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우리에게 무..

맥아더 - 박성환 밴드 │ 의식화 음악

리차드 강 2009. 6. 13. 15:04

맥아더 - 박성환 밴드

박성환 밴드

박성환 Park, Sung-Hwan 1971-

맥아더 작사, 곡 : 이광석 편곡 : 박성환밴드

 

맥아더 - 박성환

1.남의나라 인천바다 바라보며 무슨생각 그리 하시나
   망원경을 손에들고 어딜그리 바라보고 계속 계시나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진다 되내이며 암기 하시나
   고향에선 천대받고 내가여기 왜 서있나 묻고 계시나  맥아더!
           
2.사십오녀 구월그날 이나라를 접수한날 생각 하시나
   포고문을 발표하고 시민들엔 발포하던 생각 나시나
   친일파들 앞세우고 이나라를 동강내던 생각 하시나
   통일독립 염원하던 제주도민 학살하던 생각 나시나   맥아더! 맥아더~~

           
3. 노근리의 양민들을 쏴죽이라 명령했던 그자 맥아더
    신천의 양민들을 기름으로 태워죽인 그자 맥아더
    핵폭탄을 터트려서 이민족을 다 죽이려했던 맥아더
    이게 무슨 은인이다 끌어내려 살인자의 동상 맥아더
           
(후렴)
    맥아더 맥아더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려
    이제더 이제더 저거짓 우상을 섬기지 마라
    맥아더 맥아더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려 
    학살의 동상을 세우지 마라 끌어내려!

(맨트)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것이다.

   -1950년 9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남의 나라 장군 동상이 서 있는 나라에서 맥아더와 이여송을 생각함

사진/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그의 생전 건립된동상은 청산돼야 할 주권국가의 흉물이다. (Economy21 이주노 기자)

인천에 가면 자유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1888년 러시아 토목기사 사마틴이 측량하여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이 공원의 명칭이 변화한 과정에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이 잘 나타나 있다. 19세기 말 외세가 조선을 침략해오는 관문이었던 인천의 사정을 반영하여 만국공원으로 문을 연 이 공원은 일제강점기에는 서공원(西公園)으로, 그리고 한국전쟁 뒤에는 자유공원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1957년 9월15일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이 공원의 정상에 건립되어 46년째 우뚝 서 있다.

인천상륙작전과 평양성의 왜군 대파

올해는 2002년 임오년, 근대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이 1882년이니까 꼭 120주년이 되는 해다. 그때로부터 단 하루도 이 땅에서 외국군대가 없던 날이 없었다. 이 땅을 거쳐간 외국군대만 하더라도 청나라·일본·러시아·미국·소련·중국·미군 이외의 유엔 깃발 아래의 15개국 군이니 중립국 감시군을 빼더라도 헤아리기에 손가락·발가락이 모자란다.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도 우리말고는 없겠지만, 더 기막힌 일은 외국군대의 주둔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이다.

맥아더 장군, 어려서부터 우리는 그를 우리 민족의 은인으로 배워왔고 동상까지 세우며 기려왔다. 그러나 과연 그가 민족의 은인인지, 또는 살아생전에 동상까지 세워 기려야 할 만큼 훌륭한 인물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맥아더가 구국의 은인이라면, 임진왜란 때 명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李如松) 역시 구국의 은인으로 칭송되어야 마땅하다. 이여송이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것이나,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것이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이여송을 구국의 은인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이여송이 그렇게 기억되던 때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그를 재조지은(再造之恩), 즉 다 망한 나라를 다시 살려낸 은혜를 베푼 인물로 추앙했다. 오죽했으면 평양성 전투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이여송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고 생사당(生祠堂), 즉 살아 있는 인물을 위한 사당을 짓기로 결정했을까? 이렇게 해서 조정에서는 평양에 무열사(武烈祠)를 세우고 이여송과 그의 동생 이여백(李如栢), 병부상서 석성(石星), 도독 양원(楊元) 등 명나라 장수 6명의 화상을 걸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또 1599년에는 총독 형개(邢 )를 모신 선무사(宣武祠)란 사당을 짓고 선조가 친필로 ‘재조지은’ 네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는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할수록 당시 집권자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었던 국왕 선조나 대신들의 어려운 입장이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다고 그 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즉,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의 대부분을 명군의 것으로 돌리고, 나아가 그 명군을 불러온 주체가 자신들임을 부각시킴으로써 전쟁 초반의 연이은 패배 때문에 실추된 권위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이순신이나 권율같이 정규군을 이끈 명장들이나 김덕령(金德齡)·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을 이끈 진짜 구국 영웅들의 역할과 의미는 축소되고, 명군을 불러들인 조정 신료들이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화된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공신책봉에서 전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봉한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이순신·권율 등 18명만이 책봉되었는데 그나마 의병장은 단 한명도 끼지 못했다. 반면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도망가서 명군을 불러들인 공로로는 명나라에 파병을 청하는 사신으로 갔던 정곤수(鄭崑壽)가 일등공신으로 책록된 것을 필두로 무려 86명이 공신이 되었다.
 
쇠말뚝 전설의 원조, 이여송

재조지은에 대한 강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재조지은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려고 민생에 큰 부담을 줄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폐위되었다. 이제 재조지은은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정권교체의 명분이 될 정도로 강력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이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을 당해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수모를 겪은 조선의 조정은 청에 대해서는 형식적인 조공의 예를 갖추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는 등 재조지은의 논리를 한층 강화하게 된다.

재조지은의 논리가 계속되는 한 그 주역인 이여송은 조선왕조 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맥아더마냥 일방적으로 미화되는 구국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은 이여송을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근대 이전에 문자로 된 기록은 거의 지배층이 독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정서와 생각을 공식기록을 통해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대중 속에 전승되어온 구비설화는 대중의 정서와 의식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구비설화 속의 이여송은 지배층의 공식 기록에 나타난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구비문학 전공자나 민속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이여송 설화는 전국의 어느 곳에서나 가는 곳마다 채록된다고 한다. 임재해 교수의 분류에 의하면 이여송 설화는 첫째,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 들어가 수모를 겪으면서도 마침내 이여송을 청병해오는 전설, 둘째, 이여송이 조선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날 것을 시기하여 명산의 혈(穴)을 잘랐다는 전설, 셋째, 이름 없는 소년이 이여송의 행패를 저지하고 조선에서 쫓아내는 전설, 넷째, 명산의 혈을 함부로 자르다 보니 자기 할아버지 혈까지 잘라버려(공식기록에서도 확인되지만 이여송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마침내 자신도 망하게 되었다는 전설 등 크게 네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관변 쪽의 기록이 일방적으로 이여송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반면, 구비설화에 보이는 민중의 인식은 이여송의 못된 면만을 부각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여송의 단혈(斷穴), 즉 명산의 혈을 잘랐다는 전설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기를 끊고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 실제로 북한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명산에서 뽑아낸 쇠말뚝이 수십개에 이른다. 그런데 이 쇠말뚝 전설의 원조가 바로 이여송인 것이다. 이여송이 실제로 쇠말뚝을 박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민중의 눈에 이여송은 구국의 은인이 아니라 쇠말뚝을 박는 인물로 비쳤다.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

사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명군 장수 이여송. 평양성에서 왜군을 대파할 때 조선인 1만명이 노근리 학살을 능가하는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왜 민중은 이여송을 평양성 전투의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고 쇠말뚝을 박는 인물로 기억한 것일까? 그것은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보인 행태 때문이다.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이 베었다는 왜군의 머리에서 절반은 실상 조선 백성 것이었다. 이여송이 평양을 공격할 때 조선 백성의 머리를 벤 다음 앞머리털을 빡빡 깎아서 왜군의 머리로 만들어 전공을 속였다는 것은 명나라 병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 사실은 명군 내부에서도 문제가 되어 산동도어사(山東都御使) 주유한(周維翰)은 이여송을 탄핵하고 조사관을 보내 망건 자국이 있는 조선인과 머리를 빡빡 민 일본인의 수급을 구별하는 작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여송의 평양성 공격 당시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조선인이 1만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선조실록>에 보인다. 노근리 학살을 능가하는 처참한 학살이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의 주역 이여송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명군의 폐해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연 인원 20만명의 명군을 먹여살리고 그들에게 급료를 주느라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백성은 죽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명군은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명군이 온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다 도망가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명군의 노략질이 오죽이나 심했으면 민중 사이에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돌았을까? 명군의 행패가 심해지자 민심의 이반은 극에 달해 “어찌하여 왜적이 오지 않아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의 조정은 명군의 행패를 뻔히 알면서도 명군이 철수하면 나라가 장차 어찌 될지 모른다면서 명군의 계속 주둔을 희망했다. 그러나 구비설화 속에서 이여송은 이름모를 소년이나 초립동(草笠童), 노인, 산신령 등에 의해 혼이 나서 조선에서 쫓겨간다. 권율이나 곽재우, 김덕령 등 민중의 사랑을 받은 장수들을 구타하고, 이순신 장군의 전과를 가로챘을 뿐 아니라, 민중을 쥐어짠 명군을 민중은 설화를 통해서나마 스스로 쫓아낸 것이다. 이여송의 죽음에 대해서도 애도 일색이었던 조정의 분위기와는 달리 설화에서는 “이여송이가 제 발등을 제가 찍고서 돌아가 그 후손까지 결딴났다”고 고소해했다. 임재해 교수는 당시 민중은 대국과 소국 간의 종속관계란 혈연의 친연성이나 혈맹관계 등에 의해 선린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명군의 횡포를 직접 겪어야 하는 수난의 당사자였던 민중은 이렇게 냉철하고 치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삼은 코미디

한국전쟁 이후 반공의 광풍 때문일까, 민중의 맥아더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민중의 인식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 1998년 인하대 서규환 교수가 인천지역 청소년 1170명을 대상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을 조사했는데 여기서 맥아더는 20.3%를 얻어 비류백제의 시조인 비류(沸流)의 4.3%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1위를 차지해 충격을 주었다. 이 조사에 대해 서 교수는 “청소년들이 맥아더 장군을 인천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은 것은 청소년들의 그릇된 인식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인천의 역사와 정체성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한편 양담배를 단속하던 1970년대에는 맥아더을 무속신으로 모신 무당이 맥아더에게 양담배를 공양하다가 단속반에 걸렸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언젠가 필자는 한 유명한 재야인사가 4월학생봉기 당시 이승만이 하야하자 시위대 속에서 누군가가 “맥아더 장군에게 가자!”라고 외쳐 인천까지 와 맥아더 동상에 헌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같이 인천 자유공원에 가서 꽃을 바친 그 재야인사는 뒤에 맥아더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는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고 했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일본 현대사를 전공하는 한 미국인 교수에게 했는데 그는 박장대소하더니 자기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미국에 돌아와 의회에서 연설할 때 자신이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는 수업을 중단하고 라디오로 중계되는 연설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그 교수는 다른 급우들과 함께 맥아더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연설에 감동하여 엉엉 울었는데, 나중에 일본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맥아더의 사람됨을 알고는 너무 억울했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사건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매우 애석해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맥아더를 무속신으로 모신 것도 그를 최영 장군, 남이 장군 또는 관우 장군처럼 큰 한을 품은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1951년에 트루먼이 맥아더의 주장대로 만주를 폭격했더라면 통일은 그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4년 맥아더가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는 추도 사설에서 한국통일의 절호의 찬스가 맥아더의 해임으로 유실되었다면서, 그의 주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다시 애달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또 1996년에는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폭격의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원자폭탄의 사용을 전제로 한 맥아더의 만주폭격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이는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라 즉각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일이었다. 더구나 맥아더는 당시 합동참모본부에 원자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두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여 보고하면서 즉각적인 원자폭탄 투하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도 1차로! 이런 위험한 발상을 한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한반도를 위해서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나 천만다행인 조치였다. 맥아더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한 것은 전쟁 수행과정에서의 자신의 판단착오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끊임없는 정보보고에도 불구하고 이북군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했으며, 중국군의 개입 가능성을 묵살하고 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단행했다. 더구나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중국군이 개입하자 미군은 미군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기억되는 장진호 패배를 당하는 등 중국군에 크게 밀린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1960년 자신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주장했다는 트루먼의 주장은 완전한 허위라고 말했지만, 뒤에 간행된 회고록에서는 30∼50발의 원자?! 봉? 투하할 것을 계획했다고 기록했다.

맥아더 해임은 실로 천만다행

사진/ 한국전쟁 당시 인천에 상륙하는맥아더. 그의 만주폭격 주장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미국 역사상 맥아더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군인도 없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문민우위의 원칙에 도전했다가 해임된 맥아더는 한편에서는 미국의 시저, 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심지어 신으로까지 추앙받지만, 최근에는 그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연이어 나오고 있다. 애리조나 대학의 마이클 샬러 교수는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의 장군>에서 흔히 높이 평가되는 맥아더의 군사적 업적도 객관적으로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인 경우가 많았으며, 인간적으로 볼 때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이기적 기회주의자이자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다고 주장했다. 선글라스에 옥수수 파이프, 팽팽한 모자에 잘 다린 바지로 상징되는 튀는 옷차림에 대해 트루먼은 70대의 5성 장군이 19살 소위같이 하고 다닌다고 못마땅해했다. 한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의 와인츠로브 교수도 <맥아더 장군의 전쟁>에서 맥아더가 “한국전 당시 대통령도 무시할 정도의 제왕주의적인 태도와 국제정세에 대한 빈약한 판단력 때문에 결국 강제 전역됐다”고 평가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권 시절 살아생전에 동상이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생일이면 신문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정권에 의해서 찬양받았다. 재야나 학생들의 주장 이외에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문제제기는 최근에야 <한겨레21>이 용미(用美)와 철미(撤美)의 대화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제기할 정도로 이 땅에서는 엄청난 금기사항이었다. 일반 대중의 미군에 대한 인식 역시 임진왜란 당시 일반 백성의 명군에 대한 인식에 비하면 대단히 호의적이다. 그러나 대학생들에 의해 반미 구호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채록된 구비설화에 일본군이 아닌 미군이 우리 산천의 혈을 자른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생산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맥아더나 주한미군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과 옹호와는 다른 기류가 아주 낙후된 형태로나마 만만치 않게 흐르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김남주 시인의 시에 인용된 한 농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나라 군대 끌어다 제 나라 형제 쳤는데 / 뭣이 신난다고 외국 장수 이름을 절에까지 붙이겠소 (蘇定方의 이름을 딴 부여의 定方寺, 來蘇寺를 지칭) / 하기야 인천 가니까 맥아더 동상이 서 있더라만 / 남의 나라 장수 동상이 서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더만.”

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이북이 만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彭德懷)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출처  : 한겨레21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  2002년05월02일 제407호

     

맥아더 ‘은인’은 패륜적 발상

[기고] 수구세력의 강정구 교수에 대한 악의에 찬 왜곡과 사상시비

장창준 연구위원

2001년 ‘만경대 발언’으로 수구세력들에게 집중공격을 받았던 강정구 교수가 또 다시 공격을 받고 있다. 2001년도 강정구 교수에게 가해졌던 난타가 항일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이번엔 한국전쟁과 소위 ‘맥아더 장군’과 관련된 것이다. 대다수의 언론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자유진영 시민사회단체’에 속한 군상들은 동국대 정문 및 강정구 교수 연구실, 자택을 방문하여 항의 시위를 벌였으며, 한나라당의 모 국회의원은 ‘강정구 교수 북한이주 돕기 국민운동본부’ 발족을 제안하고 나섰다. 21세기 판 ‘마녀사냥’이라도 나서는 듯하다.

강정구 교수가 모 언론사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 평가하고, ‘맥아더 장군’을 ‘은인’이 아닌 ‘원수’라고 표현했다는 점이 공격의 초점이다.  강정구 교수를 공격하는 자들은 강정구 교수를 가리켜 ‘정신분열증 환자’라고 목청을 돋구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그들 수구세력이야말로 ‘극단적 노예주의’의 포로이며, ‘폭력 정치’의 선동자들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심한 역사관과 악의에 찬 왜곡

첫째 수구세력은 잘못된 역사관에 기초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수구세력은 “6.25 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표현에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정구 교수의 자택 앞에서 항의시위를 한 재향군인회 회원들은 성명서에서 “통일전쟁이란 용어는 정통성을 가진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독재정권을 공격할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어떠한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해방 이후의 정국은 남쪽과 북쪽에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서로 다른 제도와 정권을 만들어내었다. 당시 남과 북의 양 정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목표는 ‘통일’이었다. 그것이 ‘적화통일’이었건 ‘북진통일’이었건 말이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은 ‘통일’이고, 북한 정권의 ‘적화통일’은 ‘통일’이 아니라는 것은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남과 북의 양 정권은 정권 탄생 이후부터 ‘통일’을 위한 정치투쟁을 강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극적 결과는 한국전쟁이었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를 공격하는 수구세력에겐 1950년 6월 25일 이전의 한반도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1949년 아니 1948년 8월과 9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들어선 이후 38선 일대에서 수많은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던 것은 그들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북한보다는 남한이 훨씬 더 많은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진실임에도 그들의 역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한 날부터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수구세력들은 “그(강정구 교수)는 또 해방 후 전쟁이 날 때까지 남한에서는 항쟁과 전투와 폭동의 연속인 반면 북한은 혼란 없이 안정을 누렸다고 말했다. 남한에서 일어난 그 모든 혼란은 누가 일으켰는가. 북한이 안정돼 있었다면 왜 수백만명이 북한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는가. 사실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다”(국민일보 사설, 2005.7.28)고 강변하였다.

지난 5월 10일부터 70일간 맥아더동상철거 농성을 벌인 연방통추 맥아더동상 철거 특위

과연 그런가? 그 당시 북한에서 내려와 남한을 ‘혼란’시켰던 세력들은 소위 친일파, 악덕 지주, 반민족적인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친일파와 대지주를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던 미군정과 이승만 일당들을 보고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북한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숫자가 수백만이었다고? 북한은 당시 극소수의 친일파, 악덕 대지주, 반민족적 종교인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들을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수백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수백만이라는 착각이 드는 것은 그들의 만행과 죄악이 그만큼 컸음을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북한이 안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만명이 북한 정권을 피해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수구세력들의 논리야말로 역사를 왜곡하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둘째, 학살광, 전쟁광 맥아더를 ‘은인’으로 떠받들고 있다.

맥아더 ‘장군’에 대한 수구세력들의 충성심은 가히 눈물겨울 정도이다.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기 위해 열렸던 인천 자유공원에서의 집회에서 나온 “맥아더 장군은 한국 공산화를 막고 경제부국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은인”이라는 주장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과연 맥아더는 우리의 ‘은인’인가?

“서울을 탈취하라.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 1950년 9월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한 미군에게 내린 명령

지난 달 27일 있었던 '미군주둔 60년 피해자 증언대회' 모습

구세력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하달한 명령이다.
상륙작전 이틀 전에 하루 동안 95,000파운드의 네이팜탄을 퍼부었으며, 상륙 전 45분 동안 로켓발사함을 포함하여 19척으로 구성된 공격함대는 인천항에 모두 2,845발을 쏘아댔다. 아무리 전쟁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민들이 거주하는 도시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작전이며 그런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이 과연 우리의 ‘은인’인가.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에 달하는 중국 장개석 국민군을 압록강에 투여하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핵폭탄을 투하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맥아더의 회고였다. 당시 맥아더는 핵폭탄을 투하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한 두 곳이 아니라 무려 26곳을 선정하고 원폭 투하를 강력히 주장한 바 있다.

“나는 군사행동과 점령의 결과로 상실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상복귀에 관해서는 소수의견일지라도 아주 강력히 반대한다.”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1948년 맥아더의 라디오 연설 녹취록이다. 맥아더는 일본인들이 약탈해간 우리의 문화재가 반환되는 것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맥아더는 “우리(미국-필자 주)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일본이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취약하도록 만들며 전복적인 행동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할 우려가 있다”고 그 반대이유를 설명하였다.

한편 맥아더는 노근리 양민 학살을 직접 명령한 장본인이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24일 “만약 북쪽으로 향하는 피난민이 있다면 적으로 간주하여 살포하겠다”는 전단을 살포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따라 7월 26일 제8군 사령관 워커는 극동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선을 통과하는 어떤 피난민의 이동도 불허할 것이다(no movement of refugees will be permitted through the battle lines)"라고 밝혔다.

노근리 학살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50년 7월 25일 미 해군 항공모함 밸리 포지호의 작전보고서에 의하면 해군 함재기들은 8~10명 이상 규모의 어떠한 한국민들에 대해서든 간에 전투원으로 간주하고 공격하라는 육군의 지시에 따라 ‘흰 옷 입은 사람들’을 공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즉 노근리사건 발생 첫날인 7월 26일 오전 10시 미 제8군사령부의 라디오 메시지 형식은 “어떠한 피난민도, 반복한다 - 어떠한 피난민도 어떤 경우라도 전선을 통과하게 해서는 안된다”(No, repeat no refugees will be permitted to cross battle lines at any time)라는 명령을 모든 전선에 내렸다. 노근리 양민 학살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그 시초는 7월 24일 맥아더의 명령이었다.

한마디로 얘기하여 맥아더를 ‘은인’이라고 하는 것은 패륜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제 아무리 돈을 많이 주어 배불리 먹여준다고 하더라도 자기 부모와 자식을 ‘해코지’하는 자를 ‘은인’이라고 칭송하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식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우리는 ‘패륜아’라고 부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설령 맥아더로 인해 한국 경제가 살아났다는 그들의 주장을 백번 양보하여 인정한다 치더라도 수많은 양민을 학살시킨 장본인을 ‘은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명백한 ‘패륜’이다.

셋째, 강정구 교수에 대해 악의에 찬 왜곡과 사상시비를 강화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지금도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을 해도 좋다는 말이 된다.”(국민일보 사설, 2005.7.28)
“강 교수는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품에 안기라”(조선일보, 2005.7.28)
“교수가 ‘적화통일’ 무산 아쉬워하는 나라”(국민일보, 2005.7.28)
“강정구는 대한민국 적화 꿈꾸나”(데일리안 2005.7.28)
“강정구 교수는 왜 대한민국에 있는가”(동아일보 사설, 2005.7.29)
“북한 편향적 주체통일사관”(브레이크뉴스, 2005.8.2)

마치 강정구 교수가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는 ‘북한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고 함으로써 ‘북한의 남침’을 주장하였다. 수구세력들도 알고 있듯이 북한은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북침’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해 강정구 교수와 북한의 입장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강정구 교수를 ‘친북인사’로 매도하고 ‘적화통일론자’로 낙인찍었다.

지난 달 17일 인천 맥아더동상 철거집회를 불법 폭력으로 방해하고 있는 수구단체 회원들

또한 수구세력들은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을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하였다. 역사와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강정구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했을 뿐이다. 전쟁 초기에 일부를 제외한 이남의 대부분 지역이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강정구 교수의 지적대로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조기에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인명 피해 역시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의한 양민학살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는가 역시 이미 대중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 어디에도 적화통일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하는 대목이 없으며, 북한과 북한 지도부를 ‘찬양’하는 대목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적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통일을 위해 지금도 전쟁을 해도 좋다’는 대목 역시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왜곡과 사상시비는 명백한 악의적 행동이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강정구 교수의 글을 ‘친북 딱지’를 붙여 사상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명칭이 비슷하다고 하여 사로청(조선사회주의청년동맹)의 하부조직으로 규정했던 것과 흡사하다.

왜곡과 사상시비의 본 의도는 진보개혁세력의 ‘타도’

“이러한 위장전술이 촛불시위의 동력이 되었고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다”(데일리안 정창인 기획위원)
“노무현 정권의 좌파 또는 친북세력이 여러 명분과 계기로 대북지원을 늘리고 남북관계 행사의 빈도를 높이는가 하면 과거 조선공산당 인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등 분위기를 연출하는 과정에서 저들은 한국의 반미정서와 민족공조의 기류를 타고 드디어 지상으로 부상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김대중 칼럼, 조선일보)

최근 강정구 교수의 기고문과 관련한 수구세력들의 사상시비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언론 기사들이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이 마치 북한의 사주를 받은 ‘친북세력’(여기에는 노무현 정권도 포함된다)을 ‘타도’하고 과거의 분단독재정치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불순한 음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공격하는 것은 개인 ‘강정구’가 아니다. 그들 공격의 대상은 ‘진보개혁세력’이며 한국 사회의 진보개혁이다.

노무현 정권의 탄생, 진보개혁의 약진, 남북 관계의 발전 등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회 발전이 잇따르고 있으며, 최근에는 표명렬 전 장군이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드는 등 진보와 개혁의 움직임이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데 따른 의기의식의 발로이다. 따라서 그들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제2의 ‘강정구’, 제3의 ‘강정구’를 양산하여 사회 불안을 부추기려 들 것이다. 그같은 의도 역시 이미 드러나고 있다. 조선일보의 김대중은 “이 다음 단계는 보수층과 우익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어느 ‘보수적 입장의 한 대학교수’의 발언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의 안보불안을 자극하고 이완되고 있는 보수세력들을 결집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따라서 최근의 상황은 진보와 개혁, 자주와 통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 역사 발전 과정에서 요구되는 투쟁을 회피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저들의 공세로 인해 우리의 투쟁이 주춤거려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반민족, 반통일세력과의 투쟁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투쟁을 강화하여 한국 전쟁에서 자행한 미국의 범죄 행각을 폭로하고 전쟁광, 학살광 맥아더의 동상을 철거시키겠다는 각오와 뱃심이 절실히 요구된다.
 
필자 장창준연구위원은 홍익대를 졸업하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부설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맥아더는 정말 영웅인가?” 미국선 54년전 끝난 논란

1951년 4월11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본국의 훈령을 무시하고 한국전쟁의 확전을 주장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 겸 유엔군 총사령관을 전격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된 맥아더는 본국에 ‘개선장군 시저(케사르)’로 귀환했다. 연도에서 그를 환영했던 인파는 700만명이 넘었다. 의회는 공화당 주도로 그의 해임을 따지는 청문회를 열고, 그에게 군 전역을 기념하는 이례적인 고별연설 기회까지 부여했다. 국제사회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하고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선풍이 불던 당시 맥아더는 공산주의와 결연히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으로 떠오르며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54년 전 미국을 들끓게 했던 맥아더 논쟁이 최근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인천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놓고, 재야운동단체 등은 ‘맥아더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일뿐이라며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준 은인’이라며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군과 정치의 경계 넘나들다

맥아더는 최근까지 한국인들에게 ‘현대의 군신’으로까지 평가받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금세기 최고 전략전술가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터무니없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도 만만치않다.

용기·희생·애국심·정직으로 일생을 살아온 모범적인 군인이라고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오만과 허풍, 현란한 언사로 일관하며 문민우위에 도전한 공화당 보수우파의 정치군인일뿐이라고 악평하는 쪽도 있다.

맥아더는 분명 미군의 최고 엘리트였다. 웨스트포인트를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는 항상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도 작용했다. 맥아더는 1차대전에서 최연소 사단장과 준장으로 승진하며 13차례나 되는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43살의 나이로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연소 교장에다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육군의 최고자리인 참모총장에도 최연소로 취임했다. 총장 재직 때 군 현대화를 추진하며 능력도 과시했다.

그러나 그는 군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평화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침자’라는 등 보수우익적 정견과 대담한 언사로 논쟁을 불렀다.

대공황이 몰아치던 1932년 여름 맥아더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2만명의 퇴역군인들이 약속된 1천달러의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달라며 벌이던 농성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는 기관총부대와 탱크까지 동원해, 대검을 휘두르며 이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이들을 쫒아 애나코스티아 강까지 건너 노숙하던 텐트를 불질러 버렸다. 노숙지에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을 걱정했던 후버 대통령은 강을 건너지 말라고 두번이나 명령했으나 그는 그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맥아더는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며, 한때 자신의 전우였던 이들을 “추악한 몰골의 폭도”라고 태연하게 비난했다.

문민우위의 원칙을 무시하는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 이 ‘보너스 부대’ 사건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공화당 정부의 인기를 급락시켜, 그 뒤 20년이 넘게 지속된 민주당 정부 출범에 일조했다. 이 사건을 지켜본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맥아더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 민주당 정부와 평생 알력을 벌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화당의 보수우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맥아더는 보수우파의 대표적 군인으로 더 탄탄한 입지를 굳힌다.

맥아더에 대한 논란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맡은 그의 역할이 중심을 이룬다. 루스벨트와 알력을 벌이던 맥아더는 1937년 필리핀 군사고문을 마지막으로 전역했으나,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한 1941년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필리핀에 주둔하는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나는 돌아온다”는 말 실제 사정

미 합동참모부는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경우 루손에 주둔한 병력을 마닐라만의 입구인 바탄 반도와 코레기도 섬으로 퇴각시켜 마닐라만을 방어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맥아더에게 그 작전은 너무 수세적이었다. 그는 마닐라만이 아니라 전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해변에 병력을 산개하는 더 대담한 작전을 벌이자고 합참을 설득했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도 이 계획을 받아들이고, 100대의 B-17 폭격기까지 제공했다. 이 폭격기들도 해변의 기지에서 발진하도록 배치됐다. 맥아더는 13만5천명의 병력과 227대의 각종 전투기들로 엄청난 방위 및 공격 전력을 보유했다며, 필리핀은 미국 방위선의 핵심기지가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는 미군 역사상 가장 멍청한 작전임이 곧 드러났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 직후 맥아더는 비행기들을 옮겨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방치하다 다음날 바로 일본 공군의 공격으로 비행기들의 절반을 잃고, 2주도 안돼 마닐라도 함락된다. 맥아더는 뒤늦게 바탄 반도로 총퇴각을 명령해, 식량도 챙기지 못한채 포위됐다. 워싱턴 쪽은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부하들을 남겨두고 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함락이 눈 앞에 다가오자 “나는 돌아온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워싱턴의 전쟁지도부는 필리핀에서 일패도지당한 맥아더를 해임해도 시원치 않았으나, 군 내에서 그의 명성과 영웅신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오히려 2개월간 용감히 저항한 전쟁영웅으로 부각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은 해군으로 넘어갔다.

전쟁 내내 맥아더는 전략을 놓고 워싱턴과 알력을 빚었다.

“나는 돌아온다”고 한 약속에 집착한 맥아더는 일본 열도 침공의 교두보로 먼저 필리핀의 해방을 주장했다. 반면 어네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 해군지휘부는 대만을 선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해 태평양 전쟁의 방향을 틀어쥔 해군이 워싱턴의 신뢰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맥아더는 전세가 미국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어진 44년 겨울이 되어서야 필리핀 상륙을 허가받고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트루먼은 종전 뒤 공화당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조연이던 맥아더를 다시 주연으로 만들어준다.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장면으로 맥아더는 다시 전쟁영웅으로 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모두가 반대하던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다시 한번 떠오른다. 맥아더는 이 작전으로 그의 지휘력과 과단성을 과시했으나, 그 특유의 오만도 드러냈다. 마오쩌둥 중국 주석은 그의 전략을 분석한 뒤 지적했다. “그가 그렇게 오만하고 고집불통이라며? 좋아. 오만하고 고집불통일수록 좋지. 오만하고 고집불통의 적을 무찌르기는 쉽지.” 맥아더는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사명언을 남겼다. 사실 이는 그에게 적용해야 할 말이었다. 그는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경계에 실패한 용서받을 수 없는 지휘관이었다.

한국서 재연되는 맥아더 논란

맥아더가 38선을 돌파하자,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한 트루먼은 맥아더와의 면담을 원했다.

맥아더가 중대한 시기라서 워싱턴으로 갈 수 없다고 거부하자, 트루먼은 태평양 상의 웨이크 섬까지 날아왔다. 이때 맥아더는 군통수권자인 트루먼에게 경례도 하지않고 악수만 했다. 트루먼은 1차대전 때 자신의 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던 부하였다.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것은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참전해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륙전을 펼칠 것이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때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호언도 했다. 맥아더가 10월15일 웨이크에서 이렇게 호언할 때 중국 인민해방군의 최정예 부대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압록강을 은밀히 건넌 상태였다.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패전한 뒤 다시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다. 그후 그는 원폭사용, 만주폭격, 국민당군의 중국연안 항구 침공 및 한국전 참전 등을 주장했다.

맥아더의 확전론이 현실화됐을 경우, 한반도와 세계정세가 어떻게 됐을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확전하지 않는다면 미군이 고사할 것이라며, 확전과 철수 중 양자택일하라고 워싱턴에 압박했다. 그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를 놓고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사이, 한국전쟁의 실질적 지휘권은 새로 8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매튜 릿지웨이에게 넘어갔다. 릿지웨이는 워싱턴의 훈령대로 제한전을 벌이며 38선을 회복해 ‘확전 아니면 철수’라는 맥아더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해임된 맥아더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조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트루먼과 민주당 행정부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의회 청문회 과정에서 웨이크 섬 회동내용 등 그의 전략적 오류들이 공개되며, 그에 대한 인기는 곧 시들해졌다. 그를 부동의 대통령 후보로 여겼던 공화당도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참모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후보로 지명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참모로 근무했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항상 현실을 무시한 채 거창한 아이디어와 계획만을 주장한다고 불평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내가 만난 최고의 사무원”이라고 조롱했으나, 아이젠하워는 “나는 맥아더 밑에서 연극을 배웠다”고 되받아쳤다.

맥아더는 고별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맥아더를 죽일 수는 없지만, 이제 그를 조용히 사라지게 할 때이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아가씨도 부인도..." 맥아더 발언의 실체는?

박성환밴드 '맥아더' 노래 가사에 학자들 "출처 모르겠다"

▲ '동상 철거' 논란에 휩싸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약탈 및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규정한 노래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민중가수 박성환밴드가 지난 7일 발표한 <맥아더>라는 제목의 노래는 "노근리의 양민들을 쏴 죽이라 명령했던 그 자 맥아더" "신천의 양민들을 기름으로 태워 죽인 그 자 맥아더"라는 구절이 담겨있다.

총 3절과 후렴부로 구성된 노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끝 부분의 나레이션이다.

"서울을 탈취하라. 그 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으로 될 것이다. - 1950년 9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박성환밴드는 10일 인천 자유공원에서 열린 '미군강점 청산 국민대회'에서 이 노래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 동상의 이전 내지 철거에 공감하는 진보성향의 역사학자들조차 맥아더 발언의 출처에 대해서는 "어디에서 그런 말이 나왔냐"고 되묻는 분위기다.

'출처'로 지목된 한홍구 교수 "그런 내용 쓴 적 없다"

밴드의 리더 박성환씨는 15일 오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산하 한국민권연구소의 장창준 연구위원이 6월 25일 <자주민보> 홈페이지에 올린 기고문을 맥아더 발언의 출처라고 밝혔다.

장 연구위원은 "2002년 민권연구소에서 발간한 <정세동향>에 글을 쓸 때 인터넷을 검색해서 나온 얘기를 쓴 적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글에서 인용한 내용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한 교수는 "2002년 5월2일자 <한겨레21>에 맥아더에 대한 글을 쓴 적은 있지만, 그런 내용을 쓰지는 않았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고 부인했다. 한 교수는 "맥아더는 동상을 만들어 기릴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면서도 "일선 지휘관들이 그와 같은 지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맥아더가 직접 그런 말을 했는 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80∼9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베스트셀러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의 저자 박세길씨도 "관련 자료가 있으니 그런 얘기가 나왔으리라는 짐작은 있지만 발언 출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현대사에 정통한 익명의 대학교수는 "맥아더가 양민학살을 지시했다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지금처럼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주장들을 밀고 나가다가는 정말 큰일나겠다"고 우려했다.

출처 : "아가씨도 부인도..." 맥아더 발언의 실체는? - 오마이뉴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