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갈망

우리들의 아름다운 신부님, 이젠 주교님│경향잡지 2008년 9월호

리차드 강 2009. 10. 7. 02:14
우리들의 아름다운 신부님, 이젠 주교님
     
     
     
     
     
     
     
     
     

프랑스 생드니 교구장 오영진 (올리비에 드 비랑제) 주교

우리들이 아름다운 신부님, 이젠 주교님

프랑스 파리의 북족에 인접한 생 드니 교구의 주교좌 성당에 가면 익숙한 한국말로 "어디서 오셧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교구장 주교를 만날 수 잇다. 이십여 년 전 서울 영등포와 구로 등지에서 생활하던 나날을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산다는 그가 교구 청년 115명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글, 사진, 김은영 기자...

지난 7월 마지막 주에 서울 독산1동 성당에서 생드니 교구 청년들의 한국 문화체험이 있었다. 호주 시드니에서 제23차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하고 곧장 한국으로 건너와 1주일간 한국 신자 가정에 머물며 본당 주변지역과 천주교 성지를 순례한 것이다. 이 문화 체험은 같은 프라도 사제회원인 교구장 올리비에 드 베랑제 (한국명 오영진, 70세) 주교와 독산 1동 성당 주임 주수욱 베드로 신부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올리비에 주교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오래 전 초등부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가 떠올랐다. "가난한 형제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올리비에 신부님/ 천진한 어린이의 친구 되시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멋쟁ㅇ....," 지금은 첫 구절이 '아름다운 신부님' 으로 비뀌어 널리 알려진, 어린이들이 신부님 축일에 예쁜 목소리로 부르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신부님." 노래로만 듣던 분을 실제로 뵙는다고 생각하니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였다.

22일 저녁, 독산 1동 성당을 찾아가니 지역방문을 마치고 온 젊은이들이 저녁기도를 하고 있었다. 동네 찜질방에서 시원하게 땀을 뺀 덕분에 다들 얼굴이 반들반들하다. 젊은이들이 성당 둘레의 공장지대와 가산 디지털단지를 답사하는 사이 김수환 추기경을 뵙고 돌아왔다는 올리비에 주교를 만났다. 김 추기경은 30여 년 전 그를 학국으로 초대한 주인공이다.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친구
"제가 프라도신학교 학장이었을 때 추기경님께서 한국에 프라도 사제회가 있기를 운하셔서 저를 부르셨어요. 시골에서 온 공장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도 어렵고 신앙생활하기도 힘들어하니까, 그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서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셨지요." 가난한 이와 함께 사는 가난한 사제" 영성의 프라도 사제회가 19세기 프랑스의 공업화 물결 속에서 태어났듯이, 1970년대의 한국 사회도 프라도 사도직을 기다리고 있었다.

1978년 9월 입국한 그는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지내며 한국말도 익힐 겸 가까운 지역 본당에 손님신부로 미사를 드리러 다녔다. 일상대화를 할 수준은 못 되고 겨우 미사통상문과 강론만 준비하새 마치고 나오는데 허름한 차림의 신자들이 다가와 고해 성사를 청하더란다. 또렷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물범벅이 되어 속말을 쏟아놓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이어 그는 본당사복과 노동사목 소임을 받고 서울 도림동성당 보좌 신부, 구로본동성당 주임신ㅂ,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로 일했다. 1993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는 양때요 친구는 가난하고 소외된 공장 노동자들이엇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분께 대화나 고해성사를 청할 때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제가 입교할 때도 올리비에 주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고 사랑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어요. 복음을 삶에 비추어 묵상함으로써 인격적인 하느님을 만나게 하신 거죠." 그에게 예비신자 교리를 받은 뒤 프라도 수녀회에 입회한 김경옥 리디아 수녀의 말이다.

앞서 말한 '우리들의 아름다운 신부님' 은 리디아 수녀의 오빠인 김적식 로제리오 씨가 만든 노래다. "소외당한 이들의 벗이 되어주시는 아름다운 신부님/ 무거운 짐 진 사람 도와주시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신부님..." 동요풍의 가락에 얹은 이 노랫말은 실상 1980년대 서울의 어느 풍경이었던 것이다.

절두산 성지에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강론하는 올리비에 주교

내 사전에 외국인이란 없습니다.

17년의 서울살이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마음고생을 햇다. 정이 많은 한국인들과 달리 파리지앵들은 그곳 날씨만긐이나 쌀쌀맞아 보였고, 어찌나 외로웠던지 자신이 외국인 같았단다. 그런대로 새 생활에 적응할 무렵 새 양떼가 맡겨졋다 귀국한 지 3년만인 1996년에 생 드니 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생 드니 (Saint Denig)는 성 디오니시오의 프랑스식 표기로, 교구 관할지역은 파리에서 북쪽 11km 지점의 '센 생 드니' 와 40여 개 중소도시를 아우른다. 인구 150만 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 비율은 약 30%이며, 나머지는 이슬람교, 유다교, 힌두교, 불교가 차지하고 있는 다인종 다종교 지역이다. 한때 공업이 융성하여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정착하였으나, 그 공장들이 철수하면서 실업문제와 인종 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빈곤과 차별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목자가 줄 수 있는 것은 돈도 금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 (사도 3, 6), 그래서 그는 선 양떼를 찾아 나섰다. 본당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마을에 1주일 이상 머무르며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났다. 2년간의 사목방문을 마치고 곧바로 교구 시노드를 열었다. 3년 동안 교구 전체에서 기도모임이 열렸고 큰 공책 한 권이 전 지역을 돌았다. 신자들은 학구의 반모임에서처럼 함께 기도하며 자신들의 기도지향을 공책에 적었다. 이리하여 시노드는 모든 이의 목소리를 듣고 시대에 맞갖은 복음화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가 되었다.

"우리 교구가 파리의 변두리 지역이죠. 아이들도 대부분 노동자의 자식들인데, 부모님이 차별당하는 것을 보고 마약과 폭력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궃은 일을 도맡아 하는 우리 노동자들이외국에서 왔다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난 주교가 되자마자 외국인(이방인_)이란 말 자체를 없앴어요. 교회 안에 외국인은 없다. 우리는 다 형제자매라고 늘 얘기합니다. 2005년에는 ㅅㄴ 생 드니를 비롯한 이주민 거주지역의 청소년들이 파리에서 방화와 소요사태를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때 교황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프랑스의) 이민자들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습니까? 이제는 나라에서 보답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배척하면 안됩니다.' "

많이 공부하고 많이 체험하세요
하지만 그의 소신과 달리 세상에는 아직 편견이 존재한다. 서울의 구로공단은 공단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는 듯 '디지털단지'로 개명했고, 생 드니에도 누가 노동자냐고 물으면 입을 다무는 젊은이들이 많단다. 남들의 시선에 자칫 성처 받고 움츠러들기 쉬운 사람들이 떳떳하고 자신 있게 사는 비결은 공부. 특히 그리스도를 아는 말씀 공부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이번에 한국에 온 우리 아이들이 밤에 길거리에서 붉은 십자가를 보고 뭐냐고 묻기에 설명해 주었지요. 저건 개신교회들인데 한국 개신교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천주교회가 그들 덕분에 성경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게 되었는지 모른다고요.

힌국 사람들은 공부를 참 좋아해요. 옛날에 한국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밤늦은 10시 11시에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거야. 도대체, 프랑스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지. 우리에게는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신 대로 형님인 유다인들이 있어요.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율법을 공부하던 나타나엘 (요한 1, 43-51)의 전통을 본받아야 되지 않겠어요?"

한국과 서울에서의 문화체험과 사목경험을 얽어 [서울의 예수 생 드니의 예수](일빛)라는 책을 내기도 한 그는, "입버릇처럼 서울 자랑을 하다보니 청년들이 시드니 가는 김에 서울까지 가자고 먼저 제안해서 놀랍고 기뻤다." 며 교회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체험햇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국말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유럽 언어에서는 보지 못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는 표현이 참 아름답게 들렸어요. 한글과 한문으로 된 주님의 기도 전문을 4개월 동안 열심히 해석하고 묵상해서 피정 지도할 때, 활용하기도 했지요.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적인 신앙이지만, 여러 민족들의 고유한 지혜와 문화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 '아름다운' 이라는 말을 즐겨 쓰시고 다정한 친구처럼 눈을 찡긋하며 웃으시는 주교님과의 우리말 대화는 퍽 순조로웠다. 주교님은 "지난 15년 사이 한국에서 몇 차례 강의나 피정을 한 적은 있어도 한국말이 잘 나올까 걱정했는데, 성령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이야기가 잘되었어요." 라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청년들의 한국 방문일정이 끝난 뒤, 주교님과 나눈 이야기를 글로 옮기다가 문득 파리 지하철 노선도를 찾아보았다. 수년 전 여행길에서 에펠탑이니 루브루 박물관 같은 관광명소 쫓아다니느라 미처 몰랐던, 노선도 맨 위에 생 드니라는 지명이 붙은 여덟 개의 역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번에 알게 된 그곳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진작 주교님과 벗이 되었을 것을.... 언젠가 다시 파리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그때는 서울에서 의정부 가듯 지하철을 타고 예수님을 나름의 방식대로 따라 사는 생 드니의 형제자매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The Cuckoo Waltz - Will Glahé And His Orchestra
STRICTLY OOMPAH (PHASE 4 DECCA 1969)
Will Glahé And His Orchestra 1932
No.2 - Kuckuckswalzer (뻐꾹 왈츠)
 
음원 출처 : 가톨릭인터넷굿뉴스 음악이야기 - 서상철(요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