에서도 베토벤의 <교향곡 전집> 녹음은 베를린필하모닉과 이룬 거대한 업적이랄 수 있다. 1991년 아바도는 빈 국립 오페라를 사임하였다. 하지만 젊은 음악가들에게 수여하는 "빈 상(the Vienna Prize)"를 재정하여 빈 시와의 관계를 지속하여 오고 있다.
1992년 그는 독일의 가장 영예로운 '독일 시민 공로상'을 수상 하였다. 같은 해,첼리스트 나탈리아 구트만(Natalia Gutman)과 함께 베를린 페스티발 기간중 고전과 현대 실내악 콘서트에서 전문 음악가들과 재능있는 젊은 연주자들이 함께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는 "Berllner Begegnugen" 을 만들었다. 1994년 카라얀의 후임직인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Salzburg Easter Festival)"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뮌헨 "에른스트 폰 지멘스 상(Ernst von Siemens Prize)"과 "그래미상(Grammy Award)"을 각각 수상 하였다.

2002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의 새 작품 바그너 <파르지팔(Parsifal)>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였고,이를 끝으로 페스티발 예술감독직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였다. 2003년에는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이탈리아와 루체른 페스티발(Lucerne Festival)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2004년이후 2005년까지 아바도는 베를린 필하모닉,말러 챔버 오케스트라 그리고 루체른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와 바덴바덴,이탈리아등 유럽등지에서 말러를 비롯하여 베토벤,브루크너,바그너의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2006년 72세의 아바도는 2000년부터 발견된 위암과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최근에는 잘츠부르그의 콘서트와 "펜테코스트 페스티발(Pentecost Festival)" 일정도 모두 취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남긴 레코드는 지금까지 상당수에 이르며,또한 여러 오케스트라들과 레코딩을 했다. 그중 대표반만 간추리면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것으로는 그의 데뷔 앨범인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브루크너의 <교향곡 제1번>,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으로는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4번 - 이탈리아> 외,브람스의 <교향곡 제2번>,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외,스크리아빈의 <법열의 시> 외 등이 이미 정평을 얻고 있는 명연주이다.

협주곡으로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콤비를 이루어 호흡이 잘 맞는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결합반,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결합반 등이 명연이다.

오페라 전곡반으로는 테너 알바,메조 소프라노 베르간자,바리톤 프라이,베이스 몽타르솔 등에 의한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전곡반이 있는데,아마도 당분간은 이 앨범을 능가할 만한 연주는 없을 것으로 보일 만큼 의욕적이면서도 안정감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같은 롯시니의 오페라 <신데렐라> 전곡반도 좋다. 그밖에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한 드뷔시의 <야상곡>,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외,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한 <롯시니 서곡집>도 빠뜨릴 수 없는 호연이다. 그리고 치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와의 협연으로 내놓은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0번,제21번>은 대단한 호평을 얻은 앨범이다.

아직까지도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아바도이지만,그에게도 바흐와 헨델로 대변되는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많은 레코딩들이 증명하듯,그의 녹음들과 공연들은 모차르트, 베토벤 이후의 고전파와 낭만파,그리고 말러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아바도는 말러의 해석에 있어 브루노 발터,레너드 번스타인 이후 클래식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지휘자로 기억될 만 하다. 그런 아바도이기에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전곡 실황 DVD는 아직까지도 그의 도전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글 출처: 클레식 오딧세이 방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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