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118주년 세계 노동절│인터네셔널

리차드 강 2009. 4. 10. 04:55
118주년 세계 노동절
" 5월 1일 놀아요 ? "
몇년전 까지만 해도 은행이나 회사에 이런 문의 전화가 심심치 않게 걸려오곤 했다. 아니 그 훨씬 전에는 5월1일 노동절이라는 단어를 쓰면 빨갱이라고 의심받던 무지몽매한 시대도 있었다. 5월1일만 되면 서울 도심이 최루탄에 휩싸이던 시대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5월1일 - 노동절 (법률상으로는 근로자의 날-이하 노동절) 은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가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나서 사람들 머리 속에 5월 1일은 노동절 이라고 각인되기 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 노동절 어떻게 만들어 졌나 ?"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노동절의 유래는 미국의 노동운동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열악한 노동환경과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던 미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되고, 1886년 미국 노동총연맹이 탄생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노동단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 마침내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시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헤이마켓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7년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여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메이데이-노동절의 시작이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 노동절에 일하게 된다면 ? "
노동절이라고 모든 노동자가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 사정상 노동절에도 일하는 노동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노동절에 일하게 된다면 임금은 어떻게 될까? 노동부는 5월1일이 법으로 정해진 노동절이기 때문에 사업장 규모와 업종 등에 관계없이 휴무하더라도 사업주는 하루분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고시한 바 있다. 즉 노동절은 유급휴무일인 것이다. 만약 노동절에 출근해 일하면 사업주는 휴일에 대한 유급임금은 물론 평일근무보다 150% 더 지급해야 한다. 따라서 당일 근무자는 유급휴일에 당연히 지급해야 하는 통상임금(100%)에 휴일에 근로한 대가로서의 통상임금(100%)과 휴일근로가산임금(50%)까지 합해 250%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법규정이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노조가 있는 회사라면 그나마 노동절 유급휴일제를 지킬 수 있지만 영세 기업에서는 대다수 평일과 동일하게 출근해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근무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연장근무시간,휴일근무시간등을 계산해 주지 않는 곳도 있다.물론 이런 경우들은 모두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오늘날의 노동절의 의미는?
우리나라도 지속적인 노동운동과 민주화의 효과로 이전에 비해 노동환경이나 처우가 많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또하나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자신을 노동자계급이라고 보기 보다는 중산층이라는 개념으로 본인을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전과 같은 노동운동은 이제 시대의 퇴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노동환경개선과 노동자의 처우향상을 위해 나섰던 노조들도 이제는 서서히 관료주의화 되고 귀족노조화 되었다는 비판을 심심치 않게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맞춰 노동절의 의미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전의 투쟁일변도의 노동절 행사는 사라지고 각종 문화행사 , 놀이마당으로 행사 모습이 변하고 있다. 누구나 즐거운 노동절을 보내기를 원한다. 예전에는 소리내어 노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도 못한 시절도 있었다.그러한 시절을 넘어 이렇게 노동절을 축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시해도 좋지 않을까?
     
머리띠를 묶으며
박노해
이제 투쟁이다
드디어 투쟁의 시작이다
이 핑계 저 이유 단체협상 질질 끌며
냉각기간 내내 갖은 협박 온갖 술책
파업투쟁 무산시키려는 저들의 지랄발광을
피를 말리는 인내로 힘겹게 돌파해온
살얼음 준법투쟁도 오늘부로 끝이다
대강당이 떠나갈 듯
투쟁가도 힘차고 구호소리 드높아라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붉은 천 위에 박혀 살아 펄펄 뛰는
선명한 머리띠를 양손에 펼쳐 잡는다
강당 안은 일시에 메인스위치 내린 듯
숙연하고 비장한 침묵이 흐르고
우리 모두 한가슴으로 머리띠를 묶는다
노사는 공동운명 한가족이라고
고향이 같고 성씨가 같고 학교동문이라고
입사시켜준 먼 친척간이라고
심란하게 맘 약하게 안면을 맞대던
이사 부장 과장 계장 관리자놈들과는
노동자편과 자본가편으로 확연하게 갈라내며 죽었다 깨나도 하나 될 수 없는 아군 적군으로
명확한 전선으로 가차없이 매듭지어
단호하게 머리띠를 질끈 묶는다
부서별로 반별로 조별로 나뉘어져
서로 경쟁하고 씹어대던 너와 나
시다라고 초짜라고 여자라고 아줌마라고
서로 무시하고 겉돌기만 하던 우리는
똑같이 몸 팔아야 먹고 사는 계급이기에
너나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이기에
투쟁전선에 함께 선 굳센 동지로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전투부대로
뜨겁게 머리띠를 함께 묶는다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너무도 아득히 떨어져나가버린
우리의 꿈과 미래를
맑은 하늘 향그러운 꽃 빛나는 햇살을
잊혀져가는 벗들과 친지와 이웃들을
사무치게 하나로 질끈 묶는다
아 뜨거운 열망으로 머리띠를 묶는다
제멋대로 진행되는 이 나라 역사를
두동강난 분단조국 그리운 내 형제를
찢겨져 대립하는 전세계 인류동동체를
피어린 투쟁으로 하나로 묶는다
머리띠를 질끈 묶으며
적과 아를 확연히 갈라내어 묶으며
전선에 선 동지들을 한 대오로 묶으며
'결사투쟁' '일치단결' '승리쟁취' '노동해방'
살아 펄펄 뛰는 구호들을 정수리에 새기며
결연한 투지로 비장한 맹세로
떨리는 손길로 머리띠를 묶는다
출전 : 『참된 시작』, 1993
박노해 (노동해방의 약자)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던 혁명시인. 사노맹 사건으로 1991~1998년까지 복역하였다. 1957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기평, 세례명은 가스발. 서울 선린상고(야간부)를 졸업하고 섬유, 화학, 건설, 금속, 운수 노동자로 일했다. 1983년「시와 경제」제2집에「시다의 꿈」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8년 <노동의 시집>으로 제1회 노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품으로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사람만이 희망이다>, <머리띠를 묶으며>, <참된 시작> 등이 있다.
1957년 전남 함평 출생(본명 박기평 )
1976년 서울 선린상고 야간부 졸업 후 섬유, 금속 노동자로 일함. 그후 버스회사에 취직, 운수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
1985년 서노련(서울노동연맹)에서 활동
1991년 3월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 경주교도소에서 복역하기도 했음
1998년 광복절 특사 석방
1983년 <시와 경제>(제2집)에「시다의 꿈」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4년 첫시집『노동의 새벽』
1988년 제1회 노동문학상 수상
1993년 두 번째 시집『참된 시작』
1999년 세 번째 시집『겨울이 꽃핀다』
     
118주년 노동절, 1886년 5월 1일 그리고 2008년 5월 1일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또 무자비하게 연장하려는 자본의 충동은 수력과 증기와 기계에 의해 맨 처음 혁명이 일어난 산업부분들에서 먼저 충족된다. 물질적 생산방식의 변화와 이에 상응하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처음에는 노동일의 한계를 무제한으로 확대시켰고, 다음에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휴식시간을 포함하는 노동일을 법률에 의해 제한하고 규제하고 균일화 하는 사회적 통제를 초래했다.”
(칼 맑스 『자본』, 10장 7절 “표준 노동일을 위한 투쟁” 중에서)
자본주의 체제 초기, 노동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0시간을 넘어 20시간에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노동절(메이데이)’는 그런 무자비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부터 유래하였습니다.
     
<19세기 공장과 이탈리아 금속공장 노동자들>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 농기계회사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었는데, 집회 도중 원인모를 폭발로 인해 70여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당시 경찰당국은 아나키스트 활동가 8명을 주모자로 몰아 처형하였지만, 그들이 폭탄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폭발사건의 범인을 찾는 일은 관심 밖에 있었고 단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열기를 잠재울 계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국제적인 항의가 빗발쳤지만 미국정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을 교수대로 보냈습니다.
(당시 미국의) “아나키스트들은 8시간 노동일이 오직 직접행동과 연대를 통하여 쟁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들은 이 투쟁을 다만 사회혁명과 아나키즘(“협동적 생산체제에 기반을 둔 자유사회”)의 구현으로 끝나게 될 계속되는 계급투쟁 속에서의 하나의 전투라고 간주했다.”
노동절의 유래가 되었던 그들의 투쟁은 바로 저러한 아나키즘에 기반한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사상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에게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반제티의 사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아나코-코뮨주의자이고 마지막 순간까지(내가 실수했다고 깨닫지 않는 한) 아나코 코뮨주의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코뮨주의가 가장 인간적인 사회계약의 형태라고 믿으며, 인간이 해방을 위해 일어설 때에만 고귀하고 완전해진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중에서 ‘반제티의 법정진술’)
     
<제2 인터내셔널의 혁명가들 : 출처 '2004년 4월8일자 한겨레21>
노동절이 전세계 노동자들의 기념일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인, 1886년 시카고에서의 투쟁이 아나키스트들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그 날을 ‘노동절’로 규정하고 오늘날과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 낸 데에는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이 상당했습니다.
“대회는 이번 파리대회의 모든 결정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대규모 국제적 시위를 조직하여, 모든 나라와 모든 도시에서 하나의 지정된 날짜(5월 1일)에 노동대중들이 국가당국에  8시간 노동으로의 법률적 단축을 요구하기로 결의한다. 유사한 시위가 1888년 12월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린 미국노동연맹(AFL)에 의해 1890년 5월 1일에 열리기로 결정되었으므로, 이 날을 국제적 시위의 날로 받아들이는 바이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 파리대회 결의문」중에서)
     
당시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사상가와 정치조직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대체였습니다. 이 조직은 맑스주의적 전통 속에 있었구요. 맑스와 엥겔스는 시카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기 40여년 전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광범위한 계급, 전복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들이 『공산당 선언』을 쓰던 당시의 노동환경은 아래와 같았다고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일하는 곳이라고 더 좋을 리 만무했다. 당시에는 대량생산이 새로운 사회적 풍속이었다. 일주일에 6일 동안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아침에 쏟아져 들어갔다가(14시간 뒤인) 저녁에 쏟아져나왔다.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중에서)
하루 14시간 노동하는 환경은 노동자에게 건강의 악화와 수명의 단축을 불러왔고, 자본가에겐 자본의 증대와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러왔습니다. 『공산당 선언』출간부터 시카고의 투쟁까지 4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노동환경, 시간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맑스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전통 속에서 5월 1일은 전세계 노동자들의 기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크로포트킨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에서부터 이어져온 반(反)자본주의 사상과 운동의 흐름 속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노동자-자본가’의 대립구도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구도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문제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대립하고, 착취하는 인간과 착취당하는 자연이 대립하기도 하며, 다수적 성(性)과 소수적 성이 대립하기도 하는 복잡한 문제들 속에 있습니다. 또한 노동절의 유래가 되었던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해서는 기계화-자동화의 과정으로 인해 물리적인 노동시간 만으로 노동의 강도를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는 상황입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들이 진화한 만큼 그에 대한 대립, 혹은 해소의 방식도 진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수성이란 숫자가 아니라 척도의 문제이다. 서구사회에서 백인, 남성, 기독교도에 해당하는 이들은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적 지위를 차지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사회의 가치척도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수가 셀 수 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소수자들은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자들이다...(중략)...정부가 하는 말은 항상 똑같다. ‘당신들의 요구는 정당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를 솔직한 눈으로 바라보자.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할 ‘부분들’이 사실상 전체이고, ‘정상’에서 벗어나 ‘예외’가 정상을 이룬다.”
(부커진R 『소수성의 정치학』, 창간사 「R을 쓴다」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성적 소수자, 새만금 개펄의 게과 어민들 모두 소수자들입니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오랜 투쟁의 전통 안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 경향, 개발중심주의 등 한국사회의 다수적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이들이 소수자, 즉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동절의 시작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그때의 그 요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수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날에 부여된 의미들, 아직도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척도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로 우리의 118주년 세계노동절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노동절 기념행사는 5월 1일 오후 1시에 대학로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그린비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비정규직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등 우리 삶을 잠식해 오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1886년의 시카고 노동자들, 자본주의에 반대해 왔던 모든 친구들과 시대와 국경을 넘어서는 우정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그들’의 척도를 넘어서, 우리의 삶을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 노동자 운동의 노래 L'internationale 인터네셔널가
인터네셔널가 The Internationale
Billy Bragg 1988
Track No. 1 - The Internationale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