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교 협력 성과물이자 에큐메니컬 운동 결실
한국성서 번역사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공동번역 성서'(1977) 발행을 들 수 있다.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신·구교가 연합해 우리말로 성서를 내놓게 된 것은 신·구교 자체뿐 아니라 민족문화사에 뜻 깊은 일이었다. 특히 "개신교 100년 역사와 가톨릭 200년 역사에 있어서 두 교회가 함께 쌓아 올린 기념비적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 받았던 '공동번역 성서'는 세계 최초로 신·구교가 합동으로 낸 성경이기도 하다.
◇신·구교 내 번역분위기 형성='공동번역 성서'의 발행은 당시 개신교와 천주교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성경번역 분위기와 연결돼 있다. 60년대 초 개신교의 문익환 목사는 개인적으로 성경번역을 추진하고 있었다. 문 목사는 복음동지회의 '새로 옮긴 신약성서 마태의 복음서' 번역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으며, 세계적 성서번역 권위자인 나이다 교수를 만나 내용동등성 번역의 원칙을 터득하게 됐다.
이에 따라 63년부터 본격적인 성서번역에 착수하게 된다. "히브리어의 굵은 톱니를 핵문장으로 부수어서, 심지어 전치사 하나하나 속에서까지 사건어를 찾아내면서 우리말의 잘다란 톱니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재구성할 때에 비로소 성서의 신앙이 우리의 사고에 물리고 우리의 생을 돌려 기독교적인 새 문화 창조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문익환의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1974) 특히 문 목사는 성경번역에 있어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말은 생각과 뜻의 표현일 터인데 성서에 담겨있는 그 깊은 뜻을 바로 알고 바깥에 전하려면 교회와 사회를 갈라 놓는 말의 담을 허물어야 한다."(문익환의 '새것, 아름다운 것')
천주교의 선종완 신부도 59년부터 개인적으로 구약성서 번역을 하고 있었는데 63년까지 9권의 성서를 번역했다. 이처럼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성서 원문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이 개별적으로 추진되다가 신·구 양교회 지도자들 간에 성서번역을 공동으로 추진하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68년 1월 신·구교 대표들은 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성경번역시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와 바티칸이 합의한 원칙과 공동위원회가 제정한 번역원칙에 따라 성경을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4년간의 노력 끝에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71년 부활절에 나왔고, 구약 및 외경 완역본이 77년 출시됐다. 공동번역 명칭은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게 됐다.
◇의역으로 이해도 높여=번역의 원칙은 축자적 번역이나 형식적 일치를 피하고 내용의 동등성을 취해 독자들이 원문을 읽는 사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유명사는 신·구교가 현재까지 사용하는 명사가 같은 것은 그대로 두었고 그렇지 않은 것은 사전이나 교과서에서 쓰는 명칭을 따랐다. 이 두 가지가 아닌 경우에는 원어의 발음을 따랐다.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로, '유월절'은 '해방절'로, '랍비'는 '선생님' 등으로 어휘의 토착화를 추구했다.
공동번역 성서는 가로쓰기 한글전용 성서로 단락과 단락사이 각설표(O)를 사용하지 않았다. 내용을 요약하는 소제목들이 단락 사이에 붙어 있다. 외경이 붙어있는 천주교용 성경과 붙어있지 않은 개신교용 성경이 발간됐다. 천주교용 외경에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집회서, 바룩, 다니엘(추가) 등 9권의 외경이 들어갔다.
'공동번역 성서'의 특징은 주기도문(마 6:9∼13)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실=공동번역 성서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60년대 일기 시작한 에큐메니컬 운동 정신이 맺은 구체적 결실이라는 것이다. 100년의 시차를 두고 진행된 신·구교 선교는 그동안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양 교회는 대화와 일치보다는 갈등과 분쟁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에큐메니컬 운동 정신이 한국에서 성숙되었고 그 결실이 공동번역 성서인 것이다. 둘째 한국인의 손에 의해 직접 히브리어·그리스어 성경이 번역됐다는 것이다. 셋째 최신식 우리말 번역이라는 점이다. 토착적 어휘를 과감하게 채용하면서 한국 언어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성경의 중요한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성공회대학교 양권석(성서해석학) 교수는 "공동번역 성서의 출간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의미있는 최초의 작업이자 최대의 업적"이라며 "성경의 문체를 문학적 소양을 가미해 현대적 정서에 맞게 번역했다는 면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