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발전, 청빈 그리고 선교 본당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고 가난한 사람 가운데 활동하신 것이 분명하여도, 현재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서 그분의 청빈을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가 하나의 화두이다.
글 · 박문수神父
1. 빈곤과 발전 그리고 부끄러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69년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말로 신학을 배워 사제품을 준비하는 것이 당시의 나의 과제였다. 한국말을 배우기 전에 서강대학교 학생들과 같이 영어로 나눈 이야기 하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화투를 치다가 예수님이 졌어요.”
학생이 말한 그 풍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무슨 말인가요?” 라고 물어보았더니, 그 학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님은 팬티밖에 남은 것이 없는 채 팔을 벌려 ‘I have no money.’ 라고 하시지만, 붓다가 그 앞에 앉아서 내민 손으로 손바닥을 펴서 ‘Pay up.’ 하고 말하셨거든요. 하하하.”
그 학생은 웃으면서 나의 반응을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풍자에 나도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생이 예수님이 지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아서 내 웃음이 시원치 않았다. 그 후 그 농담 중에 진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나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당시에 그 대학생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사람이 ‘발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며 자기 자신과 나라의 빈곤에 대해서 창피해하였다. 그 학생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옷이 다 벗겨진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것을 다 내어 놓으신 사랑(=청빈)의 뜻보다, 약해서 당하는 빈곤을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강대학교와 거의 모든 대학은 나라의 발전과 학생의 풍부한 생활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자기의 정체성이나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보여 주려고 애를 썼다. 지금도 대학에서 청빈과 같은 미덕을 가르치기 힘든 이유는 창피한 빈곤에서 벗어나야 하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발전’은 북미나 서구와 동등하게 되는 것으로 높은 국민총생산과 기술 수준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빈부 격차를 최소화시키는 ‘지역 사회 발전’에 대한 관심은 적다.
2. 빈곤과 발전과 공동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일우 신부님과 고 제정구(전 국회의원) 씨가 ‘복음자리 마을’을 설립하고 공동체를 키우는 과정에 도시 빈민 사목의 원칙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빈민의 이웃이 되는 것”과 “함께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복음자리의 정신에 따라 1980년대에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모여서 ‘천주교도시빈민회’의 이름으로 빈민 운동과 주거권 운동에 헌신하였다. 나 또한 회원이 된 것이 자랑스러웠고, 빈민 사목이 천주교회의 쇄신과 나라의 사회 정의에 기여할 것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날에 그 친구를 알고 있는 신문사 사설 편집자가 마침 그 집을 방문하였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그 편집자가 “신부님은 무엇을 하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빈민 사목 활동을 하는데, 재개발 지역의 철거민들이 공동체를 만들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답을 하였다.
그 편집자는 “내가 달동네에 교회를 설립한 목사님을 알고 있는데, 그는 처음에 ‘가난함’이란 말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교회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방법을 바꾸어서 ‘발전’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때부터야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됐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의 마음은 매우 복잡해졌다. 소극적 표현인 ‘가난함’보다는 적극적(?) 표현인 ‘발전’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효과가 크다는 것에 나 또한 동의하고 있었지만, 편집자의 말에 동의를 표현하면 마치 성당으로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우리 빈민 사목의 목적이라고 동의하는 것 같아서 그저 간단하게 “우리는 그 목사님과 달라요.”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후에 그 편집자가 던진 도전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사실 빈민 사목에서 성당으로 사람들을 많이 오도록 하는 것보다 지역 사회에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할 일이며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단어야 물론 좋은 것이긴 하지만 일부 사람들만이 편리한 생활을 마련하는 ‘발전’이나 나눔의 공동체를 부수는 ‘발전’은 좋지 않다. 일반 사회에서 발전을 너무 피상적으로 ‘더 커져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천주교회에서도 ‘복음화’를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것으로 피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3. 빈곤과 배제
빈곤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사회적 배제’라고 하는 이론이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빈곤은 가치의 경제적 순환과 정보와 권한과 사회적 위상과 같은 것에서부터 배제를 당하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 중에 중산층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우리 교회가 사회의 배제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천주교 문턱이 높다.’고 하는 말이 빈민 이웃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천주교회의 문턱의 높이를 30cm라고 하자. 그러면 첫째 5cm는 땅 값과 성당 값이다. 일주일에 36시간만 채워서 사용하는 공간을 40억 원으로 준비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치스러운 부자가 아니면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5cm는 돈이 없어서 성당 값을 거의 내지 못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세 번째 5cm는 교리반 일정표라고 할 수 있다. 남의 밑에서 일하고, 가정생활도 여유가 없으며, 자유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을 정도로 기는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성당 교리 시간에 자주 결석했기 때문에 교리반에서 잘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네 번째 5cm는 신부님들의 높은 사회 위상이다. 그 높은 신부님과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모르고 막연한 두려움까지 느끼고 있는데, 거기에 더 잘사는 사람과 경쟁까지 해야 한다고 느끼니 신부님과 가까워지는 건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5cm는 활동 단체의 비싼 친목회비를 잘 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며, 여섯 번째 5cm는 어린이 캠프나 문화 행사의 비싼 행사 비용이다.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생각하면 이 30cm의 높은 문턱의 의미는 단순히 ‘경제적으로 비싸다.’라고 하는 것보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라고 하는 소외감이다.
4. 선교 본당
서울대교구의 선교 본당은 ‘복음자리’의 사목 원칙(이웃이 되어 함께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과 성공회의 ‘나눔의 집’ 사목 방침을 참조하여 적용한 것이다. 본당의 문턱을 낮추고자 성당을 건축하지 않고, 성당을 위한 부지도 마련하지 않는다. 미사는 사제관이나 동네 다른 적당한 곳에서 봉헌하기도 한다. 사목자와 선교 활동가들이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함께 노동하며 같은 생활수준으로 산다. 현재 한국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거슬러 활동하고자 선교 본당은 지역 주민 창구로 주민 자치 활동을 지원하고 조직하기 위한 ‘평화의 집’과 청소년 활동을 육성하기 위한 지역대 스카우트 활동과 지역 아동 센터, 실업자를 위한 사업단 등과 같은 조직을 설립하고 지원하고 있다. 소외감을 최소화하고자 선교 본당 신자들은 사목자와 선교 활동가와 더불어 ‘기초 교회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는 소공동체이며 사명감을 공유하여 사도직을 맡은 신앙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신자 수가 많아지면 본당은 여러 소공동체들 간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최근에 열심인 40대 여성 신자와 만났을 때 “선교 본당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짧게 대답하려고 “서울대교구의 빈민 사목 활동을 하는 것인데, 재개발 지역에서 가난한 철거민과 함께 활동하다가 이것이 본당으로 승격하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여자 분이 하는 말씀이 “어? 가난한 사람끼리 모인 본당이라니 이상해요. 다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나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아!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오해를 풀려고 “가난한 사람끼리가 아니고 선교 본당은 본래 주민 조직에 노력하는 활동가의 영적 성장을 위한 공소였다가 이것이 본당으로 승격하였으므로 지역 사회의 발전과 사회 정의 증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과 어렵게 사는 지역 주민들의 기초 교회 공동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아!! 그러면 이해가 됩니다.”라고 수긍하였다.
5. 청 빈
꿈이 있다. 사회가 점점 변화되어 가면서 빈부 격차가 줄어든다. 중앙 정부와 지방 자치제가 효율적인 행정을 실행하고, 지역 사회는 주민의 활발한 참여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농촌이라 해도 교육 수준이 높고 대도시라고 해도 대부분 가족들이 먹는 음식의 20% 정도는 직접 농사를 짓는다. 이런 사회에서 천주교회 본당은 지역 사회에 참여하는 남녀노소 소공동체들의 연합이 많다. 각 공동체들의 특성이 있지만 남녀노소로 편성되며 여러 소공동체의 협조로 연령별 행사나 교리반이 있다. 각 공동체에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많기 때문에 본당에서나 교구에서 받는 지도는 보충해 주는 것뿐이다. 주일 미사는 소공동체별로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여러 공동체들이 합쳐서 더 큰 규모로 미사를 봉헌하고 행사를 진행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협조해서 공간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에 성당 건축비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동체 가족들이 서로 잘 알고 많은 것을 나누기 때문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다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사치스러운 것이나 잘난 체하는 태도를 다 버렸기 때문에 부자도 없으며 가난한 사람도 없다.
이렇게 ‘청빈’을 실천하는 본당에 ‘빈민 사목’, ‘일반 사목’ 간의 구별이 없어져서 ‘지역 사회 사목’만이 남는다.
박문수 | 예수회 신부. 미국 출신으로 196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1969년 한국에 입국하여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973년 사제품을 받고, 이후 하와이 주립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1985년에 대한민국에 귀화하였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무악동 본당 주임 신부로 있다. 『농촌 공소 실태 조사 연구 보고서』, 『한국 가톨릭 교회와 소외층, 그리고 사회 운동』을 비롯한 빈민 사목에 관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월간 사목 2006년 3월 호(326호)
![](http://bbs.catholic.or.kr/attbox/bbs/include/readImg.asp?gubun=100&maingroup=2&filenm=0123%2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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