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은 존경의 표현
▼ 제 집사람은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아 세례명이 ‘카타리나’인데 성당에는 잘 안 나가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보고 냉담신자라고 하지요.
배석한 허영엽 신부가 “요즘은 ‘냉담신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쉬고 있는 신자’라고 말한다”고 거들었다.
▼ 하여튼 집사람이 ‘쉬고 있는’ 신자인데요. 함께 등산 갔다가 절에 들르면 시주함에 돈을 넣고 부처님 앞에 절해요. 대개 자식들 좋은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 것 같아요. 천주교 신자가 부처님 앞에서 절하는 것을 천주교 교리로 용인할 수 있습니까.
“그전에는 우리도 조금 옹졸해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용인을 안 했죠. 근래에는 좀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요.”
정진석 추기경은 불기(佛紀)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불교 신자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자비와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서로 사랑과 자비를 베풀기 위해 노력할 때, 서로 안에서 부처님과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에서 동반자요 동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공경
▼ 크리스천 중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안 지내는 사람도 있어요. 교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돌아가신 부모님 영정 앞에 절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예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미신이나 우상숭배라고 보는 것은 편협한 펀더멘털리즘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된 것이 1600년대 중국에서였어요. 마테오 리치(1552~1610)는 굉장한 분이에요. 예수회 회원이던 그분이 중국어로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을 썼습니다. 잘된 책이에요. 그 책을 통해 중국, 조선, 일본이 천주교 사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됐지요. 그 책은 제사를 용인했어요. 마테오 리치는 학자로서 중국의 지성인들과 교류했지요. 그때 중국 지성인들이 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성인들이라서 제사와 우상숭배를 구별할 줄 알았죠.
그런데 천주교 수도회에 분파가 있죠. 마테오 리치는 예수회 소속이죠. 예수회는 서강대학교를 세운 수도회죠. 지성인을 상대해요. 그런데 프란체스코회라는 수도회도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서울 정동에 있어요. 프란체스코회는 서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요. 그들이 마테오 리치보다 100년 후에 중국에 왔어요. 프란체스코회 사람들이 보기엔 중국 서민이 제사를 지내는 게 우상숭배와 구별이 안 된 거죠. 그래서 교황청에 예수회가 잘못한다고 보고한 거예요. 교황청에서는 제사가 뭔지 모르는 데다 안전하게 가야 되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어요. 그 결정문을 받아본 프란체스코 회원들이 서민층 신자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한 거죠. 결국 제사 폐지 때문에 박해가 시작됐습니다. 마테오 리치 때는 전도가 잘 됐어요. 중국에서 1800년대에 박해가 시작됐고, 우리나라도 뒤를 따랐어요. 우리 천주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가 조상의 위패를 불태운 사건 때문에 일어났죠.”
신해박해는 1791년 정조 15년에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珍山)에서 윤지충이라는 천주교 신도가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Gouvea) 주교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었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저는 근본적으로는 마테오 리치가 제사 문제를 옳게 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교육받은 사람은 제사와 미신을 구별해요. 제사는 조상에 대한 공경이지, 거짓 신에 대한 미혹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용인하는 거예요. 미신은 점 보러 가는 거지요(웃음). 제사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닙니다.”
▼ 그러면 장례식장에서 망자(亡者)에게 절을 해도 되는 겁니까.
“그렇죠. 망자를 신격화해서 절하는 게 아니고 그냥 존경하는 거죠.”
청년 정진석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나라를 두 번 방문했습니다. 1984년 여의도에서 열린 큰 집회가 천주교 교세 신장의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습니까? 천주교 신자들이 궁금할 거 같아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한국에 대해서는 잘 아시는 편입니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시죠.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4세였어요. 1989년 69세 때 또 오셨죠. 그런데 지금 교황님은 80세예요. 여행하는 데 60대 교황님과 80대 교황님은 상당히 차이가 나잖아요. 한국에 오실 수 있는지에 대해 제가 대답할 수 없지요. 5월9~14일 남미에 다녀오셨는데 조금 무리하신 것같이 느껴져요.”
▼ 베네딕토 16세가 신학교 학생이던 14세 때 히틀러 유겐트(소년단)에 가입했습니다. 1943년에는 징집돼 뮌헨 근교 BMW 항공기 엔진 공장의 방공포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나중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지대에서 탱크 저지선 공사를 하다가 1944년 4월 탈영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지요.
“1927년생이니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 18세잖아요. 히틀러 시대에 독일 청소년의 유겐트 가입은 의무사항이었죠. 저도 일제시대 때 학교(중앙중학교) 교복이 군복 비슷했어요. 바지에 각반 매고 학교 다녔어요.”
정 추기경은 종아리를 내밀고 손으로 각반 차는 동작을 보여주었다.
“각반을 잘못 매면 풀어지거든요. 안 풀어지게 매는 요령이 있어요. 이거 매려면 몇 분 까먹죠. 아침에 바빠요. 군복 입고 군사훈련을 받고 독일이나 우리나 똑같았던 거죠. 나는 1931년생인데도 한국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거죠. 강제로 시키니까.”
6·25전쟁으로 학업(서울대 화공과)을 중단한 정 추기경은 1954년 23세 때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필자가 “1954년 3월 이전에는 보통의 청년이었겠지요?”라고 묻자 그는 “그렇죠”라고 대답했다. “신부가 되기 전에 혹시 이성과 사랑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요”라는 질문에 “아, 그게 6·25 때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여유 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겨를이 없이 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 사랑이 사치스럽다는 말입니까.
“아니, 내가 19세 때 전쟁이 터졌지요. 22세 때 전쟁이 끝났어요. 3년 동안 내내 전쟁터로만 끌려다니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전쟁 끝나자마자 바로 신학교 간 거예요. 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데 관심이 집중돼 있었지,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웃음).”
越北한 공산주의자 아버지
▼ 결례되는 질문 같습니다만 간혹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평범한 신도 생활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냥 ‘아니다’라고 대답하긴 어렵겠죠. 전쟁 중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어요. 그때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고 생각했어요. 벌써 이 세상에서 죽은 몸이고 나머지 인생은 많은 사람에게 뭔가 좋은 일을 하라고 하느님이 덤으로 주신 삶이죠. 국민방위군에 편입돼 남한강 위를 걸어가다 바로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을 봤어요. 행군 중에 지뢰를 밟아 죽기도 했고…. 매일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잊어본 적이 없어요.”
▼ 추기경이 되신 후에 아버지가 북한에서 공업성 차관을 지낸 정원모(鄭元謨)씨라는 이야기가 알려졌잖아요. 가톨릭 집안인데 아버님이 무신론에 빠져든 사연이 궁금합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일절 말을 안 했어요. 해방됐을 때 제가 만 16세였거든요. 저는 그때 똑같이 벌어서 똑같이 나눠 먹자는 사상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 사상이 한 1년 갔지요. 그때 가르치던 사람이 고려대 학생이었어요.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 나요. 하여튼 고려대에 중앙고 선배가 많았으니까요. 선배 한 사람이 ‘같이 벌어서 같이 나눠 먹는 이상사회’에 대해 설파했죠. 그거 옳잖아요. 분배가 공정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단점은 안 가르쳐줬어요. 장점만 보면 그럴 듯하지요. 거기서 아버지를 이해한 거예요. 아버지도 그렇게 빠져들었겠죠.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귀국한 일본 유학생들이 거의 전부 좌익사상을 가졌어요. 아버지는 대학생이었죠. 그 시대의 지성인으로 그 사상에 물들었겠지요. 아버지가 북한의 공업성 차관인 것은 신문에 보도된 뒤에 알았죠. 그전에는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고 대학생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죠.”
▼ 아버지가 일제하에서 장기 복역을 했나요.
“나는 몰랐는데 그랬던가봐요. 어머니가 나를 수태했을 때 잡혀갔나봐요. 기록을 보면 그래요. 사상범은 재판 안 하고 감옥에 가두어놓고 몇 년 질질 끌다가 재판해 몇 년 딱 때렸답니다. 내가 몇 살 된 다음에 풀려난 것 같은데 그 무렵에는 외가와 같이 살기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짐작이에요. 하여튼 나는 외가에서 자랐어요. 외가 식구 중에 아버지에 대해 아무도 말을 안 해줬어요.”
추기경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친은 살림이 넉넉했던 장인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추기경의 외가는 서울 수표동에서 경대를 만드는 가구공장을 운영했다. 추기경은 평생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부친은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의 핵심인물로 구속돼 3년 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4년에는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경기도경에서 수사를 받다가 광복을 맞아 석방됐다. 정 추기경은 신문에 난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서야 자신의 얼굴이 아버지를 닮았음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주 미련해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태어난 것처럼요?”라고 묻자 추기경은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게 아니고…”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려면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너도 아버지가 있을 거야’라고 했을 때 나는 ‘결혼한 부부 중에 아기를 원하는데 아기가 없는 부부도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여자가 혼자 낳는 거지’라고 우겼어요. 그 정도로 내가 순박했다고…. 그런데 중학교에서 생물을 배우지요. 생물책에 수정(受精)이라는 게 나오더라고요. 생물 공부를 하면서 나도 아버지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죠.”
▼ 저서와 역서가 45권이나 되던데요. ‘모세’를 상중하(上中下) 3부작으로 쓰셨더군요. 상은 ‘민족해방의 영도자’, 중은 ‘율법의 제정자’, 하는 ‘민족공동체의 창설자’이더군요. 모세는 어떤 점에서 위대하고 어떤 점에서 실패했다고 보는지요.
“우리 교회 안에서 모세가 가장 위대한 리더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일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궁금증에서 책을 쓰기 시작했죠. 책을 쓰면 유익한 점이 많아요. 그냥 막연하게 알고 있거나 부정확하게 대충 알고 있던 것을 책을 쓰려면 정확하게 알아야 되잖아요. 공부를 많이 하게 됐지요. 모세도 약점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평양 교구장 된 사연
▼ 모세에겐 어떤 약점이 있었습니까.
“모세가 샘물을 두 번 친 것은 화를 표출한 거지요. 그것 때문에 가나안땅에 못 들어갔죠. 지도자는 화를 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큰 교훈을 제게 주지요.”
▼ 가톨릭 신자가 됐든 비신자가 됐든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성경 이상의 책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어요, 그게 답이에요. 하여튼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굉장한 교훈을 받아요.”
필자가 “이 질문을 할 때 틀림없이 성경이라는 대답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웃으며 “그렇게 뻔한 대답이지만 나한테는 뻔한 대답이 아니다”라고 했다.
▼ 성경 빼놓고 평생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 책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해방 직후 나도 ‘종교는 아편’이라는 사상에 빠졌다가 1년 후에 탈출했는데, 신앙에 복귀하는 계기가 있었죠. 하나님을 부정하는 좌익사상이 무비판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1947년 윤형중 신부님이 명동성당에서 2월23일부터 3월30일까지 7주 동안 7번 강의를 했어요. 그 강연이 나를 신앙인으로 회복시켜준 거예요. 그 강연 원고가 6·25전쟁에서 살아남아 전쟁 직후 ‘종교의 근본문제’라는 책으로 출간됐는데 1987년까지 14판이 나왔어요. 그 책이 나한테는 깊은 영향을 줬습니다. 탁월한 책이죠. 그것을 번안해 내가 신판으로 낸 게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입니다.”
그는 가톨릭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에 ‘황호택 님께/정진석 추기경’이라는 글씨를 적어주었다.
▼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직하고 계신데, 가톨릭에서 지금 평양에 파견한 사제가 있습니까.
“파견한 사제는 없습니다. 해방됐을 때 북에 신자가 5만명 있었습니다. 남쪽 신자 10만명을 합해 가톨릭 식구가 15만명이었죠. 북에 성당이 58개 있었습니다. 신부님이 안 계신 곳을 공소라고 하는데, 공소가 한 200개 있었죠. 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1948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1년 만에 성직자들이 모두 행방불명됐어요. 1949년 5월이에요. 천주교, 개신교 종교지도자들이 일시에 없어졌어요. 내 추측으로는, 전쟁 준비를 하면서 방해꾼들을 다 정리한 거죠. 그때 북에서 천주교 성직자 100여 명이 행방불명되면서 한 명도 안 남게 된 거죠. 지금까지 생사를 몰라요. 여러 번 그분들의 생사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대답이 없어요.
◀ 정진석 추기경이 필자에게 줄 책에 사인을 하고 있다.
평안남북도는 평양교구였고, 황해도는 서울교구예요. 함경남북도는 함흥교구였죠. 그리고 원산에는 수도회가 있었어요. 수도회는 교구에 속하지 않은 준교구예요. 이렇게 북에 교구가 3개 있었어요. 오늘날에도 천주교 신자가 1000명에서 3000명은 남아 있을 거라고 봅니다. 천주교는 교구라는 이름이 있으면 누군가가 교구장 직함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교황님께서 나보고 평양교구장을 겸해라 한 것이지만 이름뿐이지요.”
정 추기경은 평양은 물론 금강산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북한에는 장충성당과 봉수교회, 칠골교회가 있다.
▼ 저는 봉수교회에 가봤는데 북한에 자주 다니는 사람 얘기를 들으니까 장충성당에서 본 신자를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보게 된다는 군요. 전시용 행사에 동원된 신자만 있다는 거죠.
“6·25전쟁 중에 성당, 예배당이 다 없어졌어요. 예배당은 한 3000개 됐대요. 천주교는 아까 말한 대로 250개쯤 없어졌어요. 그 사람들은 미 제국주의 군대가 없앤 거라고 둘러대요. 하여튼 전쟁 중에 다 없어졌어요. 장충성당은 1988년에 생겼어요. 그해에 우리가 올림픽을 하면서 세계의 기자들이 다 왔잖아요. 그러니까 북에서 자기들도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표시로 갑작스럽게 두 개의 교회당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봉수교회고 하나는 장충성당입니다. 닮은꼴이에요. 한 사람이 설계한 거죠.”
▼ 천주교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까.
“5만명의 신자가 있었으니까 지하에서 혹시 그 자손들이 부모님한테서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지요. 조금이라도 있기는 있을 겁니다. 노출되면 위험하겠지요. 우리가 북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해 숨어 있는 신자들이 혜택을 입으면 좋겠어요.”
오웅진 신부를 돕다
▼ 제가 평양에 갔을 때 중국에서도 공산당원은 교회를 못 다니던데 북한에서는 어떠냐고 공산당원 신분의 공직자에게 물었죠. 그 사람이 반말투로 ‘공산당원은 두 개의 종교를 가질 수 없어’라고 하더군요.
“솔직한 얘기군요.”
▼ 미국의 종교 통계 사이트인 애드히런츠닷컴(adherents.com)이 ‘북한의 주체사상이 신봉자 수에서 세계 10대 종교 안에 들어간다’고 최근 발표했습니다. 주체사상을 종교라고 본 것이 흥미로워요. 일종의 사이비 종교로 본 거겠죠.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에 모셔놓고, 그 사람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부르죠. 말할 때마다 종교냄새가 나는 용어를 많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종교집단이라고 한 거겠죠.”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청주교구장으로 있을 때는 일주일에 몇 번씩 우암산에 올라갔어요. 서울에 와서는 여기 테니스장에서 맨발로 한 시간씩 걸어요. 그게 유일한 운동입니다.”
그의 모친은 나눔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던 독실한 신자였다. 이웃의 가난한 아기들이 젖동냥을 오면 주저 없이 젖을 물렸다. 그러나 돌림병을 옮길까봐 외아들에게 줄 다른 쪽 젖은 물리지 않았다. 정 추기경은 어머니가 생전에 장기 기증을 약속해 돌아가셨을 때 안구 적출 수술을 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아들은 어머니를 음성 꽃동네 묘역에 모셨다.
▼ 청주교구장 시절에 오웅진 신부의 음성 꽃동네를 많이 도와주셨다고 하던데요. 나중에 오 신부가 수사에 휘말리고 재판을 받기도 했지요.
“오 신부님이 1976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처음 주임신부를 맡은 성당이 음성 무극 본당이죠. 주임신부가 되자마자 읍내 다리 밑에 있던 거지들을 돌보기 시작했어요. 그 사람들을 위해 조그만 집을 지어 18명을 수용했어요. 그러다가 땅을 마련해 갖고 옮겨간 것이 오늘날의 꽃동네예요. 처음 시작할 때는 음성군수가 왜 전국의 거지를 음성에 모으냐고 싫어했지요. 그럴 때에 나는 뒤에서 보호해준 거죠. 나와 관계가 좋았던 김종호 도지사가 적극적으로 오 신부를 도와주니까 음성군수도 싫은 내색을 안 하게 됐죠. 음성 꽃동네가 커지면서 정부의 돈을 많이 받게 됐죠. 그게 불씨가 돼 문제가 생긴 거예요. 관(官)의 돈을 받았는데 제대로 썼느냐는 검증이 시작된 거죠. 몇 년 동안 수사와 재판을 하고서 무죄로 결론났어요.”
▼ 오 신부가 좋은 일을 많이 한 건데요.
“그렇죠. 꽃동네 시설이 놀라울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오웅진 신부가 한 푼이라도 떼어먹었으면 그런 시설이 만들어질 수가 없지요. 한 신부가 30년 동안 큰 건물을 10개 이상 지은 거예요. 가평과 음성을 합해 3000명의 노숙자를 수용해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어떤 사람이 너무 커지니까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긴 거죠. 내가 보기에 오웅진 신부는 사심이 없는 사람이고 받은 돈 다 쏟아 넣었습니다.”
▼ 천주교에서도 대학과 중·고등학교를 다수 운영하고 있는데요. 사학 쪽에서는 자율이 중요하다고 하고, 전교조와 집권 세력 쪽에서는 개방형 이사를 통해 사학 경영을 투명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근본적으로 공립학교 외에 사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있습니다. 공립학교는 교육 당국의 통제하에 당연히 들어가지요. 그런데 왜 사립학교까지 공립화하려는 겁니까. 그게 내 근본적인 문제의식이에요.”
고해성사…기억의 의지 없어야
▼ 가톨릭의 역사상 오류, 예를 들면 십자군전쟁, 마녀재판, 지동설 부정, 면죄부 판매에 대해 로마 교황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적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현재 가톨릭의 어떤 교리도 좀더 과학이 진보한 미래에 비과학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지요.
“십자군전쟁은 교회의 이름을 차용한 정치활동이죠. 갈릴레오 재판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면죄부 문제는 어떤 사람의 남용에 의해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가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잖아요. 고해성사는 자기 지역에서만 봐야 돼요. 그런데 헌금을 한 사람에게는 ‘너는 어디 가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증명서를 줬어요.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주는 증명이 아니고 어디 가서든지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는 증명서였지요. 이게 잘못 해석돼 돈과 죄의 용서가 결부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죠. 1870년에 교황국이 없어진 이후 우리 천주교회는 더 이상 정치세력이 아닙니다. 정치세력과 결별해 정치 때문에 잘못되는 일은 없어졌지요. 중세 때는 교황국 때문에 비난을 받았거든요.”
▼ 신부로 일할 때는 고해성사를 많이 받으셨겠죠. 가리개가 있어 서로 얼굴을 못 보지만 목소리를 들으면 누군지는 대개 알 수 있을 텐데요. 신도들이 지은 죄를 일일이 듣고 있으면 나중에 생각이 복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참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거기서 나오면 다 잊어버려요. 기억하면 미칠 거예요. 온갖 지저분한 얘기를 다 하는데 잊어버리지 않으면 미치지요. 이게 하나님의 은총이에요. 나오면 잊어버려요.”
필자가 “기억을 녹음기처럼 자유자재로 지우실 수 있군요”라고 말하자 그는 “아니,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으니까 들으면 그냥 끝나는 거지요”라고 말했다.
“기억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기억이 되지, 기억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는 기억이 안 되는 거죠. 사람이 무슨 얘기를 많이 듣지만 저 말은 내가 언제 써먹어야지 할 때는 딱 기억 속으로 들어가요. 그런 마음이 없으면 무슨 얘기했지 하고 생각이 안 나는 거죠. 고해성사 내용을 다 기억하면 삶이 괴롭겠지요.”
인터뷰가 2시간을 넘기자 다소 피곤해 하는 기색이 보였다. 옆에서 허 신부가 약속한 시간을 넘겼다고 신호를 보낸 지 오래됐다.
정 추기경은 호박이 박힌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필자가 사연이 있는 반지냐고 묻자 “아니 내가 그냥 편해서…”라고만 대답했다. 필자가 “장시간 인터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추기경은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답변하기 힘들었지만 질문하시기가 더 힘드셨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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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Copyright ⓒ 신동아.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