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 즐거운 ..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세계의 명화

리차드 강 2009. 6. 8. 22:23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다비드 나폴레옹 대관식
---------------
SACRE DE L’EMPEREUR NAPOLEON 1er ET COURONNEMENT DE L’IMPERATRICE JOSEPHINE DANS LA CATHEDRALE NOTRE-DAME DE PARIS, LE 2 DECEMBRE 1804

시대 : 1806~07년 크기 : 621.0 * 979.0(㎝)
소장 : 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소재 : 캔버스 유채

     

Piano Concerto No.5 in E flat Major Op.73 Emperor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 마장조 Op73 황제

Maurizio Pollini & Karl Bohm

II - Adagio un poco mosso - attacca

 

     

1804년 12월 1일 드디어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꿈에도 열망하던 황제와 황후의 즉위식에 올랐다. 야심만만한 나폴레옹은 역대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룬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행사 장소로 선택했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한 황제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사를마뉴 황제의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대관식은 나폴레옹이 요구대로 하객들의 기가 질릴만큼 화려하게 거행 되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다비드가 나폴레옹 황제의 화려한 대관식 장면을 기념비적인 대작에 담았다. 이 그림은 가로 980센티미터, 세로 680센티미터 크기에, 3년의 제작 기간이 걸렸으며 엄청난 외형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가장 총애한 화가답게 치밀한 계획을 세워 대관식을 황제의 막강한 권력을 선전하는 정치적 행사로 연출했다.

지금 보는 이 장면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객을 숙인 조세핀에게 나폴레옹이 황금 관을 씌우는 극적인 순간이다. 이미 조세핀의 머리에는 금관이 씌워져 있는데도 호아제는 왜 또 다시 아내에게 눈부신 금관을 씌워려는 것일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조세핀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서는 아닐까?
황제의 조세핀에 대한 넘치는 사랑은 엄청나게 호화로운 황후의 대관식 의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폴레옹 대관식 세부 그림>

그는 아내를 대관식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의상비로 책정해 온갖 사치를 부렸다. 르로이와 롬보 부인은 조세핀과 황제의 대관식 의상 비용으로 총 1,123,000 프랑을 사용했고, 황후의 시녀들까지도 의상비로 10,000프랑을 할당 받는다. 황제는 아내에게 자신의 엄청난 성공과 절대적인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 나폴레옹은 그림을 통해 오랜 세월 조세핀을 괴롭힌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고자 대관식 행사 장면에 자신의 가족을 모두 그려 넣도록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조세핀과의 결혼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조세핀을 눈에 띄게 냉대했다. 어머니 레티치아의 눈에는 조세핀이 자랑스런 아들을 빼앗아간 자식이 둘이나 딸린 과부이며, 행실마저 안좋은 요부로 보였다. 아들 부부와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레티치아는 자식의 결혼식과 대관식 날 참석하지 않았다.

시집 식구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황후와 가족과 불화를 겪는 황제의 치부를 깜쪽같이 감출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오랜 궁리 끝에 다비드는 기막힌 방안을 찾았다. 모후가 중앙 단상에 앉아 대견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 부부를 내려다보고, 형 조제프와 동생 루이, 여동생 카롤린과 엘리사의 식구들까지 빠짐없이 대관식에 참석해 행사를 축하하는 화기애애한 가족 드라마로 연출한 것이다.

물론 황제가 자신의 가족들을 화려하고 근사하게 보이도록 허세를 부린 가장 큰 이유는 평민 출신 가문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조세핀의 위상을 높이고 싶은 남편으로서의 바램도 정치적인 계산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완벽하게 연출된 그림을 본 나폴레옹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 아주 훌륭해, 이 그림 속에는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군."이라며 화가의 솜씨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마흔이 넘은 조세핀을 낯간지러울 정도로 미화시킨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비드에게 " 당신은 황후를 너무 젊고 아름답게 그려놓았소" 라고 핀잔을 주었다. 발끈해진 다비드는 " 가서 황제께 그렇게 말하시오."라고 쏘아붙였다.

- 이명옥 저 팜므 파탈 중

     

보너스...

이 두 그림만은 거래가 되지 않았다.

1. 프랑스 빠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2.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랍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추정가 1000억원대 작품은

1. 가나의 혼인잔치,

Paolo CALIARI, dit VÉRONÈSE The Wedding Feast at Cana 1562-63

     

2.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위를 참조),

     

3. 고야의 5월 2일,

The Second of May, 1808. The Riot against the Mameluke Mercenaries

     

4. 램브란트의 야경,

Rembrandt Van Rijn (1606 - 1669)
Title: The Nightwatch
Art Style: Baroque
Year: 1642
Medium: Oil on Canvas
Location: Rijksmuseum, Amsterdam, Holland
Size: 437 x 363 cms / 172 x 142.9 inches

     

5.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등

     

빈센트 반 고호의 Dr.Gachet의 초상화 거래가 되는 작품들 중 가장 비싼 작품 - 1990년 뉴욕 경매시장에서 한화기준으로 1천 80억원 정도에 거래 되었다.

의사 가체트의 肖像

생 레미에서 북쪽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호는 1890년 5월에 그의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에 있는 오베르 슈르 오와즈에 사는 의사 가체트의 곁으로 갔다.

오와즈강을 중심으로 이 지방의 풍경은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가체트는 고호를 만났 을 때 이미 62세로, 그 이전부터 도미에, 쿠르베, 마 네, 피사로, 귀오멩, 세잔 등과 가까운 교분을 가진 친구였다. 이 작품은 고호가 그린 3점의 가체트 초상 중의 하나로, 초상 작품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반 고흐의 '의사 가체트의 肖像'에 관한 이야기

생레미 요양소에서 퇴원한 반 고흐는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 오베르에 가기로 했다. 그 곳에서는 화가 도비니를 위시해, 폴 세잔과 같은 유명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으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Dr. 가셰(Paul F. Gachet 1828~1909)라는 반 고흐의 동생과 친분이 있는 의사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셰 박사는 의학 이외에 골상학, 관상학, 필적학 그리고 수상술(手相術)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었으며 미술에도 상당한 지견이 있는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반 고흐 이전에도 유명 화가들과의 사귐이 있었다.

Dr. 가셰는 식물에서 류마티스에 쓰이는 약을 추출했으며, 상처의 치료제도 만들었다. 이것을 동네 사람들은 '닥터 가셰의 묘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그의 초상화에 '디기탈리스'라는 식물을 그려 넣은 것도 그러한 사연에서이다.

오베르에 온 반 고흐는 그가 아를에 머물 당시 자기에게 많은 도움을 준 지누 부인을 잊을 수가 없어, 그분의 초상화를 정성껏 다시 그린 것이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의 초상'(1890)이다. 이를 옆에서 보던 가셰 박사는 반 고흐에게 자기의 초상화도 그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린 것이 '가셰 박사의 초상'(1890)이다. 초상화의 배경은 푸른색이다. 담갈색의 반점이 있는 기다란 얼굴, 회갈색의 기민한 두 눈, 양옆을 덮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한 가셰 박사가 붉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약간 기울러진 고개를 받치고 있다.

탁자위에는 콩쿠르 형제가 쓴 '제르미니 라세르뢰 (Germinie Lacerteux, 1886)'와 '마네트 랄르몽 (Manette Salomon, 1887)'라는 책이 놓여 있다. 전자는 노이로제 후자는 파리의 예술가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즉 가셰 박사는 의학과 예술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임을 표현한 것이고 또 당시 신경병 치료에 사용되던 디기탈리스 꽃도 그려 넣었다. 반 고흐는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그린 것이었다.

이 그림이 완성된 것을 본 가셰 박사는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 그림인가? 내가 원했던 것은 '지누 부인의 초상'처럼 정감이 듬뿍 담긴 그런 표정의 그림을 원했던 것이니 다시 한 장 그려주게"하며 그 그림을 퇴자 놓았다. 자기는 성의껏 그렸건만 퇴자맞은 반 고흐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배경을 남색으로 하였으며 테이블은 진한 붉은색으로 칠하고 앞서 그렸던 두 권의 책은 그리지 않고 디기탈리스 꽃도 컵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셰 박사의 손에 쥐게 하였다. 얼굴에도 변화가 있다. 즉 이맛살을 잡고 있으며 눈에도 총기가 없는 무엇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의 얼굴을 그렸다.

이 두 초상화를 비교하면 먼저 그린 그림에는 화가가 최선을 다한 것이 나타나며 뒤의 그림은 다시 그리라니 하는 수 없이 불만을 품고 그린 것이 암암리에 표현 되었다. 처음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화는 여러 미술관과 유명 인사들의 손을 거치면서 전전하다가 1990년에는 국제 미술시장에 나왔다.

이 그림은 당시 미술작품사상 최고가인 8250만불(당시의 일화 125억엔)에 일본의 제지회사 사장인 사이또(齊藤 了英)라는 분에게 낙찰되었다. 그는 자산이 죽을 때 관과 함께 '고흐의 그림 의사 가셰' 를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단다. 그 후 사이또 사장이 사망하자 이 그림은 다시 행방불명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가셰 박사 본인에게는 졸작이라 해서 퇴자 맞았던 그림이 미술작품으로서는 세계 최고의 값으로 팔렸다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미지 출처 : 인터넷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