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구성
제 5모음곡 다단조 BWV 1011
이 모음곡에는 제1현을 A음에 조현한 것과 G에 조현한 것의 두 가지 원고가 있다. 거기에 따라서 일부 의 음이나 운지법에 차이가 나타나지만 작품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니다. 제 1곡의 전주곡은 느긋하고 무게 있는 기분의 4분의 4박자의 서주와 8분의 3박자의 활발한 부분으로 구성된 이른바 프랑스풍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어지는 춤곡 부분은 제5곡이 가보트(제1, 제2, 제1로 연주된다)인 것 외에는 다른 다섯 곡과 같은 배열이다.
1. 프렐류드 - 4/4 박자, G장조, 모데라토
그 멜로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속된 16음표들로 시작되며,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전체 조곡의 성격을 제시한다.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있었던 양식으로 주로 건반악기나 플류트를 위한 곡들이 많다. 16세기에는 <프렐류드와 푸가>처럼 다른 곡과 함께 연결되어 쓰이기도 했다. 춤곡들이 정형화 된 반면, 프렐류드는 자유스럽고 즉흥적이며 토카타풍, 카덴차풍의 요소도 가미되어 전체 모음곡의 성격 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파블로 카잘스가 파악한 전6곡의 전주곡의 특성을 보면 제1번은 낙관적(Optimis tic), 제2번은 비극적(Tragic), 제3번은 영웅적(Heroic), 제4번은 장중함(Grandiose), 제5번은 격정적( Tempestuos), 제6번은 목가적(Bucolic)이라 했는데 이러한 전주곡의 성격이 각 모음곡의 전체 분위기와 성격을 나타내고 이끌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2. 알르망드 - 2/4 박자, G장조, 모데라토
독일풍의 춤곡으로 보통 빠르기의 속도를 가졌다. 비교적 힘차고 빠르다. 15 세기 초, 독일 쪽에서 발생한 춤곡으로 그 역사가 길다. 대개 4/4, 또는 2/4박자이고 속도는 일반적으로 적당한 빠르기인 알레그로와 모데라토 사이다. 대략 1620년 경부터 모음곡의 제일 앞에 놓이게 되었고, 점차 춤곡으로서의 특성이 희미해졌다.
3. 쿠랑트 - 2/4 박자, G장조,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장엄하게)
프랑스의 옛 춤곡 형식이다. 힘차고 생동감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전 후반이 같은 리듬 패턴을 취하고 있다. '달리는', '빠른'이라는 뜻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두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이탈리아 식은 코렌테(Corrente)라고 부르며 이미 16세기 프리츠 윌리엄(Fritz William)의 버지널 북(virginal book; 건반악기집)에도 실려 있다. 3박자의 빠른 패시지가 특징이다. 프랑스식 쿠랑트 프랑스의 옛 춤곡 형식이다. 힘차고 생동감 있는 주제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전후반이 같은 리듬 패턴을 취하고 있다. 약간 느리며 3/2, 6/4박자로 폴리포니한 경향이 있다.
4. 사라반드 - 3/4 박자, G장조, 라르고
옛 스페인의 춤곡으로 매우 느리고 장중하며 품위가 있는 곡이다. 가 장 장중하고 위엄 있는 곡이며 느린 3박자로 대개 둘째 박자에 무게가 실린다. 원래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속무곡인 이 춤곡은 1650년경 까지만 해도 매우 속되고 외설스러운 빠른 춤곡으로서 한때 금지 당했던 시기도 있었다. 17세기 경부터 다소 느려지면서 품위 있는 춤이 되었다.
5. 가보트(Gavotte)
프랑스 지방의 산사람들을 지칭하는 가보츠(Gavots)에서 변형된 말이다. 대개 2/2박자 인데, 17세기 초 궁중무로 수용되었고, 룰리(Lully)에 의해 베르사이유궁 발레의 핵심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통사 가보트 1,2 즉 전,후반으로 짝을 짓는 데 후반부에는 가끔 뮈제트(Musette; 같은 음의 저음이 계속 울리는 것)가 나타난다.
미뉴에트 I - 3/4 박자, G장조, 미뉴에트 II - 3/4 박자, G단조
지방에서 시작된 춤곡이나 궁중의 춤곡 형식으로 바뀌었으며 우아하고 매끄럽다. 장조에서 단조를 거쳐 다시 장조로 돌아오는 3부 형식이다. 프랑스어로 '작은 스텝'이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흐 시대에는 우아하고 매끄러우며 빠른 3박자의 춤곡이었다. 원래 프와튀(Poitu)지방의 민속무였으나 루이 14세 때 궁중무로 다듬어졌고, 19세기에 들어와서 그 속도가 다소 느려졌다.
부레(Bourree)
원래 오베르뉴(Auvergne)지방에서 발생한 춤곡이었다. 17세기 후반에 도시로, 그리고 궁중으로 들어 오면서 빠르긴 하지만 안정되고 경쾌한 춤곡으로 정착되었다.
6. 지그 - 6/8 박자, G장조, 알레그로
영국에서 시작된 춤곡 형식이다. 빠르고 경쾌한 곡이다. 16세기 경부터 영국에서 유행했던 빠른 춤곡이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을 거쳐, 1635년 당시 영국 궁정의 류트 연주자였던 프랑스인 고티에(Gautier)에 의해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부점 리듬, 넓은 음정 도약, 푸가적인 요소를 띠면서 발전하였고, 이탈리아에서는 빠른 경과구, 화성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이상과 같이 모음곡은 서로 다른 성격의 다섯 가지 춤곡을 동일한 조성으로 묶은 것으로, 우리나라 기악 독주곡인 산조와도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기본 장단에 중중모리 또는 휘몰이 등이 첨삭되는 점에서 흡사하다. 모음곡은 프렐류드와 알르망드를 교향곡의 제1악장에, 사라반드를 제2악장, 미뉴에트, 가보트 등은 스케르쵸 악장, 그리고 지그를 피날레 악장에 각각 대입해 볼 수도 있겠다.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프랑스, 이탈리아 음악의 새로운 양식과 여러 민속 음악적 요소들이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종합예술가" 바흐를 통해서 독일의 음악적 전통과 어우러지고, 여기에 종교적 경건함마저 스며들어, 음악사에 길이 남아 "성전(聖典)"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최고의 내용과 절대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추천음반
이 곡에 대해 잘 알려진 명반으로는 카잘스, 푸르니에, 장드롱, 슈타커, 빌스마, 마이스키, 요요 마, 비스펠베이, 로스트로포비치 등 많이 있지만 그 중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이 곡을 처음 접하는 분들께 적당한 몇가지 음반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추천음반으로는 모리스 장드롱의 음반(PHILIPS, 1964년 녹음)을 꼽았다. 그는 비교적 빠른 템포로 연주하며 일말의 불안함도 없이 기교적으로도 완벽하다. 당당하면서도 유려하게 연주하고 있어 곡 자체의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이끌어 내고 있다. 스승인 카잘스처럼 스케일이 크며 당당하지만, 그 어떤 과장이나 군더더기없이 일관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음의 유려함과 저음의 탄탄한 울림소리가 이 곡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빛나게 해 준다. 구조적으로도 탄탄하고 힘차고 아름다워서 비록 카잘스와 우위를 따질 수는 없지만 감히 청출어람이라는 한자성어를 쓰게끔 만든다. 음질도 상당히 좋다.
MPEG으로 준비된 파블로 카잘스 (EMI, 1936, 38, 39년 녹음)의 음반을 지나칠 수 없다. 첫 음절을 들어 보는 순간 카잘스라고 알아 차릴 정도로 다른 연주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 강렬함과 율동적임은 카잘스만의 것이다. '질서 안에서의 자유'라는 카잘스 그의 삶과 음악에서의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어 형식에 충실하기 보다는 내면 깊이 파고 드는 연주를 하고 있다. 그야말로 질서 속에서 최대한의 자유와 성찰을 표현하고 있는 전설적인 명연주다. 이 앨범은 "무반주 첼로 조곡"의 세계 최초의 전곡 녹음이며 이때 카잘스의 나이는 60세였다. 지휘자와 비교한다면 푸르트벵글러를 연상시킬 정도며, 모노 녹음이지만 그 스케일과 깊이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특히 미뉴에트에서는 슬픔마저 느껴진다. 생전에 카잘스는 매일 전체 조곡중 하나를 연주했을 정도로 이 곡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외 중요 음반들을 짧막하나마 소개해드리면
피에르 푸르니에 (ARCHIV, 1960년 녹음):
푸르니에답게 우아하고 부드러운 연주를 하고 있다. 느린 템포에 그러면서도 연약함이 아닌 어느 정도는 당당함마저 느껴진다. 프렐류드부터 특유의 섬세함과 기품이 드러나는데, 푸르니에의 이러한 연주는 사라반드에서 곡의 성격과 맞물려 그 절정을 이룬다. 특히 여기서 상당히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운 감수성을 보여 준다.
안너 빌스마 (SONY,1992년 녹음):
바로크 첼로의 명수인 빌스마가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1701년에 제작된 Servais Stradivarius cello로 연주해 그의 자신감과 의지를 보여 주는 음반이다. 현대 첼로에 비해 음역과 음량이 부족하고 음색도 부드럽지 못하지만, 유명한 명악기인 이 첼로는 음색이 조금 어두우면서도 맑고 소박하여 고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바흐 당시의 악기로 바흐의 곡을 듣는 것 자체로도 우리에게 큰 의미와 즐거움을 준다. 한편 빌스마는 조금 느린 템포에 여유로우며 감정에 치우침이 없이 치밀한 연주를 들려 준다. 프레이징은 조급하지 않고 항상 여유롭고 길다. 마지막 여운이 긴 것은 아무래도 이 고악기의 특성이 아닐까 한다. 상당히 사색적이어서 듣는 이에 따라서는 조금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마지막 지그에서는 그게 웬 말이냐는 듯 상당한 빠르기로 연주해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요요 마 (SONY, 1982년 녹음):
비교적 빠른 템포에 세련되고 편안한 연주를 들려 준다. 너무나 유려하고 아름다워서 이 곡이 연주하기 어려운 난곡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게 한다. 음색과 연주가 젊음과 기쁨에 넘쳐 젊은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각광을 받는 연주지만, 바흐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는 음반이다. 하지만 요요 마 나름대로의 이 곡에 대한 견해와 주장이 담긴 이 연주는, 그 기교의 완벽함과 더불어 새로운 바흐 상을 제시한 뛰어난 연주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윤재철 : 1999/05/03
Pierre Fournier 1906.6.24~1986.1
"음악을 그 위대함 속에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위대함을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낙담해 있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해 주는 것이다. 음악의 매력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만들고 국경이 없는 왕국을 만들기 위해 음악에 대한 사랑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음악교’의 교주 같은 설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을 남긴 푸르니에의 음악인생은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9세라는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크게 상심했으나 주변의 많은 도움과 자신의 노력, 그리고 음악의 힘으로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되었다.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뇌하는 면이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가 프랑스인이란 것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푸르니에는 처음에는 피아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항상 앉아서 연주할 수 있는 첼로를 택했으나 불편한 다리로는 보통사람보다 몇 백배나 더 힘들었다. 다만 그의 성품과 악기의 성격은 잘 맞았다. 12세에 어렵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26세이던 1932년, 늦은 나이에 음악원을 수석 졸업했다. 이후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국외 연주여행길에 자주 올랐다. 프랑스 정부는 그 공로로 그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1937년, 코르토, 티보, 카잘스가 창립한 에콜 노르말 음악원에서 첼로와 실내악 교편을 잡았고, 41년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었다. 전쟁통임에도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가 음악으로 전파하는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는 교육활동을 잠시 멈추고 연주에 전념했다.
전쟁이 끝나고 슈나벨, 켐프, 박하우스, 루빈슈타인, 굴다 등과 함께 연주하며 ‘평화와 사랑’을 전파했다. 56년 제네바에 정착한 후 피아니스트인 아들 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도움으로 마스터 클래스도 열었다. 아들은 훌륭한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의 동생인 장 푸르니에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푸르니에는 ‘첼로의 왕자’로 불릴 정도로 귀족적이고 우아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거기에 소탈함과 단정한 양식감, 균형감 등의 고전적 정신이 보태져 정갈한 음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음색도 아름답고 따뜻함이 넘쳐났다. 이런 모든 바탕 위에 인간애가 더해져 격조 높은 기품이 느껴지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첼로의 황태자 피에르 푸르니에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옛날 59년 스테레오 녹음이 DG Originals 시리즈로 재발매 된 것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은 카잘스가 그 악보를 발견, 녹음한 이후 모든 첼리스트들이 한번은 거쳐갈 수밖에 없는 유명한 곡이 되어 버렸지만, 그 어느 첼리스트도 그 곡에 쉽사리 접근했다가는 끝없는 좌절감만 맛보고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곡이다. 이는 마치 피아노 레퍼토리에서 바흐의 평균율 곡집과 맞먹는 난해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해 보이지 않는 악보지만, 그 속에 녹아있는 깊은 정신성과 음악적인 아름다움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곡 전체에서 느껴지는 경직되지 않고 자유스러운 운궁 또한 듣는 이의 마음을 여유 있게 만들어 주며, 쉬어가야 할 곳과 앞으로 나가야 할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첼로라는 악기로 눈에 보일 만큼 명징하게 드러내는 그의 사려 깊음에 놀라게 될 수 밖에 없다.
많은 음반들이 존재하지만, 푸르니에의 음반은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올라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엄하고 진중한 카잘스의 연주와 비교하면 굉장히 유연하지만, 그 낭만적인 마이스키의 음반이나 날아갈 듯 가벼운 요요마의 음반과 비교하자면 엄격한, 굉장히 중도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소 그의 성품과 닮아있는 그의 첼로소리는 온화하고 품위 있지만, 결코 그의 연주를 입 속에서 스르르 녹아나는 마쉬멜로우에 비유하는 것은 무리이다. 소리는 온화하고 품위있되, 그의 연주는 굉장히 철두철미 하며 의외로 굉장히 강인하다. 또 한편으로는 다이나믹의 낙차는 크지 않지만, 마지막 한음까지 깔끔하고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푸르니에 자신이 이 곡을 얼마나 사랑하고 높이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1007~1012)
Ⅰ.곡에 관하여
이 곡은 그의 창작열이 가장 고조되던 시기인 쾨텐시기(1717~1723)의 작품이다. 이 시기는 바흐에게 있어서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 때였다. 이때 많은 기악곡들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그 시기의 비교적 자유스러운 분위기 영향이 크다고 한다. 비슷한 형태의 곡인 무반주 바이올린곡이나 무반주 플룻 파르티타 곡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보다 30여년 전에 작곡된 최초의 무반주 형태인 첼로곡인 가브리엘리(D. Gabrielli)의 리체르카레(Ricercare/ 1689)가 있는 것을 보면, 무반주 첼로 형태의 이러한 기악곡도 다른 무반주 작품(예컨대, 무반주 바이올린곡)처럼 바흐 스스로가 창조한 영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무반주 모음곡은 바로크 모음곡의 성과를 종합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들 6곡의 모음곡들을 분석해 보면, 그 모음곡들 중 5개만(제1번~5번)이 첼로를 위한 것이었다. 6번째 모음곡 D장조는 바흐 자신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비올라 폼포사(viola pomposa)라는 악기를 위한 곡이라고 전해져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즉 바흐는 5현의 비올라 폼포사라는 이런 악기를 발명하지도 않았으며, 바흐의 작품이 이 악기로 연주되었을 가능성 또한 낮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여러 사용 예를 들어 비올론 첼로 피콜로라는 5현 악기의 사용을 주장한다. 현재 원전연주를 보면 이 6번 모음곡을 비올론 첼로 피콜로로 연주하는 것(안너 빌스마나 비스펠베이등의 원전연주자들이 이를 지지)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6번도 현대 첼로로 어렵사리 연주할 수 있지만, 비올론 첼로 피콜로로 연주하면 좀더 풍성한 맛을 주는 장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바로크시대에는 춤곡 형식을 사용하여 곡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었다. 바흐의 경우도 이러한 무곡을 사용한 것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데, 그에 이르면 단순한 무곡이 아니라 더욱 음악적으로 승화되어 다가올 고전파 음악의 터전이 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순음악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그 내용도 점차 인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었다.
바로크시기의 무곡은 알레망드, 쿠랑트, 사라방드와 지그로 연결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바흐는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미뉴에트.부레.가보트등의 전통적인 다른 무곡을 사라방드와 지그 사이에 제각기 제5곡으로 배치하여 형식에 변화를 꾀하였으며, 전주곡을 서두에 부가하여 곡의 도입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선율악기에 반주가 필요한 기본적 이유는 음악적 진행에 있어서 화성의 틀을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기능 때문이라고 한다.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첼로라는 악기는 기본적으로 선율 악기로서 반주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이른바 비자족적인 악기이다. 즉 홀로서기가 힘든 악기이다. 이런 사실을 바흐도 모를 리 만무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반주곡에서 발휘된 그의 음악적 역량은 최고의 모험이자 실험정신의 산물이다. 선율라인을 유지하면서 화성적인 맛을 부여하고 대위법적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인접한 사용가능한 현을 총동원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3줄 더 나아가 4줄 까지도 동시에 연주하도록 작곡하고 있는데, 이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무반주 바이올린곡도 마찬가지이지만)의 작곡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곡 연주시에는 연주자의 높은 음악성이 요구된다. 선율미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화성적인 조화와 대위법적인 느낌을 표현해야 하고 나아가 음악의 내용도 채워야 하므로 2중 3중의 어려움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주의 테크닉에 있어서도 활을 현에 최대한 밀착시키고 건반 악기적인 시각에서 연주할 것을 기본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악보를 놓고 보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무반주 바이올린곡에 비하면 보다 단순하고 대위법적인 면에서도 그 정교성이 덜함을 알 수 있다. 무반주 바이올린곡의 샤콘느 악장이나 푸가 악장을 보면 그것은 확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바흐는 첼로 선율자체의 심오하고 두툼한 음색의 아름다움으로 극복하고 있다. 그 음악적 결과는 성공적이며, 또한 카리스마 같은 대중적 사랑을 향유하고 있다. 다만 무반주 바이올린곡이 그 분야에서 비교적 확고한 해석의 틀이 닦여 있다고 상정한다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첼리스트들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매진해야 할 숙제라 할 것이다. 특히 원전연주 분야에서는 더욱더 많은 발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Ⅱ.파블로 카잘스와 무반주 첼로 모음곡
1876년 스페인의 카탈로니아에서 태어난 카잘스는 11세무렵 첼로의 인간미 넘치는 선율에 매료된 이래 한평생을 첼로와 같이 한 음악가이다. 그는 현대 첼로의 연주에 있어서 솔로 악기로서의 진정한 모습과 가능성을 부각시킨 첼리스트로 인정 받고 있다. 또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발굴과 연주및 최초의 레코딩 등도 그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신화적 일들일 것이다. 그는 질곡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시절을 거치면서 고뇌의 삶을 살기도 하였다. 음악 여정 중에 카잘스는 일류의 멤버들과 실내악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만년에는 지휘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80세의 나이에 20세의 제자 ‘마르티타 몬테스‘와 결혼 하여 크게 회자된 일도 있었다. 그는 1973년 96세의 나이로 어머니의 고향인 푸에토리코에서 타계했다.
1889년 바르셀로나의 한 악기점에서 카잘스에 의해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악보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바흐의 음악을 살찌운 위대한 발견이었다. 바흐가 죽은 1750년을 기산점으로 하더라도 근 140여년 가까이 사장되어 있었음을 알수 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진정한 주인을 제대로 만난 셈이었다. 마태수난곡이 멘델스존에 의해서 그 의미가 재부여 되거나,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글렌굴드에 의해 대중에 각인되어 그 의미가 재발견 되었듯이, 이곡도 카잘스에 의해 발견되고 생명력이 부여되어, 지금까지도 카잘스의 분신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가 이곡에 부여한 연주의 규범은 많은 첼리스트들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첼로의 경우는 연주자세도 바이올린보다 훨씬 불리하며, 활의 인장력도 높아 힘의 안배도 문제가 되며 또한 연주시 잡음(명반으로 대접받는 야노스 슈타커의 무반주 첼로를 들어보라!)이 많이 나는 악기자체의 문제 때문에 바이올린에 비해 그때까지도 열등한 대접을 받았다.(협주곡의 수와 위상을 보라!) 그런데 이런 문제점들이 카잘스에 의해 많은 부분 해결 되었다. 그의 덕택으로 첼로라는 악기가 가장 인간적인 악기로 새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첼로가 노래하는 부드럽고 남성적인 울림이 그냥은 얻어 진 것이 아니라 카잘스라는 음악가의 각고의 노력의 산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의 분신처럼 따라다니는 역사적인 무반주 첼로 레코딩은 그를 첼로의 성자로 까지 규정하게 한다.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견한 이래 거의 매일 연구와 연주에 몰두하여 12년 정도 지난후 비로소 공개연주회를 가졌다 한다. 그 후 다시 35년 정도 지나서 그의 역사적인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음반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논함에 있어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될 시금석이 되고 있다. 현재 많은 첼리스트들이 이곡에 도전하고 있지만 그와 필적할만한 음반은 그다지 많다고 보지 않는다. 그의 연주를 들어 보면 낭만적인 면, 엄정한 면, 순수한 면이 자연스럽게 배합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카잘스 이후의 연주를 들어보면, 어떠한 시각을 달리하는 연주도 카잘스가 세워 놓은 해석의 틀 아래에 놓여 있음을 알수 있다. 그의 음반의 훌륭함은 60년 넘게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그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영원할 것이다.
Ⅲ.무반주 첼로 모음곡 감상에 도움이 될 이야기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는 전주곡 - 알레망드 - 쿠랑트 - 사라방드 - 미뉴에트/부레/가보트 - 지그 등이 각 모음곡마다 순서대로 사용되어져 있다. 음악 감상을 위해 아래에 간단한 핵심적인 특징을 기술해 보았다. 이것만 알고 있으면 감상에 별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제1곡/ 프렐류드(Prelude)
곡의 특징은 대부분 도입적 성격을 지니며, 자유스럽고 즉흥적인 분위기를 띤다.
제2곡/ 알레망드(Allemande)
독일에서 유래한 춤곡. 신중한 느낌. 멜로딕하다. 알레그로와 모데라토 사이의 적당한 빠르기의 속도를 지니고 있다. 연주자에 따라 느리거나 빠르게 연주될 수 있다.
제3곡/ 쿠랑트(Courante)
빠른 속도의 춤곡. 정치한 느낌. 리드미컬한 느낌.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빠른 형식이 특징인 이태리식[코렌테(Corrente)]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약간 느린 형식의 프랑스식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의 쿠랑트는 일반적으로 빠른 속도로 연주된다.
제4곡/ 사라방드(Sarabande)
스페인에서 유래한 장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깔고 있는 3/4박자의 느린 춤곡이다. 아다지오 악장처럼 명상적인 정서를 깔고 있다.
제5곡:미뉴에트(제1,2번)/ 부레(제3,4번)/ 가보트(제5,6번)
①미뉴에트(Minuett)
프랑스 무곡. 귀족적이며 우아한 느낌을 주는 다소 빠른 형태의 춤곡이다.
②부레(Bourree)
프랑스 무곡. 빠르고, 안정된 경쾌한 춤곡. 류트 모음곡 제1번에 사용된 부레는 다소 비트있는 박자와 선율로 인해 현대 락음악에서 원용되기도 한다.
③가보트(Gavotte)
프랑스에서 유래한 2/2/박자의 활달한 춤곡이다.
제6곡/ 지그(Gigue)
영국에서 유행했던 빠른 춤곡. 분위기의 상큼한 전환. 피날레적 성격을 띤다.
Ⅳ.곡 해설(글쓴이가 음악을 듣고 느낀 대로 쓴 글임)
제1번 BWV1007 G장조
무심한 듯 늘어선 16분음표의 극히 단순한 화성적인 전주곡 부분이 신비롭게 느껴지는데, 경쾌함과 명랑함이 G화음을 넘나들며 대위법적 효과를 부각시킨다. 바흐가 이렇게 단순히 화음을 펼치듯이 악상을 전개하는 방식은 평균율 제1번과 류트곡 BWV999에서 보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곡 기법은 바로크시기에 널리 행해진 것이라고 한다. 일견 우주적인 느낌이 든다. 알레망드는 화성적인 깊은 맛이 어우러져 나오는 정적이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쿠랑트는 여기서 매우 경쾌하게 쓰여져 있는데, 마치 널뛰기 하는 것처럼 활기차고 자신감있는 인상을 풍긴다. 사라방드는 알레망드를 더욱 부드럽게 변화를 준 느낌이다. 아주 심오한 철학자의 이야기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이다. 다만 프랑스 출신 첼리스트 앙드레 나바라(Andre Navarra)는“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모든 사라방드는 포르노다.” 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처럼 관능적으로 볼 여지도 충분히 있는 것 같다. 제5곡으로 사용된 미뉴에트는 건강한 느낌을 주며, 마지막의 지그는 상큼한 느낌을 주는 곡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을 통해 지그는 곡 전체를 결론짓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바흐에 이르면 이런 단순한 형태의 음악이 가장 심오한 것 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 담긴 내용 혹은 담길 내용을 끄집어 내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바흐 음악이 갖는 무색 투명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 6곡 가운데 가장 추상화 되어 있으며 비교적 규모도 적은 곡이다. 이곡은 대중적으로도 많이 알려진 곡이다. 글쓴이도 아마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습고도 놀라운 사실은 제1번 G장조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막연하니 그 끝을 알기 어렵다. 누구인가 바흐음악을 회화적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다다르면 그 말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이 발언을 돌려 말하면 그만큼 바흐음악의 내용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제1번을 가장 명쾌하게 각인시키는 연주는 "요요마"와 "안너 빌스마" 인 듯 하다. "요요마"는 이곡의 경쾌하고 정겨운 느낌을" 음악의 정원" (DVD음반을 감상해야 제격임) 이라는 주제로 표출시키고 있으며, "안너 빌스마"는 정반대의 시각에서 비교적 느린 템포로 망망대해 같이 우주를 거니는 저 보이저호 같은 느낌(특히 92년반)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감정이입은 불가능할까?(예컨대, 카잘스는 유유자적한 느낌을, 로드스트로비치는 가볍고 관능적인 느낌을, 푸르니에는 무상무념의 심적 상태를 곡에 주입하고 있다고 보여짐) 물론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탁월한 혜안을 갖춘 연주자와 사려깊은 청중 혹은 감상자의 몫일 것이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1번 모음곡에 관한한 빌스마와 푸르니에의 해석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국내 영화 “동감”에서는 몇 개의 바흐 작품이 삽입(바흐 음악이 회화적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많이 원용되는 것을 추단해보면 알 수 있기도 하다.) 되어 영상미를 북돋아 주었는데,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중의 전주곡과 지그, 그리고 첼로 모음곡 2번 중의 전주곡과 지그를 들을 수 있다. 아름다운 장면과 어우러진 바흐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 추상적인 음악에 다가가는 촉매역할을 할 것이다.
제2번 BWV1008 d단조
전6곡 가운데 가장 선율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극히 내향적이고 동양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단조선율이 주는 멜랑꼬리하고 비극적인 느낌(이곡은 전반적으로 적적한 느낌이 듬)이 곡의 명상적 성격과 어우러져 묘한 운치감을 자아낸다. 일반적으로 장조곡 보다는 단조곡이 훨씬 설득력 있게 와 닿는다고 하는데, 전주곡은 3/4박자의 느린 템포로 삶의 아련한 비애을 자아내게 한다. 선율적으로 흐르다가 뒷부분으로 가면 아르페지오형으로 악상이 전개되며 자유스러운 느낌을 준다. 알레망드는 응어리진 가슴을 호소하듯이 다가온다. 역시 정적인 느낌이 들지만 약간 항의적인 뉘앙스도 풍긴다. 중음주법으로 화성적이고 대위법적으로 느껴지는 악곡이다. 쿠랑트는 역시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한다. 앞의 알레망드와 일정한 한도 내에서 대비감이 느껴진다. 사라방드는 여기서도 아다지오 악장처럼 감정을 심연의 세계로 천착시키는 느긋함을 보여준다. 곡이 사라방드에 이르면 절정에 다다른 느낌을 받는다. 제5곡으로 안배된 두 개의 미뉴엣은 장.단조의 대비감을 보여주는데, 고결함과 귀족적 기품이 이곡에 녹아져 있다. 마지막 곡인 지그는 여기서도 앞의 미뉴에트와는 많은 부분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곡의 분위기를 좀더 긍적적으로 바꿔나가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 마지막을 향한 힘찬 전진이랄까!
이 곡은 삶의 비애감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아주 호소력이 있어서 음악적으로 그 순도가 매우 높다. 바흐음악이 다 그러하겠지만, 가라앉는 정서를 담고 있는 곡이더라도 결코 우울한 방향으로 악상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비상이 그 기저를 깔고 있다. 이는 낭만파 음악가들의 많은 음악들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일 것이다. 제2번 d단조를 가장 잘 연주하는 이는 개인적으로 "파블로 카잘스" 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곡을 극히 절제된 시각으로 마치 독백을 읍조리듯이 노래한다. 그의 음반은 몇개의 판(통상 EMI판이 대표적으로 애호가에 회자됨, 그런데 너무 날카롭게 녹음되어 있어 아쉬움을 줌)이 존재하는데, 일본에서 복각된 음반이 연주음질은 잡음이 많아서 비록 열악할지언정, 곡의 내면을 아주 심도있게 포착해 내고 있다. 첼로가 노래하는 부드러운 저음부의 목소리로 오래 전의 기억을 자극하여 청춘의 애상감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약간의 어두운 정서가 있지만 그는 이것을 희망의 미래를 위한 반전의 대상물로 보는 느낌이 든다. 악상의 전개에 있어서도 지나친 과장이나, 경박함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 제2번 곡을 들으면 저 지리산 피리 소년 한태주 군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는 '오카리나'라는 조그마한 피리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는 천재 피리소년인데, 한군은 자신의 나이에 걸맞지 않을 매우 심도높은 삶의 한 단면을 노래하고 있다.(오카리나라는 이악기는 특히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음악의 연주에 사용된 악기이기도 하다. 그의 오카리나 음반을 한번 들어보라! 외로움이 뭔지를 일깨워 줄 것이다!) 그 단면은 바로 외로움에 대한 본원적 향수일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러한 향수를 그리워하고, 더 나가 그것을 지향하는지도 모른다. 요요마의 DVD음반에서도 감옥을 무대로 설정하여 속박하는 현실에 대한 인간성의 해방구로 여기도 이곡을 해석한듯하다. 어찌하였던,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제2번이 발산하는 적적함과 명상적 느낌에는 인간 본연에의 향수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느끼는, 아련한 기억속의 때묻지 않은 어린시절의 그리움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곡이 부여하는 에스프리는 그지없이 드넓은 초원 위를 드리우는 단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3번 BWV1009 C장조
이 3번 모음곡은 전 6곡 중에서 역동적인 아름다움으로 첼로의 남성적인 맛을 표출하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곡이기도 하다. 전주곡은 정적을 깨뜨리듯이 파워풀하게 옥타브를 순차적으로 하강 진행하는 형식으로 곡을 시작한다. 곡이 전개될수록 선율적인 면과 화성적인 면이 교묘하게 교차되고 있으며, 무곡적인 리듬감이 곡 전체를 초지일관하고 있다. 더블스톱과 아르페지오를 적절히 안배하여 건반악기적인 느낌도 주고 있다. 알레망드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서 사라방드에 다음가는 다소 느린 악장인데, 여기서도 중후한 맛이 감돈다. 다만 약간 장난스러운 느낌이 들기도한다. 쿠랑트는 아주 빠르고 경쾌하게 만들어진 악장이다. 전반적으로 흥겨운 맛이 든다. 사라방드는 여기서 그지없이 아름다운 선율로 쓰여있다. 철학적인 심오함이 흐르고 풍부한 감성은 무곡의 존재를 잊게 할 정도이다. 부레는 아주 빠른 춤곡으로 여기서는 악센트를 동반한 비트있는 선율진행이 무곡적 성격을 더욱 고양시킨다. 득의에 찬 적극성이 돋보이는 악곡이다. 마지막의 지그도 나머지 모음곡처럼 피날레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아주 활기찬 곡이다.
전주곡을 제외하고 나머지 곡명들이 춤곡형식의 명칭임을 감안한다면, 제3번은 그 이름에 걸맞는 음악이라고 할 것이다. 이곡은 들으면 어깨춤이 나올 정도로 흥겹다. 글쓴이는 개인적으로 이곡을 전 6곡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 C장조 조성이 주는 평안함과 곡 전체를 지배하는 리드미컬한 선율은 한겨울의 삭막함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이곡을 듣다 보면 감정의 정화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묵은 때를 씻어 내리는 시원한 바람같은 음악이다. 몇 년 쌓인 채증도 내려갈 것 같기 하다. 약동하는 듯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첼로 선율에서 첼로가 도대체 선율악기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데, 바흐의 솜씨에 새삼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곡의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탁월한 해석으로 빠뜨릴 수 없는 연주로는, 요요마의 DVD음반을 꼭 들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음반은 어찌보면 단순한 뮤직비디오 음반 일수도 있지만,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현대 무용이 절묘하게 조화된 종합 예술의 성격을 띈다고 할 수 있다. 무용수들의 너울대는 춤추는 몸짓, 고풍스런 의상, 춤과 음악의 관념적 조우, 안무가의 독특한 연출력이 첼로선율과 멋지게 어울어져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사실 첼로선율 하나만으로 보면 그의 연주는 다른 명인들에 비해 다소 왜소(약간 힘이 부족한 듯이 느껴짐)하게 느껴지지만, 무용과 어울어진 그의 음악은 남다른 매력을 지닌다. 과연 그 이름 그대로 “바흐로 부터의 영감”이라 할만하다. 생각이 기발하다!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을 가장 잘 연주하는 이는 개인적으로 "피에르 푸르니에"라고 생각한다. 첼로의 생생한 맛이 조금의 과장 없이 표현되어 있으며, 마치 실연을 듣는 것처럼 녹음되어 있다. 악상의 전개도 매우 순수하고, 숭고한 맛도 잘 표현해 내고 있다. 3번은 6번과 더불어 비브라토를 가장 절제하여야 할 곡이라고 생각하는데, 피에르 푸르니에도 이를 직시하고 극히 엄정한 방향으로 음악을 풀어 나아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면의 뜨거운 열정이 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는 "음악적인 표현은 객관적으로 그 속에 담긴 혹은 담길 음악적 내용은 주관적으로" 라는 바흐 해석의 암묵적인 패러다임 을 제시하고 있는듯하다.
제4번 BWV1010 E♭장조
이 4번 모음곡은 1번과 더불어 그 내용의 이해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곡을 오랫동안 들었지만, "불가지론적(agnostic)“이라고 할 만큼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실 바흐 곡들 중, 특히 기악곡들에는 그 내용 파악이 힘든 것이 엄청 많다. 이는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바흐 음악의 무한한 해석가능성 이라는 그 특성에 기인한 때문일 것이다. 전 6곡의 전주곡 중 가장 소박한 전주곡을 갖는 것이 그 이유인지도 모를 것이다. 모음곡 형식의 곡이라 하지만 그 내용전개에 있어서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체로 봐야 할 것 이기에, 전주곡은 곡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소로 매우 중요하다.
전주곡의 다소 밋밋한 진행은 곡 중반부의 카덴짜같은 자유스런 움직임으로 대체되고 있다. 전반부의 흐름은 건반음악의 전주곡과 유사하다. 전주곡 전체가 주는 느낌은 내향적이며, 엄정하다. 곡이 진행될수록 신중함이 느껴진다. 이 전주곡에서는 뭔가 혼돈된 느낌, 탄식과 자조의 느낌, 애매모호함, 막막함 가운데의 희망의 빛, 불안한 장래에 대한 무언의 희망, 고독한 지도자의 고뇌 등의 정서가 느껴진다. 알레망드는 비교적 간결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약간의 감정 전환이 있으며, 다소 정화되어 뭔가, 음악의 본궤도에 진입한 느낌이 든다. 그 움직임은 한층 발랄하다. 또한 다소 유유자적한 맛도 보인다. 이곡의 쿠랑트도 여유로운 느낌과 자조적인 느낌이 든다. 다른 곡의 쿠랑트에 비하면 극히 엄정하고 내성적이라고 본다. 약간 빠르지만 풍부한 감정을 갖는다. 사라방드는 화성적인 맛과 선율적인 맛을 비교적 잘 표현한 악곡으로 이곡의 분수령이 되는듯하다. 곡 전반에 걸쳐 세상의 이치를 다 깨달은 구도자의 모습처럼 겸손함이 보이며 위엄과 고뇌감이 서려 있는듯하다. 부레는 생기 넘치는 활발한 무곡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불안하지만 앞으로는 잘되리라는 그런 희망을 갈구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도 부레를 두개로 배치하여 곡의 대비감을 주고 있다. 마지막 곡인 지그는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추구하는 느낌이 든다. 매우 빠른 악곡으로 일견 독자행보를 하는 것 같지만 어느 모음곡 보다도 이 4번에서는 지그의 역할이 큰 것 같다. 곡 전체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인과적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해피엔딩적 결말을 유도하는 데에 이 지그가 일조하는 것 같다. 부레와 지그는 그 유명세에 힘입어 단독으로도 연주되는 일도 많다.
이 4번 모음곡은 지금의 사회모습과 비슷한 일면을 가지는 것 같다. 여러 독립적인 선율들이 제각기 불협 화음으로 움직이는 무언가 정돈되지 않은 모습, 힘든 사회.경제상황,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저마다의 주장 속에서 다소 자조적인 체념이 뒤썩인 이 사회 전반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이, 몇 백년 전에 바흐는 양의 동서를 넘어 첼로라는 심오한 악기로 지금을 노래하는 것 같다. 이 4번 모음곡이 전달하는 강력한 멧세지는 누구의 말처럼 “지금의 상황은 구름에 가린 달과 같다. 그 구름들이 걷혀질 때, 그 진가가 나타날 것이다.” 라고 깨우쳐 주는 충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4번을 가장 잘 연주하는 이는 개인적으로 푸르니에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이즈를 별 과장 없이 덤덤이 앞으로만 내닿는 그의 연주는 이 4번이 징표하는 모습과 가장 부합하는 것 같다. 그 자신이 신체 장애자였으므로 누구보다도 내면적 갈등 상황을 잘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족적이고 품격 높은 음색은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옮긴 것 때문이리라! 그의 삶의 체취가 풍겨져 나온다. 훌륭하도다!
제5번 BWV1011 c단조
이 5번은 여타의 곡과는 달리 변칙튜닝(스코르다투라)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이다. 제1번 현을 A음에 튜닝(정상적인 튜닝)하거나 G음에 튜닝하여 연주할 수 있는데, 한음 내려서 G음으로 연주하는 것은 스코르다투라를 요한다. 연주자들에 따라 정상적인 튜닝으로 연주하는 이(카잘스가 이를 지지, 일반적임)도 있고, 변칙튜닝으로 연주하는 이(안너 빌스마.비스펠베이등의 원전 연주, 현대 악기 연주자로는 모리스 장드롱등이 이를 지지)도 있다. 귀로만 평가하는 글쓴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변칙튜닝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상적인 튜닝을 견지하는 논거를 보면 음색의 자연스러움과 웅장함을 든다. 그런데 이 5번의 가장 단점이 전주곡 연주에서의 지나친 음향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분산화음처리 하면 둔중함을 없엘 수 있을 것임) 카잘스 연주도 음향상 지나치게 둔중한 감을 지울수 없다. 곡이 원낙 호방하게 만들어 져 있으므로 어떻게든 음향을 줄여서 연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스코르다투라를 이용한 안너 빌스마의 연주를 들어 보라!(신반이든 구반이든) 아주 이상적인 음조를 견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정상적 튜닝을 하더라도 전주곡의 울림이 많은 해석은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요요마의 해석은 어떤 방식에 따랐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의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을 주는 것도 바로 이 절제의 미학의 산물일 것이다.
c단조 조성이 주는 심각하고 준엄한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2번 곡과는 대조적으로 외형적인 일면도 보여 주고 있다. 일종의 투쟁적인 성격이랄까? 아니면 고고한 인품을 갖춘 이의 열열함 이랄까? 우선 전주곡(프랑스풍의 서곡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의 위용이 가져다 주는 중후함이 탁월하다. 이런 중후함과 신중한 정서는 각곡의 대비감과 맞물려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전주곡의 특징은 첼로 모음곡중 유일하게 푸가를 원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비탄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중반부 부터는 약간 활기를 찾은 느낌을 준다. 알레망드도 전주곡의 연장선에서 애절한 뉘앙스을 지속시켜주는 느낌이다. 쿠랑트는 무곡적인 활발함을 간직한 곡으로 도전적인 느낌을 준다. 사라방드는 비애의 정서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다소 염세적인 느낌도 전한다. 가보트와 지그는 곡 전체의 분위기치고는 활발한 편이다.
이 5번을 가장 잘 연주하는 이는 개인적으로 안너 빌스마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5번을 마치 가지고 놀듯 연주하고 있다. 전 6곡 중에서 첼로 선율로서는 다소 둔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지니고 있는 이곡의 특성과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빌스마는 이곡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79년 녹음과 92년 녹음 모두 최고의 음악성을 보여 주고있다. 79년 녹음은 다소 빠르고 경쾌한 느낌을 가져다 주며, 92년 녹음은 템포를 다소 느리게 하지만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여 곡의 중심부에 이르면 속도를 약간 빠르게 하여 긴장감을 주는 식으로 연주하고 있다. 즉, 즉흥적인 연주패턴인 템포 루바토를 곡에 도입하여 다채롭게 전개하고 있다. 극히 어두운 음조의 가라앉는 거트현의 울림은 심오하고 철학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곡이 발산하는 심각하고 어두운 정서를 멋지게 재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종래의 어떤 연주자들의 음악보다도 신선하다.
요요마의 "바흐에의 영감"에서는 일본의 전통예술 가부키를 5번과 매치시키고 있는데, 요요마와 안무가가 불어 넣으려 한 내용은 자유를 향한 내적 열망일 것이다. 이러한 열정이 은근하고 고즈넉한 운치감과 어우러져 절묘한 예술성을 표출시키고 있다. 요요마의 5번은 연주 자체만으로 보아도 그 완성도가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가부키 배우의 연기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요요마의 DVD음반은 반드시 들어 보아야 할 레코딩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6번 BWV1012 D장조
이 6번은 규모가 크고 음역도 가장 넓게 만들어져 있다. 곡이 부여하는 느낌도 매우 대담하고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프렐류드의 낮은 음의 메아리 같은 음의 울림이 묘한 운치를 자아 낸다. 약간 격정적인 느낌도 있으며 파도처럼 밀고 나가는 힘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모음곡의 마지막 곡답게 아주 활달하고 호방하게 마무리 짓고 있는데, 이는 무반주 바이올린곡의 제3번 파르티타과 대비시켜 보면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 6번은 곡간의 대비 효과가 어느 모음곡 보다도 탁월하다고 보여진다. 동적인 격렬한 선율과 명상적인 안정된 선율을 엇갈리게 안배하고 있어서 전체가 극히 건축적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프렐류드, 쿠랑트등은 전자의 성격이 있고, 중간에 놓인 알레망드, 사라방드등은 후자의 성격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모두 동적이지만, 가보트는 약간 격앙된 느낌을 주고 지그는 혼란한 감정을 추스리는 느낌이 든다. 이 6번은 전반적으로 비브라토나 즉흥적인 장식음은 극히 절제하고 연주해야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곡의 전주곡은 현의 중복 울림 효과를 사용하여 아주 박진감 넘치게 만들어진 곡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12/8박자의 리드미컬한 자유로운 악곡으로 선율적이기보다는 건반 악기적으로 연주되어야 이 프렐류드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다소 느리게 연주해야 좋을 것 같다. 알레망드는 '알레망드 그라베'로 되어 있듯이 사라방드에 비견될 정도의 중후함을 지니고 있다. 상당히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쿠랑트는 여기서는 매우 아름답게 작곡되어져 있다. 아침 햇살 머금은 이슬처럼 지극히 투명하고 건강한 느낌을 전달한다. 마치 무반주 파르티타 제3번의 프렐류드나 가보트 악장처럼 싱그러운 음악이다. 사라방드는 앞의 알레망드를 더욱 내면적으로 심화 시킨 듯 중후하게 심금을 울린다. 경건하고 종교적인 느낌도 있어서 호소력이 크다. 제5곡인 두개의 가보트는 약간 격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활기차다. 지그는 상당히 빠른 편이며 생동감과 발랄함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쾌활한 악곡이다. 지그는 자유로운 정신의 대향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원스런 음악이다.
이 6번 모음곡은 저음부와 고음부에 걸쳐 폭넓은 음역을 사용하여서 그런지 듣기에는 첼로소리가 아주 다채롭게 들려진다. 이 6번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야노스 슈타커의 음반을 들어 보면, 장식음을 극력 절제하고 비브라토사용을 줄이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잘스나 장 막스 클레망의 연주도 이런 측면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들 3인이 연주하는 6번을 들으면 가슴속의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 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곡이 표출하는 역동적이고 호쾌한 느낌과 중간 중간에 배치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명상적이고 자아 성찰적인 느낌은 수도하는 승려의 끊임없는 번뇌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바흐는 바로크시대의 음악가인 점을 생각할 때, 세속음악의 범주에 놓인 이들 곡에서 엄숙하고 고요한 종교적인 맛이 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주는 심오한 아름다움 앞에선 어떤 음악도 존재하기는 힘들며, 숭고한 악상에 있어서도 이를 덮을 것은 없을 것이다.
원래의 악기대로 연주한다면 5줄의 악기인 비올론첼로 피콜로(의견이 분분하여 반대견해가 있지만)로 가지고 연주해야 한다. 넉줄의 현대 첼로로써도 어렵살이 연주할 수 있지만, 풍성한 연주를 위해서는 비올론첼로 피콜가 나은 측면이 있다. 원전연주를 들어보면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악기자체의 현이 많음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다만 지금껏 녹음된 음악을 들어보면 현대첼로 연주가 더 낫다고 본다. 이것은 아직 원전연주가 아직도 시작단계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Ⅴ.이곡의 명반들
1.글쓴이가 생각하는 명반의 기준
바흐 음악이 다 그렇지만,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경우에도 음악 자체가 간직하는 불가지론적이고 무한한 해석의 여지 때문에 많은 서로 다른 해석의 음반이 존재한다. 또한 음악적인 스펙트럼이 엄청 넓어서 낭만적인 해석도 있고, 고전주의적인 해석도 있으며, 원전연주도 존재한다. 이러한 여러 갈래의 녹음들 중에서 명반을 찾는다는 것은 아주 재미있고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흐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 지켜야 할 패러다임을 글쓴이 나름대로 정의 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라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첫째 바흐 음악은 낭만성과는 애증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연주자 스스로 체득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장식음등과 같은 외형적 기교을 극히 절제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사용하더라도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의무사항처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 이다. 재량사항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 이것들을 바탕으로 음악의 외적인 표현은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하며, 음악에 담길 내용은 주관적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안배하여야 한다. 이런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의 조화는 양립 불가한 사실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이른바 명반이라고 추앙받는 음반들은 대체로 글쓴이가 내세운 명제를 수용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위에서 입론한 기준도 글쓴이의 머릿속 생각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글쓴이가 들은 음반(한20여종 정도)이 아직 그렇게 많다고 볼 수는 없다. 아직 못들은 음반이 훨씬 많겠지만, 나름대로 형성된 바흐의 틀에 기해 음반을 평가 해보겠다. 그리고 글쓴이가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 더 많은 음반의 빈약한 설명은 다른 분들의 리뷰로 보강했다. 이 리뷰들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명반들(글쓴이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반)
1) 파블로 카잘스 / EMI
카잘스의 이 음반은 무반주연주의 점을 이룩한 불멸의 음악사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순 음악적으로도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녹음 년대가 60년 이상을 소급하지만 그의 연주에 필적할 곡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본다. 그는 이 모음곡의 해석에 있어서 다소 낭만적이지만, 나름대로 순수한 인간미를 표현하고 있다. 간혹 음이 갈라지거나, 다소 무리한 장식음 운용(예컨대 루바토의 사용)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탁월한 음악 장악력을 가지고 이곡의 표준적인 연주로서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카잘스의 음악을 듣노라면 그가 왜 첼로의 성자 인지를 알게 된다. 현대 첼로의 본연의 모습을 일깨운 그의 연주사적인 공적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불어넣은 무반주의 연주 규범은 후배 첼리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시금석이 되고 있는 것이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음반은 몇개가 나와 있는데, EMI판이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복각된 음반도 출시되고 있다. 전자에 비해서 후자는 첼로의 인간적인 맛을 잘 포착하고 있다. 다만 잡음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흠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후자의 음반이 카잘스를 좀더 가까이 접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음반은 음색이 지나치게 날카로와 첼로의 아름다움을 실종시키고 있는데, 마치 6,70년대의 미디어를 통해서 들리는 어떤 정치인의 목소리 같다. 카잘스가 주는 감명은 그러한 날카로움으로 포장된 카리스마가 아니라 너무도 인간적인 부드러운 첼로 선율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음악적 느낌은 장래에 대한 낙관적인 행복감과 마음의 평안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글쓴이 생각으로는 제1번은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정서를 불어넣고 있으며, 제2번은 인간적인 향수와 명상및 외로움을 제3번은 마음의 평정심을 제4번은 불가지론적인 무언의 내적인 암시를 제5번은 열열함과 그 이면의 우울한 정서를 제6번은 번뇌와 명상의 내면적인 치열한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본다. 글쓴이 개인적으로 모음곡 제2번과 6번 연주는 아직까지도 카잘스를 능가하는 해석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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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카잘스는 확실히 위대한 연주자이다. 그러나 그 위대함을 너무나 추종한 나머지 자신의 시야를 좁히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은 또한 카잘스에 대한 정당한 평가조차도 방해받게 만든다. 카잘스의 연주가 오늘날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좀 더 관조적이고 비평적 입장에 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카잘스는 두말할 나위 없이 철저한 주정주의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가 어설픈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바흐의 악보를 분석해왔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해석의 역사성 측면에서 그는 반론의 여지를 많이 남겨놓았지만 적어도 정서적인 측면에서만큼은 그는 음향의 배후에 펼쳐지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끊임없이 실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종종 과장되고 통제되지 않은 격렬함을 들려주기도 했지만 연주자의 강한 주관이 투영된 음악성이 풍부한 연주의 이상적인 모델로 기억되고 있다. 조악한 음질로 악명이 높았지만 리마스터링 기술의 발달로 최근의 복각음반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음향을 들려준다.
2) 피에르 푸르니에 / ARCHIV
피에르 푸르니에(Pierre Fournier/ 1906∼1986)는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수려한 용모와 귀공자같은 품위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하지만 그는 소아마비 환자로 오른쪽 다리 전체가 불편한 사람이었다. 피아노에서 첼로로 전환한 계기도 그의 신체장애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첼로 연주에서도 그러한 불리한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그는 보통사람보다 몇 배나 연주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체 장애자들의 연주에서 발견되는 공통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순수성이 고차원적으로 발현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발햐를 보면 더욱 그것이 두드러진다. 푸르니에의 연주 역시 조금의 불순물도 허용하지 않으리 만큼 깨끗하고 정갈한 맛이 난다. 거의 감정의 기복이 없으면서도 뜨거운 정열을 곡 깊숙히 느낄 수 있다. 그지없이 투명한 음색도 훌륭하며, 기교를 별로 부리지도 않는다. 이른바, 무기교의 기교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격조 높은 연주이다. 지속음을 처리하는 능력도 어떤 첼리스트보다 탁월하여 화성적인 측면을 잘 부각시켜주는 연주를 들려준다. 카잘스 이래 가장 이곡을 잘 연주한다는 평가가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연주에서 시도하는 패러다임은 아마도 헨릭셰링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해석하는 그것과 유사하다고 본다. 외형적인 표정은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지만, 곡의 중심부에 들어가면 용광로 같은 뜨거운 정열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표현에 있어서의 엄정한 면과 음악 내용에 있어서는 낭만적 정서가 대위선율처럼 어우러져 강력한 멧세지를 발산하고 있다. 푸르니에의 이 음반은 카잘스 그것과 더불어 많은 애호가들에게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무반주 첼로 연주에서 또 하나의 표준처럼 추앙 받고 있다. 음악이 주는 품위와 높은 정신성은 현대 첼리스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이다. 푸르니에가 '첼로의 왕자'로 불리는 게 괜히 붙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연주가 발산하는 단아함, 균형감, 우아함은 카잘스이후의 무반주 첼로의 역사에 큰 획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곡을 별 하자 없이 잘 연주하는 첼리스트라 생각되는데, 특히 개인적으로 모음곡 제1번, 제3번, 제4번, 제5번등의 연주는 오히려 카잘스를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아래 글은 최은규님의 아코드 발매의 푸르니에의 다른 음반에 대한 리뷰인데, 아르히브판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리뷰같아서 부가한다.(이상 글쓴이 생각)
“이 음반을 들으면 두 가지 점에서 놀라게 된다. 우선 무반주 단선율을 입체적이고 다성적으로 표현해내는 그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푸르니에의 연주를 들어보면, 그의 프레이징과 다이내믹 설정은 결코 즉흥적인 감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 곡에 대한 구조적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는 '나아갈 때'와 '들어갈 때', 그리고 '정지'와 '운동'이 적절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변화무쌍한 연주를 들으면 앞으로 나올 선율이 어떻게 표현될지 묘한 기대감을 갖게 되며,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더 배가된다. 단선율 속에서 몇 가지 성부를 끄집어내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계층적으로 파악하여 각 악구마다 표정을 달리하는 그의 연주는, 지성적인 연주의 표본이 된다. 그러나 더욱 감탄하게 되는 것은, 구조적 중요도에 따라 계층적으로 분절된 각 악구들이 놀랄 만큼 매끄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구별된 악구들은 음색과 음량의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하나의 숨으로 연주된다. 멜로디는 결코 끊기는 법이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은 활의 압력과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그의 뛰어난 테크닉에 힘입은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바흐 음악을 보는 그의 깊고 넓은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푸르니에가 들려주는 바흐는 미세한 구조에서부터 전체적인 통일성에 이르기까지 이 음악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바탕을 둔 명연이라 할 수 있다. (최은규 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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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푸르니에의 아르히프 녹음은 카잘스와 같은 이전 세대와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적인 단아함과 아름다운 음색은 푸르니에와 그 이후의 프랑스 파를 특징짓는 두 가지 수식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카잘스의 격렬한 다이내믹과 거친 음색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푸르니에는 첫 번째 녹음에서 안나 막달레나 필사본에 근거한 파울 그뤼머의 에디션을 사용했는데 수년 뒤에 푸르니에는 자신의 에디션을 만들고 두 번째 녹음을 했다. 여기에 대해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에디션을 연구한 팀 핀홀트는 첼로의 기술에 좀 더 집중하고 있었던 카잘스와 달리 푸르니에 시대에는 스테레오 녹음이 발달하면서 레코딩에 더욱 어울리는 음향을 만들기 위해 음색이 다듬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템포는 눈에 띄게 느려졌고, 부드러운 흐름을 위해 프레이징이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물만큼은 훌륭하다. 푸르니에의 아르히프 녹음은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풍부한 느낌을 전달하며, 지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몇 안 되는 연주 가운데 하나이다. 모리스 장드롱, 앙드레 나바라, 폴 토르틀리에와 같은 프랑스 첼리스트들 또한 훌륭한 연주를 남기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장드롱(필립스, 1964년 녹음)은 푸르니에와 달리 동시대에는 드물게 5번 모음곡에서 스코르다투라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3) 안너 빌스마 / SONY / 92년 앨범
안너 빌스마는 현존 첼리스트 가운데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가장 잘 연주하는 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용하는 악기는 원전악기인데,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든 거트현을 달아서 그때 당시의 악기와 음색을 복원하여 연주한다. 강철 현에서 느끼지 못하는 부드럽고 가라앉는 음색을 거트현만이 표현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현 자체의 낮은 인장력 때문인지(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원전 연주가 거의 그러함) 모르겠으나 반음 낮게 튜닝하고 연주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주시 많은 어려움도 따르는듯하다. 지기스발트 쿠이켄이 샤콘느 연주시 애를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빌스마도 연주 시에 힘든 점이 있음을 음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주시 현이 늘어나서 발생하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장식음 처리화는 그를 무척 곤혹스럽게 하는 것 같다. 또한 제3번 6번처럼 파워풀한 느낌을 전달하는 모음곡에서 바로크 첼로는 다소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감지되는데, 악기 자체의 연주상의 한계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빌스마는 그래도 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거트현 첼로를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연주를 해낸다. 더구나 빠른 부분의 연주에 있어서도 악기자체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 같다. 거트현의 거친 숨소리같은 잔향도 매우 친숙하게 느껴진다.
카잘스가 그렇듯이 안너 빌스마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완전히 장악하고서 연주하는 연주자중의 하나인데, 그는 특히 전주곡을 잘 연주한다고 보여진다. 템포의 완급 변화를 통해서 곡의 분위기를 일신케하고 있으며 곡의 대비감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러한 느낌이 가장 현저한 것은 제1번과 제5번이며, 빌스마의 이 연주는 무반주 전체를 통틀어 단연코 최고라 생각한다.
안너 빌스마는 30년 전에 카잘스가 첼로 연주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것처럼 바흐 무반주 첼로 연주에 있어서 1979년을 획기적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만약 빌스마의 연주가 설득력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엔드핀 없는 바로크 첼로의 연주는 일종의 실험적인 시도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단지 음향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면밀한 원전연구를 통해 안나 막달레나 필사본을 스스로 교정하여 프레이징, 중음의 연주, 의사복선율의 암시, 장식과 부점의 해석 등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서 사실상 오늘날과 같이 바로크 첼로의 연주가 개화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안나 막달레나 필사본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프레이징과 보잉, 음색의 자유를 꽤함으로서 이전의 연주에서 들을 수 없었던 놀라운 활력으로 곡을 새롭게 변모시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5번 모음곡에서 스코르다투라를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빌스마는 가능한 한 개방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흐의 의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개조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스트라디바리의 대형 첼로를 사용한 비바르테의 녹음은 빌스마의 해석이 좀 더 이상적인 매체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이 연주는 엄밀한 의미에서 원전악기 연주가 아닌 절충주의적인 연주이다. 왜냐하면 "세르베"첼로에는 엔드핀이 붙어있고 무엇보다도 금속 코팅된 현과 짧고 뾰족한 바로크 활이 아닌 도미니크 페카트의 19세기 활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악기의 최대 능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을 준 것 같다. 고프릴러의 연주가 다분히 실내악적이라면 빌스마는 스트라디바리 "세르베"에서 오케스트라의 능력을 발견했다. 빌스마는 악기의 음색적 특색, 즉 밝고 카랑카랑한 고음과 어둡고 신비스러운 저음을 대비시킴으로서 다성부의 실제화에 효과적으로 적용했다.
3.글쓴이는 별로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반
1) 야노스 슈타커 / MERCURY(1963-65), RCA(1995)
야노스 슈타커의 음반은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하는 분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RCA음반(신반)이 머큐리음반(구반)보다는 음악적 성숙도라는 측면에서 좀더 나은 것 같다. 다만 양 음반 모두 녹음상태를 보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명반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치를 약간 일탈하지 않나 생각한다. 연주가 너무 모호한 음색으로 녹음되어 있어서 호소력을 반감시키고 있으며, 연주시 발생하는 잡음도 다소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물론 가장 짜증나는 것은 잡음보다는 모호한 음색이다. 바흐의 어떤 장르의 음악도 모호하게 처리하여 성공할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외형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곡이 호평받는 이유는 음악을 꾸려가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결과라고 본다.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뭐랄까 삶의 향취가 느껴진다.(글쓴이 생각)
“슈타커의, 아마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를, 92년 최신녹음(RCA)은 초중기녹음(EMI: 1957∼1959, Mercury: 1963∼1965)에 비해 음색이 너그럽고 온화하다. 흐트러짐과 무리한 비약을 찾아볼 수 없는 논리 정연함은 그대로지만 노트에 충실하고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금욕적 성향은 훨씬 누그러졌다. 유연한 흐름(3번 프렐류드)이 있고, 영감(3번 사라방드)과 확신(5번 가보트)이 지배한다. 템포는 1번을 제외하고, 전곡을 통틀어 유장해졌다. 특기할 것은 6번의 알르망드가 나머지 다섯곡의 알르망드에 비해 가장 느리고 부드러운 레가토로 연주되는 곡인데, 슈타커의 신 녹음에선 5번 알르망드가 가장 느리다. 58년 EMI반에서 4분44초로 처리된 5번 알르망드는 RCA반에서 7분26초로 꿈꾸듯 느긋하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이상적 연주란 어떤 것일까. 진지함 심오함 엄격함 따위의 정신성과 바흐도 분명히 지녔을 가슴(감정)의 조화일 것이다. 말하자면 구조적 접근과 낭만적(랩소디적) 해석간의 균형이다. 대체로 슈타커는 전자, 푸르니에와 장드롱이 후자, 그 중간에 카잘스가 놓인다. 엄격한 아카데미즘에 시정을 실어, 정신이 깃든 「교회당」에서 사람이 사는 「집」을 지향한 슈타커의 최신연주는 그런 편가르기를 수정하라고 말한다.(김용운님 글 중에서)
2) 무스티슬라브 로드스트로포비치/ EMI
로드스트로 비치의 연주에 대해서도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 같다. 명성에 비하여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견해와 최고의 첼리스트 답게 무난히 이 음악을 소화하고 있다는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는 것 같다. 글쓴이 개인적 입장으로는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다만 연주 자체가 듣기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인 것으로 본다. 어쨌던 이 음반은 국내외에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글쓴이가 이 음반을 들으면서 느낀 점은 음악을 너무 관능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글쓴이 생각) 아래에 로스트로포비치 음반이 출시하였을 즈음에 나온 재미있는 신문기사가 하나 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바흐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신중하면서도 사려 깊은 해석, 달관의 연주로 곡을 지배한다. 경쾌함 (1번) 슬픔과 격정 (2번) 빛남 (3번) 장엄 (4번) 어두움 (5번) 햇빛 (6번)으로 표현되는 6곡 가운데서 특히 장엄한 교향악에 비유되는 6번곡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듣는 이의 가슴을 활로 그어 감동을 울려내고, 바흐의 천재성이 번득이는 5번곡의 사라방드 악장에선 변화무쌍한 기교를 펼쳐 보인다. 로스트로포비치는 프로코피에프의 첼로협주곡 2 번(1952), 쇼스타코비치의 2개의 첼로협주곡(1959-1966), 브리튼의 첼로심포니(1964), 브리스의 첼로협주곡(1970) 등 수많은 곡을 초연한 우리시대 최고의 첼리스트. 본처인 볼쇼이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 갈리나 비시네프스카야를 두고 독일의 자존심 안네 소피 무터(바이올린)를 미혼모(?)로 만들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서 공부한 로스트로포비치는 워싱턴 내셔널심포니-런던심포니 등을 지휘, 쇼스타코비치음악의 탁월한 해석가로도 이름을 얻었다.(김용운님 글중에서)
4.논란이 있을 수 있는 음반들
이들 음반들은 애호가에 따라 선호도가 극명하게 대립되는 음반인 것 같다. 글쓴이도 아래의 것들 중에서 좋아하는 것도 있고 듣기를 꺼려하는 것도 있다. 이른바 자신의 기호가 음반 선택을 좌우하는 그런 일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에서는 심심찮게 일어남을 알 수있다. 여기에 이르면 호불호의 판단은 개인의 성향에 달려 있다.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장 막스 클레망 Jean-Max Clement / DECCA
음반 평론가 최은규님이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는 음반이다. 글쓴이도 상당히 애호하는 편이다. 특히 제1번과 제6번 연주는 매우 직설적이고 아름다움을 주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이 음반에서 마이너스 요소로 지적되는 것들은 비브라토가 때때로 너무 거칠고 과하다는 것이다. 특히 종지 부분에서의 과도함은 좀 오버하는 것 같다. 또한 건반 악기적으로 연주할 부분에서 지나치게 선율적으로 연주하여 엄정함을 실종시킨 것도 단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도 이 음반이 매력적인 것은 여기에서 클레망은 첼로의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그의 연주를 상당히 좋아한다.(글쓴이 생각)
“그가 연주하는 바흐 무반주첼로 모음곡 1번의 첫 프렐류드를 듣는 순간부터 그 비범한 연주에 빨려 들게 된다. ‘음악에서 한가지 위험한 것이라면, 악보대로 연주하는것‘ 이라고 말할 정도로 클레망은 자유롭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생명체인 것이다.............’아름다운 소리보다는 개성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그 자신의 연주관에 따라 그는 거칠고 굵은 소리를 내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다음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려올 것인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연주한다. 원전 연주의 엄격한 주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듯 그의 주법은 철저하게 비정격적이다. 그는 세 음이나 네 음으로 이루어진 코드를 한 번에 연주하지 않고 둘 씩 나누어 연주함으로써 고음악의 주법을 거부하고, 활을 현에 밀착시켜 연주해야 할 부분에서도 활의 튀어 오르게 하는 스피카토 주법을 서슴지 않는다. (최은규님글 중에서)”
2) 랄프 키르쉬바움 / 버진
음악 평론가인 양현호씨(제가 본적은 없지만 글을 통해서 아주 존경하는 분임)가 극찬하는 음반이다. 카잘스를 뛰어 넘을 만큼의 감명을 준다고 그분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의 견해에 대해선 반대의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직접 평가해 보시기를 꼭 권하고 싶다. 글쓴이는 좀 회의적이다.(글쓴이 생각)
“키르쉬바움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연주는 한마디로 경이롭다. 그것은 이 모음곡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석을 들려준다는 것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카잘스의 연주를 뛰어넘는 것이다. 우선 완벽한 조형감을 지녔다는 점에서 로맨틱한 자의가 덧붙여진 카잘스의 연주에 비해 훨씬 정교하며, 표현의 섬세함에 있어서도 다른 어떤 첼리스트들보다 탁월하다. 또 현대의 많은 첼리스트들이 놓쳐 버렸던 영혼의 감정이입에서도 거장 카잘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키르쉬바움의 연주에는 한음 한음에 모두 깊은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음색의 아름다움이나 울림의 깊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예컨대 제2번이나 제5번의 사라방드에서 우리의 영혼을 매혹하는 깊은 흡인력은 그와 같은 깊고도 섬세한 울림이 아니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양현호님의 글중에서)”
3) 다닐 샤프란 / Aulos 클래식
이 음반도 위에서 언급한 양현호씨나 안동림씨 같은 평론가들이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음반에 대해선 글쓴이는 약간 회의적이다. 무반주곡을 이렇게 선율적으로 연주하는 것도 그렇고, 비브라토를 이렇게 적극적으로 사용하여도 과연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한 곡의 외향적인 면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동림 선생님 같은 분들은 “우리를 깊은 명상과 달관의 경지로 승화 시켜주는 불멸의 선율로 샤프란의 무반주(음반 내지)”를 칭찬하고 있다.
4) 요요마 (바흐로부터의 영감) / SONY
요요마의 음반에 대해선 역시 헐리웃 수준을 못 벗어난다는 혹평과 바흐의 현대적 의미를 잘 부각시키고 있으며 특히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격상시킨 점에 대해서 나름의 평가를 하여야 한다는 찬사가 대립될 수 있다. 순수한 음악 하나만을 놓고 본다면 그의 무반주는 다른 명인들에 다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상과 매치된 그의 음악은 현대적 의미를 잘 깨우쳐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요요마의 해석에 대해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제3번, 5번 연주는 상당히 설득력을 가지게 하는 훌륭한 해석이라고 본다. 가격이 만만찮은 게 흠이지만, 이 모음곡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그의 바흐로부터의 영감이란 타이틀이 붙은 DVD음반을 꼭 구해 듣기를 권하고 싶다.(글쓴이 생각)
"제가 바흐의 모음곡에서 특별히 느끼는 점은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는 저만이 느낀 것이 아니겠죠. 이 곡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음악의 기본적인 힘을 향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첼리스트에게 독주 레퍼토리 중 가장 매력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겠죠. 저는 이 작품을 네 살 되던 해부터 한 번에 두 마디씩 익혀나가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의 지적이며 감성적이고 영적인 힘들은 일생에 걸쳐 제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요요마 자신의 그의 음반에 대한 생각-98년 객석 4월호 157면)"
요요마의 두 번째 녹음은 Inspired by Bach라는 제목으로 다른 예술 장르와 결합을 시도한 색다른 연주이다. 연주 외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연주 그 자체만을 두고 볼 때 요요마의 연주는 자의성과 무책임함으로 얼룩진 80년대의 연주를 완전히 탈피하여 바흐의 진지한 해석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다. 비록 원전악기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해석은 정격연주를 많이 참고한 것이 분명하다. 바로크 시대의 양식과 연주자의 음악적 감각이 한대 어우러져 구현되는, 적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비브라토, 강조된 무곡 풍의 리듬, 과감한 다이내믹, 유동적인 템포 덕분에 이 연주는 현대악기 연주 가운데 가장 유니크한 것 중 하나가 되었다. 세부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있는데 이를테면 5번 모음곡의 프렐류드에서 들려주는 기계적이고 비음악적인 트릴 같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요마는 바흐 해석의 여러 방향 가운데 올바른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5) 피터 비스펠베이 / 채널 클래식(구반, 신반)
최근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고 하지만, 글쓴이 생각은 다르다. 비스펠베이의 연주는 가장 기대를 가지고 듣게 되지만 또한 가장 많이 실망을 하게 되는 그런 연주이다.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뻣뻣하다는 느낌을 주고, 어떤 부분은 너무 기교를 부려 감정이 과잉 되게 만든다는 점이 실망스럽다. 최근 레코딩은 전체적으로 구반보다 못하다고 본다. 구반을 듣고 좀 괜찮다고 느꼈는데, 신반은 개인적으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글쓴이 생각)
“................ 첫번째 녹음보다 템포 루바토의 사용도 늘어났고, 다이내믹의 폭도 약간 넓어졌다. 전반적으로 템포도 빨라졌고 풍성한 느낌을 주고 있어, 원전연주가 줄 수 있는 경직성은 크게 완화되어 있다............. 이 음반을 다 듣고 나서야 필자는 왜 비스펠베이가 이 곡을 다시 녹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스펠베이의 첫 녹음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비스펠베이는 바로크-고전과 낭만-현대를 오가며 많은 곡들을 연주, 녹음하여 레퍼토리를 늘려왔다. 그러는 동안에 낭만-현대 레퍼토리를 연주하면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흐 곡에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풍성한 잔향이 잘 포착되어 있고, 또 거트 현의 까칠까칠하면서도 여린 음색도 남김 없이 잡혀 있다. (윤정열님의 글 중에서)”
피터 비스펠베이는 스즈키와 마찬가지로 빌스마의 제자지만 결코 그 뒤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바로크나 고전파의 음악만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오케스트라 단원이나 실내악 주자의 길을 포기하고 오로지 독주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비스펠베이의 첫 번째 녹음이 원전악기로 연주하는 무반주 모음곡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면 그의 새 녹음은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다라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확실히 첫 번째 녹음에서는 그 지향점이 거트 현의 투명한 음색에 의한 깔끔하고 안정된 연주였다. 그러나 두 번째 녹음에서는 빌스마조차도 감히 꺼려하는 즉흥적 장식이라는 요소를 대폭 도입했다. 비스펠베이의 애기인 바락 노먼의 첼로는 비스펠베이의 운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마치 비스펠베이 자신이 생각하고 활 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들려줄 수 있는 것 같다. 확실히 화려하고, 열정적이다. 지적이라기 보다는 유희성이 강조된 연주이며 현대악기와 원전악기의 편가름을 떠나서 모든 연주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것으로 꼽을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비스펠베이는 해석의 자유를 극단으로 끌고 간 것이지만 바흐의 해석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진취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시대의 바흐 연주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6) 미샤 마이스키 / DG
이 음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평가가 그다지 후한 편이 아닌 것 같다. 글쓴이도 이 연주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음악을 구축하는 면에서 조형감이 떨어지고 너무 과잉 되게 감정처리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7) 모리스 장드롱 / 필립스
모리스 장드롱(Muarice Gendron(1920∼1990)의 이 연주는 개인적으로 단점도 장점도 별로 발견되지 않는 그런 연주인 것 같다. 현대 악기로 연주한 연주자로 예외적으로 제5번을 스코르다투라로 연주하고 있다고 한다.
8)그 밖의 음반들/ 그 밖에도 글쓴이가 듣지 못한 많은 음반들이 레코딩되어 있다.
5.편곡 음반들
이들의 연주는 우선 그들의 대단한 음악적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편곡 자체가 주는 힘든 특성, 연주자체의 곤란성등이 원곡연주보다 더한 힘든 과정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바흐 자신이 편곡의 대가였던 만큼, 이런 편곡음반도 넓게 보면 바흐의 정신에 포섭될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다만, 음악의 정교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아무래도 원래의 모습이 그리워지게 된다. 그럼에도, 음악의 내용적 확대와 구체화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노력도 경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편곡 연주로는 ①guitar 편곡음반. 10현 기타 편곡음반, ②플룻 편곡음반, ③비올라 다 감바 편곡음반/ 파울로 판돌포 연주, ④더블베이스 편곡 음반 등이 존재한다.
BACH2138님의 글입니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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