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아리랑 브라더스(上)
최초의 컨츄리 포크그룹 우디 거슬리, 피트 시거 등으로 비롯된 미국의 모던 포크는 두 갈래로 나눠진다. 레너드 코헨, 밥 딜런 같은 저항적인 프로테스트 포크와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피터 폴&메리 같은 달콤한 상업 포크가 그것이다.
그들의 주옥 같은 레퍼토리는 1960년대 초 주한 미군들을 통해 이 땅에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대중들은 1961년 미8군 가수 한명숙이 소개한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를 접하기는 했지만 당시의 주류는 여전히 트로트 음악이었다.
1964년 최초의 록 그룹 <에드훠>의 등장에 이어 한국의 <브라더스 포>를 꿈꾸며 또 다른 뉴웨이브 음악을 시도했던 컨츄리 포크 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탄생했다. 최초로 한국어 포크송을 발표했던 이 그룹은 랩의 초기 형태인 만요식의 재밌고 경쾌한 리듬을 이 땅에 들여온 숨겨진 선구자들이다.
견고했던 트로트 아성은 록과 포크 가락의 협공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음악으로 세상을 뒤집고 싶었다. 그러나 외국 음악을 접해본 일부 학생들과 지식층을 제외한 일반 대중은 낯설었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4년이 지나서야 만개했다.
대학가에는 포크그룹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최초의 남성 포크 듀오 트윈 폴리오의 등장은 포크 대중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방에서 통기타 소리가 진동했다. 그러나 모든 포크곡들은 번안곡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진정한 한국 모던 포크는 1968년 말 한대수의 창작곡이 발표되면서 비로서 뿌리를 내렸다.
<아리랑 브라더스>의 음악리더 서수남은 1943년 서울 동대문에서 부친 서사문과 모친 박순금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때부터 충남 서천, 군산 등에서 훈장을 했던 한학자 집안이었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렵게 자식들을 키운 어머니와 함께 6ㆍ25 전쟁 때 전북 익산으로 피난을 갔다.
군산 발산초등학교와 이리동중학교 때는 동요를 잘 불렀던 우등생이었다. 서울 종로 6가로 이사를 오며 공학박사 아들을 갈망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공고로 진학했다. 집 근처 종로2가 세기음악학원에 호기심으로 들어가 3개월간 기타 교습을 받으면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기타 줄을 튕기자 노래하는 재미가 솔솔했다. 이때부터 날마다 AFKN에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 닐 세다카, 폴 앵카 브라더스 포의 노래에 중독되며 기타를 끼고 살았다. 곧 100여 곡의 팝송을 줄줄 외웠다.
고 3이 되자 수험 준비는 뒷전이고 아예 응원단장으로 나섰다. 1961년 한양대 화학과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음악생활이 시작되었다. 데뷔무대는 <국풍81>의 원조격인 1962년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된 MBC주최 <5ㆍ16 군사혁명 1주년기념 콩쿨대회>. 스탠드를 가득 메운 수 만명의 관중들 앞에서 떨리는 가슴으로 ‘Oh Lonesome Me’등 외국 팝송을 불렀다. 대상은 쟈니 브라더스에 돌아가고 차석인 1등상을 수상했다.
이때 중앙대생 하청일은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서수남을 눈여겨보았다. 자신이 소속된 대한합창단원인 박창학, 서울음대생 최용삼과 함께 4인조 남성보컬그룹 결성을 제의했다. 이들은 워커힐쇼단의 멜로톤 쿼텟을 꿈꾸며 팀을 결성, 피나는 노래연습을 했다. 칠성사이다 사장 아들이었던 최용삼의 집은 아지트였다. 그러나 최용삼과 박창학은 이내 팀을 탈퇴, 성악을 전공하던 석우장과 천정팔로 교체가 되었다.
하청일의 음악 친구였던 녹음보조기사 이강은 절묘한 화음을 구사하는 친구들을 대도레코드 녹음기사인 친형 이청에게 소개했다. 아카펠라 뿐만 아니라 통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멋들어진 화음을 구사하는 새로운 음악에 이청은 정신이 혼미했다. 음반사를 창립하려는 꿈을 키우고 있던 그는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뉴웨이브 음반을 만들 결심을 했다.
그는 한국 최초의 포크음반탄생에 실질적 주역이었다. 낮에는 녹음기사로 일하고 밤에는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불러 도둑질 하듯 한 달간 녹음작업을 강행했다. 서수남은 인기 절정의 외국팝송들을 번안, 편곡, 통기타 연주를 도맡으며 멜로디 작업에 혼신의 힘을 들였다. 하청일은 바리톤, 천장팔은 베이스와 스니어 드럼, 석우장은 콘트라베이스와 테너 파트를 맡았다. 팀명은 이청의 제안에 따라 한국정서를 담은 <아리랑 브라더스>로 정했다.
지금도 LP음반을 제작하는 유니버셜 레코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원로 녹음기사 이청. 그는 1964년 LA SCALA 레코드사를 창립하며 역사적인 <아리랑 부라더즈-라스카라.LSL001,64년> 음반 500장을 세상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요사에 영원히 기록될 한국 최초의 컨츄리 포크앨범의 탄생이었다.
한국일보 편집위원 최규성
[추억의 LP여행] 아리랑 브라더스(下)
척박한 가요계 풍토에 뿌린 포크씨앗
아리랑 브라더스의 독집 앨범은 홍보용으로 200장이 제작되어 1964년 4월 언론과 가요 관계자들에게 배포되었다. 타이틀곡 <우리 애인 미스 얌체>등 총 14곡의 번안곡은 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AFKN을 즐겨 듣던 학생층은 귀에 익은 외국 포크리듬이 우리말로 흘러나오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타이틀곡 보다 재밌고 경쾌한 <동물농장><웃어주세요(도미니크)>는 단숨에 인기를 모았다.
‘묘한 노래가 나왔다’는 입 소문이 퍼져 나가자 최대도매상인 청계천4가의 흥음사, 서울소리사, 낙원동의 영락레코드등에서 음반을 요청했다.
‘대박이 터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음악이라 준히트급에 머물러 제작비만 건졌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제작자 이청. 3개월 만에 타이틀곡을 <동물농장>으로 변경해 재킷을 수정, 부랴부랴 300여장의 재판을 추가로 발매했다.
KBS 라디오가 단독 프로그램으로 소개를 하고 MBC 라디오에서도 이들의 곡은 하루에 수 차례 흘러 나왔다. 제법 이름이 알려지자 1964년 9월, 뮤지컬 형식으로 인기 높았던 시민회관의 16회 <프린스 쇼>에 등장, ‘스피디한 진행과 흥겨운 무대매너는 쇼의 유일한 볼거리였다’는 언론의 호평을 이끌어 냈다.
1년 정도 활동을 했던 아리랑 브라더스 멤버들은 인기그룹을 꿈꾸며 워커힐 쇼 오디션을 받았다. 쇼 매니저는 통기타를 치며 맛깔 난 화음을 구사하는 이들의 노래에 반했지만 기형적으로 키가 큰 서수남이 영 못마땅했다.
음악리더 서수남을 제외한 3명에게 ‘키 큰 친구만 뺀다면 출연시키겠다’는 비밀제의를 했다. 화려한 워키힐 쇼무대 진출이라는 달콤한 꿈속에 빠져있던 서수남은 자신 몰래 노래연습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보고 절망했다.
어린시절부터 외모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서수남의 첫 음악적 시련이었다. 배신감에 팀을 탈퇴하고 미8군 쇼 <웨스턴 쥬빌리>를 담당했던 공영 엔터프라이즈를 찾아갔다. 3달 동안 미8군무대 진출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잔 심부름 등 온갖 허드렛일을 자청했다.
바이올리스트 김동석은 무대 뒷켠에서 열심히 노래연습을 하는 서수남의 음악성을 인정하며 오디션을 주선해준 은인이었다.
<사랑하는 마음(Before this day end)>으로 참가한 오디션 결과는 A등급 합격이었다.
1965년 미8군 무대에 진출한 서수남은 코미디를 곁들인 재미난 공연으로 미군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월 100만원이 넘는 엄청난 수입은 2년간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고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스케일 큰 음악을 하고픈 갈증이 타올랐다.
마침내 1967년 미국 내쉬빌 음악을 표방한 5인조 <그랜드 올 오프리>쇼 컨트리 밴드를 결성하며 컨트리 음악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또 하나의 거대한 시련이 다가왔다.
방송국 출연 때 ‘가수가 되고 싶으니 노래를 가르쳐달라’며 최근 작고한 원로가수 현인의 딸이자 KBS성우 현혜정이 접근했다. 예쁜 목소리에 반해 정성을 다해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룹의 솔로 보컬로는 실력이 모자라자 별도로 <서수남과 현혜정>이란 혼성듀엣을 결성하며 음악적 줄타기를 했다.
멤버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미안함을 느낀 서수남은 그룹을 스스로 탈퇴하며 그룹 <샤우터스>에서 활동하던 하청일을 대신 가담시켰다. 서수남 현혜정은 음반을 발표하며 미8군 무대와 오비스 캐빈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하지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이들의 결혼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서수남은 ‘현혜정은 일본에 가기 위해 나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홧김에 목숨같은 포크, 컨트리 음반과 자료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을 만큼 악몽 같은 세월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죽고 싶은 고통은 음악만이 구세주였다. 1969년 MBC TV <웃으면 복이와요>에 음악배필 하청일과 재결합하며 남성듀엣으로 재기, <팔도유람>등 코믹송과 동요 등으로 폭넓은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서수남은 방송 MC 등을 거쳐 현재 대학강의와 <주부가요교실>을 병행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 ‘희극적인 노래들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였다. 컨트리 포크를 최초로 시도했지만 역량이 부족해 만개 시키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다.
하청일은 운영하던 야구용품 제조업체가 부도난 후 미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석우장은 미국 LA에서 성악가로 활약하고 있다. 천장팔은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이 땅에 처음으로 포크와 컨트리 가락을 도입한 음악적 실험으로 대중가요를 한단계 발전시킨 <아리랑 브라더스>. 웬만한 가요 전문가들 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의 값진 음악실험은 뒤늦게 나마 포크의 선구자라는 정당한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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