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nzertstuck No.1 in F minor, Op.113 | |
멘델스존 연주회용 소품 Op.113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1874 1.Allegro di molto-2.Andante-3.Allegro molt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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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ine Meyer, clarinet - Wolfgang Meyer, basset horn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 - Kenneth Sillito, cond | |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 탁월한 피아노 비르투오소, 지휘자, 작곡가 및 교육가로서 이름을 날린 독일 낭만주의 시대에 서정적 성격의 소품을 정립한 작곡가. 멘델스존은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은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가였으며, 그의 부친 아브라함(1776-1835)은 1811년에 베를린에 정착하여 은행을 설립하였다. 그는 모든 식구들과 함께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멘델스존은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정신적·문화적 집안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멘델스존은 부친의 자유로우면서도 철저한 교육에 힘입어 '제2의 모차르트'로 불려질 만큼 아주 어려서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멘델스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처음 피아노 수업을 받았고, 개인교사를 통해 여러 종류의 외국어, 미술(도안), 바이올린, 피아노,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음악이외에도 문학과 회화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특히 그의 문학적 소양은 10세 때 '젊은 시저와 오비드'(Der junge Caesar und Ovid)를 읽고, 11세 때는 호라츠의 '시학'(Ars Poetica)을 번역한 실력에서도 알 수 있다. 또 그의 글 솜씨는 편지의 문장력을 통해서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클레멘티의 제자였던 베르거(L. Berger)에게서 피아노를, 베를린 궁정악장이었던 헤니히(C. W. Hennig)로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작곡 및 음악이론 스승은 첼터(C. F. Zelter: 1752-1832)였다. 바흐 음악의 신봉자였던 첼터는 바흐의 제자였던 키른베르거(J. Ph. Kirnberger: 1721-1783)방식의 대위기법을 멘델스존에게 전수하였고, 그 밖의 전통적인 음악을 가르쳤다(1819년부터 1821년까지 사용한 멘델스존의 연습노트에는 첼터의 교정과 엄격한 충고가 기록되어 있다). 멘델스존은 첼터의 지도와 집안분위기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바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이모할머니, 사라 레비(Sarah Levi)가 바흐의 큰아들 프리데만 바흐를 사사했으며, 어린 멘델스존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그의 어머니 레아 잘로몬(Lea Salomon: 1776-1842) 역시 바흐의 제자였던 키른베르거에게서 음악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 분위기와 교육은 멘델스존으로 하여금 교향곡, 협주곡, 오라토리오, 현악사중주와 그 외의 실내악 작품과 같은 전통적인 장르의 작곡가로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바로크 음악의 영향은 특히 그의 오라토리오, 실내악 및 오르간 음악에서 잘 드러난다.
16살 되던 해에 멘델스존은 유명한 현악팔중주곡(Op. 20)을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세익스피어의 희곡에 자극을 받아 '한여름밤의 꿈(Ein Sommernachtstraum)'이라는 제목의 연주회용 서곡을 만들게 된다. 멘델스존은 그의 부모의 희망에 따라 1827년에 베를린 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안드로스의 소녀'라는 제목의 희곡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 입학자격으로 인정되었다. 대학에서 그는 헤겔의 미학강의, 지리, 역사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며, 괴테, 장파울, 세익스피어의 문학작품을 탐독하였다. 그의 몇몇 강의노트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멘델스존은 베를린에서 1829년에 바흐의 '마태우스 수난곡'을 지휘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임으로써 19세기에 일어나는 이른바 "바흐-르네상스"에 불을 붙이게 되는데, 이것 역시 멘델스존이 성장과정에서부터 가졌던 바흐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멘델스존은 마태우스 수난곡의 자필본을 그의 이모할머니로부터 선물을 받아서 공연을 결심하였다. 하지만 공연이 성사되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유태인인 그가 바흐의 정신을 제대로 표할 수 있겠는가?"라는 악의에 찬 비난이 있었고, 바흐의 신봉자였던 그의 스승, 첼터나 내겔리조차 이 작품이 청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공연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승의 승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첼터는 1820년이래 '베를린 징아카데미'(Berliner Singakademie)를 이끌고 있었고, 이 합창단의 참여가 공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은 그의 친구이자 저명한 음악이론가인 막스(Adolf Bernhard Marx)와 당시 최정상급 소프라노 였던 데브리안(E. Devriant)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결국 그의 스승을 설득하게 된다. 3월 11일에 개최된 이 공연은 "유럽의 문화지진"이라고 온 유럽이 야단법석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공연의 성공은 멘델스존의 아버지로 하여금 음악이 그의 아들의 참된 직업이라는 확신을 안겨주게 된다.
멘델스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음악의 여러 주요 도시를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1829년 4월에 우선 런던을 방문하게 된다. 런던에서의 멘델스존은 우선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고 극적인 성공을 거둔다. 특히 베버를 존경했던 그는 베버의 바단조 피아노 협주곡, '콘체르트슈틱'(Op. 79)을 음악사상 최초로 암보로 연주하여 런던 청중을 경악에 빠트렸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다(멘델스존은 이후 런던을 9차례 더 방문하며 음악가로서의 최고의 존경과 영예를 누리게 된다). 음악회 시즌이 끝난 8월에 멘델스존은 친구 클링에만과 함께 스코트랜드의 헤브리디스 군도의 스타파 섬을 방문하여 '핑갈의 동굴'을 구경하게 된다. 이때의 인상으로 작곡된 것이 연주회용 서곡, '핑갈의 동굴'(1830)이다. 이 곡은 태양이 작렬하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광경을 미술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행해진 스코트랜드여행에서 비롯된 인상에서 영감을 얻어 제3번 교향곡, '스코트랜드'(1842)가 작곡되었으며, 그 이전의 이태리 여행은 제4번 교향곡 '이탈리아'(1833)의 작곡을 자극하였다. 멘델스존은 1829년 말에 베를린 음대에서 교수직의 제안을 받지만, 당시 베를린 '음악일반신문'의 편집장이던 친구, 베른하르트 막스를 위해 양보한다. 그는 이태리, 스위스, 불란서, 영국, 스코트랜드 등을 여행하고 1833년에 뒤셀도르프 음악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라인 강변의 여러 도시(쾰른, 뒤셀도르프, 아헨 등)에서 개최되는 음악페스티발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된다. 뒤셀도르프 시절에는 특히 헨델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연하여 독일에서의 "헨델-르네상스"를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1835년에는 당시 독일의 음악 중심지였던 라이프찌히의 '게반트하우스콘체르트'의 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842년에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 받은 그는 그 이듬해에 '라이프찌히 콘서바토리'를 창설하여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탁월한 작품 중에서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곡은 오라토리오, '파울루스(Paulus)'이다. 이 곡은 헨델의 오라토리오와 바흐의 수난곡을 합친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엘리아스' 역시 그 가치에 있어서 파울루스에 필적하며 그 외의 오라토리오 작품으로는 '크리스투스'가 있다. 멘델스존은 유태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도로서 성장하였으며 그의 작품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즉,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여 작곡한 그의 제5번 교향곡(일명 "종교개혁")에는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 그리고 루터가 가장 좋아하던 작품이던 '드레스덴 아멘'의 악절이 인용되어 있고, 건반악기용 작품에는 때때로 개신교 코랄작품의 기법에서 차용한 것들이 보여지기도 한다. 빅토리아 시기의 영국에서 멘델스존은 거의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위치는 과거 헨델이나 베토벤만이 누리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멘델스존을 만나면 환호하였으며, 그는 사교계에서도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 역시 그에 대한 호의는 극진한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여왕에게 '스코트랜드 교향곡'을 헌정하였다. 여왕의 남편, 앨버트(Albert)공은 아마추어 작곡가였는데, 이들 부부는 멘델스존이 개최하는 사교모임에 기꺼이 참석하여 음악을 즐기곤 하였다. 멘델스존은 '무언가(無言歌, Lieder ohne Worte)'를 연주하였고, 그의 오라토리오에서 발췌된 곡들이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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