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Lacrymosa 눈물의 날│생각의 理性

리차드 강 2009. 8. 21. 15:36

Lacrimosa from Requiem - 눈물의 날

모짜르트 레퀴엠 중 Lacrimosa

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

Sequenz No.6 Lacrimosa

 

Karl Bohm - Wiener Philhamoniker

     

     

Lacrimosa 합창 - 눈물과 한탄의 날

모차르트 레퀴엠의 애통한 감정의 정점을 이루면서 가장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곡이다. SEQUENTIA를 종결짓는 거대한 악상을 준비하다 모차르트는 숨을 거두게 된다. 비록 쥐스마이어가 보탠 마지막 "Amen"이 이러한 모차르트의 의도에 100%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분명 훌륭한 음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곡의 구조는 참으로 단순하지만 그 선율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한 번의 상승 후에 서서히 낮아지는 형태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 하다. 마지막 "Amen"에서는 더욱 가슴을 파고드는 감격이 있다.

   

     

Lacrymosa

Lacrimosa, dies illa
qua resurget ex favilla
judicandus homo reus
huic ergo parce Deus.
Pie Jesu, Domine,
dona eis requiem.
Amen

눈물의 날

눈물과 슬픔의 그날이 오면!
땅의 먼지로부터 일어난 심판 받을 자들이
대우주 자연의 주인 앞에 나아오리
천지 대우주여 자비로써 그들을 사하소서
긍휼의 대우주의 주인이여 축복하사
그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합장.. 심고.. 아멘..

     

Verdi Messa da Requiem ▶ Lacrymosa

베르디 진혼미사곡 중 눈물의 날

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

Dies Irae - 9. Lacrymosa

 

     

Tomowa-Sintow / Baltsa / Carreras / Van Dam

Herbert von Karajan - Wiener Philharmoniker - Staatsopernchorg

     

     

베르디가 진혼 미사곡을 작곡하게 된 경위는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두 거장, 로시니와 만조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868년 아탈리아 오페라의 선구자 로시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베르디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진혼 미사곡을 작곡할 것을 밀라노의 악보 출판사 리코르디에 제안하여 Messa a ossini 작곡에 몰두한다. 이 곡은 당대 명성이 높은 13명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각 부분별로 작곡하여 1869년에 완성된 공동 작품으로서 베르디는 맨 마지막 부분인 'Liverame'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로시니 사망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이 작품은 연주상의 난해함과 베르디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휘자였던 마리아니의 불성실함으로 인해 연주되지 못하였다. 베르디는 격분하였지만 연주회는 성사되지 못하였고 그는 다시 오페라 작곡에 몰두하여 Aida를 완성하게 된다.

한동안 Aida 공연에 몰두하던 베르디는 진혼 미사곡 전곡을 완성 하기로 결심 하고 로시니를 위해 작곡했던 'Livera me'를 중심으로 하여 전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73년 5월에 그가 매우 존경하던 도 다른 인물인 만조니가 89를 일기로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와 더불어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우리들의 최고의 영예가 사라졌다." 그의 죽음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뒤늦게 그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게 된다. 리코르디를 통해 베르디는 밀라노 시장에게 만조니 사망 1주년 추모행사를 위한 진혼 미사곡을 작곡할 의사를 전했다. 그는 시 당국에서 초연에 드는 비용을 지불한다면 악보를 인쇄하는데 드는 비용을 자신이 부담할 것을 제의했고 시장은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1874년 4월 진혼 미사곡을 완성한 베르디는 최고의 음향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밀라노의 San Marco 성당을 연주장소로 선택했고 120명의 합창단, 100명의 관현악단과 함게 연습을 했다. 베르디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연주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3일 후 베르디는 La Scala에서 두번째 공연을 했다.

초연 전일부터 밀라노에 머물렀던 독일의 지휘자이자 바그너 숭배자인 뷜로우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내일 밀라노의 San Marco 성당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그 자신이 지휘하는 기괴한 진혼 미사곡 -염치없이 로시니의 불멸성을 소멸시키고 이탈리아의 예술적 기호를 파괴하는 작품-연주회가 열릴 것이다. 교회 음악의 옷을 입은 베르디의 최후의 오페라는 또한 3일 연속 La Scala에서 연주될 것이다....."

다음날 신문에, 그는 다시 "뷜로우는 San Marco 성당에서 어제 장관을 이룬 연주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베르디의 교회 음악을 듣기 위해 밀라노로 모인 외국인들 가운데 결코 함께 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뷜로우의 이러한 혹평은 오히려 베르디의 진혼 미사곡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당대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전통을 고수하던 브람스는 진혼 미사곡의 증보를 연구한 후 "뷜로우는 스스로 바보가 되었다. 이것은 천재의 작품이다."라고 단언했다. 뷜로우는 몇 년 후에야 자신의 진정을 토로하면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베르디에게 사과의 편지까지 썼다. 그러한 가운데 빌로우의 청중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베르디의 명성은 유럽 각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곡은 한마디로 '극적인 교회 음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베르디 자신은 결코 이 곡을 오페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일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초연 한 달 전 리코르디에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당신이 원하던 대로 쉬울지는 모르겠지만 표현과 악보에 있어서 쉽지 않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미사곡을 오페라를 부르는 방식으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저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극작용 음악에 적합하지만 이 곡에는 어울리지 않는 악구와 다이나믹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진혼 미사곡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자유롭게 나타냈으며 그의 관심은 사후세계에 대하여 너그럽게 감수하는 마음이나 즐거운 기대감 등에 있지 않았다. 베르디는 작곡 당시 모짜르트, 케루비니, 베를리오즈의 진혼 미사곡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의 작품보다 훨씬 현실감 있게 최후의 날의 공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베르디는 진혼미사곡의 가사에서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고 참회하는 인류의 모습을 발견하여 이러한 광경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베르디의 진혼 미사곡은 단순히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미사곡이 아닌,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는 미사곡이다.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