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Muss I Denn - Schoneberger Sangerknaben│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

리차드 강 2012. 6. 19. 16:46

Muß i denn - Schöneberger Sängerknaben

Wir wollen Freunde sein (1997)

Schöneberger Sängerknaben 1947-

No.9 - Muß i denn zum Städtele hinaus

 

50 Jahre Schöneberger Sängerknabe 1997
Schöneberger Sängerknaben : 1947-
Dirigiert von Gerhard Hellwig
Level : MONOPOL-Records Berlin
Muß i denn zum Städtele hinaus

Muß i' denn, muß i' denn
Zum Städtele hinaus,
Städtele hinaus
Und du mein Schatz bleibst hier
Wenn i' komm', wenn i' komm',
Wenn i' wiederum, wiederum komm',
Kehr i' ei' mei' Schatz bei dir

Schoneberger Sangerknaben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
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adtele Hinaus (떠나자 이 도시를)

"베를린의 어린 홍보대사"로 5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검은색 반바지와 무릎까지 오는 흰색 양말을 신고 행진한다. 그들은 베를린의 상징인 곰 문장을 달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른다. 1947년 게하르트 핼비히에 의해 35명의 소년으로 창립된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전후 독일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독일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으로서 독일 민요와 베를린 거리의 유행가, 동시대의 합창곡을 불렀다.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멜로디와 가사를 통해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노래들을 다채로운 색깔로 표현한다. 이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음악들은 역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독일의 주요지역인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방에서 나온 히트곡들은 새롭게 재정비하여 텍스트화되었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노래는 즐겁다>란 곡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Elvis Presley도 란 제목으로 부른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베를린의 홍보대사, 55년 전통의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

쇠네베르거의 탄생

지난55년 동안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반바지와 흰 양말 그리고 베를린의 곰 문장으로 자신들을 알려왔다. 게하르트 핼비히(Gerhard Hellwig)가 1947년 11월 12일 문화부의 도움으로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을 창설했을 때 베를린은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세 집 건너 한 집이 무너진 상태였다. 많은 바버지들이 전사하였거나 전쟁 포로로 아직 석방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루 양식이 1500칼로리였고 빵 값은 80마르크였으며, 1파운드 버터는 600마르크였다. 약 30만 베를린 시민들이 실업자였고 시민 거의 모두가 용기와 희망을 잃어버렸었다.

이런 시기에 게하르트 핼비히가 소년합창단을 소위 길거리에서 찾아 모으기 시작했는데 전쟁 고아 소년들에게 가정과 목표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핼비히의 목표는 조금 남달랐다. 핼비히는 처음에는 정치적인 운동을 하려고 했다. 그는 합창단과 함께 전세계 투어를 하며, 그 당시의 독일 젊은이들이 나치시대의 젊은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고자 했다. 전세계의 언어로 된 음악으로 말이다. 베를린 출신 소년들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전세계에 새로운 베를린의 이미지를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헬비히는 이 합창단의 이름을 ‘베를린 소년합창단’이라는 이름 대신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낸 ‘베를린 쇠네베르거’ 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헬비히의 음악적 뿌리는 클래식이다. 그의 아버지는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의 카이제(Kaiser) 황제 궁정의 음악 감독이었다. 바이마르 음악 콘서버토리(Weimar Music Conservatory)를 졸업한 헬비히는 소규모의 소년합창단의 창단이 베를린 시민과 독일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알지는 못하였다.

데뷔와 냉전시대

동, 서독을 망라해 노래를 할 줄 아는 소년들이 우선 멤버로 뽑혔고 쇠네베르거 시청(1990년까지 서베를린의 시청)에서 연습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비공식 공연은 병원에서 이루어졌는데 헬비히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베를린 시민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구소련의 철의 장막으로 냉전은 시작되었지만 서부 동맹국들은 서베를린의 편에서 음식과 일용품을 공급하였고 서베를린 시민들은 커가는 자신감으로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한다.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1949년 폭격으로 무너져 재건된 독일 베를린 오페라(German Opera at Berlin)에서 바그너(R. Wagner)의 ‘탄호이저’로 공식적인 데뷔를 한다. 그 당시 오페라의 소년합창 부분을 쇠네베르거가 노래하는 계약을 맺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전통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카르멘’이든, ‘토스카’ 또는 ‘라 보엠’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쇠네베르거가 참여했으며 이는 단지 베를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빌란트 바그너(Wieland Wagner: R. Wagner의 손자)는 이 합창단에 관심을 가졌고, 급기야 1954년 할아버지가 만든 바이로이트 축제공연(Bayreuth Wagner Festival)에서 ‘탄호이저’ 연출을 맡은 그는 소년합창단과 함께 공연하기를 요청했다. 그 이후 2년 동안의 ‘탄호이저’ 공연의 공동작업으로 핼비히는 바그너의 예술감독으로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 그 이후 파바로티가 참여한 ‘라 보엠’(1971), 카라얀과 카레라스가 참여한 ‘카르멘’(1983)을 비롯한 수많은 오페라 레코딩에 그들은 계속 파트너 관계로 명성을 날렸다.

2차 대전 직후에 탄생하여 어두운 냉전 시대를 거치는 동안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베를린을 대표하는 문화적 산물이 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생긴 날 단원의 반이나 되는 동베를린 출신 멤버들과의 슬픈 작별을 고하는 노래를 불렀고 쇠네베르거에게 있어 냉전은 사랑하는 친구와 이웃을 갈라놓은 지독한 경험이었다. 케네디(Kennedy)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여 의회 앞에서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베를린은 자유세계에 속한다”(Berlin belongs to the free world) 란 유명한 연설을 할 때 그들도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어떤 소년합창단도 쇠네베르거만큼 냉전의 상징적인 역할을 한 합창단이 없으며 이는 결국 독일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공연 및 세계여행

1962년 당시 헬비히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감독이었고 1964년에는 Berlin Festwochen(베를린 축제 주간)의 감독으로 1965년에는 Berlin Theater Meet의 공동 창업자가 되었다. 합창단과 지휘자는 그들만의 이름을 만들었고 창설 당시의 목표대로 합창단은 전세계 투어를 하였다 1967년 몬트리얼에서 개최된 World Fair를 시작으로 뉴욕에서 열린 독일계 미국인 축제인 슈토벤 퍼레이드(Steuben Parade)에는 네 차례나 참여하였다. 1972년 헬비히는 Philhamonia Hungarica 오케스트라의 감독 겸 지휘자가 되었고 1974년에는 베를린의 RSO(Radio Symphony Orchestra)의 감독 겸 지휘자가 되었다.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1978년 백악관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에게 베를린의 음악적 인사를 전달했다. 1982년에 헬비히는 그 업적으로 인하여 Bundes Varddienst Kreuz(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 1987년은 베를린이 750주년이자 쇠네베르거가 40주년이 되는 해였는데 헬비히는 ‘한 여름 밤의 꿈’(A Mid Summer Nights Dream)을 포함하는 여름 밤 갈라 콘서트인 ‘Sternstunden’(별들의 시간)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89년은 독일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해 여름 헝가리가 서방으로 자신의 국경을 열었고 수 만 명의 서독인이 동독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이 동독의 평화혁명에 불을
당겼고 마침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연이 펼쳐졌고 부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150만 명이 운집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서 쇠네베르거는 또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서부의 두 동맹국의 송별파티에서 그리고 젊은 러시아 군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또 쇠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평화와 문화의 사절로 세계 제 2차 대전의 희생자를 기리는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포로수용소 해방 50주년 행사에도 참여하였다.

1993년 헬비히는 최고 명예 훈장인 비스마르크 메달을 받았고 1995년에는 아티스트가 선정한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했다. 1997년 50주년은 특별한 해였다.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롭 타미노(Rob Tamino)는 (우리는 이제 50살이라네)라는 50주년 기념 노래를 작곡하였다. 그 해 4월 이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35명의 소년합창단과 몇 몇의 창단 멤버를 포함한 65명의 이전 단원들 그리고 베를린 빅 밴드의 유명 뮤지션들까지 무려 120명이 참여하였다.

쇠네베르거의 복장

쇠네베르거가 창단되었을 때는 당시 독일의 소년들은 유럽의 다른 소년들처럼 그들도 짧은 반바지를 입었다. 독일의 소년들은 주변국의 소년들과는 다르게 추운 겨울 날에는 긴 바지를 입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양말이나 무릎을 덮는 양말을 신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쇠네베르거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독특한 유니폼을 입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으므로 멋진 양복을 살 수가 없었기에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검은색 반바지에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흰색 양말을 신었다. 이들은 자켓에 넥타이를 매는 대신 칼라를 열고 있는데 가슴에는 베를린을 상징하는 곰의 문장이 박혀있다.

최고 14살까지인 오늘날 이 소년합창단원은 베를린 출신뿐 아니라 한국에서 폴란드 그리고 미국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하지만 추세에 따라 옷을 바꾸는 다른 소년합창단들과는 달리 쇠네베르거는 창단 당시의 복장 ? 검은색 자켓, 흰색 셔츠, 합창단 뱃지가 달린 검은색 스웨터, 검은색 반바지, 흰 무릎 양말 그리고 검은색 구두- 을 고집한다.

쇠네베르거의 음악적 색채

쇠네베르거는 소년합창단은 양로원과 병원, 베를린의 거리와 광장에서 노래했었다. 그들은 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합창단이지만, 그들에게는 남다른 목표가 있었다. 즉, 그들은 음악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고 정의로운 합창단이 되고자 했다. 그들의 공동체는 그들에게 전쟁 이후의 걱정과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독일의 첫 번째 어린이 합창단 중의 하나로서 독일민요와 베를린의 거리유행가, 동시대의 합창곡을 불렀다. 클래식의 범주를 벗어나 독일 특히 베를린의 민요, 유행가를 많이 불렀는데 그 대표작이 바로 <안녕히 계세요>(Auf Wiedersehn)와 우리에겐 <노래는 즐겁다>로 알려진 Elvis Presley가 란 제목으로 부른 너무나 유명한 <떠나자 이 도시를>(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adtele Hinaus) 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어린이 합창단이 통속적인 유행가를 부르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게하르트 핼비히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통속적인 유행가야 말로 합창단을 유지시키는 보조역할을 한다." 그 말은 옳았다. 왜냐하면 한 합창단이 어떤 보조 없이 계속 유지되려면, 그 자체가 재정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공식적으로 규칙적인 보조금을 받은 적이 없다.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비록 그런 유행가를 불렀지만, 그들의 예술적인 의도를 잊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현대 합창음악을 계승해나갔다. 그 소년들이 동시대의 음악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 당시 누가 그 몫을 담당했을까? 유명한 작곡가들은 이런 합창단을 위한 곡을 특별히 썼으며, 그들의 명성은 계속 높아만 갔다.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은 멜로디와 가사를 통해서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의 노래들을 다채로운 색깔로 표현한다. 이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음악들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독일의 주요 지역인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 지방에서 나온 히트곡들은 쉐네베르거 소년합창단에 의해서 즐겁고 낙관적인 노래로 재정비되어 다시 텍스트화되었다. 34명의 쇠네베르그 소년합창단은 "베를린의 어린 홍보대사"로 일컬어지며, 오늘날 부란덴브루크 문이나 방송탑처럼 베를린 시에 속해있다. 1947년의 창단 멤버들은 긴 세월 동안 이미 오래 전에 "늙은 소년들"이 되었지만, 합창단은 영원히 어린 소년합창단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 편집자 | 2003/09/15

출처 : 가슴 네트워크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