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통일

학살 2 - 故 김남주 詩人 │ 명복을 빌면서

리차드 강 2007. 4. 9. 14:16

학살 2 - 김남주 [전사2 / 학살2 (1997)]

김남주 시인 육성시선 낭송집 1997

김남주 1946-1994

Track.02 - 학살 2

Introduction

김남주 시인은 80년대 한국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는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나간 '전사(戰士)시인'이며,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민족 시인'이다. 또한 청춘의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등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혁명 시인이었다.

1946년 전남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호남의 명문 광주일고를 입학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 자퇴하였고 이후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중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반독재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2년과 이듬해에 전국 최초의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배포하여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이후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창작과비평』에「진혼가」등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민 김남주 시인은 이후 작가 황석영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 등을 결성하기도 했다.

1978년 가장 강력한 반유신투쟁 지하조직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4일, 80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구속된 김남주 시인은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광주교도소 등지에서 복역했다. 그는 옥중에서 교도관 몰래 수많은 옥중시를 써서 극비리에 유출했는데, 이 시들은 80년대 우리사회 변혁운동에 일대 도화선이 됐다. 또한 김남주 시인은 1988년 12월 21일 9년 3개월의 옥고 끝에 석방되기까지 80년대 한국문학의 빛나는 정점이자, 큰별이었다.

김남주 시인은 석방 이후 각종 재야집회에서 시낭송을 했는데 이는 만인의 심금을 울린 뜨거운 절창이었다.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은 이 육성 시낭송을 사이버 상에 최초로 공개한다. 김남주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민예총 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단재상·윤상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서거 이후에 민족예술상이 수여되었다.

김남주 시인은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으로 투병하다가 1994년 2월 13일, 불과 마흔 아홉의 나이로 그 생을 마감했다. 2월 16일, '민족시인 고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이 치러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됐다. 2000년 5월 20일, '민족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와 '광주전남작가회의' 주최로 광주 비엔날레공원 안에 대표작「노래」가 수록된 '김남주 시비(詩碑)'가 제막되었다. 유족으로는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다.....


1984년 첫시집『진혼가』간행
1987년 제2시집『나의 칼 나의 피』간행
1988년 제3시집『조국은 하나다』간행
1989년 시선집『사랑의 무기』제4시집『솔직히 말하자』간행
1990년 광주항쟁시선집『학살』간행
1991년 제5시집『사상의 거처』간행
1992년 제6시집『이 좋은 세상에』 및 옥중시선집『저 창살에 햇살이』간행
1993년『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재출간
1994년 유고시집『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간행

학살 2 -  김남주(시 : 낭송)

편곡 : 윤민석(편집)

오월 어느날이었다
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80년 오월 어느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날 낮이었다

낮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치밀하지는 않았으리

     

     

     

     

     

     

김남주 시인, 27년만에 민주화운동자로 인정

 

◀ (사진 : 故 김남주 시인)

'전사'로 기억되기 바랐던 고 김남주 시인(1946~94)이 27년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하경철)는 13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 관련자 중 김 시인을 비롯한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고 김남주 시인 등 29명 인정

'남민전'은 고 이재문·김남주, 수학자 안재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이 지난 1976년 2월 반유신 민주화와 반제 민족해방운동 등을 기치로 내걸고 조직한 비밀단체.

이 단체는 무장투쟁까지도 염두에 뒀으나 실제로는 반유신 선전물 배포 등에 활동을 국한했으며 일부 소속원이 활동자금 마련을 위해 부잣집 담을 넘거나 예비군 훈련장에서 소총 1정을 취득하기도 했다.

남민전 사건은 박정희 정권 종말 직전 84명이 검거돼 1979년 10월 9일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했던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할 지에 대해 몇 차례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등 심사 숙고했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는 이날 신청자 33명 중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고 김 시인 외에도 그의 아내 박광숙씨,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박석률씨, 이수일 전 전교조 위원장, 이학영 YMCA 사무총장, 권오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장 등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또한 29명 중 김기영, 김영철씨 등 2명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과 함께 보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이에 앞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는 지난 1월 23일, 남민전 사건과 마찬가지로 유신 시기에 발생한 공안 사건이던 '인혁당재건위' 사건(1975년) 관련자 16명에 대해서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바 있다.

 

보상심의위 "유신체제에 항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해경씨와 옥중에서 사망한 고 이재문씨, 사형집행된 고 신향식씨 등 중앙위원 역임자 3명에 대해서는 심의를 보류했고 1명은 신청 대상이 되지 않아 불인정했다. 이들 3명이 보류된 이유는 아직 자료검토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관계자는 인정 사유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들의 행적이 유신 체제에 항거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자금마련을 위해 부잣집 담을 넘거나 총기를 취득한 행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위원회에서도 논의가 분분했지만 단순 범죄라기보다는 엄혹했던 유신체제에 항거하기 위한 방안으로 봐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났다는 설명이다.

이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고 김 시인은 1972년 전국 최초의 반유신 신문인 <함성>을 제작했다가 이듬해 투옥되는 등 민주화 활동을 펼쳤으며 1978년 남민전에 가입했다.

1979년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은 뒤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9년여만에 석방된 그는 수감 중 선보인 첫 시집 <진혼가>를 시작으로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을 펴내며 '혁명'과 '반역'의 정신으로 모순된 현실을 넘어설 것을 설파했다.

그밖에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 <학살>(1990), 산문집 <시와 혁명>(1991),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도 펴낸 고 김 시인은 1994년 2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남민전 사건 관련자 중 홍세화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과 이재오 한나라당 대표 등은 위원회에 신청을 하지 않아 논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전통무술 연구자 임동규씨의 경우 신청은 했으나 이번 논의 대상인 33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김덕련(pedagogy) 기자 2006-03-13 18:18 ⓒ 2007 OhmyNews

     

"쉽지 않을 거라 봤는데, 시대가 바뀌긴 했네요"

[인터뷰] 고 김남주 시인의 '동지'였던 아내 박광숙씨

김덕련(pedagogy) 기자

 

"잘 됐네요. 잘 됐어…. 인정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민전 사건 관계자 29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는 소식을 들은 박광숙씨(56)는 "참 잘된 일"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뇌면서도 "시대 흐름에 따라 사안이 바로잡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씨는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한 고 김남주 시인의 아내이자 자신도 같은 사건으로 검거(집행유예로 석방)됐던 '동지'이기도 하다. 박씨는 1988년 말 고 김 시인이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뒤 결혼했으며 이번에 고 김 시인과 함께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박씨는 13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남민전은 당시 '자생적인 빨갱이 조직' 등 무시무시한 언어로 규정됐다"며 "대미종속의 역사에 문제제기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수용이 안 됐다"고 되돌아봤다.

박씨가 2001년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신청했음에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기 쉽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남북문제 등과 관련, 보수적인 사람들이 주도하는 이데올로기 역풍이 강해 민주화운동 평가도 '색칠'해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박씨는 이날 결정에 대해 "아직 부족한 점도 있지만 금강산도 오가고 예전과 많이 남북관계도 달라지는 등 세상이 바뀌고 있는 시대흐름에 따라 남민전도 민주화운동으로 이해된 것"이라고 말했다.

 

"유신독재 아니었으면 월담, 총기확보 활동 했겠나"

또한 박씨는 당시 활동자금 확보를 위해 일부 조직원이 부잣집 담을 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 1정을 확보한 것에 대해서도, 유신이라는 시대 맥락에 바탕해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신독재 체제가 아니었다면 남민전 같은 단체가 생기지도, 그런 활동(월담 및 총기 확보)도 하지 않았겠지요."

박씨는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이날 결정이 다른 남민전 관계자들의 신청도 촉진할 것이라고 봤다. 그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보인 반응을 봤을 때) 남민전이 민주화운동으로 쉽게 인정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신청 자체를 안한 분들도 많다"며 "'고 김남주 시인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면 다른 사람들도 다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던 분들도 있었으니 이후 신청할 분들이 더 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소설가이기도 한 박씨는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면서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김덕련(pedagogy) 기자2006-03-13 19:27 ⓒ 2007 OhmyNews

     

김남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밤새 울다.

김남주 시인 추모 13주기를 맞이하여..."그를 잊고 있는 세상이 두렵다"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뭇 사내의 눈에 흐르는 눈물처럼 소리도 없이 내렸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는 이따금 들려왔다. 그것도 신경써서 듣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소리였다. 오늘은 바람도 불지 않았다.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는 시간, 세상은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

떨리는 아픔으로 시인의 마음을 건네다.

어둠은 안개를 삼켰고 어둠 속의 안개는 별빛을 삼켰다. 적막한 산촌의 밤은 그래서 더 없이 칠흑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시집을 펼쳐 들었다. 언젠가 헌책방에서 산 김남주 시인의 시집 <사상의 거처>이다.

시집이 없어 산 것은 아니었다. 김남주 시인의 시집이 헌책방에서 먼지를 덮어 쓰고 있는 게 안타까워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똑같은 시집 두 권이 책장에 나란히 꽂혔다. 책장에 꽂고 나니 김남주 시인이 외롭지 않아 보여 좋았다.

"손 떨리는 아픔으로 그대에게 김남주 시인의 마음을 전합니다. 더욱 더 건실한 여성으로 자라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동기로 남았으면 합니다."

시집의 표지를 열자 책 선물을 한 이의 말이 볼펜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뜬 지 1년 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들이 주고 받으려던 것은 단순히 김남주 시인의 시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해방전사가 되길 주저 하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이 남기고 간 올 곧은 시대정신을 주고 받으려 했을 것이다.

김남주 시인을 떠나 보낸 지 13년이 되었다. 2월 13일이 바로 그의 기일이다. 그 세월 동안 세상은 강산이 서너번은 바뀌었을 정도로 많이 변했다. 그렇게 변한 세상을 두고 어떤 이는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라는 노래를 술만 취하면 했다. 또 어떤 이는 바뀐 세상에 걸맞는 담론을 생산하자고 주장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요즘 상황을 두고 김남주 시인은 특유의 음성으로 '세상은 달라진 게 없는데 변한 건 너희들의 기름진 얼굴과 두툼해진 뱃살뿐'이라고 일침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이들이 바뀐 세상을 따라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 김남주 시인 10주기 추모제 모습.  ⓒ 강기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김남주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전문

김남주 시인은 혼자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가는 길에 김남주 시인이 앞장 섰을 뿐이다. 죽음의 공포를 수시로 넘기면서도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결코 한순간이라도 홀로 살고자 비굴하지 않았다.

박정희 독재 정권이 그를 전사로 만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해풍이 불어주는 해남의 고향집에 머물렀고, 그 스스로 보리피리 부는 소년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몇 해 전 시인 소설가들과 함께 김남주 시인의 추모 10주기 행사가 열리는 해남엘 갔었다. 그날도 올해와 같이 입춘이 지났건만 무척 추운 날이었다. 옷틈으로 파고드는 바람은 차갑다 못해 매섭기까지 한 날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공연이 있었고, 그와의 인연을 반추하며 밤새 술을 마셨다.

 

그를 잊고 있는 세상이 두렵다

▲ 김남주 시인이 생전에 읽던 책들. ⓒ 강기희
 
다음 날엔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다.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동생인 김덕종이 생가를 관리하고 있었다. 생가엔 김남주 시인이 사용하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읽던 책과 손때 묻은 육필 도구들이 시인의 삶을 짐작케 했다.

생가 앞에는 발목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웃자란 보리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김남주 시인의 땀이 배어있는 보리밭은 그가 떠났어도, 세상은 변했다지만 그가 살아생전 그랬듯 푸르기만 했다.

그가 남긴 것은 시 뿐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양심을 남겼다. 비굴하여 편케 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양심을 지키며 살기를 원했다. 그 양심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고 전사로 태어나게했다.

그를 추억하는 많은 이들이 바뀐 세상 안에서 각자의 추억만 꺼낸다. '그땐 그랬지'로 시작되는 후일담은 김남주 시인의 전사적인 양심을 오래 전의 일인양 추억 속에 머물게 한다.

시집 <사상의 거처>를 접고 시집 <진혼가>를 펼친다. 그의 시집을 펼치면 늘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의 시는 여전히 살아있다. 아니다. 시가 아니라 그가 살아있다고 말해야 옳다.

시집을 펼치면 김남주 시인이 살아서 뚜벅뚜벅 걸어온다. 때로는 웃음띤 얼굴로, 때로는 화난 표정으로 우리 곁으로 온다. 하여 바뀐 세상을 탓하며 기름진 얼굴을 한 이는 그의 시집을 섣불리 펼칠 수 없다.

▲ 김남주 시인 생가 앞에 있는 보리밭. ⓒ 강기희
 
지난해 가을 제주에서 김남주 시인의 동생인 김덕종을 만났다. 그는 전농 광주전남 의장 자격으로 한미FTA협상 저지를 위한 원정 투쟁단을 이끌고 왔다고 했다. 해남농민회를 만든 것이 김남주 시인이라 그 감회가 크다.

담배를 나눠 피며 요즘도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냐고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갑자기 그를 잊고 있는 세상이 두려워졌으며, 뱃살 넉넉해진 이들과 기름진 얼굴들을 한 이들이 무서워졌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 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
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
사람들이 주고 받는 모든 언어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
조국은 하나다 라고
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
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행동
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눠 가지는 인간의 길
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레의 양식이여 /FONT>

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 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올린
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에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도
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 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
가진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 김남주 시 '조국은 하나다' 전문

이제 세상은 그를 잊는 것인가. 그를 잊어도 될 만큼 그가 원하고 바라던 세상이 온 것인가. 살아있는 자 중에서 이 물음에 답할 자 있기나 한가. 있다면 대답해 보라.

▲ 광주 망월동에 있는 김남주 시인 묘소. 묘비엔 '온 몸을 불 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있다.

강기희 2007-02-09 02:43 ⓒ 2007 OhmyNews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