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의 빛나는 별 - 아르칸젤로 코렐리
소나타, 콘체르토, 그리고 신포니아
르네상스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유럽의 음악계는 여전히 혼란스런 정치적 사회적 바탕 속에서도 종교적인 좁은 범주를 벗어나 만인의 음악으로 개성적이면서도 또한 체계성있는 발전과 풍요로움 속으로 진행해가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들 몇 가지만 살펴본다면, 우선 음악의 연주가 사람의 목소리, 즉 인성(人聲)을 벗어나 각 성부가 다채로운 악기들로 연주될 수 있는 기악의 발전이 대단히 뚜렷해졌다는 점입니다. 이로써 오로지 인간의 목소리로만 이루어지던 연주가 인간과 기악, 더 나아가서는 악기와 악기간의 어울림으로 다채로워 졌다는 것입니다.
본시 ‘목소리로 노래하다(cantare)’ 라는 어원을 가진 ‘칸타타(cantata)’ 가 음악의 연주의 주체였다면 이제 이와는 대비가 되는 어원인 ‘악기를 연주하다(sonare)’ 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음악이건 세속적 음악이건 이미 다성부(多聲部:polyphony)로 불려지던 노래(canzona)를 기악으로 연주하도록 한 것을 ‘칸초나 다 수오나레(canzona da suonare)’라 하다가 이를 고쳐서 ‘칸초나소나타(canzonasonata)’, 다시 더 줄여서 ‘소나타(sonata)’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이 ‘소나타’란 말은 순전히 기악으로만 연주되는 음악을 가리키는 단어로 이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하나, 단성부의 음악에서 다성부의 음악으로 바뀌며 각 성부간의 경쟁적인 대비는 안티폰(交唱:antiphon)과 같은 연주기법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라틴어의 ‘경쟁하다(concertare)’라는 단어는 바로 가장 적절한 단어로서 음악 속에 파고들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몬테베르디나 그의 제자 슈츠 등에 의하여 다성부적 합창에서도 쉽게 위의 파생단어인 ‘콘체르토(concerto)’란 말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성에서의 ‘콘체르토’의 쓰임은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거나 곧 소멸되었지만. 18세기 러시아 초기음악의 작곡가들인 드미뜨리 보르뜨냔스끼 등에 의하여 ‘합창 협주곡’이란 제목이 버젓이 사용되어지고 이후로도 더 사용되었습니다.
그보다는 이 ‘콘체르토’란 단어가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기악분야에서였습니다. 이 단어는 악기와 악기간의 푸가적 전개에 있어서 서로간에 경쟁적인 역할을 하며 음악을 펼쳐갔기 때문에 흔히들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위의 ‘소나타’라는 단어와 더불어 기악 합주곡을 일컫는 또하나의 단어로서 큰 구분이 없이 혼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속음악과 기악의 발전은 인성 중심의 마드리갈을 벗어나면서 돈과 권력이 있어 여흥을 필요로하는 궁정을 중심으로 극음악, 즉 오페라의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교회와 관련된 성스런 주제도 있었으나, 좀 더 인간적이고 옛 이야기와 같은 재밋거리를 동반한 주제들로 바뀌면서 음악 자체의 표현 능력과 기법들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극음악의 첫머리, 혹은 무대의 전환시 기악합주로만 연주되는 것을 '신포니아(sinfonia)'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그리스어 어원인 ‘동시에 울리는 음(symphonia)’을 뜻하는 이 단어는 이미 오래전부터 순 기악합주곡 모음의 한 이름으로 서서히 사용되어지다가 이렇게 극음악속의 한 부분인 기악합주부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후 단독으로도 기악합주곡의 이름으로 위의 ‘소나타’나 ‘콘체르토’와 더불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시 이 세 가지의 음악 형식이 뚜렷한 차이를 보였던가...? 음악학자들은 모두 고개를 젓습니다. 어찌보면 이 용어들이 처음 사용되던 16세기부터 17세기 사이에는 연주적 구분에 있어서 별반 차이없이 섞어서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의 유명한 ‘소나타 피아네 포르테(sonata pian'e forte)’는 ‘사크라 신포니아곡집(sacrae sinfoniae)’이란 곳에 수록되어져 있으며,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사후발간된 ‘칸초나와 소나타(canzoni et sonate)’도 양 형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애매할 정도입니다. 1650년대에 이탈리아 음악의 주류가 된 칸초네, 칸초네다소나르, 소나테, 심지어 콘체르토, 신포니아, 더하여 판타지아(fantasia)들은 엄청난 양에도 불구하고 명칭적 차이 이외에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통주저음(通奏低音:basso continuo)
16세기가 지나고 음악에 있어서의 바로크(baroque) 시대가 다가오면서 교회음악을 시작으로 다성부적 연주 형태에 있어서 또하나의 큰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소 콘티누오(通奏低音:basso continuo)'의 도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불리워지던 다성부의 곡이 '반주가 없는(a capella)' 상태로 불리워졌으나, 화음반주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효과적인 ‘반주법’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확히는 누가 처음 생각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아래 저음 성부를 멜로디로 넣고 여기에 적절한 화음을 넣어줌으로써 당시 교회에 널리 보급되어져있던 오르간으로의 반주가 가능하게끔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연주 형태는 아카펠라의 합창이 모두 끊어지더라도 오르간이 그 공백을 메우면서 음악적 연속성을 유지해줄 수 있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여 주기도 하는 등 그 효과가 대단히 뛰어나자 곧 교회를 벗어나 일반의 세속적인 음악 연주에 있어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유럽음악의 바로크 시대는 바로 이 통주저음과 더불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곧 모든 악보들은 각 성부 외에 저음역과 여기에 숫자로 표시된 약식화음기호(기본 화음일때는 숫자를 적지 않으나, 음정 진행에 따라 화음이 변하면 이를 숫자로 기록)가 표기된 통주저음의 악보가 더해져 출판되게 되었으며,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러한 연주 기법은 전 유럽에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연주법에 또다른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오늘날 3중주나 4중주와 같은 개념의 시초가 되는 ‘트리오 소나타’의 확립과 콘체르토 양식의 분화였습니다.
순수기악적 연주형태인 ‘소나타’는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두갈래로 나뉘게 됩니다. 하나는 교회에서 인성 대신 악기가 연주하는 형태로서의 소나타인 ‘교회의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세속 음악으로서 궁정 등에서 연주되는 ‘실내의 소나타(sonata da camera)’였 는데, 교회에서 연주되는 소나타는 역시 경건한 분위기에서 연주되는 것으로 완-급-완-급의 4악장 구성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속적인 소나타는 마찬가지로 완-급-완-급의 구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각각의 곡들에 대응되는 대표적인 춤곡들을 사용하게 됩니다.
트리오 소나타를 연주하는 모습
이때 사용되는 악기들은 통주저음의 영향을 받아 주제를 연주하는 두 대의 고음역 악기에 이를 받쳐줄 저음역 악기 한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화음을 깔아주는 통주저음악기인 오르간이나 합시코드 같은 화음악기까지 4대의 악기가 기본적으로 연주를 하게 됨으로써 구조적으로 완벽한 연주형태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악기는 4종이지만 성부만으로 따지면 3성부에 반주가 더해진 것이니 이를 ‘트리오 소나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뒤에는 건반악기의 오른손 반주 외에 왼손의 저음역 연주를 따로 두어 2중주를 더한 세 가지 악기만의 트리오 소나타도 나오긴 했지만...)
또 하나는 콘체르토의 변화인데, 일반적인 기악합주로서 이용되던 이름인 콘체르토가 비로소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연주 형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트리오 소나타 악기군 자체를 하나의 독주군(concertino 혹은 soli)으로 하고 이들과 다시 합주를 하는, 즈로 현악기군 - 물론, 여기에 따로 바소 콘티누오가 딸려 있습니다 - 으로 이루어진 합주부(ripieno)로 연주를 하는 확대된 형태의 것을 ‘콘체르토 그로소(合奏協奏曲:concerto grosso)’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연관, 혹은 별개로 해서 독주악기군을 실력있는 단 하나의 악기(solo)로 해서 합주부가 받치고 나가는 연주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협주곡(concerto)'의 형태인데, 콘체르토 그로소와 함께 악기들의 성능과 발달로 해서 이러한 ‘솔로 콘체르토’의 발달도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악기들의 정형화와 발전
인간이 ‘소리’를 목소리가 아니라 도구를 통하여 내기 시작한 이래 악기는 음악과 더불어 발달해왔는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면서 음악 자체가 틀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정식으로 악보가 나오고 이에 맞추어 연주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음역과 음정을 지닌 악기들도 만들어지고 발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그리고 오리엔트 문명에서 유입된 여러 가지 악기들 가운데 가장 널리 정식의 악기로 채택되어진 것들은 바로 류트(lute)와 코넷(cornet), 그리고 오르간(organ)이었습니다. 화음과 음정, 그리고 서정성 등을 하나의 악기로 표현 가능한 류트, 그리고 어떤 부분을 강조할 수 있는 코넷과 넓은 대역을 가진 오르간 - 이들이 고음악을 오늘날의 음악의 역사로 이어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초기의 주요 악기였습니다.
바로크 시대로 진입하면서 여기에는 중요한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바이얼린(violin) 계열 악기의 대두였습니다. 1500년대에 들어와서 이탈리아 북부 크레모나(cremona)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악기들은 늦게 시작하였으나 가장 화려하게 음악의 꽃이 핀 프랑스 궁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류트를 누르고 멜로디 악기의 주역으로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비욜(viol)로 시작된 이들 악기군은 음역과 연주 기법의 발전에 따라 팔을 받치고 활을 그어 연주하는 작은 고역 악기인 '팔로 받치는 비욜(viola da bracchi)'과 무릎에 걸치고 활을 그어 연주하는 큰 저역 악기인 ‘무릎으로 받치는 비욜(viola da gamba)’로 나뉘어졌고, 화려함과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전자는 크레모나의 깊어져가는 전통 속에서 '바이얼린(violin)'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합주부의 가장 중심 악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오르간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교회에서 엄숙한 제례성가를 받쳐주고 또한 단독으로도 연주되면서 그 전통의 맥을 계속 이어왔는데, 세속적 음악이 발전하면서 가볍고 옮길 수도 있는 화음건반악기인 ‘합시코드(harpsicord)’가 함께 진화되었습니다. 영국의 버드(Byrd)나 불(Bull) 같은 이들이 이미 많은 곡들을 쓴 스피넷이나 버지널이 좀 더 제대로 된 소리와 체계, 그리고 형태를 갖추고서 진화하여 이루어진 합시코드는 통주저음 시대를 맞이하여 현악기 합주군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통주저음악기로서 생명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밖에도 훨씬 더 넓은 무대나 공간에서 뚜렷한 소리로 제대로 된 음정을 울려퍼지게 할 수 있는 트럼펫(trumpet)이 - 아직은 불안정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 코르넷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악기들의 변화로 교회에서는 2대의 바이얼린과 비올라 다 감바(나중에는 비올론첼로가 되겠지만...), 그리고 오르간이 연주하는 트리오 소나타의 소나타 다 키에사가 연주되고, 궁정에서는 2대의 바이얼린, 혹은 1대의 바이얼린과 오보에 또는 트라베르소 리코더(세워 부는 일반 리코더가 아니라 옆으로 잡고 부는 플륫의 전신)가 2중주를 맡는 형태의 트리오 소나타인 소나타 다 카메라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로크 음악시대로의 변화와 발전이 물론, 잠깐 동안의 변화나 한두 사람의 작곡가에 의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음악이 나타나고 그레고리안 성가 등의 정제된 형식이 나타난 이래 수 세기에 걸쳐서 나타났던 변화가 마침 이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겹쳐지게 되고 그 발전양식이 너무나도 뚜렷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강하게 인지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바로크의 여러 가지 음악양식이 확연하게 정비되고 정형화되어 마침내 ‘완성’의 단계로 나타나게 된 그 중심에는 한 사람의 작곡가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였던 것입니다.
아르칸젤로 코렐리
코렐리는 1653년 2월 17일 이탈리아의 볼로냐 부근의 작은 마을인 푸시냐노(Fusignano)에서 태어났습니다. 카차티나 G. B. 비탈리같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San Petronio) 음악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 이탈리아 음악과 악기의 중심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었는데, 가장 뛰어난 발전을 보이던 바이얼린을 익히게 된 그는 대단히 뛰어난 연주자로서 곧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17세때 이미 아카데미아 필하르모니카(Academia Filharmonica)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671년 경 로마로 진출한 그에게는 그의 음악적 재능에 반하여 든든한 후원자들이 계속해서 그를 밀어주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베네데토 팜필리(Benedetto Pamphili) 대주교나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 그리고 교황 알렉산드르 3세와 같은 집안 후손으로서 이름이 같은 피에트로 오토보니(Pietro Ottoboni) 대주교들이 들어있었고, 이들은 그를 고용한 음악가라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저택에 살게하고 친교를 나누는 등 그에게 대해 대단히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최고의 후원자였던 피에트로 오토보니 대주교
무엇이 그를 이렇게 최고의 대접을 받게 했던 것일까요?
우선, 그는 당시 가장 각광받기 시작하던 바이얼린의 연주 기법을 열심히 익혀서 마침내 자신만의, 그러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그대로 사용가능한 연주법을 완성시켰다는 점입니다. 연주여행 등의 바쁜 일정 속에서도 그는 작곡과 바이얼린의 양쪽에 걸쳐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피에트로 로카텔리(Pietro Locateli)나 프란체스코 제미니아니(Francesco Geminiani)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는 현대적인 바이얼린 주법들과 기법들을 고안하고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이얼린 현의 데타셰(detache)나 완-급-완-급의 주제펼침 등이 그가 완성시킨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져서 로카텔리는 훗날 중음 연주와 카프리치오를, 제미니아니는 훨씬 더 복잡한 주법과 이에 관한 교본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스승-제자간의 관계는 니콜로 파가니니(Nicolo Paganini)를 거쳐 파블로 사라사테(Pablo Sarasate)에 이르기까지 기교적 유파이자 동시에 현대적인 바이얼린의 연주 중심의 계보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합주 양식의 확립일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연주양식으로서의 소나타와 통주저음의 도입, 그리고 이에 따른 트리오 소나타의 완벽한 구성, 더 나아가서는 콘체르토 그로소의 양식 확립에 이르기까지 그의 뛰어난 현악기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견고하고 구조적인 것으로 집대성’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아니며, 이미 15세기를 거치며 우첼리니, 보논치니, 그리고 스트라델라와 같은 코렐리 이전의 작곡자들에 의하여 볼로냐 뿐만 아니라 모데나나 베네치아, 로마 등의 교화와 궁정에서 상당한 세월동안 작곡가들의 개성과 실험적인 대상이 되어왔던 이들 기악합주양식은 바이얼린의 기량이 급격히 발전하고 다른 악기들의 기량이 어느 정도 안정됨에 따라 서서히 일정한 양식을 확립해왔는데, 코렐리는 이러한 두 갈래의 소나타(교회용과 궁정용)가 서서히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기에 트리오 소나타의 연주 기법을 채용하면서 아울러 통주저음의 개념을 확실하게 하는 4개의 트리오 소나타집(각 소나타집은 12곡으로 이루어지며, 6곡의 교회용 소나타와 6곡의 궁정용 소나타로 구성됨)을 내놓음으로써 모든 작곡가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당시의 음악계 정황으로 보자면, 연주기법과 양식, 구조적 견고함은 과거의 전통과 현재의 최고 기교들을 사용함으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악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한 소나타에서는 라르고(아다지오) - 알레그로(프레스토)와 같은 완 - 급의 템포기호를 사용하였고, 궁정용으로는 맨 앞에 전주곡(프렐루디오:Preludio)을 두고 완 - 급에 대응되는 무곡들의 이름인 알르망드, 사라방드, 지그, 가보트 등을 순서대로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각 악장 간의 완 - 급을 지키면서 악장 내에서도 완 - 급 - 완 - 급의 주제 전개를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통과 더불어 자신만의 구조적 완성을 해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바이얼린과 비올로네 그리고 합시코드를 위한 소나타’ 작품 5의 12곡을 세트로 해서 1700년에 출판하게 되었는데, 이 곡에서는 바이얼린(혹은 트라베르소 리코더 등의 독주 악기로 대신함)과 같은 독주 악기의 역할을 다소 강조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솔로 콘체르토(solo concerto)로 갈 수 있는 작은 다리를 놓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그의 마지막 걸작이자 가장 견고한 구성을 가지면서 음악의 역사상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콘체르토 그로소(合奏協奏曲:concerto grosso)’ 작품 6이 1712년 12월에 완성되었지만 그는 1713년 1월 8일 사망하였으며, 마지막 걸작은 이듬해인 1714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작품 6인 ‘콘체르토 그로소’는 그의 모든 것을 확실하게 담고 있습니다. 우선, 트리오 소나타를 연주하는 악기인 2대의 바이얼린과 저역을 맡을 1대의 비올라 다 감바 및 화음을 맡을 합시코드 1대가 독주악기군(soli)을 이루는데, 코렐리는 이 악기들 파트에 ‘콘체르티노(concertino)’라는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받쳐주면서 함께 연주하는 현악기군 및 통주저음의 화음을 위해 또다른 합시코드가 필요한데, 이들은 리피에노(ripieno:충만하다는 의미), 혹은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라고 표시를 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장들은 언제나 일정한 것은 아닌데, 1번부터 흔히들 ‘크리스마스 콘체르토’로 부르는 8번까지는 교회용 소나타의 전통에 따라 라르고(아다지오) - 알레그로(프레스토)와 같은 빠르기말을 쓰고, 9번부터는 궁정용 소나타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즉 모두 중요한 주제를 담고서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하는 전주곡(Preludio)으로 시작하여 완 - 급의 손서대로 여러 무곡들인 사라방드 ,알레망드, 지그, 가보트 등을 배치하여 12개의 콘체르토 그로소 각 곡당 4 ~ 8악장 구성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1 ~ 4번까지의 통주저음을 이용한 트리오 소나타를 바탕으로 5번의 독주 바이얼린을 위한 콘체르토를 거쳐 6번의 콘체르토 그로소의 완성은 바로크 음악 시대의 큰 하나의 획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맺는말
이제 그에 대한 여러 찬사들 가운데서 우리들이 가장 확실하게 알고 넘어가야할 부분들 몇 가지는 꼭 꼽아봐야만 할 것입니다.
첫째, 그가 ‘콘체르토 그로소’나 ‘트리오 소나타’라는 양식을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여러 작곡가들이 여러 가지 실험적인 요소들로 만들어왔던 음악적 형식을 시대적인 영향력이 강한 그가 정형적인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점 -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 번호 1번의 약보 앞에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러 대가들을 본떠서 만든”이란 문구를 넣고 있습니다.
둘째, 그가 위의 두 가지 양식을 확립한 것은 분명한데, 그와 비슷하거나 더 앞선 양식의 모델을 보였던 다른 작곡가들이 있었음에도 그의 작품이 찬사를 받는 맨 앞줄에 있었다는 점 - 이것은 그의 작품들의 형식적인 견고함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녹아든 음악적 요소들인 주제선율과 이의 전개, 그리고 그러한 곡들이 가지는 따사로움과 균형미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양식적 감각에다 음악성도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이죠.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늘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작품들이 세상에 선보이게 되고나서부터 그의 특성이 너무나도 개성이 풍부한 다른 작곡가들에 의해 ‘청출어람’ 식으로 받아들여 짐으로써 ‘코렐리’는 희미해지고 사라져가기 시작했다는 점 - 하지만 그의 모습은 심지어 쇤베르크와 같은 20세기의 현대 작곡가들에 이르기까지도 그림자일지언정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그의 이러한 양식적 확립과 뛰어난 개성의 표출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확실하고 직설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 - 그래서 J. S. 바하는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서 트리오 소나타와 합주협주곡적인 양식을 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렐리의 최대 라이벌이던 나폴리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Alessandro Scarlatti)마저도 트리오 소나타 형식의 신포니아와 콘체르토 그로소를 위한 작품을 썼으며, 심지어는 떠돌이 작곡가였던 G. F. 헨델마저 저 변방의 영국에 정착하고서 코렐리의 합주협주곡의 명성을 듣고서 자신의 작품 번호 6번을 코렐리와 같이 12개의 ‘콘체르토 그로소’로 함으로써 그의 업적을 기렸던 것입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최고 작곡가이자 무용수였던 장 밥티스트 륄리(J. B. Lully)는 코렐리의 살아생전 극도로 적의감을 내세워 프랑스에 그의 음악이 퍼지지 않도록 애를 썼었으나, 결국 1722년 프랑소와 쿠프랭(François Couprin)이 7개의 이탈리아 풍 트리오 소나타 공으로 이루어진 ‘Le Parnasse, ou L'Apothéose de Corelli’를 발표함으로써 그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코렐리가 작품 5-12에서 다루었던 ‘라 폴리아(La folia)’가 유럽 전역에서 연주되었던 잘 알려진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Сергей Рахманинов)는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란 제목을 붙인, 20개의 변주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곡을 자신의 작품 42번으로 넣었습니다.
바 로크에서 고전악파로 넘어가면서 ‘콘체르토’와 ‘소나타’라는 용어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서 재탄생하게 되었고, ‘트리오 소나타’와 ‘콘체르토 그로소’는 얼마 되지 않아서 주류의 대열에서 멀어지고 말았지만, 코렐리의 빛나는 업적은 ‘음악회상기’란 책을 남기고 1734년에 세상을 떠났던 당대의 음악 평론가 로저 노드(Rodger Node)의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 그러다가 코렐리의 합주곡이 등장하여 다른 모든 형태의 음악이 들어서게 될 터전을 마련했다...마침 콘체르토가 출연했으니, 그 모두가 음악가들에게는 생명의 양식이었다. 거기에다 콘체르토가 아무리 나오더라도 싫증이 날 것같지 않았다. 만약 음악이 불멸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 코렐리의 콘체르토가 그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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