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 즐거운 ..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 베르메르 | 그림과 음향

리차드 강 2009. 6. 23. 05:20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 베르메르

Vermeer, Jan Girl with a Pearl Earring c. 1665-1666
Oil on canvas 44.5 x 39 cm (17 1/2 x 15 3/8 in.)
Royal Cabinet of Paintings Mauritshuis, The Hague

Jan Vermeer van Delft 1632∼1675

진주 귀고리 소녀 일명 터번을 두른 소녀

1665~1666년경 캔버스에 유채, 45x40

     

비제 진주조개잡이 중 '귀에 익은 그대 음성'

Gary Karr - Harmon Lewis, piano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는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신비로움과 매혹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림 속 소녀의 눈길은 다양한 해석을 불러 일으키며 끊임없는 찬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소녀는 누구이고, 어떻게 그림의 모델이 되었을까?

 

번잡한 일상의 고요한 색채

베르메르 그림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부재하는 듯 숨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책상이나 걸상 등의 가구와 융단·지도·그림 등은 마치 정물화의 대상처럼 어떤 실내의 고요한 장면을 강조하기 위한 정적인 사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그림을 채우는 인물도 그를 둘러싼 배경의 부가물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의 적막한 정밀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그 때문에 공간 속의 사물은 그 속의 인물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지닌 것처럼 나타난다.

정물화와의 친화력을 보여주는 이런 풍경화는 나아가 거의 200년 후 아돌프 멘젤(Adolph Menzel)의 유명한 〈발코니가 있는 방〉(1845)에 이르러 인물 없는 순수 실내화로 발전한다. 베르메르 그림 속의 고요는 여기에서 사건의 고요이자 인물의 고요이고 색채의 고요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베르메르의 삶의 고요-예술을 통해 삶의 정적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예술적 혼의 고요로 나타난다. 고요한 색채와 인물의 어울림 그리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빛의 움직임이 작품 전체의 내밀하고 질긴 무게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일상적 사물을 충실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예민하게 관찰하여 얼마나 정확하게 그의 회화언어로 옮겼던가. 베르메르의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소음부터 쫓아내야 한다. 그의 고요한 회화언어를 읽기 위해 나 스스로 고요해져야 한다. 고요한 색과 빛에 의해 창출되는 공간적 고요의 축복, 그것이 베르메르의 예술적 주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주한 일상 속에 묻어 있는 고요한 순간을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표현해 보이는 그의 화법은 〈포도주를 마시는 신사와 숙녀〉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이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는 앉아 있는 한 여인이 포도주를 입에 대고 있고 그 옆으로 포도주 병을 오른손으로 쥔 채 선, 우아하게 차려입은 한 신사가 서서 연정을 호소하듯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잔 두 개가 아니라 한 개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녀가 마신 후 바로 그 잔으로 자신이 마시든지, 아니면 그녀가 마신 그 잔 위에 다음 한 잔을 다시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녀를 취하게 할 작정인가, 아니면 그녀가 입댄 잔을 자신이 다시 씀으로써 서로의 애정을 더욱 친밀하게 할 것인가? 아무 것도 언급되어지지 않는다. 그런 미묘한 사랑의 한 순간적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그림에는 우악스럽거나 음탕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르주아 사회의 내밀한 실내 공간에서 일어나는, 때로는 거칠 수도 있는 사랑의 주고받음을 이처럼 정적으로 표현한 그림의 다른 예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보다 더 정적인 표현을 얻은 것으로 보여지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살펴보자.

이 그림 속의 소녀는 어두운 바탕에 애수 어린 표정으로 약간 고개를 돌린 채 비스듬하게 관찰자를 보고 있다.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그녀는 다소 이국적인 터번 모양의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머지 않아 닿게 될 어른들의 세계가 두려운 듯 눈빛은 호기심 속에 젖어 있는 듯하고,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내비친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무엇을 말하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한 그녀의 표정.

수줍은 표정을 한 그녀는 언제라도 다시 고개를 젖혀버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비밀스런 눈빛은, 지금껏 간직해온 그녀의 꿈이 지금 그녀가 막 들어서기 시작한 어른의 세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나의 꿈꿈은 지금의 내 눈빛을 바라보는 당신들의 눈빛으로 가 닿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듯하다.

물어오는 그녀의 눈빛에서 우리는 그림 속 눈빛의 꿈은 현실의 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다시 묻게 된다. 그윽하면서도 아련한 그녀의 눈가에 금새라도 눈물 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릴 듯하다. 고요가 일으키는 눈빛 사이의 통신. 말 이상의 무엇을 눈빛은 전달할 수가 있다.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소녀의 맑고 물기 젖은 저 비밀스런 눈빛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그 고요한 눈길의 흡인력은 그러나 결코 강제하는 무엇은 아니다.

마치 하오의 어느 한때 모래톱에 들여놓은 두 발목 사이로 스며드는 강 물결처럼 소리 없이 그것은 한 겹씩 천천히 우리의 시선을 통해 폐부 속 깊이 밀려올 뿐이다. 밀려와 떠나가길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더없이 강렬하되 위압적이지 않고, 그윽하되 명상적이라기보다는 삼투적인 그 무엇, 그것은 고요의 이름 아니던가. 오, 베르메르는 몰두하는 이의 아름다운 고요를 얼마나 섬세하게 자신의 회화언어로 번역해내고 있는가. 여기에서 그 그림의 고요는 무엇보다 각각의 사물이 각기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얻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그림에서 묘사되는 상황들은 어떤, 부가적으로 첨가될 수 있는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들에 종속되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보이는 장면의 세계는 그 각각의 하나가 그 하나의 자족적인 가치를 지니면서 독립적으로 나타나 보인다. 그렇듯이, 그의 장면을 채우는 책상이나 걸상, 그림이나 창문은 다른 그 무엇을 위해서 그것의 의미가 억압되거나 오용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쓰임에 봉사하면서 그 자족적 정적미로 말미암아 자기의 위치 가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각각은 다른 무엇과의 서열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어울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묘사되는 대상 사이의 대비를 완화시키는 빛의 삼투가 큰 역할을 한다. 사물들은 그저 단순히 그 인물들이나 공간 자체처럼 소박한 원래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 그림들의 인물을 위한 환경의 한 부가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들 인물과 마찬가지로 실내의 한 공간을 구성하는 주 요소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베르메르의 소품들에게서 마치 그 그림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부드러운 정적의 울림과 율동을 듣고 느낄 수 있다. 고요한 색채에 묻어나는 인간과 사물의 고요한 진동 ….

그림 속의 사물은 얼핏 보기에 의미 없는 것처럼 위치해 있으나 제각기의 방식으로 나직하고 드러나지 않게 정밀의 축조, 고요의 직조에 참여하고 있다. 인물의 고요에 사물의 고요가 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회화적 시선 속에 포착된 삶의 고요, 세계의 고요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한 고요의 만화경적 인상학. 매일처럼 일어나는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요한 색채와 빛의 놀라운 조합에 의해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일상적 형이하학을 넘어서는 다른 초월적 차원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베르메르 그림은 아름다움의 보다 완벽한 표현을 얻는다. 고전적 일상성의 체현이라고나 할까. 그것들은 잡다하고 실없이 분주한 지금 여기의 일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속의, 그를 넘어서는 정밀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고 명상적 한때를 잊지 않는 채로 일상적 다사다난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말의 바른 의미에서 처음부터 요지부동하게 규정된 어떤 계기가 아니라 한 계기에서 다른 계기에로의 움직임 속에 있는 것이라면, 옮아가는 대상의 경과적 과정을 드러내고 있는 베르베에르의 그림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표시하는 것은 움직임이자 변화다. 움직임은 아름다움의 징후이다. 움직임이 아름다움인 것은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고요한 그림은 변화와 형성의 건널목에 서서 사물의 추이에 스스로를 열어 두고 있다.

글 : http://arthall.net/VerMeer/vermeer.htm

     

     

Vermeer, Jan The Lacemaker c. 1669-1670
Oil on canvas transferred to panel 23.9 x 20.5 cm (9 13/32 x 8 1/2 in.)
Musée du Louvre, Paris

레이스 짜는 여인 1669~70년경.

누구나의 범박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몰두의 분위기를 연출

베르메르가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에 그린 그림 <레이스 짜는 여인>은 세로 24.5센티미터, 가로 21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유화다. 이것은 왼쪽에 놓인, 실을 꺼낼 수 있는 방석 모양의 진한 남색 궤와 여인의 노란 옷, 여기에 조응되어 나타나는 그녀의 하얀 옷깃 그리고 이것은 다시 곱게 가로세로로 땋은 여인의 흑갈색 머리결과 묘하게 어울리면서 배경을 채우는 신선한 햇볕의 물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림 전면이 진남색의 궤와 흑색 덮개에 의해 반쯤의 그늘 속에서 둔중한 색조를 띠고 있다면, 그림 중간에서 뒤편으로는 노란 블라우스와 흰 목 깃이 신선한 빛의 작용에 의해 밝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 어둡고 밝은 색채 대비가 주는 장면적 안정감이 이 여인의 몰두하는 순간을 더욱 고요하게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일하는 여인의 정적은 그녀의 몰두하는 시선뿐만이 아니라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햇살의 밝은 정조(情調)에 의해 강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오, 화가 베르메르는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일상 속에 묻어 나는 고요와 정적의 기운을 이다지도 놀랍게 드러냈는가?

Vermeer, Jan Woman Holding a Balance c. 1664
Oil on canvas 40.3 x 35.6 cm (15 7/8 x 14 in.)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진주 저울질하는 여인 1662~64년경.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하듯 고요한 몰두의 순간을 체현하는 여인의 모습

고요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건 학문적으로 일어나건, 이것은 몰두하는 자의 집중력에서 나타난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저울질하는 여자〉는 이를 가장 극명하게, 최고의 집중과 균형 속에서 보여주는 듯하다. 이 그림에서 한 여인은 내면의 평화와 정적 속에서 진주를 저울질하고 있다. 마치 자기 영혼의 무게를 저울질하듯 진주를 저울질하면서 그녀는 고요한 몰두의 한 순간을 체현하고 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 그녀의 시선은 균형 잡힌 저울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 눈꺼풀의 움직임이나 그 속의 눈동자는 관찰자에게 보이지 않는다.

Vermeer, Jan Woman with a pearl necklace, ca. 1664
Berlin,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äldegalerie event website

진주 목걸이를 하는 처녀 1664년경.

거울 앞 얼굴과 목걸이와의 설레임이 표현되어있다. 흔히 일어나는, 그러나 그때마다 다른 마음의 미묘한 움직임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