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구세력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악의에 찬 왜곡과 사상시비
장창준 연구위원
2001년 ‘만경대 발언’으로 수구세력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았던 강정구 교수가 또 다시 공격을 받고 있다. 2001년도 강정구 교수에게 가해졌던 난타가 항일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번엔 한국전쟁과 소위 ‘맥아더 장군’과 관련된 것이다. 대다수의 언론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자유진영 시민사회단체’에 속한 군상들은 동국대 정문 및 강정구 교수 연구실, 자택을 방문하여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한나라당의 모 국회의원은 ‘강정구 교수 북한이주 돕기 국민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나섰다. 21세기 판 ‘마녀사냥’이라도 나서는 듯하다.
강정구 교수가 모 언론사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 평가하고, ‘맥아더 장군’을 ‘은인’이 아닌 ‘원수’라고 표현했다는 점이 공격의 초점이다. 강정구 교수를 공격하는 자들은 강정구 교수를 가리켜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목청을 돋구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들 수구세력이야말로 ‘극단적 노예주의’의 포로이며, ‘폭력 정치’의 선동자들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심한 역사관과 악의에 찬 왜곡
첫째 수구세력은 잘못된 역사관에 기초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수구세력은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표현에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자택 앞에서 항의시위를 한 재향군인회 회원들은 성명서에서 “통일전쟁이란 용어는 정통성을 가진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독재정권을 공격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어떠한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해방 이후의 정국은 남쪽과 북쪽에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서로 다른 제도와 정권을 만들어내었다. 당시 남과 북의 양 정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표는 ‘통일’이었다. 그것이 ‘적화통일’이었건 ‘북진통일’이었건 말이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은 ‘통일’이고, 북한 정권의 ‘적화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남과 북의 양 정권은 정권 탄생 이후부터 ‘통일’을 위한 정치투쟁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극적 결과는 한국전쟁이었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를 공격하는 수구세력에겐 1950년 6월 25일 이전의 한반도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1949년 아니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들어선 이후 38선 일대에서 수많은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던 것은 그들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북한보다는 남한이 훨씬 더 많은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진실임에도 그들의 역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한 날부터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수구세력들은 “그(강정구 교수)는 또 해방 후 전쟁이 날 때까지 남한에서는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인 반면 북한은 혼란 없이 안정을 누렸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일어난 그 모든 혼란은 누가 일으켰는가. 북한이 안정돼 있었다면 왜 수백만명이 북한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는가. 사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국민일보 사설, 2005.7.28)고 강변하였다.
지난 5월 10일부터 70일간 맥아더동상철거 농성을 벌인 연방통추 맥아더동상 철거 특위
과연 그런가? 그 당시 북한에서 내려와 남한을 ‘혼란’시켰던 세력들은 소위 친일파, 악덕 지주, 반민족적인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친일파와 대지주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던 미군정과 이승만 일당들을 보고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북한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숫자가 수백만이었다고? 북한은 당시 극소수의 친일파, 악덕 대지주, 반민족적 종교인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들을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수백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수백만이라는 착각이 드는 것은 그들의 만행과 죄악이 그만큼 컸음을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안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만명이 북한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수구세력들의 논리야말로 역사를 왜곡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둘째, 학살광, 전쟁광 맥아더를 ‘은인’으로 떠받들고 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수구세력들의 충성심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이다.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기 위해 열렸던 인천 자유공원에서의 집회에서 나온 “맥아더 장군은 한국 공산화를 막고 경제부국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은인”이라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과연 맥아더는 우리의 ‘은인’인가?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 1950년 9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한 미군에게 내린 명령
지난 달 27일 있었던 '미군주둔 60년 피해자 증언대회' 모습
구세력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하달한 명령이다. 상륙작전 이틀 전에 하루 동안 95,000파운드의 네이팜탄을 퍼부었으며, 상륙 전 45분 동안 로켓발사함을 포함하여 19척으로 구성된 공격함대는 인천항에 모두 2,845발을 쏘아댔다. 아무리 전쟁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작전이며 그런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이 과연 우리의 ‘은인’인가.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에 달하는 중국 장개석 국민군을 압록강에 투여하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핵폭탄을 투하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맥아더의 회고였다. 당시 맥아더는 핵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 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고 원폭 투하를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나는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관해서는 소수의견일지라도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1948년 맥아더의 라디오 연설 녹취록이다. 맥아더는 일본인들이 약탈해간 우리의 문화재가 반환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맥아더는 “우리(미국-필자 주)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일본이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취약하도록 만들며 전복적인 행동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할 우려가 있다”고 그 반대이유를 설명하였다.
한편 맥아더는 노근리 양민 학살을 직접 명령한 장본인이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24일 “만약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있다면 적으로 간주하여 살포하겠다”는 전단을 살포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7월 26일 제8군 사령관 워커는 극동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선을 통과하는 어떤 피난민의 이동도 불허할 것이다(no movement of refugees will be permitted through the battle lines)"라고 밝혔다.
노근리 학살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미 해군 항공모함 밸리 포지호의 작전보고서에 의하면 해군 함재기들은 8~10명 이상 규모의 어떠한 한국민들에 대해서든 간에 전투원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라는 육군의 지시에 따라 ‘흰 옷 입은 사람들’을 공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즉 노근리사건 발생 첫날인 7월 26일 오전 10시 미 제8군사령부의 라디오 메시지 형식은 “어떠한 피난민도, 반복한다 - 어떠한 피난민도 어떤 경우라도 전선을 통과하게 해서는 안된다”(No, repeat no refugees will be permitted to cross battle lines at any time)라는 명령을 모든 전선에 내렸다. 노근리 양민 학살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그 시초는 7월 24일 맥아더의 명령이었다.
한마디로 얘기하여 맥아더를 ‘은인’이라고 하는 것은 패륜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 배불리 먹여준다고 하더라도 자기 부모와 자식을 ‘해코지’하는 자를 ‘은인’이라고 칭송하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식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우리는 ‘패륜아’라고 부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설령 맥아더로 인해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그들의 주장을 백번 양보하여 인정한다 치더라도 수많은 양민을 학살시킨 장본인을 ‘은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명백한 ‘패륜’이다.
셋째, 강정구 교수에 대해 악의에 찬 왜곡과 사상시비를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지금도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을 해도 좋다는 말이 된다.”(국민일보 사설, 2005.7.28) “강 교수는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품에 안기라”(조선일보, 2005.7.28) “교수가 ‘적화통일’ 무산 아쉬워하는 나라”(국민일보, 2005.7.28) “강정구는 대한민국 적화 꿈꾸나”(데일리안 2005.7.28) “강정구 교수는 왜 대한민국에 있는가”(동아일보 사설, 2005.7.29) “북한 편향적 주체통일사관”(브레이크뉴스, 2005.8.2)
마치 강정구 교수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는 ‘북한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함으로써 ‘북한의 남침’을 주장하였다. 수구세력들도 알고 있듯이 북한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북침’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강정구 교수와 북한의 입장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정구 교수를 ‘친북인사’로 매도하고 ‘적화통일론자’로 낙인찍었다.
지난 달 17일 인천 맥아더동상 철거집회를 불법 폭력으로 방해하고 있는 수구단체 회원들
또한 수구세력들은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을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하였다.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강정구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전쟁 초기에 일부를 제외한 이남의 대부분 지역이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강정구 교수의 지적대로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조기에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인명 피해 역시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의한 양민학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가 역시 이미 대중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 어디에도 적화통일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없으며, 북한과 북한 지도부를 ‘찬양’하는 대목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적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통일을 위해 지금도 전쟁을 해도 좋다’는 대목 역시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왜곡과 사상시비는 명백한 악의적 행동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강정구 교수의 글을 ‘친북 딱지’를 붙여 사상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명칭이 비슷하다고 하여 사로청(조선사회주의청년동맹)의 하부조직으로 규정했던 것과 흡사하다.
왜곡과 사상시비의 본 의도는 진보개혁세력의 ‘타도’
“이러한 위장전술이 촛불시위의 동력이 되었고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데일리안 정창인 기획위원) “노무현 정권의 좌파 또는 친북세력이 여러 명분과 계기로 대북지원을 늘리고 남북관계 행사의 빈도를 높이는가 하면 과거 조선공산당 인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등 분위기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저들은 한국의 반미정서와 민족공조의 기류를 타고 드디어 지상으로 부상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김대중 칼럼, 조선일보)
최근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과 관련한 수구세력들의 사상시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언론 기사들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이 마치 북한의 사주를 받은 ‘친북세력’(여기에는 노무현 정권도 포함된다)을 ‘타도’하고 과거의 분단독재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음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공격하는 것은 개인 ‘강정구’가 아니다. 그들 공격의 대상은 ‘진보개혁세력’이며 한국 사회의 진보개혁이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 진보개혁의 약진, 남북 관계의 발전 등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회 발전이 잇따르고 있으며, 최근에는 표명렬 전 장군이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드는 등 진보와 개혁의 움직임이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데 따른 의기의식의 발로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제2의 ‘강정구’, 제3의 ‘강정구’를 양산하여 사회 불안을 부추기려 들 것이다. 그같은 의도 역시 이미 드러나고 있다. 조선일보의 김대중은 “이 다음 단계는 보수층과 우익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어느 ‘보수적 입장의 한 대학교수’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의 안보불안을 자극하고 이완되고 있는 보수세력들을 결집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따라서 최근의 상황은 진보와 개혁,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 역사 발전 과정에서 요구되는 투쟁을 회피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저들의 공세로 인해 우리의 투쟁이 주춤거려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반민족, 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투쟁을 강화하여 한국 전쟁에서 자행한 미국의 범죄 행각을 폭로하고 전쟁광, 학살광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시키겠다는 각오와 뱃심이 절실히 요구된다. 필자 장창준연구위원은 홍익대를 졸업하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부설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