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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처형된 나자렛 예수의 놀라운 삶과 역설을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상황을 전복시키고 복종시키는 기억이다. 전복시키고 복종시킨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수 차례 예수를 묘사했던 말의 현대적 표현아라 할 수 있다. 즉, 집 짓는 자들이 버렸던 돌이 건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성서의 표현과 같은 표현이다: 시편 117장의 말씀들은 공관복음(예를 들면 마르꼬 12.10)과 사도행전(4.11) 그리고 베드로 1서 2,4. 2,20에서도 그런 표현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시편 109장과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의 노래들은 구약성서에서 예수에게 가장 어울리는 부분이다.
이 역설적인 표현은 예수의 삶을 그릴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에 관한 논쟁"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공식적인" 대표자들과의 계속된 논쟁에서 결국 예수는 비난을 받고 신성모독죄로 판결을 받았으며, 후에야 "말씀" 이시고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로 선포되었던 것이다.
신성 모독죄라는 비난의 내용은 하느님을 종교계와 정치계 권력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 권력들에 의해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하느님임을 선포하고 행위로 입증했으며 그 현존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익명의 사람은, 박사도 아니요, 사무실도 열지 않았고 저술도 하지 않았던 이 살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적 혁명을 성취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권력이나 성전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 사제직이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 어떤 아름다운 말들을 통해서도 아니라는 것, 다만 역사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것이라는 사힐을 확고하게 정립하였다. 소외된 이들을 통한 혁명은 아마도 우리들이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그곳에 있었고", 우리들에게도 가능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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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사람 되어 2003년 2월호 머릿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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