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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기념주화(2006년 발행), "가장 기술적인 은화상" 주화 선정│우리것

리차드 강 2009. 4. 10. 02:38
한글날 기념주화, "가장 기술적인 은화상" 주화 선정
한글날기념주화 "가장 기술적인 은화상"
우리나라의 `한글날 기념주화(2006년 발행)'가 기념주화 은화부문 의 제조 기술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주화로 선정됐다.
한국조폐공사는 12~13일 부산에서 개최된 `제25차 세계주화책임자회의(25th Mint Directors Conference) 주화경연대회'에 출품된 `한글날 기념주화'가 `가장 기술적인 은화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주화경연대회에는 세계 26개국의 28개 조폐기관이 참가했다.
주화경연대회는 세계주화책임자회의에서 가장 주목받는 행사로, 2006년과 2007년 2년 동안 발행된 주화를 대상으로 3개의 카테고리(기념주화 금화부문, 기념주화 은화부문, 유통주화 부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념주화'와 `가장 기술적인 주화'로 나눠 6개 부문의 최고작을 선정한다.
세계 최고의 주화전문가들로 부터 극찬을 받은 `한글날 기념주화'는 19g짜리 은화이다.
한글날기념주화 "가장 기술적인 은화상"
우리나라는 2002년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된 제22차 회의에서 `2002년 월드컵 기념주화'로 `가장 아름다운 기념주화 대상'을 받았으며, 이번이 두 번째 수상이다.
한국조폐공사는 "이번 수상으로 조폐공사의 주화 제조기술이 예술성과 기술성을 모두 갖춘 세계 최고 수준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향후 공사의 해외 시장 개척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경연대회에서 금화부문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주화' 대상은 남아공, `가장 기술적인 기념주화'는 프랑스 주화가 차지했으며, 은화부문의 아름다운 주화 대상은 멕시코 주화, 유통주화부문의 아름다운 주화 대상은 영국, 기술적인 주화 대상은 캐나다 주화가 차지했다. (c) (부산=연합뉴스) 신정훈 기자 2008-05-16
     
한국은행 "엽전형 기념주화 첫 발행"
한글날 국경일 제정 기념주화 2만원 은화 발행
天圓地方(천원지방)원리 담은 엽전형태로 첫발행
국내 기념주화 가운데 처음으로 상평통보모양의 엽전형 기념주화가 선을 보인다.
한국은행은 10일 "한글날의 국경일 제정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주화를 발행한다"며 "특히 하늘은 동그라미이고 땅은 네모란 '천원지방(天圓地方)'원리를 담아낸 국내 최초의 엽전형의 기념주화"라고 밝혔다. 또한 기념주화 둘레에는 한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 자모가 새겨진다.
한국은행은 이날 금융통화위원회에서「한글날 국경일 제정 기념주화」를 오는 10월 9일 한글날에 발행하기로 의결했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4월 한글날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을 계기로 한글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온 국민과 함께 경축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기념주화의 발행을 요청했다. 지난해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의 개정으로 올해부터 한글날(10.9일)이 3.1절(3.1일), 제헌절(7.17일), 광복절(8.15일), 개천절(10.3일)과 함께 국경일이 됐다.
「한글날 국경일 제정 기념주화」는 액면금액이 2만원인 은화(은 99.9%)로 Proof급(무광)으로 제조되며, 앞면에는 “효뎨례의(효제례의 孝悌禮義)” 별전(別錢)을 재현한 디자인을, 뒷면에는 한글 자음을 균형미있게 조합한 디자인을 사용해했다.
최대 발행량은 5만장(관련기관의 홍보용 기념주화는 1000장 이내에서 별도 제작)으로 국내 발행분과 국외 발행분(최대 5000장 이내)으로 나누어 발행하며, 한국조폐공사가 21일부터 28일까지 농협중앙회와 우리은행을 통해 사전 예약을 받아 액면금액에 판매부대실제비용을 더한 가격으로 판매할 예정이다.
세계일보 인터넷뉴스부 2006
     
'한글날 기념주화' - 한국조폐공사가 한글날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키로 한 주화. 조폐공사는 이 기념주화를 오는 21일부터 28일까지 전국 1천700여개 농협중앙회 및 우리은행 창구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판매한다. (연합뉴스) 2006/08/21
     
훈민정음(訓民正音) 
대한민국의 국보
지정 번호 : 국보 70호
소재지 : 간송미술관
제작 시기 : 조선 초기
국보 지정 : 1962년 12월 20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만들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 상순에 공포한, 뒷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 그리고 그 문자 체계를 해설한 책의 이름이다. 집현전 학자들도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 남아 있는 기록에는 모두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되어 있을 뿐 집현전 학자가 제작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첫째 아들 문종과 둘째 딸 정의공주가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훈민정음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훈민정음 책
책은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cm, 세로 32.3cm 크기이다.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단 한 권밖에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본디 한문(해례본/원본)으로 되어 있는데, 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月印釋譜)》에는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되어 있다. 이것을 통상 언해본이라고 한다.
이 책의 의의
이 책은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으로 인식된다. 특히 언해본에서는 현재의 한글에서 쓰이지 않는 방점이라던지 어두 자음군 등이 나타나나 모음 조화, 원순 모음화, 두음 법칙등은 적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역사 
훈민정음언해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 102권에 따르면 세종 25년(서기 1443년) 12월 30일 이달에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세종 28년(서기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완성하였다고 하고 어제와 예조판서 정인지 서문을 소개하였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1445년(세종 27) 4월에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권제(權方) 등이 짓고,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이개(李塏) 등이 주석(註釋), 정인지가 서문(序文)을 쓰고 최항(崔恒)이 발문(跋文)),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세종은 “어리석은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세종실록, 세종 26년)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도록 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일부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했다. 그 뒤로 계속 민간은 물론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써 왔다.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년) 훈민정음을 쓰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했지만, 그런데도 조정에서 훈민정음을 쓰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훈민정음을 아는 사람을 일부러 궁궐에 등용하기도 했다.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한글은 조선시대에는 '언문'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세종실록》에서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에 연유하는데 뜻을 나타내는 한자에 비교하여‘언문’즉 말을 표현한 글이라는 의미였다. 일부에서는 궁중과 양반 그리고 백성들중 여성들이 많이 한글을 썼기 때문에‘암클’등으로 낮추어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1894년(고종 31년)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여 모든 법률 칙령을 “국문을 본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국문’으로 불리게 되었고, 1913년경에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쓰기 시작한후 지금은 보통 한글로 불린다. 한편 북한에서는 조선글이라고 한다.
     
조선 세종
세종(世宗,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5월 15일~1450년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6일, 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휘는 도(裪), 자는 원정(元正), 정식 칭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1]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흔히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과학 및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10월 9일은 한글날로 정해졌다. 현재 대한민국의 10,000원권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출생
세종대왕은 1397년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08년 12살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 16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그 뒤 1418년에 맏형 양녕대군이 태종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 양녕이 군주가 된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혀를 찰 정도로 심각한 비행[2]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 충녕대군의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 22살에 새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에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재위
먼저 황희, 맹사성 등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정치를 맡겨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세종은 학문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일본의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그 대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경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급속히 축소되었던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1443년 조선에 고유 문자가 없음을 개탄한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이후 20세기에 들어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자로 쓰이고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그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보급시키려고 여러 책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그리고 행정 실무에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 채용에 훈민정음을 시험으로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또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관측 기구인 간의,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말년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세종은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각종 질병(중풍, 임질, 노안)에 시달려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1445년부터 세자 향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1450년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능은 영릉(英陵)이다.
가족관계
이 외에도 7부인 장의궁주 박씨,  8부인 의정궁주 조씨,  9부인 혜순궁주 이씨 가 있다.
     
여의도 공원 내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만원권
     
세종과 관련이 있는 것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세종과학기지는 남극 킹조지 섬에 있는 과학 기지이다.
세종대왕상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해율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세종로(世宗路)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도로이며, 세종문화회관는 세종로에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다. 세종로 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교보타워, 세종문화회관, 정부중앙청사를 지나 광화문 앞까지 이르는 도로이자 법정동의 명칭이다.
21세기 세종계획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서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에 국립국어원이 마무리한 중장기 국어 정보화 사업이다. 이 사업은 한국어 전자사전 개발 사업, 한국어 말뭉치 개발 사업, 한민족 언어 정보화 사업, 전문 용어/문자코드 표준화 사업, 글꼴 개발 사업, 정보화 인력 양성 사업 등 여러 하위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최종 결과는 2007년 12월 11일에 발표되었다.
세종 솔로이스츠는 문화단체로 줄리어드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강효 교수의 책임 아래 운영되고 있는 앙상블 단체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문화단체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며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세종대왕함은 한국 해군의 이지스 구축함 KDX-3의 1번함이다.
세종시(世宗市)는 2015년까지 정부 부처가 이주할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세종과학고등학교는 대한민국의 과학고등학교이다.
세종대학교는 대한민국의 4년제 종합대학교이다
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은 세종관이다.
기타
과거에 사용하던 1000환, 500환 지폐의 도안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의 도안.
대한민국의 기념일 스승의 날 : 세종의 탄신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
대한민국의 기념일 한글날 : 한글을 반포하였으리라 여겨지는 날을 한글 창제를 기리는 날
세종을 연기한 배우들
한인수 - 1984년 (조선왕조 오백년 - 뿌리깊은 나무) MBC 드라마
안재모 - 1996년 (용의 눈물) KBS 드라마
송재호 - 1998년 (왕과 비) KBS 드라마
김상경 - 2008년 (대왕 세종) KBS 드라마
조선 세종 출처 : 위키백과
     
한글날 노래란?
한글날은 세종대왕이 1446년에 한글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고 한글의 연구, 보급을 장려하기 위하여 정한 날로, 이 노래는 이날을 기리는 기념 의식 노래이다. 
한글날 기념식은 1926년 한글 반포 8회갑(480돌)을 기념하며 '가갸날'로 선포한 데서 시작된다.
1981년께 지금과 같은 '한글날' 이름이 시작되었고, 1946년에는 국경일로 제정하여 1990년까지 지켜왔으나, 지금은 기념일로만 지정되어 있다. 처음부터 10월 9일이었던 건 아니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적힌 바에 따라 '정통11년 9월 상한'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945년부터 양력 10월 9일을 한글 반포 기념일로 최종확정했다.
전세계적으로 문자 탄생의 기념을 갖는 날은 '한글날'이 유일하다. 세계적으로 말은 3,000개가 넘지만 글자는 경우 50가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한글은 가장 독창적이며, 연구를 통해 과학적인 체계를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창제 발명 문자로, 유네스코에서는 199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한글에 대한 민족적 긍지를 갖고 자랑스러운 한글을 닦고 발전시켜 우리의 민족 문화를 인류사에 더욱 빛낼 일이다.
     
한글날 노래 - 어린이 합창
의식의 노래
최현배 작사, 박태현 작곡
Track No.9 - 한글날 노래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