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 - Glenn Gould (1955.06. CBS Studio) | 音香 클래식

리차드 강 2017. 3. 4. 11:36

Glenn Gould - 1955.06 - CBS Studio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The Goldberg Var, BWV 988 - 전악장 연주

Glenn Gould, piano

Bach Goldberg Var BWV988 Glenn Gould 1955 1981 Aria Var3

1. Aria 1955 1:52

1-1. Aria 1981 3:05

2. Variatio 1 1955 a 1 Clav. 0:45

3. Variatio 2 1955 a 1 Clav. 0:37

4. Variatio 3 1955 a 1 Clav. Canone all'Unisono 0:54

1955연주는 고독 속에서 황홀경에 이르는 그의 의식은 "미친놈의 연주"라는 평을 듣는다. 삐딱한 성격이 아니더라도 그의 '레퀴엠'인 1981년 연주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위의 순서대로 연주되니 비교감상도 하고 굴드를 느껴보세요..

     

Glenn Gould 1981 Aria

Bach Goldberg Var BWV988 Glenn Gould 1981 001 Aria

     

   

 

Glenn Gould - 1955.06 - CBS Studio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미국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굴드는 이후 뉴욕을 데뷔타운 'Debutown'이라고 불렀다 한다). 데뷔 연주회를 가진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계약을 맺었고,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악명높은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따스한 뉴욕의 6월, 굴드는 베레모를 쓰고,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과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5개의 약병, 그리고 한 무더기의 타올을 챙겨 들었다. 게다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유명한 의자까지 글렌 굴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굴드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굴드는 이 의자에 앉아 그 특유의 연주자세를 만들어 냈다. 마치 건반 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건반을 향해 머리를 깊이 박고, 몸을 전후좌우할 것 없이 비틀어가며 움직이는 그의 연주 모습에 이 의자는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굴드는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반드시 더운 물에 손을 20분간 담그고 자신이 준비해온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의 연주를 녹음하던 음향 엔지니어는 아마 세 번 놀랐을 것이다. 한 번은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야 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에, 몸을 비틀며 연주를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놀라고, 그가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 입으로도 쉴 새없이 허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계속 몸을 앞으로 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고, 그 와중에도 입으로는 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계속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반을 녹음할 때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이건 연주자가 바로 건반 위에서 입으로 허밍을 하고 있으니 엔지니어로서는 최악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반을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굴드의 음반에는 크든 작든 이런 허밍들이 들어 있으므로.

음악이야 물론 실연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음악 감상법이겠지만 해외의 명 연주자들은 물론 이미 죽어 버린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남긴 음반을 듣는 것이다. 모든 음반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굴드의 연주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오디오에도 상당한 투자를 거듭하지 않으면 않된다. 질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는 그러나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글렌 굴드의 가까이에서 연주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의 음반을 듣다보면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굴드가 현대적 녹음 시스템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기계들을 놀랄 만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나벨이 베토벤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를 이용했듯이 굴드는 바흐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와 녹음을 매우 자유롭게 이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우리가 실제 듣게 되는 피아노 소리와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 데 여기에는 굴드 자신이 가벼운 터치를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굴드가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당시 기술로 가능한 음향적 가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Review 1

글렌 굴드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전설로 분류된 사람. 평생 결혼하지 않고 50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일생동안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4년(32세) "고통일 뿐인 속임수"라며 돌연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그후론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던 굴드. 나는 글렌 굴드의 연주와 그의 생애에 대해 알아 갈수록 어쩐지 글렌 굴드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씨 이야기>의 주인공. 좀머씨를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던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은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골드베르크에게 수면음악의 작곡을 부탁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연주 능력을 가진 골드베르크라 할지라도 불과 14살의 어린 골드베르크는 수면음악이라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먼저 곯아 떨어지기 일수였다. 골드베르크는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승 프리드만에게 상의했고, 프리드만은 바흐를 떠올려 백작에게 바흐를 추천한다. 카이저링크 백작은 바흐가 드레스덴 궁정악장으로 임명되도록 도와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바흐는 궁정음악가로 매우 바쁜 와중에도 작곡에 임했다.

작곡할 것이 너무나 많았던 바흐는 짧은 시간 안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했다. 악보를 받은 백작은 만족하며 골드베르크에게 매일밤 이 곡을 연주하도록 했지만 이 곡을 듣고 잠을 잘 잘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바흐는 사실 변주곡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 곡을 작곡하면서 변주곡 양식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바흐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1개의 주제와 30개의 변주곡을 작곡했다. 내 생각엔 백작이 조금만 성실한 감상자라면 그리 쉽게 잠을 청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곡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제의 다채로움이 경이로울 지경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성자이자 그 자신이 뛰어난 파이프오르간 연주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이 곡에 대해서 "고전 시대 이전의 대작 가운데 이만큼 현대의 피아노 스타일에 접근한 작품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노래에 대단히 만족한 백작은 이 곡에 대한 사례로 금잔에 금화를 가득 담아 사례를 했고, 이때 받은 사례비가 바흐의 1년치 월급을 웃도는 금액으로서 바흐가 평생 받았던 작곡료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오늘날엔 일반적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바흐가 붙였던 곡명은 <2단 건반이 딸린 클라비어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갖가지 변주>였다고 한다.

현재는 글렌 굴드를 비롯해 이 곡은 피아노로 연주되는 것이 일반적인 줄 알지만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하더라도 쳄발로, 하프시코드 연주가 좀더 일반적인 연주였다. 그 대표적인 연주자들이 바로 란도프스카였다. 그러던 것이 로잘린 투렉과 같은 여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로 연주했고, 이후 글렌 굴드에 이르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오늘날엔 도리어 쳄발로로 연주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가 되었으니 짧은 시간에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성공리에 마쳤고 다음 날 콜럼비아 레코드사의 마스터웍스 시리즈에 참여하게 되었다. 굴드는 메이저 음반사에서 출반하는 자신의 첫 레코딩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택하였고, 당시만 해도 지루하고 변화없는 곡으로 인식되어 피아니스트들의 일반적인 레퍼토리에 끼지 못하고 한켠에 밀쳐져 있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곡이 되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바흐를 탐닉해 오던 굴드는 자신의 내면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곡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23세의 굴드를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 위의 사진은 그의 두 번째 녹음(1981년 녹음)

 

피아니스트 아닌 피아니스트가 되기 까지의 글렌 굴드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한 글렌 굴드. 그의 아버지 러셀 허버트는 모피제조공이었고, 또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의 외가쪽 먼 친척 중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얼만큼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굴드의 집안이 그만큼 음악과 가까운 집안이란 것이다. 굴드의 회상에 의하면 그의 외할머니는 파데레브스키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 욱스브리지를 떠나 온타리오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글렌 굴드는 간신히 걸음마를 옮겨놓을 무렵인 3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렛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스승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천재 음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소위 '절대음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글렌 굴드는 5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굴드의 같은 반 급우였던 작가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9살 무렵 이웃에 살던 굴드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글렌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노력했기 때문에 외로웠다. 그는 음악에 대해 부드럽고도 열정적인 엄청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 그건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살 되던 해 굴드는 어머니 이외의 새로운 스승을 찾아야 했고, 칠레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를 만났다.

이후 게레로는 더 이상 굴드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고백하기 까지 9년 동안 굴드를 맡아 지도했다. 굴드는 자신의 스승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음악적 접근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으로 느끼는' 인간이었던 데 반해 나는 '머리로 이해하는' 소년이기를 원했다." 굴드의 나이 6살 때 그는 부모를 따라 요제프 호프만의 독주회에 가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한다. 굴드는 연주회 뒤 내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연주회 광경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음향' 만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만약 우리가 굴드에게 있어 고전적인 의미의 피아니스트보다는 일종의 '음향 연주자'로서의 음악가적 면모를 보게 된다면 그가 지닌 '절대음감'과 더불어 그가 음악을 먼저 '음향'으로 이해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굴드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4년 2월 15일 키와니스 페스티벌의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 직업 피아니스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합격한다. 그는 단순히 연주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지 1946년에는 음악 이론시험에서도 일등상을 받았다. 어린 굴드에게 유일한 우상이 있었다면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었다. 굴드는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할 만한 말을 했다. "슈나벨은 실제로 악기로서의 피아노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었는데, 이 목표는 베토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글렌 굴드는 그 목표를 아마 '바흐'로 삼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음향'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만들어 냈다.

 

경이로운 데뷔로부터 경악스런 콘서트 은퇴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라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미국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굴드는 이후 뉴욕을 데뷔타운 'Debutown'이라고 불렀다 한다). 데뷔 연주회를 가진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계약을 맺었고,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악명높은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짜집기 통조림 음악가인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자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굴드는 1964년 이래 더 이상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았다. 소위 '립싱크'란 것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대중음악 현장에서도 립싱크를 주로 하는 가수들에 대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글렌 굴드가 콘서트를 포기하고 음반 녹음에만 치중했다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당시 굴드는 콘서트 현장에서도 최고의 각광을 받는 피아티니스트였다. 1957년에 글렌 굴드는 냉전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소련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다. 그의 소련 연주회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의 연주에 대해 청중은 물론 비평가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럽순회 연주기간동안 <베토벤 3번 협주곡>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음반에 담긴 음악을 '통조림 음악'이라고 불렀던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다면 글렌 굴드를 좋게 평가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음반 녹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카라얀이 음반 녹음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연주로 승화시킨 굴드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0년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다. 굴드는 1960년의 TV 출연 이전에도 이미 캐나다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미 유명 인물이었고, 정기적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글렌 굴드는 전생애를 통해 확고한 평화주의자였고, 그런 때문인지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상황을 주제로 한 캐나다 영화 <전쟁>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964년 4월 10일 LA에서 마지막 연주회 이후 굴드는 콘서트 연주자로서 자신의 경력을 끝냈다. 파블로 카잘스도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엔 절대로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곧잘 콘서트 활동을 중단했지만 글렌 굴드는 이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굴드는 이후 전혀 연주회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처럼 글렌 굴드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굴드는 자신의 직업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공적인 생활을 모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여러 방면의 생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방송활동, 작곡, 지휘 등 그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해보고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때 이상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글렌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로 부르기 보다는 그를 일종의 '전위예술가'로 구분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읽고 매우 참신한 주장이며 상당히 옳은 지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렌 굴드는 연주라는 음악의 재현에 매달렸던 전통적 개념의 피아니스트,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피아노만을 고집한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생애 동안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한 기간은 넉넉히 잡아주어야 10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다(물론 그 10여년 동안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하긴 했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에는 분명 다른 연주자의 그것과는 다른, 단순히 '파격'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굴드는 녹음 기술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채택했고, 자신의 연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당시 다른 연주자들이 느끼는 거북한 기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마 기술적인 제약만 없었다면 글렌 굴드는 신서사이저나 컴퓨터를 도입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목적을 향해가는 도정에서 채용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가 한 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1981년 다시 녹음하게 된 것은 1955년과 1981년 사이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며 골드베르크변주곡과 바흐는 바로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와 바흐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일찌감치 콘서트를 포기한 탓인지 글렌 굴드의 음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음반들이 글렌 굴드라는 명성에 걸맞는 것들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편식(그는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 그는 거의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연명했다고 한다)과 기행으로 일관한 그 답게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들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그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고, 심지어 브람스의 경우에도 녹음 직전에야 겨우 연습하여 녹음에 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작곡가는 오로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고,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이 말은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명확한 설정이 없다는 점에서) 바흐 이전의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다.

굴드가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26년 전 자신이 처음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녹음한 것도 기술적 진보에 따른 그의 도전이자 동시에 세월을 거치며 다시 마음 속에 담게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2002년 월드컵 4강을 매우 감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륙, 그것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월드컵 4강에 올랐다는 것도 하나일 것이다. 클래식 음악계에도 이렇듯 비유럽인들의 진출은 매우 어렵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대부분이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들이기 때문에 일종의 정서적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음악의 특성상 동양적 정서 속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클래식음악을 감상한다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을 연주하고 새롭게 해석하며 게다가 청중에게 감동까지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단 동양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어서 레너드 번스타인과 같이 오늘날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들조차 유럽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땀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정경화, 정명훈 등과 같이 클래식음악의 변방이랄 수 있는 우리나라 출신 음악가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 '애국심'이란 한 꺼풀을 벗겨내더라도 그들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것은 북미 출신 음악가들에게도 비슷하게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글렌 굴드는 비교적 손쉽게 유럽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낸 사람이었지만, 그가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냈을 때만 하더라도 대중의 환호와 달리 일부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솔직히 내 경우엔 그의 연주가 오히려 정격 연주로까지 들릴 만큼 귀에 익어 버렸기 때문에 도리어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가 밍숭밍숭하니 재미없게 들릴 지경이라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연주는 남달랐다. 그의 연주가 어떤점에서 파격적인지 음악 용어들을 동원하여 설명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와 관련된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보겠다.

글렌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카네기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4번을 협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최종 리허설에 이를 때까지 이 곡의 템포 문제를 놓고 서로의 음악적 해석과 견해가 달라서 대립하고 있었다. 결국 번스타인이 굴드의 고집에 못이겨 엄청나게 느린 그의 템포에 뉴욕 필을 맞추기로 했다. 한 번이라도 번스타인의 지휘 모습을 보면 짐작이 되겠지만 지휘대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을 만큼 힘차고 다이나믹한 지휘와 템포를 가진 번스타인이 굴드의 느려터진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제4번을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대번에 어떤 상황일지 짐작이 될 것이다. 결국 연주가 끝나고 이런 상황을 알리 없는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지만 번스타인은 그 순간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이니,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번스타인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이 굴드는 자신의 템포대로 연주한 뒤 어리둥절해하는 청중들을 뒤로 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가 버렸다.

굴드는 유럽적 전통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의 음악을 시작했고, 자신만의 템포와 해석방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연주 활동을 시작했으므로 다른 연주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학습기간을 보냈고, 그 기간에도 유럽이 아니라 캐나다에서 음악 수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여긴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고,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했다.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글렌 굴드의 일화들

글렌 굴드에 대해서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려고 해도, 그가 남긴 기행들 모두를 이해하기엔 나의 머리가 너무나 단순하다. 앞서 그가 녹음이나 연주에 임하기 전 생수 두통과 알약병, 몸 전체를 칭칭 감아맬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몸을 전후좌우로 연신 흔들어가며 정신없이 허밍을 늘어놓는 연주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굴드는 절대로 에어콘이 켜진 식당을 가려 하지 않았고, 타인과의 접촉도 최대한 피했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전화를 통해야만 했는데 전화 통화 중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감기 옮아요."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노이로제 증세는 매우 심각해서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다. 그가 이스라엘 항공사만 이용했던 까닭은 이 항공사의 비행기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정비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나중엔 그나마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다른 사람과의 악수도 피하고, 손을 내밀어도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하며 거절했다.

그의 이런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피아노 제작회사인 스타인웨이를 향한 30만 달러 피해보상 소송이었다. 굴드의 피아노 터치는 매우 가벼운데 굴드 자신도 바흐 시대 악기의 특징을 염두에 둔 듯 작고 변화없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중시했다(피에르 앙타이의 <골드베르크 변주곡/OPUS111>을 들어보면 굴드가 얼마나 가벼운 터치를 위해 노력했는지 새삼 알게 된다. 피에르 앙타이의 쳄발로 연주는 고악기 특유의 매우 가벼운 터치들이 돋보이는 연주를 하고 있는데, 굴드는 피아노를 통해 이에 못지 않은 가벼운 터치를 보이고 있다). 굴드는 자신에게 맞는 피아노를 찾기 위해 매우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자신에게 꼭 맞는 피아노를 발견했다. 바로 <스타인웨이 CD318> 제작번호 174번이었다. 그러나 1958년 클리블랜드 연주회 직후 운송하던 트럭이 피아노를 떨어뜨리고 크게 손상을 입었다. 굴드가 크게 상심한 것은 불문가지였고, 어떻게든 이를 재생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174번은 살아나지 않았고, 굴드는 다른 <스타인웨이 CD318>을 사용해야 했다.

굴드는 만년에 잠시 야마하를 쓰기는 했지만 그가 즐겨쓰고 좋아한 피아노는 역시 <스타인웨이 CD318>이었다. 1960년 초 굴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아노의 건반을 좀 더 가볍게 하기 위해 스타인웨이사의 전속 조율사 윌리엄 후퍼를 불렀다. 후퍼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애용하는 호로비츠와 굴드를 위해 스타인웨이사측에서 특별히 채용하고 있는 조율사였다. 굴드의 집에 온 후퍼는 굴드와 이야기를 나누다 친근감의 표시로 그의 등을 가볍게 한번 툭 쳤다. 그러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절대 악수하지 않는다는 결벽증의 소유자. 소련에서 니콜라예바와 악수할 때도 장갑을 낀 채 였던 굴드에게 이것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는 즉시 왼팔과 등에 통증과 왼손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마비되었다고 주장하며 스타인웨이사에 30만달러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이 재판에서 누가 승소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사건이 굴드의 노이로제 증세를 더욱 악화시킨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굴드는 이전부터 '감기에 걸렸다' 혹은 '신장에 이상이 있다'는 등의 핑계댈 만한 것만 있으면, 아니 핑계될 것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예정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휴식하던 중 번스타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병의 이름들을 적어놓은 리스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특히 콘서트 매니저들에게 효과가 있을 병들을 앞으로도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의 일이다. 결국 이런 글렌 굴드의 꾀병과 노이로제 증세는 정작 그의 몸에 중한 병이 찾아왔을 때 의사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부메랑이 되어 변변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좀머씨의 죽음 - 과연 그는 호수를 향해 걸어갔는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토론토 순회공연중이던 레너드 번스타인이 어느날 굴드를 방문했다. 굴드는 자신의 아파트에 번스타인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곧 두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모피와 털로 안을 댄 외투, 목도리 속에 얼굴이 묻힐만큼 깊이 파묻힌 굴드는 창문을 모두 닫고 난방을 최고로 높였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 올린 라디오가 악을 쓰는 상황에서 번스타인은 굴드와 함께 서너 시간 동안 도시 주변을 배회해야 했다. 소음과 땀에 파묻힌 번스타인이 이런 일이 자주 있느냐고 했더니 굴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매일!"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한 얼마 후 글렌 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토론토의 아파트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불을 모두 켜둔 채 잠을 자던 그는 토론토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데뷔 레코딩곡>이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굴드는 두 번째 녹음 이듬해인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코를 박듯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연주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우리는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속 결말이 어찌 끝나는지 잘 알고 있다. 소설 속의 좀머씨는 호수를 향해 그냥 걸어 들어갔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 나는 그가 과연 자살을 위해 호수로 걸어 들어갔는지 그냥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오늘날 클래식 연주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스타성을 발휘하길 원하는 청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을 포함해서) 사실 고전 음악의 최전성기 때조차 연주자와 작곡가들이 받은 대접이 그렇게 훌륭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몸을 누일 만한 그럴 듯한 관짝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페라 작곡가들은 온갖 연애담과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로 대접받았던 시기는 고전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연주자들은 더 이상 예술가라기보다는 메이저 음반사에 묶인 상품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들은 마음의 심연을 두드리는 음악보다는 듣기 좋게 짜깁기된 콤필레이션 음반들을 더 선호하고, 불황으로 활로를 찾을 수 없는 음반사들은 음악성보다는 뛰어난 외모를 갖춘 연주자들을 통해 매출을 극대화하려 든다. 글렌 굴드가 이와 같은 이유들로 청중들을 싫어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에서,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글렌 굴드에 대해서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글렌 굴드의 음악을 들으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은밀한 상처들을 응시한다. 혼자 되었을 때 누구도 속일 수 없고, 속이려는 마음조차 없는 마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 가끔 오래된 상처들이 제멋대로 벌어져 가득 찬 고름들을 외부로 흘려 보낸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랑은 때로 모든 걸 알고, 이해하기 전에 덮어주고 모른 척 하길 바라는 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논리 위에 성립하는 계약이 아니므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 먼저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런 쓸데없는 사설들에 대해 글렌 굴드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굴드'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된 사람이다. 이 병은 그의 연주를 들어야만 치유될 수 있는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다. 글쎄, 과연 굴드가 고독한 사람이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글렌 굴드의 연주에 대해서 '미친 놈의 연주'라고 했던 어느 평론가의 지적은 그 악의적인 뜻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확한 평가로 보인다. 그는 음악이 펼쳐놓은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시험한 이카루스였지만 도시의 익명으로부터는 치명적인 해독을 입는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 글렌 굴드에 대한 나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불행히도 글렌 굴드에 대해 어떤 글을 쓰기에 나는 아직도 너무나 젊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껏 50년을 살았던 피아니스트에 대한 글을 쓰는데 이렇듯 허덕이는 기분이 드는 까닭, 왜일까? 그에 대한 정답을 찾는 것은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언젠가 해답을 찾으신 분은 내게도 알려주시길…

Review 2

굴드의 음악

굴드는 토론토 왕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별도의 음악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굴드의 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음악의 중심지'가 그의 성장환경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굴드는 빈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음악을 배우지 않았으며 19세기의 흐름을 이어받은 대가들에게 사사받은 일도 없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템포의 설정도, 프레이징 도, 장식음의 처리도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여기에 기괴한 그의 성격까지 더해져서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굴드의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 못지 않은 중요한 특징으로 음악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활동한 음악가와는 달리 미국 대륙에서 활동한 덕분에 비교적 풍부한 영상자료가 남겨져있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기괴한 표정과 허밍, 고무로 만든 놀라운 의자, 호로비츠 못지 않게 '불량한' 연주자세 등을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특이점은 그의 음악에의 몰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취하는 제스츄어를 모두 쇼맨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굴드의 연주자세는 청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집중력이라는 의미에서 굴드는 바흐 전문가인 칼 리히터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독일적인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굴드는 바흐의 음악에 잠재하는 본질을 확실히 이끌어 내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자유롭게 바흐를 연주했다. 그는 현대 피아노를 사용하였고, 주법도 바흐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굴드가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바흐의 연주에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잃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보를 있는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내는 행위의 무미건조함을 굴드는 의표를 찌르는 연주를 통해 새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바흐가 그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도취되었음에 분명한, 약동하는 생명력을 굴드는 극히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와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영롱한 트릴, 때때로 어이없이 빠르거나 혹은 느린 템포, 지나칠 정도의 논-레가토 주법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결코 큰 음량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와 협연한 지휘자들은 굴드의 음량이 비교적 작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흐 시대 악기의 작고 변화가 없는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굴드는 오래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수리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피아노는 매우 가벼운 건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종종 굴드의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스피드는 아마도 이 피아노의 특성인 듯 하다. 굴드가 만드는 소리는 과격한 해석과는 반대로 매우 섬세한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내기를 원했던 음색의 미묘한 차이, 주법의 극적인 변화는 연주회장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레코드만을 통해 - 눈의 미세한 결정을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듯이 - 그는 자신의 말을 다할 수 있었다.

결국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굴드의 음색은 매우 예쁘다. 호로비츠의 스카를랏티 소나타를 들어봐도 이와 유사한 예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소니의 SBM기술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훨씬 이전에 발매된 CBS의 오리지널 음반을 들어 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굴드의 깔끔하고 예쁜 음색은 여전하다. 아마도 굴드는 녹음과정에서 피아노 소리의 의도적인 수정을 가했던 것 같다. 이것은 현대 피아노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기술적인 (음악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굴드의 '창의력'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음향과 트랙의 합성에 몰두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단순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은 굴드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서 평생을 거기에서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굴드는 아무 거리낌없이 새로운 음악의 창조에 골몰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굴드의 바흐가 기적적으로 훌륭한 연주들임에 비해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 등의 연주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바흐의 연주에서는 충분히 허용되고 새로움을 줄 수 있었던 자유로운 발상들이 그 이후의 음악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 당시와 현재의 악기 자체의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은 분명히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따라서 표현의 폭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굴드의 '전위'는 바흐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23번 소나타를 들어보면 바흐 때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해석은 분명히 참신한 것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1악장의 듣는 이를 초초하게 만들만큼 느린 템포에서 기존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바흐 때와 같은 음향상의 매력은 아무래도 훨씬 뒤쳐져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들에서는 어느 정도 참신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지만 베토벤 이후에는 해석상의 참신함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굴드가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연주한 음반을 들어보면 그다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작곡 당시의 악기를 사용하는데 굳이 기괴한 해석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 것일까?

굴드는 본질적으로 청중을 싫어했다.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러한 적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연주회장을 기피하였으며 청중의 비판적인 의견이 자신의 창조적인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 굴드의 이런 생각은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음악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나마 이래저래 평가하고 때로는 공격까지 하는 필자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리는 점이다.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음악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일 뿐, 연주자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굴드가 기계적인 편집과 조작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에 일말의 사심이 없었다는 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선구자'로서의 굴드에 대한 평가를 다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999.10.06

 

Glenn Gould - 엄청난 신선함과 강한 개성

20세기의 모든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강한 개성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는 아무래도 글렌 굴드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주 외적인 면에서도 많은 기행을 보여주었고; 연주 자체에 있어서도 다른 연주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표현을 자유롭게 보여준 피아니스트가 바로 그였다.

연주 외적인 면에서 보여 준 그의 천재성과 기행은 일단 접어 두더라도 그의 연주에서 보여주는 파격만이로도 볼 때에도 그의 강한 개성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굴드의 데뷔 음반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처음 출반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하나같이 "미친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모든 해석과 연주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극히 개성적인 아티큘레이션과 미친 듯이 질주하는 듯한 템포로 곡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굴드의 연주는 이제까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음악이기 때문이다.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단순히 빠른 템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남긴 모든 음반에서는 다른 연주자들이 악보를 쫓아 레가토로 연주하는 부분을 스타카토로 연주한다던가 코드를 분산 화음으로 처리하는 일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 템포의 설정에 있어서도 최단 시간의 기록을 깨 버리려는 듯이 광기 어린 속도로 곡을 휘몰아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오히려 다른 연주자들은 상상도 못할 템포로 느리게 연주하기도 한다. 굴드가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니와 카네기 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 4번을 협연할 때의 일이다. 리허설을 할 때부터 번스타인과 굴드는 템포에 대해 서로 대립했었는데 결국 굴드의 고집으로 번스타인이 엄청나게(?) 느린 굴드의 템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건은 연주가 끝난 뒤에 벌어졌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번스타인은 청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방금 연주한 곡의 템포는 제가 원하는 템포가 아니라 굴드가 고집한 템포이니, 템포가 너무 느리다고 느끼셨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번스타인이 이런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템포로 연주를 끝낸 굴드는 이에 상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표현으로 연주하는 것 뿐임을 분명히 밝히려는 듯이, 아무런 변명 없이 고독한 모습으로, 굴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 주는 기행이 아니다. 그를 단순히 남이 하지 않는 기행만을 추구하는 괴팍한 연주자라고 한 마디로 매도하기보다는 자신이 느끼고 바라는 바대로 작품을 해석하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재 해석해야만 할 것이다. 어떤 곡이건 그 해석과 연주 방법은 한 가지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제까지 연주되어 온 스타일을 누구나 답습해야 한다는 철칙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굴드의 경우에는 이러한 연주자의 창의성이 극단까지 닿아 있기는 하지만, 현대의 음악계와 같이 천편일률적인 콩쿠르 입상용 획일적인 연주만이 난무하는 이러한 시점에 있어서 굴드와 같이 개성적인 모습의 연주자를 음반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더 없이 귀중할 뿐이다.

굴드의 연주는 '엑센트릭'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명확함, 믿을수 없을 정도로 가볍고 신선한 터치와 스타카토를 바탕으로 듣는 이의 의표를 찌르면서 곡 자체에 전혀 새로운 신선함을 부여하는 그의 연주는,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못했고 이후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모방할 수 없는 참신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전의 모든 연주 전통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로 자신만의 개성을 망설임 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음색 자체도 피아노포르테와 같은 독특한 음색을 지향하면서 극단적인 템포와 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아티큘레이션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굴드의 연주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원곡의 왜곡이라는 지적 등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가 드러내 주는 엄청난 신선함과 강한 개성,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연주에서 드러나는 흡인력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연주자 들이 모두 하나의 길을 향해서 있는 동안, 굴드는 연주자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그리고 음악 자체의 본질에 대해 그 누구도 제기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수행한 극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굴드의 천재성은 어린 나이에도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한다. 굴드의 스승인 구에레로는 이 시기 자신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새로운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워낙 개성이 강하고 천재적인 아이라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당황할 때가 많다네." 굴드가 국외에 알려진 것은 1955년 미국의 워싱턴 D.C와 뉴욕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한 이후였다. 그는 이 한 곡의 연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는 전격적으로 그와 전속 계약을 맺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시작으로 많은 곡목을 녹음하게 된다. 그의 데뷔 음반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은 1955년 6월에 일주일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가 보여 준 기벽은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초여름 날씨인 6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굴드는 코트를 입고 머플러와 베레모, 그리고 장갑까지 착용한 채 스튜디오로 나타났다. 그리고 뉴욕의 물이 마실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에서 캐나다에서부터 들고 온 두병의 물병과 다섯 병에 이르는 약병까지 가지고 있었다. 녹음을 시작하기 전에 굴드는 근육을 풀기 위해서라며 따뜻한 물에 손을 20여분이나 손을 담갔다. 피아노 의자도 캐나다에서 직접 가지고 왔는데, 그 의자 또한 걸작이었다. 굴드의 큰 키에 어울리는 나지막한 의자로 네 개의 다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달려 있었고 두 손을 자유롭게 교차시킬 수 있게 한 부분을 고정시켜 놓은 의자였다. 하지만 더욱 가관인 것은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황홀한 표정에 눈을 지긋이 감고 있다가도 갑자기 흥분되어 온통 얼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기도 하고, 몸을 계속 흔들어 대면서 끙끙거리는 소리로 계속 곡을 흥얼거리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연주 모습을 보여 주었고, 데뷔 앨범 녹음에서의 그의 이러한 연주 모습은 스틸 사진으로 발표되어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곡을 흥얼거리는 소리는 이후 녹음 기사들의 골칫거리가 됨과 동시에 그의 음반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굴드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하게 되었다. 심지어 굴드의 끙끙거리는 콧소리와 삐걱대는 의자 소리는 오디오 기기와 녹음 상태를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까지 활용되기도 하였다. 확실히 새롭게 리마스터링하여 CD로 제작한 음반들에서는 이전의 LP들보다 이런 소리들이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이후 그는 1956-7년 시즌에 미국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다니며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이어서 1957년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독주회를 개최함으로써 2차 대전 후 최초로 소련 땅을 밟은 캐나다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연주에 대한 소련에서의 평가는 이후 거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젊은 소련 피아니스트들은 가능한 모든 경로로 그의 음반을 구하는데 혈안이 되었고 바흐 연주에 있어서 그를 모방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소련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비엔나 음악제에 참가하여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하여 유럽에서도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는 이후 1960년까지 소련을 포함한 전 유럽에서도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계속해서 곡을 입으로 흥얼거리며 한 손만으로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계속 지휘를 하는 듯이 손을 흔들고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 하는 그 특유의 기벽이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연주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개성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며 부조니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압도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연주회 생활을 청산하고 녹음 작업만을 수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나이 32세 되던 해인 1964년부터이다. 1964년 3월 시카고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그는 캐나다에서 은거하면서 많은 곡을 녹음하면서 라디오와 텔레비젼에도 출연하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음악에 관한 글을 썼으나, 공식적인 연주회 무대에는 1982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복귀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을 극히 사적인 예술로 생각했었다. 즉 기술의 발전... 곧, 음반으로 인해 연주가들은 작품을 최상의 상태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대비할 시간과 자유를 줄 수 있고, 연주회에서 비롯되는 불확실한 여러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연주가 마치 단거리 경주라도 하듯이 질주하고 있을 때 조차도 그는 청중과의 교감으로 말미암은 흥분 상태를 겨냥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음악을 표현하고 있는 고독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쉽게 발견 할수 있다. 그리고 해적판 음반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그의 실황 녹음과 비교해 볼 때 실황연주에서는 굴드만의 개성적인 모습이 상당히 엷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수 있고, 이러한 여러 점들을 고려해 볼 때 녹음 작업만을 외롭게 수행해 나간 그의 판단을 옳았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다.

1982년 그의 나이 50세 때 그는 뇌일혈로 사망할 때 그는 뇌일혈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양의 음반을 녹음하였는데, 그의 마지막 레코딩은 데뷔 때와 같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살아 있었을 때 유일하게 같은 곡이 재 녹음되어 출반된 경우인데, 데뷔시의 충격적인 반응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이 음반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첫번째 음반에서는 엄청난 빠르기와 비할데 없는 리듬감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심어 주었다면, 두번째 음반에서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을 내적인 성숙성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그리고 굴드 음반 목록의 처음과 시작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역시 처음과 끝이 동일한 아리아가 위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30개의 변주곡이 연주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하여, 굴드의 생애가 이 곡의 구조와 완벽한 유사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굴드와 이 곡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레코딩 작업만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굴드인지라 그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 하다. 단, 그가 거부한 작곡가들도 있었는데, 쇼팽과 슈베르트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굴드가 피력한 작곡가론 무척 독특하다. 물론 그가 가장 중요시 하고 많은 음반을 남긴 작곡가는 바흐였다. 하지만 그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바흐 이전 영국의 작곡가인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는데, 이는 이들 작곡가들의 곡의 연주에서 바흐의 곡과는 달리 자유로운 익명성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바흐 외에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음반도 상당수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특히 그는 베토벤의 경우 초기 작품고 말년의 소나타를 즐겨 연주하고 높이 평가하기는 하였지만 그 나머지 작품 중 상당수의 곡에 대해서는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긴듯하다. 베토벤 이후 19세기 초반의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한 그의 혹평은 극에 달랐는데, 그는 그 시기의 곡(쇼팽,슈만,리스트 등)에 대해 "의미 없는 극적인 제스처와 과시벽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 현대 음악에 대한 굴드의 열정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그 자신이 현대적 어법을 사용한 다수의 현대곡을 작곡한바 있는데에서도 들어나듯이, 현대 음악에 대한 굴드의 이해는 정확하고 작품에 대한 공감에 가득찬 것이었다. 또한 굴드 이전에 거의 사장되어 있었던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들-리하트르 슈트라우스, 시벨리우스, 그리그 등-의 피아노 작품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위대하다. 물론 이들 낭만주의 작곡가의 곡과 현대 음악에 있어서도 굴드는 작품의 충실한 재현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바흐적인 맥락에서 지극히 개성적이고 독특한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출처

goclassic.co.kr

glenngould.com

windshoes.hihome.com

home.megapass.co.kr/%7Ekjb11187

http://gias.snu.ac.kr/pschoi/gould.htm

http://www.powerjh.com/music/glenngou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