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몬테베르디: 달콤한 탄식 Sì Dolce È L'tormento │ 클래식 성악

리차드 강 2018. 5. 10. 04:56



Sì dolce è'l tormento, SV 332 · Christina Pluhar · Philippe Jaroussky

Sì dolce è'l tormento, SV 332

몬테베르디의 달콤한 탄식

Claudio Monteverdi (1567-1643)

Si Dolce È L'tormento

L'Arpeggiata, Christina Pluhar · Philippe Jaroussky

 
 

Si dolce è’l tormento
Ch’in seno mi sta,
Ch’io vivo contento
Per cruda beltà.
Nel ciel di bellezza
S’accreschi fierezza
Et manchi pietà:
Che sempre qual scoglio
All’onda d’orgoglio
Mia fede sarà.

La speme fallace
Rivolgam’ il piè.
Diletto ne pace
Non scendano a me.
E l’empia ch’adoro
Mi nieghi ristoro
Di buona mercè:
Tra doglia infinita,
Tra speme tradita
Vivrà la mia fè

Se fiamma d’amore
Già mai non sentì
Quel riggido core
Ch’il cor mi rapì,
Se nega pietate La cruda beltate
Che l’alma invaghì:
Ben fia che dolente,
Pentita e languente
Sospirimi un dì.

 

So sweet is the torment
in my breast
that happily do I live
for cruel beauty.
In the heaven of beauty
let cruelty grow
and mercy be lacking:
for my faith will always
be as a rock,
in the face of pride.

Let deceitful hope
turn away from me,
let neither joy nor peace
descend on me.
And let the wicked girl whom I adore
deny me the solace
of sweet mercy:
amid infinite pain,
amid hope betrayed,
my faith will survive.

The hard heart
that stole mine away
has never felt love’s flame.
The cruel beauty
that charmed my soul
withholds mercy,
so let it suffer,
repentant and languishing, and
let it sigh one day for me.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verdi: 1567-1643)는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억되어야 할 존재이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라고 하는 음악 장르의 문을 비로소 활짝 연 사람이다. 그는 근대 오페라의 시조이다. 일각에서는 야코포 페리(Jacopo Peri)라는 사람이 몬테베르디보다 먼저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다는 주장이 있다. 1597년에 다프네(Dafne)라는 오페라를 공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프네는 불행하게도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어떤 오페라인지 알수 없다. 그저 다프네라는 오페라를 공연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607년, 몬테베르디의 Orfeo(오르페오)가 첫선을 보였다. 오늘날까지 악보가 남아 있어서 간혹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페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를 최초의 오페라라고 인정하며 '오르페오'가 공연된 1607년을 근대 오페라의 스타팅 포인트로 삼고 있다. 한편, 야코포 페리는 메디치가를 위해 '유리디체'(Euridice)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1600년에 공연했다고 한다. 이 역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보다 7년 앞서서의 일이다. 페리의 '유리디체'는 악보가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페리의 '유리디체'가 근대 오페라라고 보기에는 ‘아니올시다!’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연극에 몇가지 노래를 첨가했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와 이름이 비슷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를 근대 오페라의 시조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떠나서 살수 없었던 그 시대의 모든 음악가들이 그러했듯이 몬테베르디 역시 교회음악으로부터 경력을 쌓았다. 깡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기기 했지만 신앙심만은 훌륭하여 이미 20세 초반에 교회용 모테트와 마드리갈 작품집을 여러권 내놓았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몬테베르디는 훌륭한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현악기 연주자이기도 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했다. 24세인 몬테베르디가 만투아의 빈센조 곤자가(Vincenzo Gonzaga)공작 궁정에서 현악기 연주자로서 연주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한 그가 오페라에 눈을 돌린 것은 불혹의 40대에 들어서서 부터였다. 1607년 첫 오페라인 저 유명한 오르페오를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아리안나(L'Arianna)를 내놓았다. 오페라를 연극의 부속물이 아니라 음악의 새로운 장르로서 가능성을 제시해준 작품들이었다. 그러므로 1607년은 근대 오페라의 연혁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이정표를 세워준 해였다.

몬테베르디는 만투아에서의 생활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곤자가(Gonzaga)공작 가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겨우 만투아를 떠날 수 있었다. 베니스로 온 그는 1613년 성마르꼬 성당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당시로서 성마르꼬 성당의 음악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출세였고 영광이었다. 그는 베니스에서 마드리갈을 비롯한 성가 작곡에 전념하였다.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 활동은 그로부터 무려 20여년이 지난 1637년, 베니스에 대중을 위한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연 후부터였다. 몬테베르디는 극장을 위한 오페라, 무대를 위한 오페라를 처음 시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오페라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오페라 악보를 교황청에 퀵 서비스로 배달하는 중에 악보 가방이 분실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황청은 몬테베르디에게 교황청 알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에 그런 분실사고가 생겼다는 이유로 경고를 주었다. 당시로서 교황청에게 잘 못 보이면 사회, 종교, 예술 등 모든 활동에 지장을 받았다. 그래서 여러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L'incoronazione di Poppea(포페아의 대관식)는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인정받는 오페라이다. 몬테베르디는 76세를 일기로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Conductor   Christina Pluhar


Ensemble   L'Arpeggi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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