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어머니와 고등어 - 산울림(김창완)

리차드 강 2012. 9. 10. 07:34

어머니와 고등어 - 산울림

김창완 1집 ..... 기타가 있는 수필 (1983)

김창완 (1954 ~ )

Track.07 - 어머니와 고등어

 

어머니와 고등어

(작사:김창완 작곡:김창완)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보다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 놓고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

 

계보학적으로 볼 때 이번 신작의 효시가 되는 그의 솔로 앨범. 산울림이라는 틀로도 메꿀 수 없었던 넘치는 그의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발효된 걸작이다. "어머니와 고등어" "비닐 장판의 딱정벌레"를 위시하여 "초야"와 "무슨 색을 좋아해도" 같은 심각하지 않은 그의 정서가 깔끔하게 표명되어 있다. 이 통기타의 정서는 꾸러기들의 앨범에 그대로 이어진다.

재발매 음반(CD)에는 모 피자 광고에서 김창완이 빠빠빠~재밌게 부른 곡 "빗소리"가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Introduction

출생 1954년 / 한국
학력 1975년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

프로필
경 력
-1977년 그룹 산울림의 '아니벌써'로 가수 데뷔
-1985년 '바다의 노래'로 연기생활 시작
-1996년 MBC FM 김창완의 골든 디스크 진행
-1996년 영화 <정글 스토리>에 출연

'김창완' 의 음악 활동
도시락특공대 (2000)  강태환, 성기완, 신대철, 원일, 위승희, 이상은, 이제하, 장사익, 한대수, 황신혜밴드

도시락특공대 (1997) 강산에, 삐삐롱스타킹, 어어부 프로젝트, 원일, 이상은, 장영규, 황보령, 황신혜밴드

꾸러기들 (1986) 신정숙, 윤설하, 임지훈, 최성수, 현희

꾸러기들 (1985) 권진경, 신정숙, 이호찬, 임지훈, 최성수

산울림 (1977) 김창익, 김창훈

김창완, 그는 이미 설명이 필요 하지 않을 만큼 유명하다. 현재도 활발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작사, 작곡 등 창작 활동도 왕성하여 다작하는 중에도 졸작이 하나도 없는 천재형의 음악인이다. 지적이면서도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외유내강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작품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노래하고,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고 싶다는, 아무리 나이들어도 솜털을 벗지 못하는 여린 동심을 가진 만년 소년이다.

     

산울림

김창완이 친동생 김창훈, 김창익과 함께 만든 그룹 '산울림'은 실제로 직업적인 락그룹이 되기 위해 앨범을 만든 건 아니다. 1972년 경에 그가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음악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김창훈이 기타를 하나 더 장만하자, 할 것이 없는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내면서 그들의 음악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1977 대학을 졸업(서울대 농대 잠사학과)하면서, 그동안 작곡을 하였던 약 150 여곡들이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들은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을 허락했고, 녹음날 취직시험이 있던 그는 과감히 녹음을 하기로 결정하고 녹음한 것이 바로 '산울림'의 탄생이었다. rock이 그다지 대중화되지 못한 70년경에 '산울림'의 "아니벌써"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국내 가요계를 흔들어 놓았고, rock의 대중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집의 '산울림'은 다시 한번 앨범을 낼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집 "내마음의 주단을 깔고"이고, 이 앨범은 '산울림'을 국내가요계의 앞서가는 그룹으로 완전히 자리 굳히게 한다.

1979년 창훈과 창익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기를 거쳐 1981년 7집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무렵에는 "산할아버지" "개구쟁이"등 어린이를 위한 세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이 노래들은 지금도 각종 모임과 운동경기에서 단골로 불려지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1983년 산울림은 9집을 끝으로 해체했다. 두 동생은 사회인이 되었고 맏이인 그만이 산울림의 이름으로 3장의 음반을 내는 등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신인들을 모아 '꾸러기들'을 결성하여 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현희, 신정숙 등을 길러냈다. "꼬마야" "고등어" 등 히트곡도 냈다. 그의 음악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산울림의 연장선상이다.

'산울림'의 78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첫 공연은 새벽부터 장사진을 치는 소동을 벌였고, 관객들이 던진 꽃으로 무대가 뒤덮이는 소동을 벌이는 등 많이 화제를 낳았다.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음악정신에 젊은이들의 열광이 따랐다. 77년생 아이는 '산울림동이'로 불렸을 정도이니 인기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3년 활동을 중단한 이후 14년만에 본격 활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삼형제 록그룹 '산울림'의 복귀는 신선함과 충격 이상이다. 산울림은 90년대의 록 평론가들에 의해 신중현과 들국화와 더불어 한국록 역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문제적 데뷔 앨범'으로 평가받는 산울림 1집이래 '산울림'이란 이름으로 작년까지 13집이 출반 되었다. 네 개의 동요앨범, 두개의 독집도 그의 앨범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의 음악은 어떤 장르에 있더라도, 상투적인 문법을 거부하는 창의성으로 빛난다.

'산울림' 음악의 전반적인 관심은 '인생'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2집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다. 좀더 깊은 주제에 관해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이게 되면서 산울림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말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해서, 노랫말도 참신함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구어체 문장을 그대로 가사로 사용해 위트와 파라독스가 생동감 있게 표현된 노랫말은 우리 가요계의 발전에 커다란 시금석이 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산울림의 앨범 자켓은, 자켓의 1/4이 조금 넘는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왼쪽 중간에 있고, 그 오른쪽에는 '산울림'이라는 특이한 글씨체로 그들의 그룹명을 적어 놓았는데, 12장의 정규앨범들이 나오면서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만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가수의 사진을 앨범 자켓에 싣는 것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앨범 자켓에서도 그들은 앞서 가고 있었다.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