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베트남' 세계로!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진혼곡, 각국 비정부기구와 유엔 등에 전달된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자. 전장터의 한가운데서 떨고 있는 젊은 병사. 그의 군모엔 붉은 원의 히노마루(일본 국기)가 새겨져 있다. 병사는 위안소를 드나들며 조선에서 끌려와 성노예가 된 위안부에게 ‘인간적인’ 사랑을 느낀다.
화력으로 무장한 그의 부대는 적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지만 죽창을 든 초라한 독립군 몇명이 결국 그를 포함한 부대원 전원을 ‘잔인하게’ 몰살시킨다.
만약 일본의 인기가수가 이런 내용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면? 아마 한국의 신문들은 이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을 대서특필하고 젊은 해커들은 사이버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시나요>의 몰역사성과 결례를 넘어
(◀ 사진/올해 최고의 음반판매를 기록한 조성모의 <아시나요>.그러나 베트남전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상상만으로도 경악스럽다고 호들갑떨 일이 아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계에서는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노래말과는 무관하게 베트남전을 위와 비슷한 내용으로 엮은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비디오는 최근 한 음악채널이 선정한 ‘올해의 뮤직비디오’로 선정됐다. 이곡이 수록된 조성모의 3집 앨범은 200만장 이상 팔려나가며 올해 최고의 음반판매를 기록했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아시나요> 뮤직비디오의 화려한 스펙터클과 병사로 분한 조성모의 처연한 표정에 감탄하며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번 베트남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는 셈인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음반 <미안해요 베트남>은 베트남전의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이자 <아시나요>가 범한 ‘무심한 결례’에 대해 베트남의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사과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음반은 지난 7월 서울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열렸던 베트남전쟁 희생자를 위한 진혼공연 ‘사이공, 그날의 노래’에 참가했던 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베트남 국영방송사로부터 지난 공연의 기록을 특집방영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같이한 음악인들이 모였습니다.” 음반기획자인 박치음 교수(순천대)와 원일, 노영심, 어어부 프로젝트, 이지상, 타악그룹 공명이 지난 10월부터 녹음작업에 들어간 이 음반의 5곡 수록곡들은 모두 순수창작곡들이다. <미안해요 베트남>(박치음, 김영남, 아름나라 어린이합창단), <으깨진 감자>(어어부 프로젝트), <베트남에서 온 편지>(이지상) 등 공연에서 소개됐던 곡들은 재작업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가다듬어졌고 <눈물꽃>(원일), <모퉁이에서>(노영심)등은 새롭게 작곡되었으며,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공명의 서정적인 연주도 추가되었다.
음반의 제작과정은 그리 순탄히 않았다. 무엇보다 돈문제가 일정 진행을 가로막았다. 최소한 2천만원 이상 들어가는 음반 제작에 모인 돈은 베트남전쟁진실위원회에서 내놓은 300만원과 주위에서 받은 후원금 200만원. 참여음악인들의 무제한대 노고와 녹음스튜디오의 넓은 아량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원래 지난 1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에 맞춰 두 나라의 수반에 나란히 전달하려고 했던 이 음반은 예정보다 출반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 나가게 된다. 의미는 다르지만 서태지나 H.O.T도 못했던 전세계 진출을 하게 되는 최초의 한국음반이 되는 것이다. 비상업적 유통을 전제로 제작되는 2천장 한정판 가운데 1천장이 미국의 백악관을 비롯한 전세계 정부와 비정부 기구, UN, 그리고 평화운동 단체에 전달된다.
베트남 현지공연도 기획중
(▶ 사진/음반작업을 하는 박치음교수.한장의 음반을 통해 전쟁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운동의 국제적 연대의 끈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 음반은 전세계에 20세기의 최악의 침략전쟁 가운데 하나인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는 의미뿐 아니라 지향점을 잃고 헤매는 평화운동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의 진실을 호소하는 한장의 음반을 통해 전쟁이라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전쟁희생자에 대한 미국과 한국 등 가해국가의 사과운동을 위한 연대의 끈을 만들겠다는 것이 박치음 교수를 비롯한 참가음악인들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야무진 꿈이다.
국내에서 출시되는 1천장의 음반도 기존의 상업적 유통경로를 배제하고 인터넷이나 NGO, 대학가 서점 등 ‘원하는 이’들이 스스로 찾아가서 구할 수 있도록 해, 좀더 건강한 유통구조를 실현하겠다는 계획이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선데이 서울>을 읽으며 즐거워할 때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던 1천명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주축이 됐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역시 조성모의 노래만큼 대중적인 사랑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21세기 평화운동에 있어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의미로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작에 참여한 음악인들은 음반 출시를 기념해 베트남 현지에서 공연도 기획하고 있다. ‘전쟁을 넘어 평화로’라는 타이틀로 열리게 되는 이 공연은 지난해 전 재산을 베트남진실위원회에 기탁한 문명금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베트남에서 ‘평화역사관’의 기공식이 열리는 날 베트남의 음악인들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음반구입 및 후원문의:베트남전 진실위원회 02-3675-5810).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2000년12월20일 제339호 한겨레 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