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살고싶다면 통화하라! 베리드 2010 │ 영화 & 음악

리차드 강 2011. 4. 12. 11:52

Buried

베리드 2010 Original Soundtrack

Victor Reyes (February 25, 1962 - )

1. Buried (Main Titles) - Track 전곡연주

     

Composer: Victor Reyes

Orchestra: City of Prague Philharmonic Orchestra
Audio CD (4 Nov 2010)
Mono/Stereo: Stereo
Genres: Soundtracks
Number of Discs: 1
Label: Editions Milan Music
Copyright: (c) Editions Milan Music
Total Length: 54:01

     

     

1. Buried (Main Titles)
2. Thanks For Calling The Conroy's
3. You American? Then You Soldier
4. Don't Be Sorry, Just Help Me!
5. I Was Informed Of What's Going on
6. Ssssnake!
7. A Kid From New Hampshire
8. Make Video Now
9. Chicago Field Office
10. Is This Paulie? (You Get Money! And My Name Is Paul Conroy)
11. It's A Bunch Of Lies (The Crack)
12. Can You Track My Cell Signal?
13. I Got You
14. They're Dead
15. You're A Piece Of Shit
16. I Should Have Listened To You
17. You Show Blood
18. I'm Sorry Paul, I'm So Sorry
19. In The Lap Of The Mountain (Garret Wall & The Breath-No-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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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드 2010

영문제목: Buried
감독: 로드리고 코르테즈
주연: 라이언 레이놀즈, 로버트 패터슨, 호세 루이스 크라시아 페레즈, 스티븐 토볼로스키, 사만다 마티스
배급사: (주)화앤담이엔티
제작국가: 스페인
등급: 15
상영시간: 95분
장르: 스릴러, 미스터리
개봉일: 2010.12.08
홈페이지: http://www.buried.co.kr/

     

     

살고싶다면 통화하라!

시놉시스

6피트의 땅 속, 90분의 산소, 탈출구는 없다!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트럭 운전사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 분).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눈을 떠보니 그는 어딘가에 묻혀 있다.
직감적으로 그곳이 땅 아래 관 속임을 안 그.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라이터, 칼,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핸드폰뿐이다.

그 핸드폰으로 구조 요청을 시도하는 그는
아내, 친구, 911, 국방부, 회사 등 닥치는 대로 연락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그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제작노트

2010년 전 세계는 이 문제적인 작품의 등장에 술렁이고 있다! 올해 선댄스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를 통해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탄탄히 조여주는 밀실공포의 <베리드>는 독창성과 서스펜스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새로운 교본이다! [더 타임즈]”, “이 영화는 올 해에 개봉한 모든 ‘고예산’ 스릴러들을 땅에 묻어 버렸다! [스크린 코멘트]”. “호러부터 멜로드라마와 액션까지 빈틈없이 야무지게 이끌어 간다! [버라이어티]”와 같은 호평이 터져나오며 화제의 중심에 있는 영화 <베리드>. 프랑스 자본, 스페인 감독, 헐리우드 배우의 조우로 이루어진 2010 초유의 글로벌 프로젝트, 2009년 <워낭소리>의 신화를 만들어낸 고영재PD가 선택한 걸작, 단 하나의 공간에서 단 한 명의 배우가 펼쳐내는 90여분 간의 숨막히는 이야기를 그려낸 단 하나의 독보적 기획, <프로포즈>,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라이언 레이놀즈가 과호흡증을 일으키며 펼쳐낸 열연, <인셉션>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이을 천재 감독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발견 등 영화에 대한 수많은 이슈가 터져나오며 <베리드>는 2010년 절대 놓쳐서는 안될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렇듯 전세계적 집중을 받고 있는 <베리드>가 마침내 12월 2일 개봉을 확정하며 국내 영화 팬들과의 만남을 카운트다운하기 시작했다.

당신 발 아래 충격의 현장 <베리드>!
숨막히는 문제적 티저포스터 드디어 공개!
이 영화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포스터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력한 비주얼과 임팩트 있는 카피 한 줄로 모든 말을 대신한다. 영화는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트럭 운전사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 분)가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관 속에 생매장 당한 뒤 펼쳐지는 95분 간의 생존을 위한 극한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티저포스터는 6피트의 땅 속에 파묻힌 주인공 폴 콘로이의 상황을 포착, 폐쇄 공간에서 오는 극도의 공포감을 표현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프로포즈> 등의 영화에 출연한 로맨틱 가이로, 혹은 스칼렛 요한슨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라이언 레이놀즈가 관 속에 생매장 당한 남자 폴 콘로이로 분해 그 절박감과 공포심을 완벽하게 그려냈다. 또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칠흑 같은 어둠과 “6피트의 땅 속, 그는 아직 살아있다!”라는 카피는 비주얼과 100% 싱크로율을 이루어 내며 이 남자의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영화만큼 센세이셔널한 <베리드>의 티저포스터는 강력한 비주얼과 임팩트 있는 카피로 관객들의 숨통을 쥐고 흔들며 2010 하반기 화제작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개봉 소식과 함께 티저포스터 공개로 국내 관객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 <베리드>는, 12월 2일 올 겨울 단 한편의 강력한 스릴러로 관객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 예정이다.

     

     

등장인물

폰 콘로이
라이언 레이놀즈
 

댄 브레너 (목소리)
로버트 패터슨

자비르 (목소리)
호세 루이스 크라시아 페레즈

앨런 대번포트 (목소리)
스티븐토볼로스키

린다 콘로이 (목소리)
사만다 마티스

     

     

씨네21 리뷰

■ 완벽하게 갇힌 채 한없이 열린 영화 <베리드>

 

글 : 김도훈 | 2010.12.08

폐쇄된 공간에서만 벌어지는 밀실 장편영화는 많은 장르 감독들의 꿈이다. 실제로 꽤 좋은 장르영화들이 밀실 컨셉을 훌륭하게 밀어붙이며 완성됐다. 빈센조 나탈리의 <큐브>가 좋은 사례다. 다만 1시간30분 이상을 관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채우는 건 조금 무리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생매장>이나 웨스 크레이븐의 <악령의 관>이 생매장의 공포를 장르적 장치로 잠시 이용한 적이 있는 정도다. 물론 <킬 빌2>의 생매장 시퀀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베리드>는 굉장한 야심을 가진 영화다. 주인공은 한명, 카메라는 결코 관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제약으로 1시간30분짜리 장편영화가 가능할까. <베리드>는 그게 가능한 건 물론이고 기막히게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다.

<베리드>에서 생매장당하는 건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트럭운전사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스)다. 인질범들에게 묻힌 콘로이는 라이터와 칼, 휴대폰을 이용해 산소가 떨어지기 전까지 목숨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911 Is A Joke>라 노래한 퍼블릭 에너미의 가사처럼 9·11도, 국방부도, 회사도, 친구도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으른 할리우드 감독이었다면 구출대의 활약을 집어넣고 폴이 묻히기 직전의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주절거렸겠지만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은 깔끔하게 관 속에서 모든 걸 해낸다. 그래서 이게 그저 폐소공포증에 관한 탐구영화냐고? 라이언 레이놀스는 전원이 떨어져가는 휴대폰으로 어영부영대는 관료주의자들과 블랙코미디를 주고받고, 구출대원, 아내와의 통화를 통해 뜨거운 신파를 만들어내고, 갑자기 나타난 뱀과는 근사한 호러 시퀀스를 창조한다. <베리드>는 완벽하게 갇힌 채 한없이 열린 영화다.

글 : 김도훈

     

     

씨네21 20자평

 주성철 영화에서 여전히 아이디어를 고민하자는 선언 ★★★★
 이화정 관습 따위, 모조리 땅에 묻어버린 영화 ★★★★
 이용철 포스트 9·11의 트라우마를 고전적 비극으로 묘사하다 ★★★☆
 박평식 공포를 캐내 시대에 끼얹다 ★★★☆
 김종철 관 속의 1인극… 무섭고 놀랍다 ★★★★
 김도훈 가히 천재적이다 ★★★★
 이동진 형식적 제약이 창의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경우 ★★★★

     

     

[영화읽기] 나는 묻혔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

글 : 김종일 | 2011.01.06

개인이라는 이름의 관에 갇힌 실존의 폐소공포 <베리드>

※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라크전의 전운이 채 가시지 않은 2004년 초여름, 이라크 무장단체가 이 나라 군납업체에서 일하던 한 젊은이를 납치했다. 무장단체는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그를 살해하겠노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카메라 앞에 선 젊은이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죽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다고, 여러분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나의 생명도 소중하다고 애원했다. 그때 무장단체가 제시한 협상시한은 고작 24시간이었다.

납치, 생매장 그리고 휴대전화
불길하고 긴박한 음악을 배경으로 오프닝 크레딧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끝없이 땅속으로 하강하다 사라지고 나면 화면은 한동안 온통 암흑이다. 영사 사고를 의심할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어둠 속에서 영화는 관객을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트럭 운전기사 폴 콘로이가 갇힌 관 속으로 끌어들인다. 가까스로 어둠을 몰아내는 지포라이터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과 맞닥뜨리는 순간부터 관객은 그와 하나가 되어 숨막히는 95분을 오롯이 함께해야만 한다. 발치의 전화기를 집는 데에도 사력을 다해야만 할 정도로 비좁은, 산소가 희박해 숨쉬기조차 버거운, 없던 폐소공포증도 생길 듯한 이 생지옥에서 그에게 주어진 ‘아이템’이라고는 지포라이터와 휴대전화, 야광 스틱과 손전등, 연필과 나이프가 고작이다. 그는 휴대전화를 붙들고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이 나락에서 살아나가고자 용을 쓰지만 상황은 점점 절망으로 치닫는다.

<베리드>는 유례없는 형식의 스릴러다. 물론 <베리드>가 생매장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는 아니다. 일찍이 에드거 앨런 포의 <때이른 매장>을 각색한 로저 코먼의 <중단된 매장>(The Premature Burial, 1962)이 있었고, 프랭크 다라본트는 <생매장>(Buried Alive, 1990)이라는 멋진 선례를 남겼으며, TV시리즈에서는 <CSI 라스베이거스> 시즌5의 마지막 에피소드 <Grave Danger>(2005, 이 에피소드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던 이가 근사한 생매장 시퀀스로 유명한 <킬 빌2>(2004)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사실은 흥미롭다)가 ‘생매장 스릴러’의 전범으로 남았다. 주인공(들)을 한정된 공간에 몰아넣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도록 금을 그어놓는 설정도 앨프리드 히치콕의 <구명보트>(Lifeboat, 1944)나 빈센조 나탈리의 <큐브>(Cube, 1997), 조엘 슈마허의 <폰 부스>(Phone Booth, 2002) 같은 영화에서도 익히 보아온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흔한 플래시백 한번 없이 땅속에 묻힌 단 한명의 인물과 단 한 공간만 비추는 우직한 카메라워킹으로 러닝타임을 메우는 영화는 전무후무하다. 전화 통화나 동영상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화면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라고는 오로지 폴 콘로이뿐이며, 조명이라고는 당장에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라이터 불빛과 야광 스틱, 전화기의 액정 불빛이 전부다. 앞서 열거한 영화들이 돋보기라면 <베리드>는 가히 광학현미경이라 할 만하다. 폴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진땀이 배어나오는 살갗, 진득한 피로 얼룩진 이마와 목울대, 가쁜 숨소리와 다급한 목소리를 통해 그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되다 보니 관객도 그와 함께 절망하고, 발작하고, 눈물짓고, 가쁜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다.

개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베리드>의 공간이 내내 폴이 갇힌 관 속이라는 설정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말한다. “개인만 있고 국민은 없습니다.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폴이 이라크의 어디인지도 모를 땅속에 묻힌 순간, 그가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광장’은 사라지고 숨막히는 ‘밀실’만이 남을 뿐이며, 그는 더이상 ‘국민’도 ‘직원’도 아닌 ‘개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붙들 수 있는 희망의 끈이라고는 오직 휴대전화뿐이지만, 전화기 너머의 타인들은 대부분 사무적이고 매정한 말투로 그 썩은 동아줄 같은 끈일랑 그만 놓으라고 등을 돌린다. 프랭크 다라본트의 <생매장>에서 와인에 탄 독극물을 먹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남편 클림트에게 아내 조애나가 “죽어, 그냥 죽어버려”라고 차갑게 내뱉었듯이. 이라크 주재 인질전담반의 댄 브레너는 폴처럼 인질로 잡혔던 마크 화이트라는 인물을 구출한 전력이 있다며 그에게 한 가닥 희망을 던져주지만 미 공군은 이내 그가 묻힌 지역을 폭격한다. 폭격은 도리어 관 뚜껑을 부수고 관 속에 모래를 쏟아내며 그의 목숨을 위협한다. 게다가 그가 깨진 관 뚜껑 틈으로 새어드는 모래를 가까스로 틀어막는 동안 전화를 걸어온 회사 인사담당자는 그가 사내연애를 했다는 얼토당토않은 구실로 그에게 해고를 통보하기까지 한다. 비로소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한 폴은 나지막이 씹어뱉는다. “네가 나를 여기 넣었어.” 오직 댄 브레너만이 생매장의 위기에 처한 그를 곧 구해주겠노라고 뛰어다니지만, 그마저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희망고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폴은 인질범의 협박에 못 이겨 협상을 호소하는 동영상과 나이프로 손가락까지 자르는 동영상까지 찍어 유튜브에 올렸건만, 끝내 아무도 그를 구하러 와주지 않는다. 폴이 아들에게 동영상으로 유언을 남기다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리는 “내가 유명한 야구선수였거나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었다면 아마 바로 구조했겠지”라는 대사는 그래서 더욱 뼈저리게 가슴에 와닿는다.

허구에 불과한 영화가 현실과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순간 영화는 더이상 허구라 무마할 수 없는 힘으로 관객을 옥죈다. 람베르토 바바의 <데몬스>에서 스크린을 찢고 튀어나오던 악령처럼, 나카다 히데오의 <링>에서 브라운관을 뚫고 기어 나오던 사다코처럼, <베리드>가 그려낸 폴 콘로이의 악몽은 태평양 너머의 이 나라 관객을 불편한 현실로 소환한다.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며 자유롭고 정의로운 이 나라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라고 우리를 어르고 달래는 국가가 막상 국민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국익 운운하며 싸늘하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는 사실, 힘없는 개인에게 위정자들이 내세우는 ‘공정사회’란 허울뿐인 사탕발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국가에게 개인이란, 영화 <파이란>의 이강재의 말대로 “옛날에도 호구(虎口)고 지금도 호구고 국가대표 호구”에 불과한 존재일는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기란, 그야말로 언제 닫힐지 모르는 ‘범의 아가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부질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망루에 올라간 철거민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갈 곳 잃은 노동자들에게 진압봉을 휘두르고, 불도저로 강을 갈아엎고, 대포폰으로 민간인을 염탐하고, 국회에서 격투를 벌이고, 서민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한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국가. 그런 국가에 개인 따위야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불안. 영화 <베리드>의 씁쓸한 결말이 진정으로 섬뜩한 이유는 대다수가 힘없는 개인일 뿐인 우리에게 그런 실존적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장르는 분명 호러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세상의 무수한 ‘개인’들에게 <베리드>는 이보다 더 섬뜩할 수 없는 공포영화다. 단언하건대 내게 올해 최고의 공포영화는 <베리드>다.

다시 2004년 초여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 우리의 외교통상부는 이라크 파병 방침은 변함없노라고 만천하에 천명했다. 무장단체가 제시한 협상시한을 반나절이나 앞둔 오전의 일이었다. 그 다음날 밤, 바그다드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35km 떨어진 지점에서 젊은이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살고 싶다고 절규하던 개인은, 피랍 보름 전 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 ‘하루빨리 한국에 가고 싶’다고 썼던 개인은 그렇게 죽은 뒤에야 고국 땅을 밟았고, 이내 기억하는 이 몇 없는 망각 속에 ‘묻혔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감사원은 그 사건과 관련해 사실상 정부의 책임은 없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때때로 현실은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참혹하다.

김종일 작가. <몸> <손톱>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공저) 등의 책을 썼고, 틈틈이 시나리오와 영화평을 쓰는 중이다.

     

     

[전영객잔] 그 참신함, 나는 즐기지 못하겠네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 2010.12.30

<베리드>가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이유
 <베리드>가 새롭고 독창적인 영화라는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땅속에 묻힌 관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단 한명의 인물로 95분을 버티는 설정, 그리고 그것이 결핍이 아닌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보인다는 점이 그런 평가의 근거들이다. 이미 몇몇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유사한 영화들의 계보를 나열하면서 이런 시도가 얼마나 신선한지에 대해 묻고 증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아이디어에 대한 찬사에 가려진 지점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그래서 더욱 말해지지 않는) 물음을 마주하는 일이 시급해보인다. 우리가 <베리드>에서 보고 있는 건, 정확히 말해 체험하는 건 무엇인가. 혹은, 이 미스터리 스릴러는 관객에게 무엇으로 호소하고 있는가.

이 영화, 기대보다 답답하지 않은걸
이 영화가 안기는 폐소공포증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좁은 관 안에서 영화를 진행시키는 이 단순한 설정의 영화가 관객과 벌이는 유일한 게임은 어쩌면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베리드>를 보고 폐소공포증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고 토로(실은 감탄)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엄살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종일관 관 안에서만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영화와 관객이 동의하는 전제가 폐소공포증을 불러오는 것이지, 그 전제의 영화적 현시에서 그런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지는 않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사방이 꽉 막힌 관 안에서는 이 영화의 촬영이 성립될 수 없다. 실제라면 불가능한 앵글들의 자유로 하나의 공간, 한명의 인물이라는 한계를 상쇄하고 있고, 영화는 그걸 그다지 숨길 생각이 없다. 이를테면 관 천장이 균열되면서 모래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인공은 그걸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천장 위로 쭉 올라가서 주인공을 내려다본다. 혹은 누워 있는 주인공에게는 불가능해보이는 시점 숏도 종종 등장한다. 영화 자신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지지하는 자들도 그걸 이 영화의 결함이 아닌, 제한적 환경을 돌파하는 영리한 영화적 전략으로 기꺼이 수용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기대보다 답답하지 않다. <베리드>가 유사한 장르의 다른 영화들처럼 주인공의 손에 직접 카메라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점, 혹은 그의 모습을 고정된 앵글의 폐쇄회로 화면들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불평하는 평을 읽은 기억은 없다. 당연하다. <베리드>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주인공과 폐소공포증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 겪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위치로 더 기울어져 있다. 다만, <베리드>가 그 극한의 상황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감흥, 그리고 우리가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매달리게 되는 긴장감은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다뤄질 때 생긴다는 사실만큼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허구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려는 비틀린 욕망이 여기 작동한다. 즉 누군가 이 영화를 즐긴다는 건, 이 영화의 ‘현장감’을 믿고 즐기려고 필사적으로 버틴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것이 실시간 현장이 아님에도 실시간 중계처럼 착각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에게 있고, 그런 우리의 욕망을 그럴듯한 현장감으로 자극하려는 욕망이 이 영화에 있다.

여기에 없는 적의 육체
많이 알려진 것처럼, <베리드>는 주인공의 과거를 설명하는 플래시백이나 땅 위의 스펙터클을 단 한차례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영화에 대한 찬사는 영화가 공포를 불러오는 방식, 즉 희박한 구성요소로 포화상태의 감정을 양산해내는 매우 경제적인 발상의 전환에 맞춰져 있다. 9. 11 테러의 트라우마를 닳고 닳은 방식으로 스펙터클화하는 데 몰두했던 할리우드의 지난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이 영화의 방식이 다르기는 하다. 한 남자가 눈을 뜨니 땅속의 관 안이고 옆에는 핸드폰이 놓여 있다. 그 핸드폰으로 납치범에게서 전화가 오고, 납치범은 돈을 요구한다. 남자는 핸드폰으로 가족, 911, 국방부, 회사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하지만, 그 누구도 이 상황에 책임질 의지가 없거나 관료주의적이거나 무력하다. <베리드>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한 공간 안에 갇힌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놓여진 상황은 9.11 이후의 미국이다, 혹은 이라크다. 그런 사건들의 영화적 현시를 생략했다 뿐이지, 이 어두운 땅속의 상황은 굳이 이 영화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포스트 9.11과 관련된 여러 이미지들에 기대고 있다. 이 극한의 장르영화가 사건을 직접 재현하지 않으면서 현실정치의 징후를 환기하는 방식이 신선하다는 일련의 견해에 동의하기 위해서 이 말을 꺼낸 건 아니다.

오히려 <베리드>의 관에서 남자가 벌이는 사투를 영화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9.11 이후의 상황들을 보여주지는 않으면서도 명백히 관 밖에 배치한 것이 이 영화의 어떤 타협처럼, 도피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저예산 영화의 경제적인 선택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사람들이 쉽게 신선하다고 판단하는 그 지점은 다시 질문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며, 그걸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무엇인가.

아무리 한 공간, 한 인물만으로 구성되는 영화라도 이런 장르에는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 있는데, 그건 안타고니스트의 존재다. 일반적인 경우,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형상이나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이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베리드>에서 적의 존재는 의외로 너무 알기 쉽다. 그 적이 주인공을 납치한 이라크인이든, 그를 배신하는 미국 회사든, 혹은 사태를 해결할 생각이 없는 미국 정부든, 그들은 전화 속 음성의 억양만으로도 그 정체를 쉽게 짐작 가능한 존재들이다. 혹은 그들이 주인공에게 왜 그러는지는 영화적으로 딱히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하다(그런데도 영화는 시선의 균형을 의식한 듯, 미국 구조대원의 입을 통해 납치범들의 입장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베리드>는 현실정치를 상투적인 이미지로 가시화하지 않을 뿐이지, 상투적인 대사들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사실, 여기에 내용적으로 새로운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주인공을 땅속에 가두고 죽게 내버려두는 진짜 적은 누구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그런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를 비판적으로 되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베리드>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우리가 적의 정체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적의 실체를 볼 수 없다는 점, 즉 여기에 적의 육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9. 11 이후의 세계라는 사건과 타자로서의 적의 육체성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 이 영화가 경제적 이유에서건 뭐건 그걸 자신의 특이성으로 밀어붙이며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전형적인 형상으로 반복 재생되는 것만큼, 아니 이제는 그보다 주의 깊게 들여다볼 문제다.

희망 아닌 호기심으로
이 영화에서 사건과 타자는 모두 목소리로만 등장하고,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기계에 녹음된 텅 빈 음성으로만 존재하는데, 그때 이들의 존재는 땅속에서 몸만으로 벌어지는 상황의 현장감에 비한다면 가상으로 느껴질 정도다. 관 속 주체의 시간과 관 밖 타자의 시간은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긋나거나 분리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타자의 육체, 사건의 실체가 사라진 자리는 이제 오로지 주체의 몸뚱이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그 몸은 산소와 핸드폰 배터리의 고갈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소멸을 향해 가는 주체의 육신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실재이다. 혹은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만이 실재이다.

내 생각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주인공이 언젠가 살아서 관 밖으로 나갈 거라는 희망 때문에 끝까지 보는 게 아니라, 그가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는 것 같다. 95분간의 처절한 싸움 뒤에 그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베리드>에서 주체가 싸워야 할 대상은 단 하나, 죽음 그 자체다. 차라리 그의 안타고니스트는 그에게 죽음의 시간을 알리고, 지연시키고, 때로는 죽음의 순간을 중계하고(동료가 처형당하는 장면), 다시 재생하고, 마침내 그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이미지화하는 핸드폰이 아닐까. 핸드폰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애초에 성립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핸드폰은 주인공에게 남겨진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허락된 최후의 물리적 현존, 혹은 최소한의 육체성마저 추상화하는 죽음 기계다. 또한 관객인 우리에게 그것은 죽음과 접속하는 유혹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베리드>에 대한 열광이 새로운 장르적 형식에 대한 것이라면, 그 새로운 형식의 다른 말은 죽어가는 육신을 전시하고 관찰하는 영화적 틀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즐기고 기대하는 현장감이란, 사건의 현장감(재현)이 아니라, 죽음의 과정을 생생하게 구경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장감, 실은 사건과도, 타자와도 분리된 것이다. <베리드>를 보며 나는 이 시대, 영화가 사건과 타자의 육신을 지운 자리에서 무엇과 싸우는가, 혹은 어떻게, 무엇으로 이야기를 버티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그때 등장인물의 구원(결국 주인공이 살아남는지, 죽는지의 여부)이 아니라 영화의 구원이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해 근심하게 된다. 지금으로서 내게 <베리드>는 영화의 구원을 포기하는 데서 장르적 쾌감을 발견한 영화이며, 설사 그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일련의 평가처럼 참신함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그 참신함을 나는 즐기지 못하겠다.

남다은 빛나는 영화로 올해 마지막 객잔을 마감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관 속에서 마무리하게 되다니... 어쨌든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자학의 시, 혹은 영화 만들기

글 : 김혜리 | 2010.12.17

<베리드>(Buried)를 119 소방재난 본부 대원들과 한 극장에서 보았다(자못 안심이 됐다). 영화는 예술적 쉼표인지 영사사고인지 잠시 동요할 만큼 기나긴 암전으로 시작했다. 하긴, 정신을 잃은 사이 생매장된 남자의 이야기이므로 인물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빛도 말소리도 없는 게 맞다. 러닝타임 내내 인물과 영화를 사막에 파묻힌 관 안에 철저히 감금한 이 영화는, 하나의 롱테이크로 찍은 영화나 전체를 시점 숏만으로 편집한 영화 등과 더불어 ‘영화적 스턴트’ 장르로 묶어도 좋을 법하다. 설정을 알고 있던 내겐 두 가지 걱정이 있었다. 하나는, 플래시백이나 플래시 포워드로 영화가 비겁한 탈출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고, 또 하나는 혼잣말 대사가 쏟아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둘 다 기우였다. 딴소리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자, 이제라도 도망쳐!”라는 대피 사이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면이 있으니, 주인공이 혼잣말로 내면의 감정을 중계하기 시작할 때다. 어쨌거나 이런 부류의 영화답게 <베리드>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양극이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침통한 신음소리를 내며 동행과 다투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에서는 극장의 불이 켜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가 환호를 보냈다. 최근에는 <데쓰 프루프>와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시사회가 유사한 풍경이었다. 취향을 떠나 폐소공포증 관객에 대한 경고는 첨부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폐소애호증’에 가까운 나 같은 관객의 손톱도 영화를 본 뒤 열 중 일곱이 물어뜯겨 있었으니까.

글 : 김혜리

     

     

[라이언 레이놀즈] 완벽히 새로운 스타일의 할리우드 스타

글 : 김도훈 | 2010.12.17

<베리드>의 라이언 레이놀스

미스터리다. 라이언 레이놀스가 할리우드의 가장 촉망받는 남자배우이자 타블로이드가 쫓아다니는 슈퍼스타가 된 건 미스터리다. 그게 왜 놀랍냐고? 지금 가장 몸값 비싼 주연급 스타들을 열거해보자. 그들 대부분은 20대의 청춘에 이미 스타가 됐다. 톰 크루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아역 시절부터 스타였다. 멧 데이먼 역시 이른 이십대에 스타가 됐다. 30대에 스타가 된 남자들은 대부분 수입된 스타들이거나(러셀 크로나 휴 잭맨, 휴 그랜트 같은 남자들), 할리우드로 진출한 TV스타다(그렇다, 조지 클루니). 10대 아역으로 출발한 라이언 레이놀스는 지금 서른다섯살이다. 대체 20대와 30대 초반의 그는 뭘 했단 말인가.

레이놀스의 과거를 추적해보자. 그가 처음으로 블록버스터에 주요한 ‘조연’으로 출연한 <블레이드3>(2004) 이전의 경력 말이다. IMDb를 뒤져보면 <블레이드3>와 같은 해 출연한 <해롤드와 쿠마>에서 남자 간호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얼굴이 기억나는가? 그럴 리가. 이 모든 라이언 레이놀스 신드롬(적어도 미국에서 그의 인기는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의 시작은 2008년과 2009년이다. 샌드라 불럭과 함께 출연한 <프로포즈>가 로맨틱코미디 역사상 최고 성적을 올렸고,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데드풀 역할은 차세대 액션스타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며, 무엇보다 레이놀스는 세상 모든 남자들의 절규를 뒤로하고 스칼렛 요한슨과 결혼했다. 이 캐나다 남자는 겨우 2년 사이에 우주왕복선이 치솟아오르듯 할리우드 권력의 중심으로 튀어올랐다.

<더 나인스> 배우로서의 기상 알람
라이언 레이놀스가 스타의 지위에 오르기 전까지 걸어왔던 뒤안길은 꽤나 눈물겹다. 1976년생인 그는 1991년과 93년 사이에 방영된 아동용 TV채널 <니켈로디언>의 시트콤 <힐사이드>에 출연하면서 아역배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10여년간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이 그러하듯이, 레이놀스 역시 운이 없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증언한다. “13살에 연기를 시작했죠. 대마에 취한 고딩들을 위해 3년이나 방영된 끔찍한 <니켈로디언>의 소프 오페라로 말이죠. 14살에 스리랑카에서 첫 영화를 찍었어요. TV영화 하나를 찍으려고 내전이 한창인 나라에 부모도 없이 머물렀습니다. 끔찍하죠 정말.” 싸구려 TV용 영화에만 출연하며 10대와 20대 청춘을 허비하던 그는 심각하게 연기를 포기하려다가 마지막 기회를 위해 LA로 갔다. 주거지는 LA 변방의 싸구려 모텔이었고, 재산의 전부인 자동차는 LA에 도착하자마자 언덕에서 구르는 바람에 문도 달려 있지 않았다.

라이언 레이놀스는 2002년작 코미디영화 <엽기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꿰찼다. 그러나 레이놀스에게 미래의 스타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에 출연한 영화에서 그는 190cm에 가까운 꺼벙한 키와 소년처럼 친근한 미소를 이용한 코미디영화의 주연으로나 쓸 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레이놀스 스스로 어떤 이정표라고 말하는 영화는 존 어거스트가 감독한 2007년작 <더 나인스>다. “배우로서의 기상 알람과도 같은 영화였다. 영화 만들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더 나인스> 이후 비로소 야망이 생겼고, 특별한 역할을 찾아 헤매게 됐다.” 그는 야망을 가졌고, 야망을 위해서 필요한 건 연기와 좋은 역할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레이놀스는 아도니스의 곡선을 몸에 덧씌운 뒤 <블레이드3>에서 총과 검을 휘둘렀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나는 언제나 과체중에 여드름쟁이 꼬맹이라며 스스로를 비하하곤 했다. 영화는 그런 오랜 근심에서 빠져나갈 길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베리드> 이후 <그린 랜턴>으로 진정한 스타의 반열에

<프로포즈>의 대성공 이후 놀라운 저예산영화 <베리드>로 자신이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걸 증명한 라이언 레이놀스는 내년에 개봉하는 <그린 랜턴>의 주인공 역을 맡음으로써 진정한 스타의 지위에 올랐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린 랜턴’은 DC 코믹스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슈퍼히어로 중 하나이며, 수많은 스타가 탐낸 역할이다. 그는 자신이 <베리드> 같은 저예산영화와 <그린 랜턴>에 동시에 캐스팅될 수 있는 이유가 오랜 무명의 그림자 덕분이라고 말한다. “내가 스물한살부터 이미 유명한 스타였다면 이런 역할들이 동시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다. 내 경력은 서서히 올라선 점층적인 영화들의 총합이고, 그 덕분에 좀더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린 랜턴> 이후 레이놀스는 지금 할리우드의 어떤 젊은 남자배우들보다도 바쁠 예정이다. <더 행오버>의 제작진이 모여서 만드는 R등급 코미디 <체인지 업>, 샌드라 불럭과 다시 만나는 액션코미디 <모스트 원티드>가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그는 무수한 도전자를 젖히고 덴젤 워싱턴과 공연할 액션스릴러 <세이프 하우스>의 주연 자리를 꿰차는 데도 성공했다. 레이놀스가 젖힌 도전자가 누구냐고? 샤이어 라버프, 제이크 질렌홀, 크리스 파인, 샘 워딩턴, 톰 하디, 채닝 테이텀, 잭 에프런, 제임스 맥어보이다. “이런 역할들 중 나에게 ‘어서 옵쇼!’라며 배달된 건 없다. <그린 랜턴>을 위해서는 스크린 테스트를 두번이나 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역할을 따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의 성과가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더 재미있는 건 라이언 레이놀스가 <그린 랜턴>에 이어 두편의 슈퍼히어로영화를 더 찍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데드풀’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다른 하나는 다크호스사의 인기 코믹스를 영화화하는 <R.I.P.D.>다.

이웃집 청년처럼 생긴 영웅
이로써 분명한 것은 이 캐나다 출신의 남자가 새로운 미국의 영웅이라는 거다. <피플>이 그를 “살아 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뽑건 말건 간에 사실 라이언 레이놀스의 외모가 딱히 영웅적인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10대를 대상으로 한 코미디에서 쿼터백 조연으로나 잠깐 출연할 듯한 얼굴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스타파워가 박스오피스에서 맥을 못 추고, 타블로이드와 인터넷이 스타의 아우라를 지워버린 시대. 라이언 레이놀스는 언제나 기분 좋은 이웃집 청년의 얼굴로 뒤늦은 스타덤에 올랐다. 어쩌면 이 남자는 할리우드의 21세기를 알리는 첫 번째 ‘새로운’ 스타일지도 모른다.

글 : 김도훈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