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 즐거운 ..

기도하는 손 Study of Praying Hands - Albrecht Durer

리차드 강 2011. 4. 20. 02:12

Study of Praying Hands

     

Albrecht Durer, Study of Praying Hands

1508
Brush and ink heightened with white on blue tinted paper
29 x 20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작품 해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 원래 제목은 "Hands of the Apostle,...사도의 손".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목은 "The Praying Hands...기도하는 손". Northern Renaissance 시대의 명화가 Albrecht Durer의 작품이다. Albrecht Durer는 헝가리에서 독일로 이민온 부모 (부모의 혈통은 네덜란드 및 이태리), 독일명으로는 Albrecht Durer (1471 - 1528),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화가 Michael Wohlgemut에게 그림공부를 보냄.

"The Praying Hands" 그림은 Albrecht Durer가 아래의 내용에 대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으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 내려오나 근거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함.

독일의 Nuremberg근처 조그만 마을에 Albrecht Durer라는 젊은이가 무려 18명이라는 대식구와 함께 살고 있었고 먹고 살기도 힘들어 하루 18시간을 일해서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했다.

희망이 거의 없는 이 가족에 Albrecht Durer와 그의 형 Albert는 꿈을 갖고 있었다. (* 한국 Version에는 Albrecht Durer와 그의 친구로 나오며 유럽 및 미국 Version에는 가족으로 나옴)

그들은 모두 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둘 중 한 명이 먼저 학교에 가서 미술공부를 하고 그 동안 다른 한 명은 돈을 벌어 학비를 대고 나중에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에 서로의 임무를 바꾸는 것으로 의견이 이루어 졌다.

결국 Albrecht Durer가 먼저 공부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4년 동안 형 Albert는 광산일을 하여 열심히 학비를 보탰고 동생인 Albrecht Durer은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성공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Albrecht Durer은 형 Albert에게 지난번 약속한대로 이젠 내가 학비를 마련 할테니 형이 미술 공부를 하러 Nuremberg로 가라고 했다.

형 Albert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며 "아니야...아니야"를 반복했다. "나는 Nuremberg로 갈수 없어, 이젠 너무 늦었어, 4년동안 광산에서 일한 댓가로 손마디가 상했고 최근에는 손목 관절로 제대로 물건을 집을 수가 없어. 심지어는 너를 위한 축배의 잔을 드는 것 조차 어려워서 안돼. 섬세한 터치가 필요한 그림 그리는 일은 안돼. 이젠 너무 늦었어"

Albrecht Durer는 형 Albert의 가늘어지고 약해진 두 손을 그렸다.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저 두손을 위해. 나를 위한 두손을 모은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의 나의 성공이 있었다고 믿으며 기도드리는 모습의 손을 그렸다고 전해짐.

처음에는 그냥 "Hands"라고만 불렀으나. 곧 그의 이 작품이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아름다운 걸작이 되어  "The Praying Hands."로 명명지어져 현재에 이른다. 아무도 혼자서 이룰수는 없다..

아래는 이야기 원본


~Source Unknown~

Back in the fifteenth century, in a tiny village near Nuremberg, lived a family with eighteen children. Eighteen! In order merely to keep food on the table for this big family, the father and head of the household, a goldsmith by profession, worked almost eighteen hours a day at his trade and any other paying chore he could find in the neighbourhood.

Despite their seemingly hopeless condition, two of Albrecht Durer the Elder's children had a dream. They both wanted to pursue their talent for art, but they knew full well that their father would never be financially able to send either of them to Nuremberg to study at the Academy.

After many long discussions at night in their crowded bed, the two boys finally worked out a pact. They would toss a coin. The loser would go down into the nearby mines and, with his earnings, support his brother while he attended the academy. Then, when that brother who won the toss completed his studies, in four years, he would support the other brother at the academy, either with sales of his artwork or, if necessary, also by labouring in the mines.

They tossed a coin on a Sunday morning after church. Albrecht Durer won the toss and went off to Nuremberg.

Albert went down into the dangerous mines and, for the next four years, financed his brother, whose work at the academy was almost an immediate sensation. Albrecht's etchings, his woodcuts, and his oils were far better than those of most of his professors, and by the time he graduated, he was beginning to earn considerable fees for his commissioned works.

When the young artist returned to his village, the Durer family held a festive dinner on their lawn to celebrate Albrecht's triumphant homecoming. After a long and memorable meal, punctuated with music and laughter, Albrecht rose from his honoured position at the head of the table to drink a toast to his beloved brother for the years of sacrifice that had enabled Albrecht to fulfil his ambition. His closing words were, "And now, Albert, blessed brother of mine, now it is your turn. Now you can go to Nuremberg to pursue your dream, and I will take care of you."

All heads turned in eager expectation to the far end of the table where Albert sat, tears streaming down his pale face, shaking his lowered head from side to side while he sobbed and repeated, over and over, "No ...no ...no ...no."

Finally, Albert rose and wiped the tears from his cheeks. He glanced down the long table at the faces he loved, and then, holding his hands close to his right cheek, he said softly, "No, brother. I cannot go to Nuremberg. It is too late for me. Look ... look what four years in the mines have done to my hands! The bones in every finger have been smashed at least once, and lately I have been suffering from arthritis so badly in my right hand that I cannot even hold a glass to return your toast, much less make delicate lines on parchment or canvas with a pen or a brush. No, brother ... for me it is too late."

More than 450 years have passed. By now, Albrecht Durer's hundreds of masterful portraits, pen and silver point sketches, water-colours, charcoals, woodcuts, and copper engravings hang in every great museum in the world, but the odds are great that you, like most people, are familiar with only one of Albrecht Durer's works. More than merely being familiar with it, you very well may have a reproduction hanging in your home or office.

One day, to pay homage to Albert for all that he had sacrificed, Albrecht Durer painstakingly drew his brother's abused hands with palms together and thin fingers stretched skyward. He called his powerful drawing simply "Hands," but the entire world almost immediately opened their hearts to his great masterpiece and renamed his tribute of love "The Praying Hands."

The next time you see a copy of that touching creation, take a second look. Let it be your reminder, if you still need one, that no one - no one - - ever makes it alone!

* 5월 21일이 Albrecht Durer의 생일에...

글 출처: vidanova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삶과 창작 활동

1500년 그린 자화상.

출생: 1471년 5월 21일
         독일, 뉘른베르크
사망: 1528년 4월 6일 (56세)

직업: 화가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부친 아래서 금세공을 배웠으나 화가가 되기 위해 미하엘 볼게무트의 문하생이 되었다.

1490년 부할절부터 1494년 오순절까지 알브레히트 뒤러는 오버라인 지역의 각지를 편력했다. 살아 생전 했던 세 번의 장기 여행 중에서 첫 번째였던 이 여행의 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처음에는 네덜란드나 중부 라인 지역에 머물렀다가, 1492년에 엘사스 지역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는 자신에게 커다란 인상을 준 작품을 만든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를 방문하기 위해서 콜마르(Colmar)를 찾아갔지만, 숀가우어가 이미 1419년 2월 2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뒤러는 바젤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곳에서 세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의 책〈바보배Narrenschiff〉(1494년 초판 인쇄)에 실린 유명한 목판화가 제작되었다. 여행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1494년 아그네스 프라이(Agnes Frey)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오래되고 명망이 있는 뉘른베르크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은 출생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두 형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뒤러 가문은 대가 끊기고 사라졌다.

결혼하지 약 3개월이 지난 1494년 10월 초순에 그는 신혼인 아내를 혼자 남겨 두고 베네치아로 여행, 이듬해인 1495년에 귀국하였다. 이 제1차 이탈리아 여행에서 당시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뒤러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 후의 독일 회화 전체를 위해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그때의 구체적인 성과는 그가 여행 도중에 틈틈이 그린 몇 점의 수채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자연에 접할 때에 화가가 가지는 신선한 감동이 싱싱한 서정성과 날카로운 자연 관조를 바탕으로 하여 훌륭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른바 도나우 파의 작품과 더불어 그 후의 유럽 풍경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자신의 상의를 입은 모습을 새긴
뒤러의 목판화

알브레히트 뒤러는 1497년부터 독립을 했고, 1503년부터는 한스 쇼이펠라인(Hans Schäufelein), 한스 폰 쿨름바흐(Hans von Kulmbach), 한스 발둥 그리엔(Hans Baldung Grien)과 함께 작업장을 운영을 했다. 그는 뉘른베르크 알트슈타드에 있던 그의 작업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을 했다. 주로 초상화와 몇 점의 자화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버지의 초상화〉(149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자화상〉(1498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린다우의 상인〈오스볼트의 초상화〉(1499년 바이어른 국립 회화 수집소 소장), 〈자화상〉(1500년 뮌헨 미술관 소장) 등이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당시에 이미 작가로서의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 묵시록>(1498년)은 뒤러의 삶에서 만이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16점의 작품은 한점 한점마다 고도한 기술적 완성과 탁월한 화면 구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네 사람의 기사>는 특히 널리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와 뒤러가 맺고 있는 관계는 콘라트 첼티(Conrad Celtis)의 책 〈지형학으로서의 사랑 quatuor libri amorum〉(1502년)을 위해서 뒤러가 제작한 삽화에 잘 드러나 있다. 첼티는 뒤러를 제 2의 아펠레스(Apelles)라고 칭찬했다.

이탈리아 여행과 그 이후 활동

자화상 동판화 13세 때 뒤러가 그
린 것이다, 1484.

1505년 뒤러는 베네치아를 향해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 조르조네, 팔마 일 베키오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조바니 벨리니가 그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편지에서 뒤러는 벨리니를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하기도 했다. 진지한 학구열, 근면함, 통찰력을 통해서 뒤러는 고향 도시 뉘른베르크에서도 정확한 소묘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과 진실된 자연관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그는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색채가 지닌 힘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발견은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베니스에 거주하는 독일의 상인들은 바르톨로메우스 교회를 위해서 커다란 크기의 그림 〈묵주〉를 주문했다. 후에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구입해서 프라하로 옮기도록 해서, 지금은 프라하의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그림에는 두 명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리아가 황제에게, 아기 예수가 교황에게, 성 도미니크와 여러 천사들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묵주를 건네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베네치아에서 받은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한 인정을 받았고, 베네치아 시 위원회가 만약 그가 영구히 베네치아에 거주한다면 200두카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를 했지만, 그는 1506년 늦가을 고향 도시로 되돌아오는 여행길에 올랐다.

동방박사의 경배(Anbetung der Könige)
(1504년)

1506-1514년
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위원회에 의해서 임명된 미술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을 입안하는데 뒤러가 상당부분 관여를 했다고 가정을 한다. 이 시기 동안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다.

● 작은 크기의 수난 연작(1509/1510년)
● 커다란 크기의 수난 연작(1510년)
● 마리아의 삶(1510/1511년)
● 성 삼위일체(1511년)
● 성 그레고르의 미사
● 성 그리스토프
● 안나와 함께 있는 성가족
● 묵주를 들고 있는 요하임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 당시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서 판화를 제작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게 해서 〈성녀 베로니카〉(1510년), 〈고통을 껵는 구세주〉(1512년), 〈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1512년)가 제작되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1493)
유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이 시기부터 뒤러의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었고, 뒤러가 그린 회화는 점점 드물게 보게 되었다. 1512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있다. 작은 크기의 동판화 연작의 상당 부분이 이 해에 제작되었다.

그리고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얻었다. 뒤러는 여러 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주문을 받아서 일을 했다. 늦어도 1510/1511년 이후부터는 관계가 이루어졌다.

뒤러의 친구인 빌리발트 피리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가 그 관계를 중재했다. 모든 작품은 간접적으로나마 황제의 결혼과 명성을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이 제작되었다. 또한 〈파움가르트너 제단화〉도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달 전에 뒤러는 목판화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제작했는데,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죽을 정도로 병약해진 인간을 그린 최초의 초상화였다.

1518-1520년
이 시기에 뒤러는 집중적으로 비례학과 같은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518년 뉘른베르크 시의 대표자로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렸던 제국회의에 참석했으며, 그곳에서 유명 인사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Ritter, Tod und
Teufel) (1513년)

네덜란드로의 여행(1520-1521년)
1520년 6월 12일부터 뒤러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쾰른을 거쳐서 안트페르펜과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들로 여행을 갔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진짜 개선행진과도 같았다. 도처에서 뒤러는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안트페르펜의 시행정당국은 정착을 하도록 뒤러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300굴덴의 연금, 아름다운 저택, 무료 숙식과 공공 작업에 대한 보수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시행정당국의 제안은 허사였다. 영주들, 각국의 대사들, 학자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그를 열렬하게 찬양했고, 그를 자신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의 특권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특권을 재확인받으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의 보물같은 예술품을 보고, 그곳의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다. 수 많은 영주, 고위 성직자, 예술가들의 그림도 이번 여행의 결과물이었다. 1521년 7월 2일 그는 뉘른베르크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뒤러는 다시금 미술작품을 제작하는 데 몰두했다. 1520/1521년에 그는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책임졌다. 그 장식은 오늘날에서 사라지고 없지만, 1530년에 제작된 모조품이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가 1526년에 제작되었다. 이 목판화는 바오로, 베드로, 마르코 복음 저자, 요한 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의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뒤러는 원래 이 목판화를 뉘른베르크 시에 선사했고, 시청사에 세워져 전시되었다.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으로 간주되는 뉘른베르크의 상인〈히에로니무스 홀츠슈우어〉라는 유화가 1526년에 그려졌다. 같은 해에 〈요한 클레베르거〉의 그림이 제작되었는데, 그림이 뒤러가 그린 마지막 그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로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던 뒤러는 1528년 4월 6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업적

그는 르네상스 최성기에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그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하고, 북유럽적·독일적인 미의 전통을 쌓은 화가이다. 이론적 연구에도 뛰어나 <인체 비례론> 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의 저서도 내고, 또 이상미(理想美)에 관하여도 논하였다. 수채화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에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주로 종교화·초상화·풍경화 등을 제재로 하였으며, 동판·목판 등 판화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작품으로 <아담과 이브> <동방 세 박사의 예배> <자화상> <요한 묵시록> 등이 있다.

글 출처 : 위키페티아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 冊 소개

노르베르트 볼프 저/김병화 역 | 마로니에북스

알브레히트 뒤러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미술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업적을 남긴 최고 수준의 대가였다. 또한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최초의 독일 화가였으며, 자화상을 독자적인 분야로 확립한 최초의 화가였다. 일찌감치 예술적 기술적으로 탁월한 수준의 수채화와 판화를 선보인 그는, 독일 최초로 누드를 실물 사생한 화가였는가 하면 미술 이론에 관한 글을 써서 자기 작품의 기반을 다진 첫 화가였다. 이런 점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이 그와 비견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여주는 방법 면에서는 뒤러가 훨씬 체계적이었다. 또한, 뒤러는 13살 때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3점의 작품을 남겨 자화상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3대 판화가라 불리는 뒤러는 평생 100여점의 동판과 200여점의 목판화를 남겼고, 그의 그림에서도 느껴지듯이 완벽주의자였던 뒤러는 판을 제작한 뒤 찍는 종이의 선택과정은 물론 인쇄과정과 판매까지 관여를 했다.

150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뒤러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점점 몸이 쇠약해졌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뒤러는 흑사병을 피해 몇 번의 여행을 해야만 했다. 덕분에 병은 더 깊어졌고, 우울증 또한 겹쳐 그의 그림들에선 우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벨기에로 여행을 하던 50세의 뒤러는 고래가 해안에 떠밀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네덜란드의 해안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래는 뒤러가 도착하기 전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고, 뒤러는 고래도 보지 못한 채 말라리아에 걸리게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마지막 작품을 그렸다. 그리스도의 제자 4명을 그린 '네사도'를 뉘른베르크 시에 기증하면서 그는 “나에 대한 기념물로 공공장소에 전시하고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는 말을 남겼다.

저자 : 노르베르트 볼프
노르베르트 볼프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미술사와 언어학, 중세를 공부하고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각된 14세기 제단 장식벽’에 관한 논문으로 뮌헨 대학교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마르부르크,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라이프치히, 뒤셀도르프, 누렘베르크 - 에를랑겐에서 교환교수를 지냈다. 현재 인스부르크 대학의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벨라스케스』(1999)『 키르히너』(2003)『 프리드리히』(2003) 등이 있다.

역자 : 김병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번역·기획 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히에로니무스 보스』『앙리 마티스』『렘브란트 반 레인』『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쇼스타코비치의 증언』『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세기말 비엔나』『이 고기는 먹지 마라?』『공화국의 몰락』등이 있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